|
https://cafe.daum.net/djdare/W6l9/41
교과서적 해석보다는 거울 속에 자기를 비춰본 체험에서 비롯
보통 사람이 생각하지 몫한 것 – 시적 재미 (이남호)
1) 거울 속 세상과 거울 속 나의 발견 – 첫 세연
2) 실제의 ‘나’와 거울 속 ‘나’의 같고 다름
3) 거울 속 ‘나의 독자적 삶’
4) ‘만남’의 의미
‘거울’에 대한 자크 라캉의 이해
유아의 정신발달 단계
1) 생후 몇 달 – 자기와 세계를 파편화된 덩어리로 인식-‘자기’라는 인식이 없음
2) 거울 단계 mirror stage 온전한 전체로서 자기를 알아보는 감각을 잘달시키는 단계
- 거울에 비취는 자신의 전체 이미지가 진짜 자기존재인 양 받아들인다.
상상계the imaginary other의 시작. 상상계=이미지의 세계. 말 대신 이미지를 통해 경험
두 가지 환상 1) 자신이 분리불가능한 일부로서 속해있는 주변을 자신이 제어할 수 있다는환상 2) 자신과 만족스럽게 결합하고 있는 어머니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환상. 어머니=나(어머니 욕망/어머니에 대한 욕망)
-테리 이글턴의 이해 : 아이가 거울 속 허상을 주체로 착각하듯 이데올로기에 무의지적으로 감응된 현대인들은 집단에 종속된 자기를 독립된 주체로 인식
3) 언어의 습득 =상징계.
언어=의미작용. 어머니와의 분리. 결여.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대체 실재계에 대한 이해
정신분석학에 대한 짧은 글(유달상)
시 ‘거울’로 돌아가보자.
기본적으로 ‘나’의 발견에 대한 시
‘나’가 (낯선) 타자로 인식
정신분적학적 ‘거울 단계’와 다른 점
거울 단계에서 처음 보는 것은 그냥 ‘타자’이지 ‘타자로서의 나’가 아니다. 그 타자가 특정한 논리적 시간 후에 자아가 되는 것. 그러나 이상 시 ‘거울’에서 화자는 이미 거울 속 존재가 ‘나’임을 알고 있다. 또한 그 ‘나’가 낯선 타자임을 속상해하고 있다.
화자 ‘나’는 이미 나를 알고 세계를 아는 성인이다. 그럼에도 거울 속 나를 처음 발견한 것처럼 표를 내고 있다. 우리는 이즈음부터 한국인이 ‘나’를 알기시작햇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이라고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나를 모르고 이웃을 모르고 세계를 몰랐겠는가? 그러나 ‘모더니티’가 충격하기 전까지 ‘나’를 ‘나 자신’으로서 의식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 그 전까지는 ‘천하’, ‘하늘’, ‘삼강오륜’, ‘공자님 말씀’과 같은 바깥의 절대적 지표에 근거해 나를 측정하는 게 체질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나’의 발견으로 나가는 시라고 할 수 있다. (권보드래-“이상은 개인을 쓰면서도 그 안에 철저히 세계와 역사를 담고 있다.”) 실제의 나오 거울 속 나의 만남의 모색 3연 2행부터 4연
그리고 만남으로 나아간다. 사르트르는 타자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타자에 대한 움직임의 일체를 ‘호소’라고 규정했다. 이 호소가 거울에서 제시한 만남의 실제적인 주제다. 만남은 달성과 실패로 규정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끝없는 호소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나의 결여에 근거해서 타자를 의욕하고, 타자의 결여에 근거해서 나를 의욕하는 것, 원천적 제약에 묶인 상호성에 기대어 항구적인 발견과 변신의 도정을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의 ‘외로된 사업’이다.
거울에서 타자는 자기자신이다. 그것은 모든 자기 인식은 타자로서 떨어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그대로 가리킨다. 타자가 될 때 비로소 자기가 된다. 타자를 인지할 때 비로소 자기를 인지하게 된다. 근대인으로서의 한국인의 자기인식은 이상을 통해서 완미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정과리)
나, 너(타자)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참고 자료>
정신분석학에 대한 짧은 글
유달상
[ 1 ]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단번에 태어나지 않았다. 마음먹고 찾아보지 않아도 프로이트가 정초한 정신분석비평의 전사를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이선영은 『문학비평의 방법과 실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주 예리한 지각심리학의 연구가였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여 <시학>의 대부분은 오늘날의 심리비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20세기의 정신분석학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카타르시스'란 말을 그 자체의 임상적 용어로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a)정신분석비평과 유사한 의미라는 맥락에서 '심리비평'이란 용어를 쓸 수 있다면, 정신분석비평의 시평(time horizon)은 기원 전까지 소급될 수 있다. 이렇게 규정되면 b) 정신분석학 비평의 외연이 확장되고 논의의 폭은 더 열린다. c) 문학 연구의 고대사는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탐구의 도정은 그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뿐 아니라 그만큼 긴 길이 내적 심연으로 나 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이선영은 또 시학에 나타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용주의적 기술은 형이상학적 가설로부터 연역되었다기보다는 인간행동에 대한 경험주의적 관찰을 토대로 한 것이'라고 쓰고 있다. 즉 d)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시도한 인간심연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도 전인미답의 지적 모험은 아니었다.
[ 2 ]
테리 이글턴이 프로이트를 해석하는 대목에서 주목되는 점은 위 [1]의 c)항과 연관된다. 이글턴은 라깡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성과가 된 지점을 평가한다. '사회적 행위임이 분명한 언어를 통해서 프로이트주의를 재해석함으로써 라캉은 무의식과 인간사회간의 연관을 탐구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리고 '라캉이 사람들에게 무의식이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들끓고 소란스러운 영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간에 맺고 있는 관계의 결과라는 사실'에 대해서다. 라캉의 이 성과는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과정을 언어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덕분에 얻어진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트 자신도 무의식을 개인차원에 묶어둘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죽음본능은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집단 차원 즉, 집단자살의 상징양상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 예로 전쟁이나 집단갈등을 들었다. 이렇듯 프로이트는 라캉에게 재해석되었는데 라캉의 개념인 상상계와 상징계는 알튀세르로부터 더 발전된 이론으로 나간다. 라캉의 '거울단계'에서 아이는 거울 속 이미지를 자기와 동일시한다. 이 아이는 알튀세르가 새롭게 정립한 개념인 '이데올로기'에 무의지적으로 감응된 현대인의 유비다. 아이가 거울 속 허상을 주체로 착각하듯, 현대인들은 집단에 종속된 자기를 독립된 주체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 3 ]
[2]항은 부분적인 예시들이다. 프로이트는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다른 영역으로 연관된다. 이글턴은, 상징계에서 아이가 갖는 '어머니의 욕망' 혹은'어머니와의 욕망'은 구조주의의 언어와 대상과의 일대 일 대응과 같은 맥락으로, 상징계에서 아버지가 개입하면서 아이가 불안에 빠지는 것을 탈구조주의가 다루는 언어와 현실의 미끄러짐으로 설명한다.
발터 벤야민은 영화에서 자신이 발견한 것을 '시각의 무의식'이라 명명했다. 벤야민은 위에 거론한 어떤 사람들보다 프로이트와 가까운 시대를 살았다. 그보다 프로이트에게서 먼 시대를 살았던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정치이론과 정신분석학 이론간의 만남'을 시도했다 크리스테바는 라캉에 저항하여 상징계의 부성적인 권위에 의해 은폐되고 삭제되어 온 모성적인 것을 북권하고 오히려 상징계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으로서의 모성적인 육체에 정당한 권위를 주었다. 그녀의 용어인 기호적 코라the semiotic chora는 주체가 언어로 진입하기 이전의 기호계적 차원의 표현들로 가득 찬 공간이다.
오늘날 페미니스트 정신분석이론가들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라는 진지를 변용하고 비판하고 심지어 폭파하려고 시도한다. 오늘날이라고 했지만 시작은 20세기 중반부터였으니 내력이 아주 오래된 일이다. 줄리엣 미첼, 캐롤 길리건, 멜라니 클라인, 제시카 벤자민, 뤼스 이리기레, 주디스 버틀러 등이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이름과 병렬을 이루고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무의식을 놓치지 않으면서, 우리 개인의식과 사회의식의 영역으로 끊임없이 되살아온다. 죽음 본능처럼 죽지 않고 영원한 어떤 것들이 있다.
연관된 텍스트
- 테리 이글턴, 김명환 외 옮김, 『문학이론입문』, 창작과 비평사.
- 이선영,『문학비평의 방법과 실제』, 삼지원.
- G. 프로이트, 『프로이트 전집』, 열린 책들.
- 줄리엣 미첼 외, 『페미니스트 정신분석이론가들』, 도서출판 여이연
『시학』-명료하고 아름다운 창작방법론 2
유달상
일찍이 정화, 즉 카타르시스의 예술적 의미를 설명한 고전 중의 고전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서양철학사상사』를 기술한 버트란트 러셀은 “플라톤 이후의 모든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정교한 주석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을 흉내내서 어떤 미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후의 모든 예술이론은 『시학』에 대한 정교한 주석이다”라고 오마주한다.
『시학』을 가리켜 비극을 설명한 장르론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틀린 말을 아니지만그렇게만 말하고 나면 어딘가 부족하고 좀 서운하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보기에 『시학』은 장르론이기 이전에 미학일반에 대해 총체적으로 기술한 인류 최초의 책이다.
칸트에 따르면, 미학이란, 예술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의미한다. 예술을 반성한다는 것은 아름다움이라는 특수한 가치의 의미를 밝혀낸다는 것이다. 『시학』은이 아름다움의 특수한 가치와 의미를 모방과 정화 즉, 카타르시스와 미메시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정화, 즉 카타르시스를 얘기해보자. 좀 에둘러 간다.
먼저 장르론으로서의 『시학』얘기다. 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비극론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고 틀린 말이 아니라고 한 바 있다. 『시학』은 비극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다른 장르가 아니고 왜 하필 비극이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당대에 비극이 가장 발전된 장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전이란 생물학적 진화와 성격상 비슷하다. 가장 진화한 종을 연구하면 비교적 덜 진화한 종의 생물학적 특성까지를 밝혀낼 수 있다는 맥락에서 그러하다. 『시학』이 비극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도 그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을 다루면서 말했던 것들은 그보다 수 세기나 앞서 등장했던 서사시에도 적용될 수 있다. 비극을 말하면 서사시를 포함해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롭게 서사시를 말할 필요가 없다. 『시학』4장의 문장, ‘최고의 형식은 역사적으로 맨 나중에 나타난다’는 바로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가장 진화한 종은 역사적으로 맨 나중에 나타난다는 말을 부연할 필요가 있을까.
오늘날, 그 옛날 비극의 자리에 올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영화일 것이다. 비극과 서사시는 모두 문학의 영역에 속해 있었고 장르의 미학적, 현실적 상황은 수 천년 전과 후의 거리만큼 많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어렵다. 그렇지만 영화는 다른 장르들이 포함하고 있지 못한 대부분의 장르를 포함한다. 소설과 비교보자. 소설에도 음악이 있지만 영화만큼 직접적이지 못하다. 소설의 음악은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그러니까 활자의 침묵 속에서 들리지만 영화음악은 음악이면서 음악 이상이다.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미술도 그렇고 무용도 그렇다. 심지어 영화는 방금 비교 대상으로 삼았던 소설을 비롯한 문학적 서사들과 문학 안의 여러 장르의 면면들도 품고 있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 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작품상을 수여한 아카데미 시상부문을 보자. 작품상이나 감독상, 주연상, 조연상, 촬영상 등은 그렇다고 해도 나머지 수상부문은 영화 외의 전 예술장르를 거의 포괄한다. 각본상, 각색상은 문학장르에, 미술상, 시각효과상, 의상상, 분장상은 넓은 범주의 미술장르에, 음악효과상, 음향편집상, 음악상, 주제가상은 음악장르에 원적을 두고 있다.
통섭의 시대, 융합의 시대다. 예술장르도 서로 통섭하고 융합한다. 나아가 영화는 오늘날의 장르간 통섭과 융합을 선도한다. 영화의 장르적 욕망은 플라톤의 표현처럼, ‘머리가 여럿 달린 짐승’같다. 물론, 영화가 통섭하고 융합해내는 다른 장르들간의 관계는 서사시의 특성을 비극이 다 보여주는 것과 같은, 저열한 형식과 최고의 형식의 관계로서가 아니다. 영화는 다른 장르들을 끌어들이는 자성(磁性)과 장르들 사이에 가장 많은 친연성과 교집합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장르들이 영화의 부분집합인 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수 천년의 거리를 두고서도 영화와 비극은 예술의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닮은 모습을 보여준다. 정화, 즉 카타르시스에 있어서 그러하다. 카타르시스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영화와 비극은 다르지 않다.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 옛날의 비극 관객과 오늘날의 영화 관객은 여전히 예술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성취하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카타르시스가 무엇인지 알아볼 차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기능을 카타르시스라고 규정하고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그래서 『시학』은 장르론이면서 창작방법론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카타르시스는
관객의 마음에 불러일으켜야 할 타깃 감정target-emoution이다.
비극은 먼저 등장인물의 행동과 플롯을 통해 관객에게 연민과 공포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다음 비극의 주인공은 자기가 왜 불행해졌는지를 깨달아가며 그 원인을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감당하거나 헤쳐나간다. 그러면서 비극은 대단원에 이른다. 이 과정들을 통해 관객은 자신들 속에 환기되었던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배출한다. 이것을 심리적 정화 혹은 카타르시스라고 한다.
카타르시스는 단순히 연민과 공포를 배출하거나 중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카타르시스는 두 가지 조건 속에서 얻어지는 심리상태다. 먼저 미학적인 심리, 그러니까 가치 있는 아름다움으로 마음이 고양된 결과에서 얻어진다. 두 번째 도덕적인 심리, 그러니까 윤리적인 정당성에 동의하는 마음이 고양된 상태에서 나타난다.
쉽게 말해서 아름답고 올바른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관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플라톤이 그의 이상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한 것은 예술의 효과나 기능을 몰라서가 아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현실은 이데아의 그림자이다. 그 그림자의 그림자가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겹의 그림자를 지닌, 이데아의 편에서 보면 세 번째 자리를 분유(分有)한, 사돈의 팔촌 같은 존재다. 그렇지만 예술은 이데아의 피를 나눠가졌으되 피라기보다는 거의 물처럼 희미한 흔적만을 분유한 남남처럼 별 볼일 없는 사이가 아니다. 이데아의 편에서 보면 예술은 아주 위험하다. 바로 카타르시스 때문이다. 카타르시스의 힘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플라톤도 카타르시스에 주목했고 그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플라톤은 카타르시스의 도덕적 측면만 인정했지 미학적 측면은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웅을 영웅답게만, 도덕적으로 그려야 한다고, 플라톤은 그의 책 『국가』에서많은 페이지를 투자하며 역설한다. 거기에는 시인에 의해 이상국가의 지도자답게 묘사된 영웅들의 한편에, 음험한 욕망과 쩨쩨하고 비열한 이면을 감추지 못하는 영웅들이 있다. 플라톤의 눈에는 바로 이 후자가 낙원인 이상국가에서 저 멀리 추방하고 싶을 만큼 못마땅하다.
이렇게 카타르시스의 미학적 측면을 배제함으로써 그리스 수도 아테네의 성골 출신 철학자 플라톤은 인류 최초의 미학이론가의 영예를 마케도니아에서 온 촌뜨기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양보하게 된다. 이것은 스승의 미덕일까. 필자가 보기에는 고대 미학의 올림피아드에 기록된, 의문의 일패가 아닌 확실한 KO패(?)다.
카타르시스에 대한 설명은 어느 정도 된 것 같다. 그렇다면 창작방법론이기도 한 『시학』]은 예술작품에서 어떻게 카타르시스를 구현해야 한다고 썼을까? 카타르시스를 구현하는 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하나는 주인공이 부당하게 불행한 운명이나 사건에 처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 주인공이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어야 한다. 정리하면, 보통사람이 부당하게 불행한 조건에 처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시학』13장은 이렇게 쓰고 있다.
‘연민이란 부당하게 불행해지는 사람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고, 공포란 그 불행에 부딪치는 사람이 우리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때 환기되는 것이다’
간명하다.
자, 그럼 오늘날의 영화들은 카타르시스를 어떻게 구현하고 있을까? 하도 사례가 많아서 선택장애가 온다. 편의상 봉준호 감독이 작품상을 수상했던 해에 아카데미상 수상작과 후보에 노미네이트 된 영화 두 편을 보자.
영화 <두 교황>이 그중 하나다. 교황같이 훌륭한 분들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반문하실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에 그려진 두 교황은 보통 사람들이다. 개가 주인공 형사로 나오는 티브이 드라마를 즐겨보고, 외로워하고, 번민하고, 배달된 피자를 맛있게 먹으며 즐거워한다. 부당하게 불행해지는 것도 그렇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제 시절,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이 자행한 학살의 한가운데서 사제와 신자들을 살리려고 애를 쓴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학살자에게 희생된다. 바다에 버린 시체가 해안으로 떠밀려와 모래사장을 덮는다. 한편으로 프란시스코는 사제와 신자들로부터 독재정권과 결탁했다는 오해와 비난을 받는다. 새로운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스스로 유배를 택한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고, 긴 자기갱신의 길을 걸으며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된다.
부당하게 불행해짐으로써 젊은 사제, 훗날의 교황 프란시스코는 보다 심원한 영적인 구원의 길에 들어선다. 그렇지만 그 상처는 오래 아물지 않았고, 영화 속에서 교황 베네딕트 16세에게 고해하고 위로받는다. 이 과정들은 관객에게 연민을, 그리고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대단원을 거치면서 관객들은 연민과 공포를 배출하며 미학적으로 도덕적으로 고양된 심리상태에 이른다. 카타르시스의 전형이다. 베네딕트 16세 역시 나치에 부역했다는 낙인에서 오는 아픔과 교황청 내부의 악성 게이트를 프란시스코 교황에게 고해하는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번에는 영화 <기생충>을 카타르시스의 관점에서 보자. 기생충의 주인공들 역시 보통 사람들이다. 그런데 두 교황과는 다르다. 이들도 부당하게 불행해졌는가, 의문이다. 혹자는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하는 천명이라 하고 누구는 개개인의 게으름 탓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기생충의 가족들은 저마다 대저택의 일꾼으로서 훌륭하게 자기 몫을 다해내는 능력 있는 보통사람들이다. 이선균과 조여정으로 대표되는 부자들이 훨씬 무능력하고 현실인지력조차 떨어진다.
그렇다면, 어떤 부당함이 이들이 겪는 가난이라는 불행의 원인일까? 교환가치라는 기준으로 고착된 사회구조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사용가치라는 점에서는 그러할지 몰라도 교환가치로 보면 일당 만원의 노동이 있는 이면에는 일억원 이상의 노동도 있다. 정규직이 있는가 하면 파리 목숨 비정규직이 있다. 그래서 관객들은 연민하고 어두운 지하실에서, 그리고, 생일파티가 열리는 화려한 저택의 밝은 가든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서 괴리와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지상과 지하, 저택과 반지하, 향기와 냄새 등으로 분리되고 차단된 우리 사회 구조에 그 원인이 있음을 간파한다.
영화가 끝나면, 연민과 공포는 다른 감정으로 바뀐다. 관객들은 연민과 공포를 배출해서 영화관 출입구의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올바른 현실인식을 안고 영화관을 나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간다. 카타르시다. 카타르시스는 이렇듯 고양된 심리상태다. 고양된 심리상태란, 모든 것을 배출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마음가짐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우리말로는 정화, 혹은 조정(調整)이라고 번역한다.
카타르시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심리상태를 갖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기생충의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미해결의, 열린 결말이 중요하다. 송강호는 여전히 대저택의 지하실에 갇혀 있다. 관객들은 미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한층 고양된 심리를 지닌 채 우리 사회의 이웃들, 수많은 송강호와 그의 가족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자신에게서도 송강호 같은 어두운 얼굴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고 각성하게 될지 모른다. 이쯤 되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에도 기생충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탈 자격이 있는 영화일 것라는 확신이 생긴다.
사족을 달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카타르시스는 단어나 문장과 같은 언어표현과는 무관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시학』은 언어표현에 대해서도 언급은 합니다. 시학 19장 이하 몇 장이 여기에 할애되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표현을 사고에 속한 것으로 생각하지 언어표현 그 자체만의 독립적인 문장론을 펼치지는 않는다. 그에 따르는 언어 표현 자체보다 언어를 통한 사고 내용의 표현이 더 중요하다. 나는 글쓰기에서 문장의 형식을 크게 강조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카타르시스란 예술 감상자들에게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킨 다음 주인공의 바람직한 대응을 통해 감상자들이 그것을 배출하는 것이다. 그냥 배출하는 게 아니라 고양된 심리상태가 된다. 고양된 심리상태란,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마음가짐이다.
그런데 위에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이고자 한다고 썼는데 오늘날, 예술 향유의 대열에서 플라톤의 후예들도 적지 않다. 예술에서 먼저 교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다. 자녀들이 만화책이나 영화를 보는 것을 허용하되 학습이나 도덕 교육을 목적으로 할 때만 너그러운 부류도 그 한 예다. 자신이 누구의 후예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미학과 도덕이라는 카타르시스의 두 영역을 참고하면 되겠다.
『시학』얘기가 나오니 생각나는 이가 있다. 소설가 고(故) 최상규 선생이다. 이 분이 번역한 레온 골덴이 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시학 주해서로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책이다. 최상규 선생은 충북 보령 출생으로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공주교대 교수를 역임하다 사임하고, 유성에서 창작과 번역에 전념하다 예순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우리 시대의 작가다. 170여편에 달하는 단편, 중편, 장편 소설을 남겼다.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의 작품을 우리 시대 최고의 소설로 주목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문학비평가 김병욱, 김주연 등은 작가 최상규를 오래오래 읽히고 연구되어야 할 작가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최상규 선생은 『소설의 시학』을 비롯해 수많은 문학 비평서를 번역해 학계의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번역은 그 중 하나다. 예술의 길에서는 특별한 인연이 따로 있는 것 같지 않다. 소설이나 문학 공부를 제대로 하다 보면 최상규라는 이름을 꼭 만나게 된다. 억지로 인연을 만들거나 끊을 필요도 없는 것 같다. 만날 사람은 만나고 헤어져야 할 사람이면 인연을 붙들어도 헤어지게 된다. 예술은 생전에 인연을 맺지 못한 죽은 영혼에게까지 인연의 타래를 드리워주는 신비로운 중매쟁이, 아름다운 월하노인이다.
다시 『시학』으로 돌아가보자. 예술의 개념들은 낱낱의 의미와 기능들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보는 관점에서 그러한 것이지 예술 작품 안에서는 모든 개념들이 내적 완결성안에 연결되어 있다. 『시학』도 카타르시스는 그것과 관련해서 강조되는 미메시스, 즉 모방, 그리고 플롯 등과 연결지어 살펴보도록 설명되고 있다. 『시학』6장은 카타르시스란 인물의 성격이 아니라 행위를 모방하는 것이라고 했다. 행위란 인물이 벌이는 사건을 말한다. 그러니까 성격묘사 자체에 치중하지 말고 인물의 행동이 벌이는 서사를 구축하라는 것이다.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시 중요한 것은 사건의 배열이라고 했다. 행위의 배열이란 바로 구성, 즉 플롯을 일컫는다. 여기서 마침내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영혼이라고까지 명명했던 플롯이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순서로 사건을 배치할 것인가? 창작방법론으로 읽는 『시학』이니 만큼 구체적인 작품을 실례로 들어야 할 때다. <춘향전>을 비롯한 우리의 고전들을 보자.
춘향이가 변학도의 학대를 받기 전에 어사가 되어 남원에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춘향이의 고난은 독자의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춘향이의 고난으로 아픈 가슴들이 없었다면 과연 카타르시스가 가능했을까? 한 겨울에 놀부로부터 쫒겨난 흥부 가족의 시련이 없었다면, 제비가 놀부네 집에서 먼저 다리가 부러졌고 그 집 하인이 다리를 고쳐주었다면, 뺑덕어미와 오봉사의 행악이 없었다면, 연꽃 속 심청이가 눈에 들기 전에 황제가 재혼해버렸다면?
이 질문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걸작들은 세계 어디를 가나 비슷한 서사구조를,
즉 사건의 배열형태를 지니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찾아온 불행이 그것이다.그래서 블라디미르 프롭이라는 러시아 학자는 『민딤형태론』이라는 책에서 세계의 모든 민담은 구조적 측면에서 같은 유형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프롭에 따르면 사건들의 기능은 서른 한 가지 논리적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원형이 그렇다는 얘기다. 이 원형을 지렛대로 수많은 변형이 산포하고 수렴된다.
서사 예술에 있어서 사건의 배치는 중요하다. 플롯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플롯은 바로 사건의 배치다. 그냥 배치가 아니라 사건의 순서를 잘 배치하여 인과관계의 사슬을 엮고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바로 플롯이다. 『연을 좆는 아이』의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는 아이러니와 플롯을 예술의 두 비밀이라고 했고, 전술했듯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플롯을 비극의 영혼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카타르시스는 바로 이 비극의 영혼인 플롯의 구축에 달려 있다.
어떻게? 핵심은 이것이다. 가장 중요한 정보는 끝까지 숨겨라. 자기의 신분을 맨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낸
이몽룡과 심청에게 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