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6월 12일 수요일
성동구청 신우회 예배 설교
시리즈 주제: 하나님의 경륜 4
제목: 예수님의 최후 진술[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26:64
설교를 위한 묵상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는 작업이 구도의 길이며,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그 길의 최종 목적이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의 이야기와 잠언, 그리고 판타지로 제시된다.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 독자의 임무다. 그런데 어떤 독자들은 이미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읽어낸다. 어느 시대나 자기 시대의 고민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고민에 대한 답을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인간은 시대와 공간의 한계 속에서 살아간다. 어쩌면 이 말은 현실에 충실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는 이번 설교에서 예수님의 최후 진술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신 분이라고 할 때 그분의 재판과 그 최후진술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확신과 희망, 그리고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발견은 즉시 우리에게 이렇게 제시할 것이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설교 개요
1. 소크라테스의 재판
2. 예수님의 재판
3. 예수님의 최후 진술
***
1. 소크라테스의 재판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전 세계인들에게 알려진 유명인입니다. 그는 그리스 시민 중에 500인으로 구성된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가 재판정에서 변론한 이야기는 2,4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책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제자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라는 책으로 기록했습니다.
최근에 저는 조선대학교 철학과 박구용 교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박 교수는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대하여 좀더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죄목 중에 두드러진 것은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리스 사회가 존중하는 신을 소크라테스는 존중하지 않았다. 둘째, 그는 청년들을 타락시켰다. 그런데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더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파악하려면 크세노폰의 ‘회상’ (Memorabilia)을 읽을 필요가 있다고 박 교수는 소개합니다. 박 교수의 철학강연은 흥미롭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소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떠날 때가 왔다. 나는 죽기 위하여,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그 어느 것이 더 행복한가에 대해서는 신 이외에 아는 자는 없다.” 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한달 후에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는 형벌을 받고 죽었습니다.
2. 예수님의 재판
오늘 저는 예수님의 최후 진술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6장은 예수님의 체포 과정과 재판을 보여줍니다. 이 재판은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있은 지 430년 뒤의 일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은 민중의 마음을 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환영했습니다. 그 환영 인파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9) 이 말은 예수님이 곧 유대인들의 메시아 즉, 그리스도시라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판에서 최종 판결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가 아닌가에 달려있었습니다. 민중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라고 환영하는데 권력을 잡은 이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권력자들은 결국 많은 거짓 증인을 매수하여 재판에 임했지만 어떤 죄도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떤 증인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예수가 성전을 헐면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는 불경한 말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그 어떤 변론을 할지라도 이 재판의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재판은 진실을 가리는 자리가 아니라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었으니까요. 예수님은 마치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재판장인 대제사장이 이렇게 마지막으로 심문을 합니다: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 대제사장의 이 질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환영하던 민중들의 생각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판은 민중의 지지를 거스르는 것이었고 오직 특권층의 입장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이들도 일어나서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하건만 그 재판관들은 눈이 멀고 귀가 닫혔는지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했으므로 사형에 해당한다고 그 재판관들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삼척동자도 알만한 일을 법률가들만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2차 인혁당 사건의 재판이 1975년 4월 8일에 있었습니다. 그날은 대법원의 판결이 있던 날입니다. 그 전에 많은 재판이 열렸습니다. 8명의 무고한 시민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에 근거하여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4월 9일, 선고 후 18시간만에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 날은 국제법학자회에서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재판으로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32년이 지나 2007년 1월에 인혁당 사건의 재심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그들은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재판에서도 최종 결론은 유죄입니다. 죄목은 신성모독입니다. 그가 스스로 그리스도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것은 신성모독에 해당한다는 판결입니다. 이 판결이 정당하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면 됩니다. 유대인의 최고 재판소인 산헤드린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전제를 가지고 재판에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3. 예수님의 최후 진술
앞에서 저는 소크라테스의 최후 진술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최후 진술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마태복음 26장 6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26:64
네가 그리스도인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여 대답하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대답이 끝나자 즉각적으로 최종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것은 사형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최종 진술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왜 그런 대답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재판정에서 보여주신 태도와 대답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못지 않게 오늘 우리도 굽어진 재판을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재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불의와 불법이 상식처럼 버젓이 드러나는 것이 현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불의와 불법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순간이 몇 군데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이 결심을 하신 순간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소개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누가복음 9:51).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명절 때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로 사역을 하시던 장소는 갈릴리입니다. 그곳은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지방입니다. 우리나라 지형으로 보면 함경도에 해당한다고 할까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면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백성들을 먹이시고 돌보는 일을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병든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죄 지은 사람과 소외된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고침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말은 앞으로 죽으면 네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말은 네가 이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축하의 의미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이유로 구원이란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말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귀신입니까? 귀신은 쫓아내면 됩니다. 병입니까? 병은 고치면 됩니다.
무엇이 사람을 힘들게 하고 무엇 때문에 사람이 죽음을 선택합니까? 그것은 그 사회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무엇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사회에서 학력의 서열화로 인한 지나친 경쟁교육과 입시과열이라는 병폐가 고쳐지지 않을 때 자살하는 학생이 늘어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의 격차가 너무 커질 때 사회는 불안정해집니다. 사회의 중요한 결정을 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 부패할 때 그 사회에는 곳곳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무엇이 사회의 가장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을까요? 그 시대에 모든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곳, 그 결과 백성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일을 발생하게 하는 곳은 어디였을까요? 그곳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성전은 모든 백성들이 바라보는 곳이며 사모하는 곳이며 길을 찾고 소망을 두는 곳입니다. 성전의 지도자들은 백성의 세금과 제사와 재판과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부패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자선을 하고 병자를 치료하고 사람들을 가르쳐도 결국 성전과 그 지도자들이 고쳐지지 않으면 백성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셔서 그곳에 있는 장사꾼들을 모두 몰아내셨습니다. 그들의 상을 엎으시고 그들의 짐승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꾸짖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을 보면, 예수께서는 일곱번이나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아!” 하면서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권력에 대한 정면도전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메시지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진리를 실천하는데 게으르며, 돈을 사랑하며, 겉으로만 믿음이 있는 체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진실이 없는 정부, 돈을 인권보다 앞세우는 사회, 그리고 사람 사이에 불신을 조장하는 세상은 그 자체로 지옥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천당에 들어갈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만드신 이 복된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한 지침일까요?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기에 예수님은 자신을 던져 그 권력의 중심을 깨뜨리고자 하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최후의 진술에서 이렇게 선포하셨다고 저는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제 후로는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너희를 심판하는 것을 볼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에 대한 최후통첩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최후진술을 마치시고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예수님이 옳으셨음을 확증하셨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음을 확신했습니다. 그 말은 이 세상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예루살렘의 함락을 통하여 예수님의 최후진술이 진실임을 입증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법정에도 굽은 판결이 있습니다. 오늘의 경제에도 구조적 차별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과 자비가 최고의 처세술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왕따를 당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오늘 다시 서울에 오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2천년 전과 같이 모든 죄악이 흘러나오는 중심부로 다시 올라가셔서 자신의 몸을 다윗의 물맷돌처럼 던지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수많은 돌들을 이 세상에 세우셨습니다. 그 돌들이 일어나 예수님처럼 자신을 던져 세상을 바로잡기를 기대하실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끝으로, 사도 베드로가 교회를 향하여 일깨워주는 말씀을 소개하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베드로전서 2:4~8
<끝>.
[1] 최후 진술(最後陳述): 형사 재판에서,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하는 마지막 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