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떠한 관계가 좋은 관계인지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생각하는 관계를 옮겨봅니다.
378~9쪽) 관계의 최고 형태 (형수님께)
시대와 사회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처한 위치가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은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의 출발은 대상과 내가 이미 맺고 있는 관계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검은 피부에 대한 말콤 X의 관계, 알제리에 대한 프란츠파농의 관계…….
주체가 대상을 포옹하고 대상이 주체 속에 육화된 혼혈의 엄숙한 의식을 우리는 세계의 도처에서, 역사의 수시(隨時)에서 발견합니다. 이러한 대상과의 일체화야말로 우리들의 삶의 진상을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동시에 우리 스스로를 정직하게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젊은 재소자의 아내가 일을 나간다(몸을 판다)는 짧은 몇 마디의 말에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전한 부분에 아팠습니다.
집을 나누어 쓰듯 아내나 남편을 나누어 사는 인생을 세 들어 산다고 표현한 것도 인상적입니다,
385~6쪽) 세 들어 사는 인생(형수님께)
이러한 삶은 우리들로 하여금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처럼 참혹한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러한 사람들의 삶이 그 비극적 흔적을 좀체로 표면에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아마 그 한복판에 있는 저의 감성이 무디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그들 자신의 그 왜소한 삶에 기울이는 그들 나름의 노고와 진실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온몸으로 살아가는 삶은 비록 도덕적으로 타락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진실성을 훼손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날 접견장에서 만난 젊은 친구의 표정에서 제가 읽은 것만 하더라도 그것은 아내의 옥바라지를 염두에 둔 타산의 흔적이 아니라 비록 1/3, 1/10의 아내이지만 아내의 옹근 자리 하나 고스란히 남겨두려는 그의 고뇌와 진실이었습니다. 지금도 고뇌에 찬 그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사무치는 생각은, 같은 시대 같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판이한 사고와 윤리관을 갖게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것은 또 얼마나 끔직한 것인가 하는 몸서리입니다. 그리고 그들에 비하면 저의 윤리의식은 얼마나 공허하며 사치스러운 것인가 하는 참괴의 염(念)입니다. 그리고 1/3의 아내로서든, 1/10의 아내로서든 그가 출소할 때까지 그의 옆에 남아 있어 주기를 바라는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