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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아버지 활동만 멈추면 당장 맹물인 사람>의 줄거리:
맹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흔히들 자기 유익을 위하여 전혀 야무진 구석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스스로 유익을 추구하는 인격적인 맛과 색깔과 경향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지요. 예수님의 하나님을 향한 인격 성분은 너무 진국이셨지요. 그러나 이 세상을 향해서는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의 활동이 멈추기만 하면 완전 맹물이셨습니다.
아버지 활동만 멈추면 당장 맹물인 사람
(요한복음 19:1~16)
1.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2.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6.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아버지 활동만 멈추면 당장 맹물인 사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아버지 활동만 멈추면 당장 맹물인 사람”
오늘 본문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예수님에 대한 빌라도의 태도입니다. 앞에서도 잠깐 비쳤습니다만 본문 16절 마지막 부분까지도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집요할 정도로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에게 설득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압력에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고 맙니다. 여기서 빌라도가 끝까지 예수님의 무죄를 설득하려고 하는 집요함이 굉장히 특이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여기서 빌라도가 느낀 예수님으로부터 “아버지 활동만 멈추면 당장 맹물인 사람”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맹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맹물 같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75억 명이 함께 살고 있는 이 지구에서 자기유익을 위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공통점입니다. 그리고 자기유익을 위하여 의지를 드러낼 때는 누구나 자기만의 인격적 특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자기유익의 추구라는 공통적 기반 위에서 인격의 특징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 인격의 특징을 맛과 냄새와 색깔과 경향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유익을 추구할 때 드러나는 맛과 냄새와 색깔과 경향이 무척 희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유익을 추구하려는 추진력과 욕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워낙 약하고 희미해서 인격적 특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사람 참 맹물이네!”라는 소리를 듣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뜨겁고 진한 사랑을 하시는 진국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들여다보면 이 세상을 향해서는 완전히 맹물 같은 분이셨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듯이 예수님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에 대해 맹물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세상에 대해 맹물일 때에 나타나는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쳐줍니다.
본문에서 로마 군인들은 빌라도의 지시에 따라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채찍질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시는 중동 땅 광야에서 자라는 손가락만한 가시들이 뻗어 있는 줄기입니다. 이것으로 면류관의 형상을 만들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씌웠던 것입니다. 학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이 가시가 점점 더 안쪽으로 깊이 파고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시면류관을 쓰셨던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괴로우셨을 것입니다. 채찍질도 단순히 때린 것이 아닙니다. 채찍 끝에는 날카로운 쇠붙이가 붙어있었습니다. 옷을 벗겨서 채찍을 치면 한두 대만 쳐도 살점이 떨어져 나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께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채찍질한 뒤에 고관대작들이 입다 버린 자색 옷을 입혀서 조롱합니다. 당시 자색으로 물들인 옷감은 왕이나 고관대작들만 입던 귀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입다 버린 것을 구해다 입히고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손으로 치며 조롱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빌라도가 무죄로 여긴 예수님에게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채찍질하고 조롱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빌라도는 예수님께 벌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발할 때에 언급했던 죄목은 유대인의 왕을 자칭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왕을 자칭한다는 것은 종주국인 로마황제에 대한 반기를 든다는 뜻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서 십자가에서 처형시키고자 고발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빌라도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 심문하는 동안 유대인들의 고발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로마황제에 저항하거나 식민지인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에 위협을 가할만한 어떠한 요소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대로 풀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빌라도가 총독의 직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소요가 없어야 했습니다. 소요가 있다는 보고가 황제에게 올라간다면 쉽게 말해 점수가 깎이는 상황이었고 빌라도는 무능하다고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보이는 분노와 적개심을 어느 정도 풀어줄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대중들의 분노와 적개심을 풀어줄 수 없다면 군중 폭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고 그것은 곧 통치능력에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타협할 선을 찾았고 예수님에게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채찍질하고 낡아 떨어진 자색 옷을 입혀서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이 보는 앞으로 끌고 나오게 하였습니다. 다만 여전히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고발한 대로 왕을 자칭한 범죄에 대해 충분한 벌을 내렸으니 이제 방면하겠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러한 처벌 과정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분노를 달래고 예수님과 관련된 송사를 매듭짓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여론을 이끌던 대제사장들과 그 하속들은 기어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불굴의 의지를 보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며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면 빌라도가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반복하여 유대인들을 설득해서 예수님을 방면하고자 애를 씁니다. 요한복음이 이렇듯 빌라도가 집요할 정도로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하는 사실 속에 들어있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로마제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의지를 찾을 수 없었고, 민족이 처한 상황을 바꾸고 개선시키려는 개혁의지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처해계신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의 주도하에 결박되어서 로마총독 앞에 끌려와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정하신 십자가의 길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온전히 수용하시며 묵묵히 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때에 성령님을 통해서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처하신 상황은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활동이 전면적으로 정지된 상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 안에 아무런 말씀이나 행동도 넣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해 맹물 같은 사람이 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확고한 무죄 판단은 맹물 같은 예수님에 대해 이방인의 총독이 가지는 느낌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빌라도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고 주권자로서 살아계심을 전혀 몰랐습니다. 이러한 빌라도가 볼 때 예수님으로부터 그 어떤 불만이나 저항의지나 개혁의지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직접 예수님을 만나고 대화를 하면서 이상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빌라도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고 언제 누가 잡아먹을지 모르는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정치판에서 뼈가 굵은 사람이었습니다. 총독으로 임명될 정도의 예리한 정치적 감각을 지닌 빌라도는 사람에 대한 판단력 또한 뛰어났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몇 마디를 나눈 것만으로도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느낀 예수님은 마치 맹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의 분노와 적개심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유익을 추구하려는 의지자체를 의심할 정도로 세상에 대해서 맹물이셨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이러한 사람이 무슨 잘못을 저지를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단순히 도덕적 깨끗함이나 윤리적 의로움을 느꼈던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서 53장 7절을 보면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결박되어 재판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맹물 같았기에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의 고발이 마음에 닿지 않았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를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에게 집요하게 설득하려 했던 것은 빌라도의 인격이 훌륭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만큼 세상에 대해 맹물 같은 상태였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공생애 때의 예수님은 특색 있고 독특한 경향을 보이시며 활동하셨습니다. 셀 수도 없는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셨고 세리와 죄인과 창녀들을 향해서는 온유하심으로 포용력을 보이셨습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날이 선 칼을 휘두르듯이 날카롭게 질책하시고 저주하셨습니다. 어떤 때에는 대제사장들의 이권의 현장이 되어버린 성전에서 채찍을 드시고 정화하시는 과격함을 보이시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색채가 뚜렷하였기에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들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의 장본인이신 예수님께서 결박당해 빌라도 앞에 섰을 때 빌라도는 예수님을 맹물같이 느낍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표현되었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모두 하나님 아버지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표출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향해 가고 있는 시점에서 아버지께서는 예수님 안에서의 활동을 전면적으로 중단하십니다. 아버지의 활동이 중단되자 예수님의 모습은 아무런 색채가 없는 맹물 같은 상태였습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것을 빌라도의 느낌을 빌려서 반복하여 기록하며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대해 맹물과 같으셨습니다. 이 세상을 향하고 계신 아버지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더 이상 표출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자기방어를 위해, 자기변호를 위해 의지 자체가 발동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에 대해 맹물같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당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드러내십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아버지의 활동을 나의 인격적 특성으로 볼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서 적개심과 분노로 들끓었던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가 활동하고 계시는 동안에 예수님의 인격의 특성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지 못한 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공생애 때의 유대인과 대제사장들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판이하게 달라 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이 판이하게 달랐던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내 모습이 사람들에게 과격해 보일 수도 있고 온유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과격해 보이든 온유해 보이든 그것은 아버지의 활동의 결과여야만 합니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아버지의 색깔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아버지 생각의 냄새가 나야 하고 아버지 생각의 맛이 나야만 합니다. 만약 아버지가 내 입에 할 말을 넣어주시지 않고 내 몸에 행동을 주시지 않는다면 맹물이 되어야만 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죄를 물을 수 없었던 것처럼 죄를 덮어씌운다는 것 자체가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의 맹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주방장들과 셰프들과 주부들은 국물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맹물로부터 시작합니다. 멸치육수를 내려면 맹물에 멸치를 넣고 끓입니다. 고기육수를 내려면 맹물에 고기와 뼈를 넣어 끓입니다. 김치찌개를 해도 맹물이 들어가야 합니다. 맹물은 모든 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의 물이기 때문입니다. 강릉에 송천약수라는 물이 있습니다. 이 샘물은 철분이 많아 맛이 강하고 톡 쏘는 탄산이 들어있기에 그냥 마시는 것 외에는 다른 용도로 쓸 수가 없습니다. 요리를 하려면 맹물이어야 합니다.
공생애 때의 활동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인격은 한 마디로 특정할 수 없었습니다. 온유한 분이라기에는 누구보다 과격할 때가 있었습니다. 과격한 분이라기에는 예수님처럼 온유한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규정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상황과 대상에 따라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표현되는 분이셨기에 예수님의 인격적 특성을 규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인격적 특성을 규정하자면 맹물이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황마다 대상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언제 어디서든 그대로 나타내시는 완전한 맹물이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맹물이어야 합니다. 맹물이 아니라면 이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본래의 맛대로 표현해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맹물이 되도록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돈 문제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면한 돈 문제에 대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있으십니다. 이제 그 아버지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그 맛 그대로 돈 문제를 마주하고 있는 나를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멸치육수 맛이 나고, 된장 맛이 나고, 고기 삶은 맛이 나타나려면 기본이 되는 물은 맹물이어야 합니다. 내가 처한 문제에 아버지가 가진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그대로 나타나려면 맹물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인격 전체를 맹물로 만드십니다. 송천약수처럼 독특하고 톡 쏘는 인격의 맛을 드러낸다면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드러날 수 없습니다. 돈 문제에 대해, 자녀 문제에 대해, 배우자 문제에 대해, 직장 문제에 대해 나의 인격의 독특한 맛을 내고 있다면 아버지가 갖고 계신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맛도 내가 마주하는 상황에 대하여 표현될 수 없습니다.
빌라도는 거래와 담합과 타협에 능한 달인이었습니다. 그랬던 빌라도가 예수님을 무죄방면 하고자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을 설득하고 또 설득합니다. 그 이유는 빌라도가 느낀 예수님의 맹물 되심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자기유익을 위해서 어떠한 의도와 의지의 색깔을 드러낼 수 없는 맹물 같은 사람이다.”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맹물 되심의 정도가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그 인상과 느낌을 벗어버릴 수 없어서 무죄를 설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자기유익 추구의 달인이었던 빌라도가 볼 때 예수님의 맹물스러움은 너무나 자기와 달랐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고, 예수님 나라에 속하기 위해서는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이것은 주체성의 주제와 같은 맥락입니다. 내가 만나는 상황과 대상들에 대한 아버지의 색깔과 인격의 맛을 온전히 표현해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붙잡고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 문제에 대해서는 맹물 중에서도 상 맹물이 되어야 아버지의 맛깔스러운 인격이 주체가 되셔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맹물 됨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한 뜨겁고 진한 진국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아버지를 향하여 진국의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들은 이 세상을 향해서는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생각의 맛이 그대로 표현되는 맹물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빌라도는 아버지의 활동이 중단되신 예수님을 맹물 같이 느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서도 맹물 됨을 느끼게 하여주심으로써 아버지가 가지신 모든 생각의 맛과 냄새가 그대로 살아서 이 땅에 표현되는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