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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정승 |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황희(黃喜, 1363∼1452)정승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종영된 ‘대왕세종’ 대하사극드라마를 통해 다시 한 번 그의 삶과 정치적인 진가를 확인한 바 있다. 황방촌 유물은 바로 황희 정승이 생전에 사용하던 유물로서 1979년 1월 2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3호로 지정되었으며 옥서진(玉書鎭, 옥으로 된 종이누르개) 1쌍, 산호영(珊瑚纓, 산호로 된 갓끈) 1종, 옥연(玉硯, 옥벼루) 1개. 서각대(犀角帶, 코뿔소 뿔로 된 허리띠) 1개, 분재문서(分財文書, 재산분할문서) 1매가 그것이다.
황희의 호는 방촌(尨村)으로, 고려 공양왕 1년(1389)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태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고, 1431년부터 1449년까지 영의정이 되어 세종대왕을 도와 국정을 통치하였으며, 관직을 벗은 후에도 중대사에 대해 세종의 자문을 해 주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4군 6진의 개척, 외교 및 문물제도 정비, 문화진흥을 지휘하여 세종대의 태평성대를 이룩하는데 기여하여, 조선왕조에서 가장 훌륭한 재상으로 칭송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정승의 자리에 계신 분으로도 유명하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황희정승 동상 |
그렇다면 현재 우리지역에 남아있는 “황방촌 유물”이 어떻게 흘러들어온 것일까?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성에서 출생을 하였고, 성장은 전라도 남원에서 말년은 경기도 파주에서 보냈다. 더더구나 경상도에서 벼슬을 한 적도 없고 딱히 문경을 거쳐 간 기록도 발견되지 않았다.
황방촌 유물 |
연유는 이러하다. 황희 정승의 둘째아들 황보신(黃保身)이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처가의 연고지역인 상주 모동 중모에 내려와 살았다. 이후 그의 손자 황정(黃珽)이 용궁 무리실을 거쳐 문경 산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황정은 삼척부사를 지낸 아들 황사웅(黃士雄)에게 재산 상속과 관련된 분재기를 작성하여 남겼다. 그 분재기가 아직도 황씨 집안에 전해오고 있으며 문경 장수 황씨 집안은 입향조 황정의 호를 따라 사정공파라 이름하게 됐다.
황희정승 묘소(경기도 파주시) |
황희정승 영당지(경기도 파주시) |
별급문기로 남겨진 유품
연산군(燕山君) 6년(1500) 9월에 이 분재기에 재주(財主)인 황정(黃珽)이 아들 사웅(士雄)에게 전답(田畓)을 특별히 별급(別給)하고, 증조(曾祖)가 손수 사용하던 물건인 산호갓끈, 옥연, 옥서진 등의 몇 가지 보물(寶物)을 종가(宗家)에서 간직하여 삼가 지킬 것을 밝혔다.
옥서진 |
산호영 |
>> 사진설명... |
서각대 |
옥연은 길이 27.3㎝, 너비 17 ㎝, 두께 1.5㎝로 손을 댄 자국에 노결현상(露結現象)이 생겨 무수연(無水硯)이라고도 한다.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세종에게 하사받은 벼루이며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지난 2006년에는 상주 김선치의 벼루(1330년)가 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서대는 길이 100㎝, 너비 3.5㎝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보관하는 각대통도 좋다. 분재기는 가로 48㎝, 세로 54㎝의 장지(壯紙)에 황희의 증손인 황정(黃珽)이 쓴 것으로 아들 황사웅(黃士雄)에게 논밭을 특별히 내리고, 옥서진·서각대·옥연 등을 종가에서 간직하여 지킬 것을 언급하였다.
※ 황정별급문기(黃珽別給文記)
황정이 아들 사웅에게 남겨준 별급문기 |
1500년(연산군 6) 황정이 아들 사웅(士雄)에게 땅과 선조인 황희의 유물을 특별히 상속해 준 문서로서 일반적인 재산상속과는 구별되는 문서로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에 일정한 토지나 노비 혹은 조상전래의 가산이나 유품을 특정한 자녀, 친손, 외손에게 지급하는 문서이다. 이 자료는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중요한 별급문기의 하나로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할 수 있다.
이 별급문기의 작성 동기는 아들 황사웅이 황희의 증손으로서 글재주가 뛰어나 앞으로 크게 될 자질이 있다고 인정해서이다. 별급의 내용은 논 25마지기와 황희의 유품인 옥서진 1쌍, 산호영자(珊瑚纓子) 2개, 옥연(玉硯) 1좌, 서각대(犀角帶) 1개이다. 그리고 이러한 물품들은 조상대대로 이어지는 유품이니 잘 보존하여 잃어버리지 않도록 당부하고 있다.
문경시 산북면 대하1리에 자리한 장수황씨 종택.
단순한 '고택(古宅)'이 아닌, 여전히 우리 곁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선인들의 숭고한 가르침을 전해주는 종가. 황희 정승의 청백리 정신을 가풍으로 여기며 면면이 이어온 종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황희 정승의 맥을 잇고 있는 문경 장수황씨 종택은 약 400여년 전 건립됐으며 문경시 산북면 대하 1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 옛날 종가를 세운 조상은 세상을 떠났지면 종택은 지금도 건재하며 베품의 철학도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다. 대하리는 장수황씨가 입향한지 200여년이 지난 180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하마을로 나누어졌다. 1700년대 대종가를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었던 웃한두리에서, 1800년대 들어 소종가들이 아랫한두리(대상 1리)로 분가했다. 장수황씨는 중국 후한(後漢)의 유신이었던 황 락(黃 洛)이 서기 28년(신라 유리왕 5년) 현재의 베트남 북부 하노이지방 교지국(交趾國) 사신으로 가다 동북해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현재의 울진군 평해(平海) 월송(月松)지방에 표착(漂着)한 후 그곳에 자리잡고 살면서부터 시조가 됐다. 자칭 황장군(黃將軍)이라 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황씨의 시원(始源)이다.
황 락(黃 洛)은 갑고(甲古)·을고(乙古)·병고(丙古) 세 아들을 두었는데 각각 기성군(箕城君, 평해의 옛이름)·장수군(長水君)·창원백(昌原伯)에 봉해져 훗날 평해· 장수·창원 등 3관향이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즉 맏이 황갑고(黃甲古)의 후손 황온인(黃溫仁)은 평해 황씨의 시조,둘째인 황을고(黃乙古)의 후손은 신라 경순왕의 부마이며 시중벼슬을 지낸 황 경(黃 瓊)으로 장수 황씨의 시조(始祖)가 되며, 셋째 황병고(黃丙古)의 후손인 황충준(黃忠俊)은 창원 황씨의 시조다. 고증(考證)할 문헌이 손꼽히는 황희(黃喜)정승의 증조부로 증(贈) 참의(參議)를 지낸 황석부(黃石富)를 1세조로 지금의 유실돼 역사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장수 황씨(長水 黃氏)는 조선시대 4대 명상(名相)의 한사람으로 계보를 잇고 있다.
문경 한두리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집촌으로 인적·물적 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장수황씨 동성마을이 형성된데는 황사간의 역할이 컸다. 삼가(三嘉)현감을 지낸 황사간은 7대조 황희의 영정과 유품을 보관하기 위해 숙청사(肅靑祠)를 비롯한 종택을 마련했고 '정우정'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다. 종택의 역사가 약 400년의 역사를 말해주듯 장수황씨 종택은 지방 양반가옥으로서의 원형이 잘 보존하고 있다. 종택 건물은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고방채가 있다. 우측에는 별도로 영정각 및 숙청사가 담장 내 배치돼 있다. 종택 건물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236호로 지정돼 있고 탱자나무는 기념물 제 135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종가에 내려오는 문헌자료는 많지않다.
종택이 유지된 400여년간 문경의 장수황씨는 조선시대 중앙관직에 나아가기도 했다. 그만큼 향촌에서는 명망있는 사족이었다. 그동안 장수황씨가 작성하거나 보존해오던 문헌자료는 상당수였으나 여러차례 절도를 당했다. 현재는 다만 1천500년전(연산군 6) 황희의 증손 황정이 작성한 분재기와 황희의 유품인 옥으로 된 종이 누르기(옥서전) 1장, 산호로 된 갓끈 1종, 옥 벼루 1개, 코뿔소 뿔로 된 띠(사각대), 1개가 보존돼 있다. 분재기에는 종가의 유물을 보존하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장수황씨 종가에서 불천위로 모셨던 분은 15대조 황사간과 13대조 황상중이지만 현재 불천위 제사는 지내지 않는다. 일제시대 생계가 막막했던 종택에서는 생존을 위해 사당의 제목까지 팔아야 했다. 처음에는 다락방에 신주를 모시고 사당삼아 제사를 모셨지만 이마저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지자 모든 신주를 조매하고 말았다. 대신 종택에서는 매년 2월 10일 황희의 생일에 자손과 파손, 유림들이 모여 방촌선조 다례를 올리고 있다. 이 밖에 종택에서는 음력 10월 묘사를 지낸다. 종택 음식으로는 가양주인 '호산춘'이 유명하다. 이는 수 백년간 장수황씨 집안에 이어져온 전통주로 1990년 민속주로 문화재 등록됐으며 지금도 이 집안에서 빚어지고 있다. '쌀 한되에 술 한되가 나온다'고 하며 술이 너무 좋아 술에 빠져 지내다가 몸과 집안을 망친다고 해서 망주(亡酒), 신선이 좋아한다 하여 호선주, 관리들이 이 술맛에 취해 임무도 잊고 돌아갔다 하여 망주(忘酒)로 불렸다는 유명한 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