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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인 같던 할아버지의 영향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부위원장이라면 10만 교사를 대표하는 조직의 명실상부한 2인자가 아닌가. 그 전교조의 부위원장을 하던 사람이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스스로 교직에서 나온 뒤 관광버스 운전기사를 한다? 이건 뭔가 도무지 앞뒤 맞지 않는 얘기였다. 홍익대 사대부고에 재직하고 있는 교직 경력 31년의 이윤 선생에게서 이병식 선생님의 이야기를 처음 듣고 나서 만나뵈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데에는 솔직히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한번 보기나 하자”는 속셈이 전혀 없지 않았다.
“그거 다 얘기해야 하나…”로 시작된 청소년기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갑자기 가세가 기운 가정형편에서도 죽도록 공부하고 싶어했던 불우한 소년’의 전형이었다. 경북 봉화에서 서울까지 하루 1200리를 왕복하며 출석수업을 받으면서 우여곡절 끝에 방송통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문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이미 나이가 27살이었다.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실업계 사립고등학교에서 부기 실기교사를 하면서 4년제 대학을 다녔다.
“새벽에 일어나 동두천에 있는 학교에서 수업 마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왔다가 다시 올라갈 때 깜박 졸다 깨보면, 차가 3·8선 표지판을 지나가고 있는 거야. 그 버스가 전곡까지 가는 직행이라 동두천 정류장에 잠깐 들렀다가는 바로 올라가거든. ‘이 밤중에 내가 3·8선을 왜 넘고 있나’ 기가 막히더라고…. 한탄강 다리 넘어 부랴부랴 기사한테 사정해 내려서 그 밤중에 동두천까지 다시 오기는 또 쉽나. 휴… 한번은 택시기사 양반이 내가 학교 선생이라니까 자기 아이도 동두천 어느 중학교 학생이라면서 한탄강에서 동두천까지 택시비를 안 받아. 그런 인심이 또 있더라고….”
자연스럽게 말씨는 ‘해라’ 투로 바뀌었는데 나는 그게 훨씬 더 정겹게 느껴져 고마웠다. 한번 ‘선생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선생님’이다. 이미 퇴직한 분이지만 내가 꼬박꼬박 ‘이병식 선생님’이라고 쓰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정말로 “방에 누우면 밤하늘에 별이 보이고 겨울에는 방안에 물이 어는 집”에 살면서 “못해서 한이 맺힌 공부”를 열심히 했다. 재직하던 학교를 서울로 옮겨, 그 뒤에는 다시 또 버스를 탄 채 3·8선을 넘는 일은 없었다. 31살에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4년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고, 대학을 다닐 때 옮겨다니던 서울의 고등학교에서 결국 20년의 교직생활을 했다.
어릴 적에 큰 영향을 끼친 분은 할아버지였다. 명예 도산서원장을 지낸 문장가이시면서 평생 도인 같은 생활을 하신 분이었는데 “규칙적으로 생활하셨고, ‘낮에 한가롭게 책이나 읽고 앉아있는 것은 옳은 선비가 아니다’라면서 주경야독을 몸소 실천하셨으며, ‘농번기에 일꾼 뒷바라지하기도 바쁜 아녀자에게 바느질을 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간단한 바느질을 집안의 남자들에게 가르치셨고, ‘더 먹고 싶을 때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밥은 반드시 두 숫가락을 남기시는 등 실학사상을 몸소 실천하셨는데, 그 수준이 거의 새로운 교(敎)나 도(道)를 하나 창시해도 될 만한 경지에 이른 분”이셨다.
뼈아픈 자신의 한계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 할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은 손자가 나중에 교사가 되어 ‘참교육’을 위해 전교조에 가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500명이 넘는 교사가 해직당해 길거리로 쫓겨나야 했던 비합법 시절의 전교조가 겪은 ‘엄청난 탄압과 고초’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복면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대학생 제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전교조 창립대회를 치르던, 10년도 훨씬 더 지난 ‘그 날의 감흥과 두려움’에 대해 얘기하다가 이병식 선생님은 목이 잠겼다.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 동안 나는 차마 그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전교조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무엇보다 ‘학생을 위한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어. 재단이나 교장을 위한 교사가 아니라….”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받은 무능한 자손이 그 재산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 바로 ‘사학’이라고까지 얘기되는 우리 사회에서 이병식 선생님이 어떤 활동을 했을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다. 비합법 시절의 전교조에서, 해직교사들이 당하는 피해가 너무 크니 그 깃발을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 불씨를 단숨에 꺼버린 사람이 이병식 선생님이었다. 당시의 김귀식 위원장님이 하던 다음과 같은 말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깃발 내리자고 하는 사람들은… 이병식 선생부터 이민 보내고 나서 얘기를 꺼내든지 말든지 하라구.”
이제는 교직을 떠날 수밖에 없던 가슴 아픈 얘기를 해야 하는 순서가 되었다. 영화나 소설에 나올 법한 극적인 사건이 있던 것은 아니다. ‘무너지는 학교’로 상징되는 교육의 황폐화 앞에서 이병식 선생님은 ‘자기 한계’를 느꼈고 뼈아픈 자신의 한계를 그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단지 몇명의 학생들에게 희망을 걸고, 계속 학생들 앞에서 수업을 할 수 있는 훌륭한 교사가 될 자신이 없더라고. 그렇게 ‘참교육’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계속 해야지. 그렇지만 나는 도저히 자신이 서질 않는 거야. 이게 도대체 수업인가 싶은 생각만 들고…. 자신이 없으면서도 적당히 수업을 하면 월급은 꼬박꼬박 받을 수 있지. 그렇지만 그것은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더라고…. 내가 스스로 떠날 때가 된 거지.”
참교육실천대회행 버스의 핸들을 잡고…
그것이 ‘교사 이병식’이 ‘관광버스 운전기사’라는 생활인을 선택한 이유였다. 할아버지에게 어릴 때부터 익힌 ‘노동 중시 사상’은 수십년 뒤에 그렇게 다시 꽃처럼 피었다. 수업 듣기를 원하지 않는 학생들 앞에서 수업을 하는 것보다, 사람들을 원하는 목적지까지 옮겨주면 최소한 ‘사기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지난 1월 ‘참교육실천대회’에 가는 전교조 선생님들을 서울에서 목원대까지 태우고 간 관광버스 운전기사가 바로 이병식 선생님이었다. 충북 괴산의 ‘전국일꾼연수’에 갈 때에도 ‘관광버스 운전기사 이병식’이 차의 핸들을 잡았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잠이 들었지만 이수호 전교조 위원장은 운전석 옆자리의 보조의자에 앉아 한때 자신의 오른팔이던 사랑스런 후배와 내내 이야기를 나눴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대우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은 땀 흘려 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자신의 생각을 이해해주는 이수호 선배가 고맙다고 말하는 이병식 선생님의 표정은 바로 우리들의 영원한 스승 ‘큰바위 얼굴’이었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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