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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참되시다 / 롬 3:1-8
유태인식 교육에서 자녀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지 않고, 오늘 무슨 질문했느냐고 묻습니다.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수동적입니다. 반면에 질문한다는 것은 주체적입니다. 자기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을 매개로 토론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식은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그렇습니다. 모든 의문을 차단한 채 무조건적인 순종이나 믿음을 강요함으로써 참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 정면에서 질문했습니다. 그 결과 고난의 신비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전도서의 기자는 하나님의 질서가 무엇인지 강한 회의를 나타냈습니다. 그 결과 인생의 겸손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망루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말씀에서도 매우 많은 질문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짧은 여덟 절에 다섯 번의 질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전체 주제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님의 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에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장에 부도덕한 불신자, 2장 전반에 도덕적인 불신자, 후반에 종교적인 불신자 역시 하나님의 의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천국에 갈만한 하나님의 의를 자기 스스로 만들어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1~3장의 결론은 3:10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또 로마서 3:23절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3:10절의 결론을 내리기 전, 1~8절까지 이 결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반론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다룸으로 복음에 거치는 장애물을 먼저 치우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는 이미 20년 이상 복음을 증거 한 경험이 있는 상태였고, 복음을 거절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공통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먼저 대표적인 네 가지 반론에 대해 답변하고 있습니다. 논쟁자들도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하지 못합니다. “내가 왜 죄인입니까?”라고 항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지옥에 가야 한다면 이 질문에 대답 좀 해 보라’는 식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1-2절이 첫 번째 반론과 답변입니다. 1절은 반론자들의 질문입니다. “유대인들도 지옥에 가고, 이방인들도 지옥에 가고, 착한 사람, 악한 사람 구분 없이 모두 지옥에 간다고 하면, 우리가 유대인으로서 그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유대인이 아무 소용없는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유대인의 유익은 범사에 많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사실도 알고, 애굽의 노예 되었던 200만 명이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광야에서 40년 방황할 때도 만나와 메추라기 떼를 내려주셔서 먹고 마시게 하셨으며, 그 가운데서도 옷과 신발이 헤지지 않는 은혜를 주셨는데, 이것이 어찌 유익이 아닐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받은 백성이 어찌 유익이 없다고 하느냐고 답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우선’이라고 표현한 것은 여러 가지 중에 첫 번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 유익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을 기록하실 때 유대인에게 계시를 주셔서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부터 메시야가 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올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유익입니다. 유대인으로부터 구원자가 나오고,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면 이보다 더 한 유익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3-4절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3~4절이 두 번째 반론과 답변입니다. 3절은 반론자들의 두 번째 질문입니다. “설령 유대인들 가운데 불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할 때, ‘너희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언약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 중에 일부가 믿든지, 그렇지 않든지 모두 다 구원해 주실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혹 있다고 해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언약이 파기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폐하시는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의 언약을 오해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유대인으로부터 메시야를 보내셔서 그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겠다는 것이지, 모든 유대인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방인들 중에 택한 자들과 유대인 중에 남은 자들이 유대인으로부터 나오는 메시야를 구주로 믿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구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 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언약을 이행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라, 100% 지키시는 분이신데, 너희는 약속의 내용을 오해해서 시비를 걸고 있다’는 요지의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저지르고,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어 간접 살인하여 모든 알리바이를 숨겼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의 죄를 지적하게 하신 사건과 그가 쓴 반성문을 인용해서 논지를 전개하였습니다. 시편 51:4절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옳다는 내용의 반성문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주의 말씀을 오해하고 왜곡해서 받아들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옳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대인 중에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지, 믿지 않는 자들까지 구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옳다고 해야지 오해해서 항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5~6절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5~6절이 세 번째 반론과 답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불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의가 배경이 되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세지신 것이 아니냐는 주장입니다. 아주 고약한 논리입니다. 소설가 백도기 목사님이 ‘가룟 유다에 대한 증언’이란 소설을 1979년 발간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오늘 말씀과 관련한 얘기가 나옵니다. 지금 누군가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을 맡은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의 생각은 뭐냐 하면 누군가가 이 악역을 감당해야 되는데 아무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자기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만약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그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구원 역사는 이루어져서 좋고, 그게 싫다면 방법은 하나인데, 예수님이 능력이 있으시니까 하늘의 천군 천사를 불러 불의한 악당들을 물리치고 거기 새 나라를 건설하실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겁니다. 사실 가룟 유다는 나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판 게 아니라 예수님이 가지신 그 신성, 그 하늘의 능력을 끌어내기 위해 예수님을 사지로 몰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이렇게 독백하면서 밧줄을 목에 맵니다. “세상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고 나에게 감사할 때가 올 것이다. 내가 한 일이 이기적 욕심에서가 아니라 희생이었다는 것을 당신들은 알 것이다. 나 하나의 죽음으로 예수님이 신이 되고, 그 분의 능력이 회생된다면 내 죽음은 충분히 가치 있으리라. 사람들이여, 나를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인으로서 기억하라!” 그런데 오늘 여기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는 뭡니까? 결과가 선으로 나타났다고 해서 지은 죄가 정당화 될 수는 결코 없다는 겁니다. 만약 이런 걸 선으로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이 건물에 불은 지른 것도 똑같이 선이 될 수가 있습니다. 불이 나게 되니까 소방관들이 활약할 것이고 그 중엔 많은 사람을 구조하는 영웅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소방관을 영웅 되게 불 지른 사람의 행동도 선이라고 우긴다는 겁니다. 말이 됩니까? 요셉의 형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동생을 죽이려하다가 팔아먹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엄청난 고난을 겪게 되지요? 종살이도 하고 억울하게 감옥생활도 합니다. 그렇게 13년간 온갖 고생을 다하다가 결국은 총리가 되잖아요? 형들이 쌀을 사러 왔다가 동생을 만나게 되고 죽을 죄를 지었다고 말하고 용서를 빕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한 형제가, “그래도 우리가 당신을 팔지 않았으면 당신이 지금 애굽의 총리가 어떻게 됐겠소?“ 이렇게 말했다고 칩시다. 이게 말이 됩니까? 결과가 좋게 됐다고 죄를 뒤집을 수 있겠냐는 겁니다. 죄는 죄고, 결과가 아무리 좋게 나왔어도 그건 심판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도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돌려서 악을 선으로 만드시고, 우리의 죄를 의로 만드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이런 열매가 얼마든지 맺혀 집니다. 그야말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지요. 그러나 이것을 보고 죄를 정당화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겁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과에 의해 논할 것이 못됩니다. 유대인들이 믿지 않아서 그 결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렸고, 다 믿게 돼서 구원을 얻었다고 해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 걸까요?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는 의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개별적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어떤 변명으로도 우리 죄는 정당화할 수 없고 또 거기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의롭다고 고백을 해야 됩니다.
7~8절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7~8절은 네 번째 반론과 책망입니다. 네 번째 반론은 세 번째와 비슷합니다. “나의 거짓말을 통해 하나님의 참되심이 드러난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인데, 어찌하여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이전처럼 대답하지 않고 야단을 치고 책망합니다. 8절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악한 궤변을 늘어놓으니 하나님께 정죄 받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는 막말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을 전하다 보면 반론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궤변인 경우가 많습니다. 궤변을 하면서, 거짓되고 헛된 논리를 가지고 복음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증거 할 때 자꾸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핵심에서 벗어난 질문을 계속하면, 딱 잘라 일단 교회를 나오시라고 권하시기 바랍니다. 논쟁자들의 네 가지 반론을 통해 우리는 죄악 된 그들의 세 가지 인격적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얼마든지 좋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들을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죄악 된 논쟁자들입니다. 질문하는 태도가 잘못되었고, 질문의 내용도 극도로 왜곡되어 있습니다. 첫째, 이들은 항상 핵심에서 벗어난 질문을 합니다. 로마서 1~3장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라는 것입니다. “너는 네 능력으로 천국갈 수 있을 만큼 의로우냐? 아닙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면 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완전한 의를 받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질문은 “너는 죄인이냐? 아니냐?” 이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핵심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쓸데없는 변두리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을 전해 보면 꼭 이런 걸 물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순신 장군이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왜 이순신 장군까지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질문의 대상은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의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묻고 있는데 쓸데없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질문합니다. 사람들은 자꾸 변두리 것을 가지고 질문하여 자기들에게 묻는 핵심적인 질문을 회피하려 합니다. “네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의를 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해줘도 이런 사람들은 꼭 “이 사람,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들은 끊임없이 질문하며 복음을 회피합니다. 질문해서 대답해 주면 또 질문하고, 또 대답해 주면 다시 질문하며, 끊임없이 질문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촌이 감기 걸린 것은 어떤 연유입니까? 오촌이 교통사고 난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육촌이 암에 걸리게 된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런 식입니다. 온 세상 모든 민족에 대해서 물을 기세입니다. 이렇게 쓸데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계속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답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요구를 회피하며, 시비 걸고 논쟁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들의 질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악한 방향으로 발전됩니다. 유대인들도 지옥에 간다면 유대인으로서 유익이 무엇이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중에 혹 불신자들이 있더라도 유대인들을 다 구원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질문부터는 굉장히 어리석은 질문들입니다.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때문에 심판받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냐? 또 네 번째 질문, 우리의 거짓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되심이 드러나니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의 질문은 어이가 없는 아주 사악한 질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들의 질문은 사악한 방향으로 발전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으려고 작심하고, 어떤 변명이라도 찾아내려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이런 반론을 만나게 되면 친절히 대답해 주다가도 어느 시점에 그들의 질문을 막고, 다시 핵심적인 질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계속해서 이런 사악한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논쟁자들에게는 두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첫째, 이들의 논쟁은 상식에 어긋나는 것들입니다. 상식을 벗어나는 질문들입니다. 계속 질문을 해서 답변을 얻으려 하는데, 답을 다 알아야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사촌이 왜 감기에 걸렸는지, 오촌이 왜 교통사고를 당했는지 알아야 믿겠다는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믿지 않겠다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밥과 반찬들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 알고 먹습니까? 아니면 그냥 먹습니까? 물론 알고 있는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는 대로 먹고 사는 것입니다. 이 반찬이 어디에 좋은 것인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 알고 먹는 것이 아닙니다. 다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다 먹으니까 먹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사용할 때 모든 기능을 전부 숙지하고 사용하지 않습니다. 몰라도 사용합니다. 기능을 다 알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것 중 하나는 비행기가 어떻게 하늘을 날아다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육중한 쇳덩이가 수많은 사람과 짐을 싣고 날아갑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저는 표를 사서 비행기를 타고 다닙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질문에 답을 얻어야 행동하겠다는 것은 일반 상식에 어긋나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런 방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둘째, 이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대적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불의를 통해 하나님이 의로워지셨으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세를 졌다는 것이 말이 되는 주장입니까? 하나님을 모욕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빚졌다고 말합니다. 이런 태도가 바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태도요, 대적하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 9:20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을 모르고 하나님께 까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엄위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바다 속 지층을 흔드시면 쓰나미가 됩니다. 백두산 밑에는 서울 두 배 면적에 마그마가 있다고 합니다. 그게 터지면 한반도가 남아날 리 없습니다. 성경에 이 세상은 더 이상 물로 심판을 받지 않고, 불로 망하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불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날을 ‘주의 날, 여호와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것이 핵폭탄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지구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그마가 터지면 그 때는 모두 불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엄위하신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시면 지진이 나고, 화산이 폭발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논쟁자들은 정상적인 인간 이성에도 맞지 않는 논리로 반론을 제기하고, 엄위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악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약점이고, 지옥에 떨어지는 영원한 약점인 것입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엄위한 심판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대로 하나님은 항상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도 자기 생각은 아니라고 고집을 부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논쟁자들에 대한 바울의 세 가지 반응은 첫째, 바울은 가능한 한 모두 대답을 해 줍니다. 둘째, 핵심적인 질문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셋째, 계속 대답을 해 주다가 어느 순간에 답변이 아닌 책망을 통해 질문을 끊어냅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넘어갑니다. 마가복음 4:31-32절 말씀을 보면 작은 겨자씨가 나중에는 모든 풀보다 크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현재 처한 여러 가지 어려운 큰 문제와 비교해볼 때, 하나님의 약속이 아주 작은 씨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잃지 않으면 그 작은 겨자씨를 통해 기적적인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작은 씨가 처음에 흙에 덮였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엄청난 흙의 양과 무게에 비하면 씨는 너무나도 작습니다. 그때 흙은 씨를 조롱할 것입니다. “이 쪼그만 게. 너는 나를 못 이겨!” 그때 씨는 웃으면서 말할 것입니다. “흙아! 지금은 내가 작지만 내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있어. 때가 되면 크게 자라게 될 거야.” 그때 흙이 말할 것입니다. “웃기지 마. 나는 너보다 천배 만배 크고 무거워. 어떻게 네가 나를 뚫고 나오겠어?” 그때 씨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두고 봐라. 때가 되면 너를 뚫고 나간다.” 그래도 흙은 여전히 비웃을 것입니다. “두고 보자는 놈 하나도 무섭지 않더라!” 그러나 아무리 작은 씨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얼마나 무서운 힘이 나옵니까? 결국 그 씨는 점차 자라면서 자기보다 천 배 만 배 큰 힘과 덩치를 가진 흙을 밀어낼 것입니다. 그리고 흙 위로 솟아난 싹은 나중에 자기 밑에 널린 흙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뿌리로 열매를 맺는 고구마와 같은 식물을 보십시오. 고구마가 자랄 때 주변의 땅을 파헤치면서 그 파헤친 공간에서 고구마 크기가 커집니까? 아닙니다. 주변의 거대한 땅을 밀어내면서 점차 커지는 것입니다. 그 땅을 밀어내는 엄청난 힘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생명의 힘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그런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결국 인생의 성패는 자신이 마음속에 어떤 소리를 키워내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복음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단순하다고 해서 지루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복음은 듣고 또 들어도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 죄인들인데,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아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받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의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 안에 성령을 보내 주시고, 천국에서 받아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날 생명의 부활을 해서 영원토록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니,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 교회 처음 나오신 분, 아직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분이 계시면 이 말씀을 새겨들으시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논쟁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항상 옳고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순전하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되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과 같이 변명하지 말고, 말씀 앞에 순종하고, 회개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으로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의인은 없나니 / 롬 3:9-18
유머집에 보니까 공주병 시리즈가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공주병에는 단계별로 증상이 있답니다. 먼저 초기 증상은 이렇습니다. 55 사이즈 입는 것에 한없는 자부심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이 피부가 곱다고 칭찬하면 '저는 화장을 하나 안 하나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공주병 중기 중상은 짧은 쇼트 머리를 하고는 '나니까 소화하지' 합니다. 남편은 세상에 여자가 자기밖에 없는 줄 안다고 하면서 얼굴을 붉힙니다. 공주병 말기 증상도 있습니다. 이건 여러 가지인데. 숲 속에 가면 졸려서 하품을 합니다. 공주로 착각하니까 그렇습니다. 키 작은 남자를 보면 꼭 7명을 채우려 한답니다. 자신이 백설공주로 착각하는 겁니다. 어떤 집에 초대되어서 나올 때 꼭 소지품을 흘리고 나옵니다. 부부 동반 외출할 때는 남편 치장에 공을 더 많이 들입니다. 왜냐하면 공주하고 격이 맞아야 하니까요. 공주병 최종기 증상도 있습니다. 자기는 죽어도 썩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요즘 보면 공주병 환자가 많기는 많은 것 같습니다. 공주병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올바로 알지 못하고, 헛된 생각을 하며 지내는 사람을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을 무시하고 착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했는데, 자기 자신을 똑바로 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겁니다. 인생이나 비전이나 발전은 현재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깨닫는 것이 인생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열 번이면 열 번, 백번이면 백번 다, 항상 가기 싫은 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기도 할 때도 “주님! 제발 저 집에는 좀 안 가게 해 주세요!,” 또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해 줄 때도 “주님! 우리 교인들도 제발 저 집에는 좀 안 가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일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목사인 제가 그토록 싫어하고, 심지어는 교인들까지도 안 가기를 기도하는 집이 어느 집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제 이야기를 들으면 “맞다, 나도 그 집에는 정말 가기 싫어!” 하고 동의 하실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병원입니다. 병원에 들어가면 우선 그 특유한 소독약 냄새가 거부감을 조성합니다. 의료진의 하얀 가운이 어쩐지 거리감을 갖게 합니다. 더구나 의사선생님께 불려서 진찰실로 들어가는 것은 두려움, 심하면 공포감까지 느끼게 합니다. 더구나 종합검진을 해놓고 결과를 보러오라는 날은 죄수가 재판 받으러 판사 앞으로 가는 것처럼 더 두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주 위중한 병으로 판정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병원에는 가야 합니다. 아무리 공포감이 들어도 중년을 넘긴 사람들은 적어도 1-2년에 한번쯤은 종합검진을 받아보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데 보탬이 됩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암에 걸린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몸에 이상이 없어도 병원에 가서 반드시 종합검진을 받아야 됩니다. 더구나 몸에 좀 이상을 느끼게 되면 병원 가는 일을 미루면 안 됩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 한국 사람들은 좀 이상한 습관이 있어요, 몸이 좀 안 좋은데도 곧장 병원 갈 생각은 안하고, 좀 버텨보자 하면서 차일피일 병원 가는 것을 미루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병을 키웁니다. 신속하게 진단을 하고 치료를 받으면 쉽게 고칠 수 있는 것도, 시기를 놓치고 병을 키워서 치료의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쉽사리 병원으로 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병원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가기가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는 병원과 같습니다. 병원이 몸의 질병을 치료하는 곳일 뿐 아니라, 건강한 사람도 더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교회도 사람을 진단하여 영혼의 병이 있는지를 찾으며, 병든 영혼을 치료하는 영적인 병원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종합검진 하여 치료의 방법을 찾으며, 더 건강한 영혼의 상태를 유지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풍성한 생명과 축복된 삶을 살게 하는 곳입니다. 병원은 잠깐 70-80년 살다 갈 육신의 생명을 치료하는 의료기관이지만, 교회는 영원히 살아야 될 영혼의 생명을 치료하는 의료기관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영혼의 병원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예배시간이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영적건강상태를 세밀하게 진단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과 육을 진단하는 광선입니다. 히브리서 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여러분은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의 X-Ray, 초음파, CT, MRI를 찍어서 여러분의 육체와 영혼에 무슨 병이 있는지를 진단받고, 병이 발견되면 치료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우리 성도들의 영적인 건강을 위한 종합검진을 말씀하는 내용으로 보면 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청진기를 대시고 사람의 구석구석을 살피시는 모습을 우리가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인간의 모습을 살피신 후에 마지막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죄의 아래에 있다. 인간은 죄인이다.”
9-10절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죄의 보편성에 대해서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다 죄의 영향력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에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가 인간에게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인간은 이제 죄의 유전성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음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의 유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하다는 성선설의 입장보다는, 태어나면서부터 악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성악설의 입장을 택합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닙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죄인으로 이 땅에 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 오래된 구약시대에 다윗은 이미 자신이 죄인으로 출생하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는 끊임없는 죄의 추함과 본성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 죄인이라는 말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먼저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자신들의 전유물처럼 여기면서 교만과 특권의식, 우월감에 사로잡혀 사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너희도 예외가 아니다. 너희에게도 심판이 있다. 너희도 죄인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정말 내 자신이 나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입니까? ‘정말 내가 죄인인가?’ 어떤 분들은 죄인이라고 하면 입으로는 그렇다고 하지만 ‘내가 뭐 남의 것을 도둑질 했나?, 사람을 죽였나? 내가 왜 죄인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죄라는 말,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왜 목사님은 만날 죄, 죄인이라고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성장학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죄에 대해서 말하지 마십시오. 죄인이라는 말을 교인들에게 쓰지 마십시오. 교인들이 싫어합니다.” 여러분!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죄인은 죄인이지만, 나는 그래도 이 사람보다는 좀 나은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옆에 있는 집사님은 나보다 훨씬 죄를 많이 지었다고, 나는 이 사람에 비하면 되게 착하다고, 나는 어렸을 적 문방구에 가서 고무지우개 하나 훔친 적 없다고.’ 이렇게 자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의인이나 위인이나 성자가 존재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죄인일 뿐이다.” 누구든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외가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는데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죄인이 있고, 다른 하나는 내가 의인이라고 하는 죄인이 있다.” 죄인은 죄인이지만 자신을 의인처럼 여긴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말을 입에서 습관처럼 하지만 사실은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니까 그렇긴 하지만 ‘나는 이 사람보다는 낫다.’하고 자신을 위로합니다. 재판정에 한 피고인이 붙들려 왔습니다. 판사가 그의 기록을 보고 이제 그에게 어떤 형량을 선고하려고 준비했습니다. 피고인이 판사에게 선처를 바랍니다. “판사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초범이니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딸린 자식들도 있고, 두 살짜리 어린 아이도 있고, 제가 먹여 살릴 가족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번 한 번만 선처해 주시면 제가 다음부터는 절대 안 그러겠습니다.” 하고 죽을죄를 지었다고 읍소했습니다. 그랬더니 판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 죄는 죽을죄는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교도소에 가서 한 6개월만 반성하고 오십시오.” 그러자 이 사람이 안색이 싹 바뀌었습니다.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6개월이나 살라는 것입니까?”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하지만 ‘진짜 내가 죄인인가?’ 여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 보면 ‘나 같은 죄인, 말할 수 없는 죄인,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라고 고백하지만, 또 그렇게 기도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허물과 흠을 지적하면 안색이 바뀝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 여러분! 죄에는 특성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사도바울이 죄인들이 갖는, 타락한 인간이 갖는 죄의 특성에 관해서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11-12절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먼저는 전적인 무능입니다. 인간은 범죄의 결과로 무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전적인 무능, 무지입니다. 깨닫는 자가 없다, 진리를 깨닫는 자가 없습니다. 우둔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죄가 그를 무지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 말씀하시고 경고하시지만 그들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의 무지함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상을 찾고 있습니다. 진정한 창조주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복 주시는 하나님만 찾고 있습니다. 내가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징계하지 않고 무조건 나를 받아주시는 그런 복 주시는 하나님만 찾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하나님 손에 들려 있는 사탕만 보고 있습니다. 진정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무익한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이 무익이라는 말은 기차가 레일 위를 지나가다 탈선해서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이 바로 무익입니다. 의미 없고 허망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마치 냉장고에 우유를 보관했는데 그 우유가 상해서 먹을 수 없게 된, 쉬어버린 우유와 같은 무익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무능합니다. 또한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TV나 신문을 보면 불우이웃돕기도 하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정말 그 중심의 동기가 순수하냐를 살펴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과시하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게 할 뿐이지 진실로 그 마음속에 긍휼의 마음이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바로 찾지도 못하는 전적으로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13-15절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죄를 지은 인간의 특성은 전적인 부패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부패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목구멍은 다 열려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속에서 더러운 악을 끊임없이 쏟아놓는다는 것입니다. 쉬지 않는 악입니다. 인간들은 깨어있을 때마다 악을 만들어내는 악의 제조 공장입니다. 고대 중동이나 현대 중동에서는 우리처럼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땅에 파고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동굴 속에 시신을 넣고 돌문을 막습니다. 그것이 무덤인 것입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이라는 것은 그 무덤 앞에 막은 돌에다가 회를 칠해서 구별해 놓은 것을 말합니다. 속에는 시신이 썩고 있지만, 밖에는 그럴싸하게 회를 칠해놓은 모습을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장사지내고 돌문을 닫아놓았는데 가끔 탈주범, 도굴범들에 의해서, 또 지진에 의해서 바위가 굴러지는 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동굴 입구가 열려집니다. 그러면 시신 썩는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마치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부패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오늘 성경에서는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라고 말합니다.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입을 열면 늘 거짓말을 상습적으로 말합니다. 오죽했으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번은 거짓말대회가 열렸는데 누가 일등을 했을까요? 자기는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한 사람이 일등을 했다고 합니다. 인간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거짓말을 많이 합니다. 그 속에 악의 본성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혀로는 속이는 것입니다. 또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유순한 말이나 온유한 말, 격려의 말보다는 독사처럼 공격합니다. 그래서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고 찌르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참 부드러운 말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가려고 출발했습니다. 시간이 늦었는데 아이가 자꾸 딴 짓을 합니다. 다른 것을 보고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자꾸 장난치고 하니 엄마가 화가 나서 자신도 모르게 아이에게 하는 말이 “야 이놈아! 지랄 좀 그만해.” 참 좋은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아이를 겨우 달래서 겨우 교회 시간에 맞게 왔습니다. 마침 목사님이 교회 앞에서 교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이가 오니 쓰다듬어 주면서 아이에게 말합니다. “얘야! 집에서 교회까지 오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니?” 이 아이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지랄하고 오면 20분 걸리고요, 지랄 안 하고 오면 10분 걸려요.” 엄마가 한 말을 금방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입에서 선한 말, 부드러운 말 보다는 이런 안 좋은 말을 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찌르는 가시가 있습니다. 칭찬은 하고 격려는 하지만 그 마음속에 독이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잘 되면 진짜 기뻐서 잘 되었다고 기뻐합니까? 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겉으로는 “아이고, 너무 좋다. 너무 잘 되었다. 아들이 잘 되어서 얼마나 좋아?” 속은 질투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꼭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망했으면 좋겠는데, 잘 된 것이 속상한데 겉으로는 그럴 수 없고. 이런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오죽했으면 사촌이 땅을 사면 왜 내 배가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좋아해야 하는데,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또 성경에 보니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입을 열면 남을 향한 저주가 끊이지 않습니다. 중상모략과 험담과 비난의 말이 이어집니다. 앞에서는 비위를 맞춰주고 돌아서면 헐뜯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 된 본성입니다. 또한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고 했습니다. 선한 일보다는 악한 일에 그 발이 빠릅니다. 좋은 일에는 안 갑니다. 그러나 악한 일에는 열심히 갑니다. 인간들의 본성 자체가 악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적인 부패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 마음이 부패해 있는 것입니다. 16-18절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인간들은 죄로 인해 전적인 절망에 빠져있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의 선고를 받고 태어나는 인간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습니다. 땀 흘리고 노력하지만 그 앞에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앞에는 고생길이 훤합니다. 늘 고생하지만 그 고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더구나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가 주는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죄는 결국 인간을 파멸로 인도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온다.”고 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죄인 된 인간들은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파멸의 길이요 심판의 길인 것입니다. 땀을 흘리지만 거기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늘 고생하지만 평강이 없습니다. 전적인 절망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습니까? 이 절망에 빠진 인간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들에게 한 가지 희망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모습을 벌거벗겨놓고 보니 그 몸이 성한 곳이 없습니다. 죄로 얼룩져있고 만신창이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새로운 희망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우리 죄를 자백할 때, 그리고 우리 죄를 낱낱이 주님의 십자가 앞에 고백할 때, 우리는 주님의 보혈로 씻음 받을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은 인간은 다 죄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죄라는 말을 복수로 죄들이라고 쓴다면 21가지 죄의 목록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죄를 단수로 쓸 때는 그 죄의 실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 그 죄를 계속 충동질하고 일으키는 것이 사탄마귀, 악령의 세력입니다. 사탄마귀, 악령의 세력은 계속해서 인간에게 죄를 짓도록 충동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죄를 이기려면 죄의 실체를 이길 수 있는 전능하신 그 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인간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 흘리셨지만 죽은 자 가운데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래서 위대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겁고 큽니까? 이 죄 값을 치르려면 한 사람이 고통 받는 것 정도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그가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런 것으로 볼 때 우리 죄가 얼마나 큰 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행동으로 짓는, 결과를 가져오는 죄가 있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마음으로만 짓는 죄도 있습니다. 마음으로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했다고 했습니다. 형제를 보고 라가라 하는 이미 살인한 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너무나 크고 엄청나기 때문에, 그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 생명을 내어놓고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제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들 앞에서 내 옷을 벗듯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의사 앞에 가서 옷 벗으라고 하면 부끄럽지 않습니까? 속옷만 입고 있으라고 해도 참 부끄럽습니다.
아람의 나아만이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어느 날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온 몸에 진물이 흐르고, 헌데가 덕지덕지 있고 아주 보기 흉악합니다. 그는 자기의 더러운 몸을 숨기기 위해서 더 아름다운 외투로 자신을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가족은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에서 온 한 계집종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가면 엘리사라는 위대한 선지자가 있는데, 그 앞에 가면 우리 주인의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 많은 선물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이 왔을 때 밖에 나아보지도 않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나아만은 분노했습니다. “아니, 적어도 한 나라의 장군이 오면 나와서 영접할 것이지, 상처도 보지 않고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니 말이 되는가.”하고 분노하고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하들이 “더한 일도 하겠는데 이 정도쯤이야 뭐 어렵습니까? 밑져야 본전인데 한 번 해 보시죠?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서 신하들의 말을 듣고 그의 화려한 외투를 벗습니다. 계급장을 떼었습니다. 그의 알몸의 모습은 처절한 문둥병자의 모습입니다.
마치 우리의 죄의 모습이 이 처절한 문둥병자의 모습과 같습니다. 끔찍해서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 근사하게 자신을 치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바로 그런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으로 십자가 앞에 나오십시오. 주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절망에 빠진 죄인입니다.” 이것을 고백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한 절망감에 빠질 때 구원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고 내 능력으로 내 죄를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만이 이 절망에서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만이 나를 이 죄에서 건지실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2절에 보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29절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앞에 나오셔야 합니다.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죄를 고백할 때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될 줄로 믿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너희 죄를 멀리 던져버리신다고 주님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절망에 빠진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오십시오. 주님의 보혈의 강에 나를 던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 죄를 끊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죄인은 죄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없습니다. 오직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실 수 있고 우리의 죄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하고 그분의 은혜의 강 앞에 내 자신을 맡김으로써 오늘 내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받는 축복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인간들이었고, 주께서 죄를 가지고 우리를 상관하실 때 주 앞에 설 수 없는 인생들인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죽게 하시고, 그 흘리신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주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놀라운 축복들을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의 / 롬 3:19-26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 심지어 인터넷 댓글 상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난무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는 이들은 스스로 안티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현상적으로 나타난 기독교의 모습,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습을 비판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독교의 본질까지 비판하며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 안에는 우리도 한때 가졌던 비판의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늘만 바라보는 종교가 아닌가? 그래서 땅의 문제, 현실의 아픔과 슬픔은 망각하고 있지 않은가?” 또는 정반대로, “현실주의에 매몰되어 물질적인 축복만을 추구하는 기복주의적 신앙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하여 적극성을 잃어버리고 수동성에만 멈추어 사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이 자유롭게 된다고 했는데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종교는 아닌가?” “천국이라는 미래를 강조함으로써 현실의 억눌린 삶에는 굴종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그토록 ‘사랑’을 말하면서도 자기와 조금만 다르면 분노하고 미움을 증폭시키는 혐오스러운 종교는 아닌가? 그래서 독선주의적인 양태를 지닌 종교가 아닌가?” 질문들이 나타내는 현상들은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현실 속에서 조금씩 묻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도 ‘저런 신앙을 가지면 안 될 텐데…’라는 마음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가장 신랄하게 철학적으로 비판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혐오주의를 대표하는 19세기 독일 철학자 니체입니다. 니체는 당대의 기독교의 실상 속에 나타난 허상을 보며 “하나님이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갑니다. ‘하나님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인간을 억누르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는 당대의 기독교적 가치관이 붕괴되기를 원했습니다. 니체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그가 말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신이란 창조주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 곧 우상이기 때문에 신을 죽여야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체하려고 하니 무언가 다른 인간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초인’을 등장시키게 됩니다. 핵심은 ‘너 자신을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넘어서서 진정한 인간을 되찾자는 운동이 곧 니체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나는 너희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 자신 속에 있는데, 그것이 초인사상의 핵심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할 때 자연스레 도래하는 허무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그는 초인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초인이 되면 허무주의가 극복될 수 있을까요? 초인이 되면 정말 인간다운 존재가 되는 것일까요? 과연 인간다운 존재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어떤 인간상이 진정한, 올바른 인간상인가를 되묻게 됩니다. 니체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기독교 인간상을, 사도 바울은 이미 이천년 전에 유대주의적인 인간상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도 예수님을 알기 전에 그러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이라고 주장하면서 오만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자신은 우월적 신앙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을 쉽게 무시하고 함부로 정죄하는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율법 아래’에서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여기며 사는 것이 얼마나 독선적인 인간상을 만드는지를 확인했습니다. 바울은 비뚤어진 인간상을 고발합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7장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발견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의 이 고백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신을 직시하면 인간이 곤고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 없는 인간이 허무주의를 피할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별것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넘기 위해 니체는 초인을 만들었고, 지금 사도 바울도 ‘누가 나를 건져낼 수 있을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고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안타까운 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발을 통해 진정한 인간상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9~20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의 공의라는 속성은 반드시 대가를 지불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심판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악인에게는 벌을 주시고 의인에게 상을 주시는 심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뿌린 대로 거두도록 보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반드시 뿌리는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시편 9:8절에도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서게 된다면 과연 희망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서게 된다면 모든 인간은 자기 죄에 대하여 형벌과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 역시 절망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 은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회심하기 이전에 자신의 영적인 고뇌를 떨치고 영혼의 안식을 얻기 위해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서 경건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고 사제들에게 날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열심이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로마서 1: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말씀이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고통스러운 말씀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에 의해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이제는 구원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자기 서재에서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다시 깨닫게 하시는데,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는 말씀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가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완전한 의이고, 이것은 인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것을 예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 1:17절의 말씀이 가장 고통스러운 말씀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말씀이며, 천국의 문을 열게 된 말씀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당시 루터의 서재가 비텐베르크 대학교 탑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 경험을 루터 자신이 ‘탑의 경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위한 공의가 아니라 우리 죄 아래 있는 인간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이며, 이 의가 하나님이 주신 오직 복음에 의해서만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완벽하고 완전하게 다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마음으로나 100% 다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1서 3:15절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마음속에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하는 것이고, 영생도 그 속에 없다고 하나님이 규정하여 주셨습니다. 더불어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부패했다라고 판단하십니다. 예레미야 17:9절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율법과 계명을 지켜서 절대로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지 못하는데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무엇이 죄인지를 알도록 하시고, 율법에 비추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알게 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인간을 동일한 범주로 묶어 나누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별에 따라서 남자라는 인간과 여자라는 인간을 구분합니다. 피부색으로 유색인종과 백인종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또 소유에 따라서 부자와 가난한 자, 학식이 있는가에 따라서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로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의 인간 구분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바울에 따르면 인간은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죄인 된 인간, 그리고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된 인간. 단 두 종류만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을 이렇게 나누며 ‘모든 사람, 모든 믿는 자’라고 합니다. 곧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민도 율법을 가진 자도 이생에서 선하게 산 자나 악하게 산 자도 하나님 앞에 서면 그대로 다 죄인일 뿐입니다. 엄청난 인간 이해 아닙니까? 이러한 이해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이방인도 하나님의 율법을 따랐던 유대인도 다 죄인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서면 자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모두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 보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존재이기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멈춰서야 한다는 말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는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길, 죄인이 의로워지는 길,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는 길, 은혜의 길, 믿음의 길이 열렸다고 말입니다.
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여기 보면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떠나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입니다. 그 길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그동안 다른 길로 가려 했던 인간들의 왜곡된 신앙을 불식시키겠다는 것입니다. 편견의 신앙을 무너뜨리겠다는 것입니다. 나만이 갈 수 있다는 독선의 신앙을 사라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21절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새로운 시대가, 과거가 아니라 ‘이제’ 지금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에 엄청난 전환이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곧 예전과는 다른 극적인 반전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우리말에는 숨겨진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앞에 붙어 있습니다. 원어의 의미를 살려 정확히 번역하자면, ‘그러나 이제는’입니다. 곧 옛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는 표현입니다. 그 새로운 시대는 무엇입니까? ‘율법 외’의 길입니다. 율법으로 구원받는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이라는 것입니다. 곧 율법과는 상관없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구원의 길은 유대인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새로운 길은 구약의 율법인 모세 오경과 예언자들의 말씀을 통해 반복적으로 가르쳐 주신 약속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약속은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모세에게 약속하셨고, 다윗에게 약속하신 메시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메시야를 보내셨고, 그를 믿는 사람들마다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이 놀라운 믿음의 길을 통해서 열린 것입니다. 지식이 있는 자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돈 많은 자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힘 있고 권력을 가진 자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이것도 복음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차별들을 철폐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만이 조건이 됩니다. 남자도 여자도 상관이 없습니다. 많이 가진 자도 적게 가진 자도 상관이 없습니다. 배운 사람도 배우지 않은 사람도 상관없습니다. 어린아이도 어른도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평등의 세계를 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길이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음을 가르쳐 주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로마서 1:17절에 처음 나옵니다. 그의 의를 말하기 위해서 바울은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탐욕스러우며 이기적인지를, 또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이방인이든 똑같은 죄인이라는 이야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에게 열린 새로운 길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로운 길, 하나님의 의를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하나님이 의롭다’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처음에 이 말 때문에 고민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데 나 같은 죄인이 감히 어떻게 그 앞에 설 수 있을까? 부끄러움뿐인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에 다가설 수 있을까?’ 그러다가 로마서를 읽었습니다. 읽고 또 읽으며 묵상했습니다. 그러자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징계하시는 의가 아니라 그런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고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셔서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워주신다는 것을, 곧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깨달으면서 그는 종교개혁의 핵심, 복음의 핵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 개혁이라는 역사의 거대한 변화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새로운 길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인간의 잘못된 편견을 깨뜨리시고, 왜곡된 신앙의 본질을 다시 일깨우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오만한 유대교의 독선주의를 부수셨습니다. ‘우리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다. 우리만이 율법을 가진 자다. 우리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셨습니다. 일종의 편협한 종교성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마치 중독증 환자처럼 종교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이란 유대인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한 보편적 특성을 지닌 것임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기 자랑하는 업적주의적 공로사상을 깨뜨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공로사상에 젖어들면 문제가 생깁니다. 중세 로마카톨릭의 문제가 바로 이 공로주의였습니다. 공로주의에 빠지게 되면 차별을 하게 됩니다. 나는 이만큼 헌신했는데, 나는 이만큼 헌금했는데, 나는 이만큼의 직책이 있는데, 하며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새롭게 여신 길은 이러한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은 어느 누구도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기 연민에 빠져 절망해야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에게는 너 나름대로의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알고 스스로를 귀히 여길 줄 알라. 연민과 절망 속에 빠져있지 말라’며 새로운 인간상을 보여주셨습니다.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이 길이 공짜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길이기 때문에 은혜로, 값없이 받는 선물이며 거저 주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거저 받는 선물을 좋아하십니까? 누구에게나 공짜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게 된다. 네가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고 고백하기만 하면, 이 축복을 너에게 주겠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껏해야 니체의 초인 같은 인간상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초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오는 일이며 엄청난 지혜가 담겨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수동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선물을 주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기독교 복음의 본질은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잘났다고 해서 떵떵거리지 않게 하시고, 반대로 조금 못났다 해도 자기연민 속에 빠지지 않게 하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게 소중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인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오게 된 사람들이 은혜를 경험하며 갖게 되는 정서가 있습니다. 바로 ‘감사와 기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노래할 수 있고, 춤출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인생밖에 없습니다. 죄인인데 죄인임을 모르는 인생, 죄인임을 알고 부끄럽지만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길을 만나는 인생. 이 두 가지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25-26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간과한다는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간과한다는 말은 죄를 사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로마의 법정에서 사용하던 말입니다. 어떤 이가 유언을 하는데, 당연히 언급되어야 하는 한 사람을 그냥 지나쳐버린 것을 말합니다. 간과하심이란 중대한 문제를 제외시키고, 그냥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간과한다는 말은 “넘어간다, 빠뜨리다, 무시하다, 주목하지 않고 통과하는 것을 허용하다, 의도적으로 빠뜨리다”라는 말입니다. 반드시 처벌해야 하는 사람인데,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나온 사람이기에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그분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죄인 사이에 서신 화목제물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죄인을 처벌하셔야만 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곧 피를 흘리는 것이요, 피를 흘리게 하므로 생명을 거두는 것입니다. 생명을 거두실 때에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그 피를 흘리실 때에 의가 충족되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고 인간과 화목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이루시고,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 앞에 선물을 받기 위하여 손을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이루신 그 구원을 저에게도 주옵소서.”라고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의 늪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을 밖으로 내밀고 구원의 손길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를 예배로 초청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를 깨달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인 것을 내가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기로 작정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은 감격을 잃지 말고 예수만이 나의 참된 보화임을 알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차별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차별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차별이 없는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의만을 드러내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세 가지 중요한 질문 / 롬 3:27-31
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완벽하게 옮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언어에는 그 나라의 문화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면서도 ‘시원하다’고 합니다. 이때 시원하다는 말은 영어로 표현이 안 됩니다. 영어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식의 표현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외여행을 다녀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 음식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설명이 안 됩니다. 우리나라에 없는 맛이기 때문입니다. 맛 자체가 우리나라에 없는 맛이니까 그런 맛을 표현하는 단어도 우리나라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그 맛을 표현하려면 우리나라에 있는 단어 중에 그나마 비슷하다 싶은 단어로 표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도 이런 일이 작용합니다. 하물며 하늘에 속한 것을 땅에 속한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믿음’입니다. 믿음은 성경에도 나오는 단어이고 교회 밖에서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믿음은 ‘믿다’의 제1명사형입니다. 국어사전에서 ‘믿다’를 찾으면 ‘마음으로 그렇게 여겨서 의심하지 않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할 때의 믿음은 비단 그런 뜻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제시해야 하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통로입니다. 기독교는 땅에 속한 종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내용을 땅에 속한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통로’를 뜻하는 단어가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믿음’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게 한 후에 구원해주십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여겨서 의심하지 않는 것도 믿음의 한 단면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풍성한 내용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이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알아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고 또한 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경 속에서 일을 행하셨다면 오늘날도 성도들을 위해서도 동일하게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경 안에 기록된 약속을 따라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천국이 있고 영생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은 자기의 경험이나 단지 생각 속에서 ‘그럴 것이다’ 하는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기장 목사인 김진 박사가 쓴 “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라고 질문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책 제목 부터가 상당히 도발적이지 않으십니까? “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 그 책을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는 붕어빵 기독교다.’라고 말합니다. ‘붕어빵 기독교’ 여러분? 한 번 묻겠습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붕어빵 기독교는 ‘예수님 없는 기독교, 예수님과 상관없는 기독교’를 말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이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개독교’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아예 기독교인들이 잘못하면 “개독스럽다.”라고 말한답니다. 오죽하면 “저 사람은 기독교인인데, 사람은 괜찮아!” 뭐 이런 말까지 떠돌고 있겠습니까? 또 그 책에 보면 이런 말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짝퉁 제품이 오히려 진짜 제품보다 더 진짜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제품이 너무나도 정교해서 단속하는 사람들조차도 진짜와 짝퉁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 짝퉁을 만드는 이유는 짝퉁 제품이 진품보다 더 잘 팔리기 때문입니다. 값이 싸고, 구하기 쉽고, 거기다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짝퉁을 진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장사꾼 입장에서는 짝퉁을 파는 것이 진품을 파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짝퉁 예수를 만드는 이유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짝퉁 예수와 그의 말이 지금 기독교인들에게 훨씬 더 쉽게 소화되고, 잘 수용되기 때문은 아닐까요? 한 마디로 교회에서 짝퉁 예수가 훨씬 더 씨알이 먹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그 저자는 “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 반문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어떤 질문을 하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가슴에 와 닿는 질문은 삶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할진대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속에서 로마 교인들을 향해서 정말로 중요한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27절의 “자랑할 데가 어디냐?” 하는 것이고, 두 번째 질문은 29절의 “누구의 하나님이시냐?” 하는 것이며, 세 번째 질문은 31절의 “믿음으로 율법을 파기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첫 번째는 자랑의 질문이고, 두 번째는 인간 차별의 질문이며, 세 번째는 율법 폐지의 질문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고 또 읽어 나가면서 과거에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 가지 질문에 근거해서 로마서 4장부터 8장까지가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4:1-8절까지는 자랑 문제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서 그가 공로를 세운 것이 없는데도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4장 9절부터 5장 마지막 절까지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6장 1절부터는 율법을 폐지하는 문제에 대해서 거론을 하는데 이것이 8장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세 가지 질문은 로마서 8장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아주 중요한 질문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7-28절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첫 번째 질문은 자랑 문제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자랑할 데가 어디냐?” 그렇습니다. 우리 자랑의 근거가 무슨 법의 원리에서냐, 아니면 행위에 근거해서냐 하는 것을 묻고는, 그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인간의 업적 자랑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에, 그런 자랑의 여지는 전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 그런 자랑의 근거를 없애버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가 전혀 새로운 차원, 곧 업적을 세우기보다는 믿는 차원에 들어섰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마약을 계속해서 먹으면 마약 중독이 되는 것처럼, 선행도 계속하면 자기도 모르게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선행에 대한 자랑에서 그치지 않고, 선행으로 구원을 이루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선행 중독입니다. 선을 힘쓰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선행 중독에 걸리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남보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낫다고 생각하면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거칠게 자랑을 하고, 어떤 사람은 세련되게 자랑을 합니다. 후자는 자신의 자랑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오도록 유도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비행기를 타고서 상공에서 보면 집들이 전부 다 성냥갑 같습니다. 제가 한번은 비행기 안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려고 운동장을 내려다보니까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꼭 개미들처럼 보였습니다. 땅에서 하늘로 조금만 올라가도 아이들의 모습이 개미들처럼 보이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에서 보면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이겠습니까? 지구 전체가 초록색의 눈물 한 방울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속에 들어있는 인간들이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것은, 마치 개미들이 서로 자기 발가락이 더 길다고 자랑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또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자랑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예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것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하우스 목사님은 ‘우리 인간들은 사망 지역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해저에서 살고 있고, 어떤 사람은 높은 산 위에서 삽니다. 그러나 어떤 곳에서 살든지 우리들은 사망 지역을 벗어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사망 지역에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이런 사망 지역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기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 구원의 길이 바로 십자가라는 다리입니다. 이 다리를 통과하기만 하면 우리는 생명의 지역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지역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놓으신 다리를 통해서 들어가는 것이기에 아무도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의 다리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생명의 땅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조금이나마 만족시켜 드린 대가로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다리를 놓아,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벗어나 생명의 땅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위험천만한 사고방식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 거룩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작은 지진도 감당 못하고 꼼짝없이 당하고 마는데, 하나님 진노의 손길이 이 땅에 임하게 된다면 얼마나 더 끔찍한 일들이 생기겠습니까? 요한계시록 6장 마지막에 보면, 어린 양의 진노의 큰 날이 임할 것인데 그 날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바위와 산에게 자신을 가려 달라고 절규하는 날이 될 것이라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진노의 심판인 지진이 일어나면 그 누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그 진노를 감당할 사람은 어린 양의 피로 그 옷을 빨아 희게 한 자들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나아온 저와 여러분만이라도 하나님 진노의 날을 온전히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시온산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찬양하는 사람들로 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께 어느 정도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자신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아직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착각하게 되고, 조그마한 선행을 해 놓고도 무언가 성취한 것같이 들떠서 자기 자랑을 하게 되는 겁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것이기에 절대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거꾸러트려 놓고 일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자신의 공로를 전혀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통해서 하시는 그 모든 일은 오로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시기 위함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후서 12:1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늘에 올라간 사실을 말하면서도,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14년 동안 말하지 않고 있다가 그제야 비로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지나치게 생각할까봐 그렇게 행동한 겁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당신이 최고’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될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입니다. 그런 사도 바울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교만하지 않도록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는 전혀 교만하지 않을 사람 같은데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역시 교만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가시인 질병을 주신 겁니다. 그리고 다른 기도는 다 응답하시면서도 건강을 위해서는 사도 바울이 세 번이나 기도했음에도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질병을 평생 동안 제거해 주지 않으신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일을 통해서도 자신이 약할 때 오히려 강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있습니다. 약한 데서 자신이 온전해 진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된 겁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가 교만한 자리에서 살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고난의 끄나풀을 가지고서 당신 자녀를 자신에게로 이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겸손하지 않은 자를 결코 사용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닫고 난 이후에는 차라리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면서 다녔습니다. 그는 박해와 곤란과 고통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약한 데서 온전해 지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계시를 받고도 평소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어 교만을 경계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위대하지도 못하면서도 평소에 교만하게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교만 제어 장치를 과연 어떤 것으로 하셔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자랑하는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 율법의 청진기를 갖다 대시고, 우리는 모두 다 죄인임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이는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의로운 것이 있는 줄 알게 되면 거기서부터 자랑이 나와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게 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한 평생 살면서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만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아예 애시 당초 쐐기를 박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혹시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라는 이 말씀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 말씀의 관계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증거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됩니다. 구원에 이른 믿음의 증거로써 삶의 열매가 맺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크든 작든 선행의 열매가 반드시 나타난다는 겁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생명의 싹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선행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오직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 지역으로 나오게 되면 당연히 선행의 열매를 추구하게 되고, 선행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더 나은 생활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지금보다 도덕적으로 더 나은 곳으로 갈 수는 있지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갈 수는 없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지요. 그러할진대 여기에 우리 인간의 자랑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자랑이 전혀 없는 복음”일진대 이제부터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내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9-30절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두 번째 질문은 차별 문제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누구의 하나님이시냐?” 여러분, 세 가지 질문의 첫 번째는 “자랑할 데가 있느냐?”인데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에 자랑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차별이 있느냐?”인데 칭의에 근거해서는 인간이 차별이 없다는 겁니다. 할례를 받았든 안 받았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에 인간 차별이 전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에게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에 대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할례를 통해서 선민을 만드셨을 때는 그것을 통해 온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마치 자기들이 잘나서 선민이 된 것처럼 할례자와 무할례자를 차별했던 겁니다.
첫 번째 질문에서 다룬 자랑도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있는 문제이지만, 인간 차별도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깔려 있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나라도 여전히 지역감정과 지방색이 퍼져 있으며 학벌 위주의 차별도 만연해 있습니다. 개미 발목 자랑을 왜 그렇게들 많이 하는지요. 별 것 아닌 것 때문에 인간 차별이 왜 이다지도 심한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일도 다 막아 놓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엄연한 현실입니다.(사법고시,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등)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아메리칸 드림의 본거지인 미국에서도 지금까지 흑백 인종 차별이 수시로 일어나서 얼마나 큰 홍역을 앓고 있는지 모릅니다. 몇 년 전 흑인에 대한 차별에 반발해서 백인 경찰관들에게 조준 사격을 가함으로써 백인 경찰관들이 숨지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흑인인 오바마 전 대통령 내외와 백인인 부시 전 대통령 내외가,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의미로 손에 손을 맞잡고 추모식에서 함께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구주로 믿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일진대 그 누구도 차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자녀답게 나부터 이러한 편견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할 때에, 예수님처럼 모두에게 관용을 베푸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31절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세 번째 질문은 율법 폐지 문제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믿음으로 율법을 파기하느냐?” 세 번째는 율법에 대한 겁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은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기에 율법은 필요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오면 이는 잘못된 겁니다. 구원파 이단의 문제도 따지고 보면 믿음이 있으면 율법이 필요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믿음은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의 거울을 우리 앞에 두면 우리 얼굴에 묻은 더러움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더러움을 제거해 주지는 못합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드러내기는 하지만 씻기지는 못하는 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되면, 율법이 파기되지 않느냐는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민수기 15:32절 이하에 보면 안식일에 나무 하다가 잡힌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에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 어떻게 하면 율법이 세워지게 될까요? 범법자를 풀어 주면 율법이 세워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범법자를 풀어주면 율법의 규정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율법을 어겨서 잡혔는데, 풀어 주면 그 율법은 그대로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나무를 한 사람이 앞으로 다시는 안 하겠다고 하면 그 율법이 세워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율법의 규정을 어긴 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앞으로 안 하겠다고 해서 율법을 세워 주지는 못합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누구든지 잡히면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할 것이고, 그러면 다 풀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세우는 길은 율법에 정해진 대로 그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안식일에 나무하면 돌로 쳐 죽이라는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호와의 명령이 세워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어겼을 경우 형별의 집행을 통해서만이 율법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병원에서 하는 검사와 같습니다. 피검사나 소변검사를 정기적으로 자주 한다고 간이나 신장이 좋아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병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확인하려고 합니까? 궁극적으로는 치료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병을 발견하기 못하면 병이 있으면서도 치료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엑스레이를 왜 찍습니까? 이것들은 병을 검사하는 기계지 병을 치료하는 기계는 아닙니다. 율법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엑스레이를 아무리 많이 찍어도 결핵이 고쳐진다던가 부러진 뼈가 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엑스레이를 통해 어디가 어떻게 부러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 거기에 맞게 치료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죽는 순간까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율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신 것도 바로 이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대가로 저주의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이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이 그 근거로 있기에 칭의 교리가 그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칭의 교리가 그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칭의 교리 배후에는 예수님의 율법 완수와 예수님의 대속과 의의 전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셨으며, 우리가 예수님 그 분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그래도 율법의 기능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살아 있어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확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알면서도 육신이 약해서 하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시고, 성령이 우리의 약함을 도우셔서 율법의 요구가 온전히 이루어지게 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칭의 교리는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말이 100프로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 올바로 살아야 할 기준이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율법을 동전에 비긴다면 동전은 스스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금속을 틀에 부어서 만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율법 동전을 만드는 원 틀이 바로 정직, 정의, 진실, 순수, 공평,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율법을 통해서 나타난 겁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율법은 우리가 살아야 할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 율법의 기준 그대로 온전히 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피를 흘리시고 구원을 완성해 주셨으며,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고 살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해 주심으로,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닮은꼴로 점점 더 변해져 가고 있는 겁니다. 이를 우리는 성화의 삶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았다면, 이제는 우리의 삶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답게 예수님만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높일 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오직 하나님만 높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시기 바랍니다. 참사랑과 율법의 종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어떤 경우에도 전혀 차별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끝까지 완성해 나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길 원하고 애쓰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그 누구보다도 죄를 멀리하고, 그 죄와 싸워 하나님이 주시는 그 승리를 얻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참된 믿음은 율법을 폐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며, 또한 하나님의 의도대로 하나님의 법을 능히 지킬 수 있도록 우리를 견고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