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울
- 김선우
새벽에 일어나 오줌을 누다
한 방울
오줌방울의 느낌
물은 빠져나가니까
몸에 갇히지 않으니까
어디서든 기어코 흐르니까
가두는 자가 아니라
흐르고 빠져나가는 자를 맡은
저 역할이 마음에 든다…… 중얼거리며
문득 적는다
물로 태어나리라
처음은 비
입술로 스며 그대 몸속
어루만져 속속들이 살린 후
마침내 그대를 빠져나가는
너라는 꽃을 지우기 위해
- 배영옥
언젠가 목구멍 저 깊은 곳에 숨어있는 성대를
내시경 화면으로 본 적이 있다
어두컴컴한 목구멍 안쪽에서 소리가 되어 나오려고
파르르 떨고 있는 성대는
아주 작고 연약한 꽃잎이었다
내 손으로
눈 닫아걸고 귀 닫아걸고 입 닫아걸고 십년이 지났지만
너는 아직 내 안에 있었다
질문 없는 대답처럼
너는 꽃이 되어 있었다
너라는 꽃을 지우기 위해
나는 얼마나 긴 침묵과 싸워야했던가
스스로 씹어 삼킨 가시는
또 얼마나 깊이 폐부를 찔러댔던가
고통의 축제*는 끝이 없고
나는 얼마나 더 붉은 입술을 깨물어야하는지
또 얼마나 오래 숨죽여야하는지
목구멍에 핀 저 꽃에게 묻는다
*정현종의『고통의 祝祭』에서 따옴.
시집『뭇별이 총총』실천문학 2011
- 대구 출생. 계명대 대학원 문창과 졸업
1999년『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꽃 내장탕
- 유미애
홀딱 넘어갔단 말이지
헤시시 옥문이 열리더란 말이지
마당에서 졸던 너구리가 샤랄라 항문을 부풀리는데
나는 울컥 육욕을 느껴
홍릉식당 마루에 앉아 매운탕 한 그릇과 천국天菊 몇 잔을 비웠지
고개를 들면 물고기 떼가 주홍빛 지느러미를 치고
화부花夫의 자전거는 취한 바다를 건너가는데
그의 등 뒤에 앉아 나는 귀신고래의 피리 소리를 듣는데
석쇠 위에선 한나절 꽃의 일대기가 구워지고
너구리의 그물에는 나비들이 붕붕거리는데
묵묵한 나무의 애가 탕 속에서 끓어 넘치는데
꽃의 내장이 질기더란 말이지
말캉말캉 넘어올 듯하다가도 뿌리를 물고 늘어지고
배를 뒤집은 꽃잎이 하르륵, 또 별안간 떨어져내려
무심한 고래는 나를 홀려놓고 가더란 말이지
수십 년 졸아든 내 눈물도 비리고 싱겁더란 얘기지
그렇게 피리 소리도 없이, 위태로운 가랑이 사이
멀건 꽃을 피우고 있더란 말이지
시집『손톱』문학세계사 2010
- 경북 문경 출생.
2004년『시인세계』신인상 등단
2009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비 오는 드레스 히치하이커
- 김선우
비가 내린다 오늘은 (죽은 門이 생피를 흘리듯)
유적에 남겨진 문장을 읽는 달빛
빗줄기는 말랐구나 아, 나는 빗소리처럼 비만하구나
오래 기다려도 차는 오지 않고
핏대를 세운 발꿈치를 들며 비 오는 오늘은 박물관에 갔네
세상 어디나 있는 식기들(한참 들여다보면 우스꽝스러워지는,
더 한참 들여다보면 슬픔이 자글거리는)
총칼들 갑옷들 각종 서류들 인장들
목 없는 마네킹에 입혀진 화려한 실크 드레스
아아 추워라, 우리의 고향은 정거장
오늘의 권력자에게 이 질긴 드레스를 보여주고 싶네
당신이 죽은 아주 오랜 후에도 우향우 좌향좌 기립해 있을
당신의 드레스
서성이고 서성이며 서성이는 드레스
(당신이나 나나 참,)
비 오는 날의 박물관 100년 간격으로 늘어선 방들
서성이다 지쳐 빗소리에 열쇠를 꽂는다
(정거장엔 빈 무덤들,
100년의 정거장에서 다음 정거장으로 떠도는
텅 비어 질겨진 드레스들 앞에서
윙크하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누군가)
이봐, 나 본 적 있지?
빗줄기는 저렇게 가는데
젠장, 빗소리는 왜 이리 질긴 거야,
두 생애나 밀린 급료를 어디서 받으라고!
박물관 지붕으로 쏟아지는 마른 빗줄기
헤치며 헤드라이트 불빛이 잠깐 멈추었다 떠난다
투명한 두터운 슬픈 몸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