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생애
1879년 9. 2. 황해도해주 광석동 안태훈과 조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남(아명 응칠)
1885년(07세)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
1894년(16세) 황해도 재령 출신의 김아려와 결혼
1897년(19세) 천주교에 입교하고 발렘 신부로부터 토마스로 세례를 받다.
1902년(24세) 장녀 현생 출생
1905년(27세) 일제가 조선 침략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중국으로 이주하기
위 하여 상해와 산동반도 일대를 살펴보고 12월에 귀국하다.
부친 안태훈 별세, 장남 분도 출생
1906년(28세) 3월에 진남포로 이사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운영하여 구국 영재 양성에 전력하다.
1907년(29세) 국채보상회 관서지부를 설치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다.
일제가 고종을 퇴위시키고 대한 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자 국외에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하여 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에서 활동
차남 준생 출생
1908년(30세) 국외 의병부대 대한의군을 조직하여 참모중장의 직책을 맡아 국내 진공
작전을 도모하다.
7월에 3백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홍의동과 신아산 부근으로 진공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나
화령 영산에서 중과부적으로 일본군에 패퇴하다.
1909년(31세) 3월. 블라디보스톡 연추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단지동맹으로 동의단 지회를 조직하다.
3월21일. 해조신문에 인심을 단합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길을 논한 [인심결합론]을 발표
-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를 파괴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 응징하고
대한제국 만세를 삼창한 후 러시아 헌병에 체포되다.
- 10월30일 일본 검찰관의 심문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상 15개 항목을 열거하다.
- 11월3일 여순 감옥에 수감되다.
1910년(32세) 2월14일. 여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되다.
- 3월15일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탈고하다.
- 3월26일 여순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다. 미완성의 [동양평화론]을 남기다.
첫댓글 뮤지컬 '영웅'의 주제곡을 배경음악으로 넣다가 알게 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