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사표(師表)
누구나 태어난 고향에 대한 애정을 품고 살아간다. 문화예술을 논하면서 “가장 한국적(혹은 토속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종종 국내 여행을 했어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아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지만 전국에 명승지와 인물이 많았음을 알 수가 있다.
이번에도 동생부부와 함께 2박 3일간에 걸쳐 「장수」와 「무주」 그리고 「거창」과 「함양」, 「남원」을 한 바퀴 돌았다. 지리산을 둘러싼 주변의 풍광과 인물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의 시간이었다. 예전에 「함양」지역의 남계서원(灆溪書院 :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과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을 모신 청계서원(靑溪書院)을 둘러보아 이 지역이 훌륭한 유학자의 산실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산청」에서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산천재(山天齋)와 성철 스님의 생가를 구경하였다. 특히, 「남명」의 제자들이 임진왜란 시 의병장으로 큰 기여를 하였다. 첩첩으로 쌓인 깊은 산골의 지리산 자락에서 이 나라를 빛 낸 큰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것이다.
먼저 「장수향교」를 찾았다.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향촌을 교화하고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일종의 국립학교이다. 이곳에 훌륭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마다 이들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낸다. 또한 이곳에서는 유교 경전을 읽고 해석하는 방법과 시문(詩文)을 짓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곳에 위치한 『정충복비(丁忠僕碑)』는 정유재란 때 「장수향교」를 지킨 「정경손(丁敬孫)」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846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왜적이 향교에 불을 지르려하자 이곳을 지키던 그가 ‘여기는 성전이니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들어가려거든 나를 죽이고 들어가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의 기개에 감동한 왜장은 「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 :이 곳은 성스러운 곳이니 침범하지 말라)」라는 글씨를 써주고 물러났다고 한다. 다른 지역의 향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지만 「장수향교」는 살아남았다. 이후 「장수향교」는 사라진 다른 향교를 지을 때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논개(論介)」의 사당과 생가를 들렸다. 일찍 아버지의 사망으로 숙부가 민며느리로 이웃 마을에 팔면서 후에 장수 관아에서 재판을 받으며 만나게 된 사람이 「최경회(崔慶會)」현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최경회」」의 소식을 접하고 진주성에 들어갔다. 「최경회」는 의병을 이끌고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나, 다음 해에 10만 왜군의 공격으로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7만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최경회」, 「김천일(金千鎰)」, 「고종후(高從厚)」등은 진주성 함락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이 때 이들은 북향 사배(四拜) 후 절명시를 남겼다.
촉석루 위 삼장사는
술 한 잔을 들고 웃으며 남강을 가리키노라.
남강 물 도도히 흘러가노니
저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이 혼도 죽지 않으리.
왜군이 전승 축하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논개」가 매혹적인 차림으로 바위에 오르니,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合村六助)」가 다가왔다. 「논개」는 양 손에 낀 가락지를 이용하여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 순절하여 「최경회」를 따랐다. 이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이름 짓고 또한 「의암」을 「논개」의 호(號)로 삼았다.
천재 시인으로 기행을 일삼던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는 「논개」를 노래했다. 『명정(酩酊) 40년』이란 수필집으로 유명한 술의 대가이며 시인이자 영문학자로 부천(옛 지명이 樹州)에 동상과 「수주문학관」이 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높게 흔들리우며/그 석류(石榴)속 같은 입술/죽음을 입 맞추었네!/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길이길이 푸르리니/그대의 꽃다운 혼(魂)/어이 아니 붉으랴./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장수」는 「건재 정인승」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기념관이 있다. 그는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반발하여 우리말과 글을 지킨 한글학자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고 한글학회를 이끌면서 『큰 사전』을 편찬, 발간하고 많은 후학을 양성한 학자이면서 애국지사였다. 그는 “말과 글을 그대로 지니고 지켜가고 있는 민족은 비록 남의 민족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지언정 언젠가는 독립이 되어 제 나라를 울 수가 있되 말과 글을 잃게 되면 그 나라 그 민족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라고 하였다.
이어 「무주」로 방향을 돌려 적상산(赤裳山)을 찾았다. 정상에 있는 안국사(安國寺)에 이르는 꾸불꾸불한 산길은 주변의 단풍을 감상하는 이 시절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이다. 더구나 사찰에서 내려다보이는 산허리에 붉고 아름답게 형형색색으로 물들어가는 단풍은 그야말로 선계(仙界에 와있는 느낌을 주었다. 마침 석양으로 물들어가는 태양과 더불어 환상적인 풍광이었다. 하산 길에 조선시대에 실록과 의궤를 보관하던 사고지(史庫址)를 구경하였다. 서적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새로 옮겨지은 건물만 보존되어 있다.
다음 날 덕유산의 향적봉(香積峯)에 올랐다. 켜켜이 동심원을 그리며 끝도 없는 준봉들이 늘어서 있는 장관을 구경하였다. 마침 날씨도 쾌청하니 저 멀리 가야산, 비계산, 천왕봉과 반야봉, 마이산, 대둔산과 계룡산이 가물거린다. 이처럼 한 곳에서 명산을 관람하기란 마치 록키산맥에서 준봉을 구경하던 바로 그 기분이었다. 다만 몇 군데라도 만년설이 쌓인 절경을 연출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미련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거창」으로 들어가 찾은 곳은 수승대(搜勝臺)였다. 「거창」의 명승으로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 넓은 화강암 암반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원래 이곳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관계로, 신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이 수심에 차서 송별하는 곳이어서 수송대(愁送臺)라 불렸다고 한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수승대(搜勝臺)로 그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거북바위를 중심으로 암반 위를 흐르는 물과 숲이 어우러져 빼어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어 마치 수채화를 보는 듯 아름답다.
멋진 경관에 취해 머물다가 찾은 곳은 조선의 성리학의 대가인 「일두(一蠹) 정여창(丁汝昌)」 선생의 생가가 있는 「함양」의 「개평한옥 마을」이었다. 충효의 모범을 보인 학자답게 그 후손들도 대를 이어 충신과 효자를 배출하여 솟을 대문에는 충효전가(忠孝傳家)를 상징하는 5개의 정려패(旌閭牌)가 걸려있다. 이 마을에는 「오담고택」, 「풍천노씨 대종가」, 「노참판댁 고가」, 「하동 정씨 고가」 등이 보존되어 있는데 홈스테이가 가능한 곳이라 옛 선비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남원」에서 쉬고 3일차에는 먼저 「실상사(實相寺)」를 찾았다. 생각보다 넓은 곳에 위치한 이 사찰은 구산선문 중 최초의 선종(禪宗) 사찰이다. 주변의 넓은 사찰의 토지를 직접 가꾸어 필요한 식재료를 조달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삼층 석탑」과 큰 규모의 「석등」 그리고 「철조여래좌상」 등이 유명한 곳이다. 신라 시대에 건립한 곳으로 지금은 사세가 많이 기울어 옛 영화는 자취만 남아 있다. 9층탑의 기단 규모를 봐도 엄청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어서 다시 「함양」으로 넘어가 찾은 곳이 「벽송사(碧松寺)」이다. 역시 생각 이상으로 주위가 깊은 숲으로 가려진 장소였다.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이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고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사찰이다. 안타깝게도 빨치산이 야전병원으로 이용하던 곳으로 불에 타 전소하고 이후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뒤편의 산자락에는 300년이 넘은 두 그루의 노송이 오늘도 말없이 과객을 내려다보고 있다. 「벽송사」의 입구 부근에 있는 「서암정사」에서 보는 산자락의 전망도 천하의 명승지이다.
다시 돌아 나와 「뱀사골」의 단풍과 「마한」의 궁전이 있었다는 「달궁 마을」을 구경하고, 「정령치(鄭嶺峙)」에 올라 한 눈으로 지리산의 전망을 바라보았다. 지척인 듯 가깝게 보이나 오르고자 하면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운봉」에 있는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였다. 고려 말에 횡포를 부리던 왜구를 토벌한 곳으로 「이 성계장군」과 「이두란(李豆蘭)」이 적장인 「아지발도(阿只抜都)」를 죽인 「피바위」가 바로 인근의 개울가이다. 선조 때 세운 비(碑)를 일제 강점기에 왜인들은 글씨를 정으로 쪼아 없애고 땅 속에 파묻었다. 해방 이후에 이 깨어진 비석을 캐내어 파비각(破碑閣)을 세웠다.
주변에는 동편제(東便制)의 가왕(歌王)인 송흥록(宋興祿)과 국창(國唱) 박초월(朴初月)의 생가가 있다. 당시 민초들의 애환을 담아 낸 명창들의 빼어난 솜씨가 오늘 날 세계적인 한국가요의 열풍을 일으킨 원조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고 보니 과거 왜인(倭人)에게 맞서 결사적으로 항전한 인물의 행적을 돌아본 셈이다. 이들은 아무리 짓누르고 핍박을 가해도 우리의 혼을 지켜낸 ‘겨레의 사표’였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역시 금수강산다운 절경이 있고, 고향과 나라를 빛 낸 백성들의 이야기가 전한다. 무엇보다 무명의 민초들이 들고 일어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고 왜적과 대결한 그 저력에 새삼 전율을 느낀다. 정치가는 얼마든지 외교적인 언어를 구사하여 고도의 균형외교를 할지라도 일반 백성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명이 있다. ‘치욕의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2023.11.3.작성/11.7.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