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안녕 아무꽃이나 보러 가자
이서영
나는 사람보다 꽃이 많은 시절에 살았는데
꽃을 보러 간 날을 달력에 표시해 두었다
함께한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꽃에 붙여 주면
전생에 내가 잃었거나
낳았던 아이들 이름인 것 같다
은목련이거나 백동백, 류장미, 진모란
가만가만 불러 보면
떠나 버린 사랑이 서둘러 돌아올 것만 같아
절대 미치지 않겠다
진달래 골담초 사루비아 같은 것을 똑똑 따 먹으며
배가 사르르 아파 오고
가끔 예상치도 못한 꽃이 덜컥 피어나
얼마 머물지 않고 또 떨어졌다
세량지(細良池)
나무가 물에 잠겨 있었다
무엇에 잠겨 산다는 것
물이라서
좋았다
다행이잖아 봄이라서
수온이 적당하기를
비가 저수지에 떨어질 때 네가 우산을 꺼냈다
둑방길을 걸으려 할 때 막
비가 와서
좋았다
우산이 커다랗고 동그랗고 펼쳐지고
자리가 생겨
나는 가방을 오른 어깨에 옮겨 멨다
왼손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둘 곳 없는 손이 하릴없이
흔들 흔들
저수지 안을 오래 기억하는 나무들
연둣빛으로 흔들리는 표정
두근대는 빗방울
나무를 더 자주 더 멀리 보냈다
흐려지는 물속을 들여다보며
비가 한참 오려나 봐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보았다
차가운 살
너는 내 손바닥 안의 비를 만져 보았다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무들이 더 빠르게 흩어지고
#이서영 시인 # 시집 《안녕 안녕 아무 꽃이나 보러 가자》 # 전남 해남
첫댓글
가장 먼저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변명을 올립니다.
이런 일이 불쑥 내 앞에 펼쳐질 때가 가장 난감합니다.
잊어서는 안되지만, 나도 모르게 이것 저것 시집들을 들추다 보면
너무도 낯설고 일면식도 없는 시인의 소중한 시집이 서가에 있습니다.
얼마나 인간적으로 같이 시를 쓰는 처지에서,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야 되겠는가를 다시 반성하면서,
저 자신을 되돌아 봅니다.
이서영 시인님의 꼭꼭 눌러쓴 시집 속 싸인본을 이제야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