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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형제
그로부터 백년 후, 곧 영적 암흑시대에 휫필드(Whitefield)와 웨슬리(Wesley) 형제는 하나님의 빛을 전하는 사람들로 나타났다. 당시의 영국 사람들은 국교회(國敎會)의 통제 아래 이교도와 거의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종교적으로 쇠퇴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성직자는 자연 종교를 즐겨 연구하였으므로 그들의 대부분의 신학은 그런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상류 계급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냉소하였고, 소위 그들이 광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위에 있다고 자랑하였다. 하류 계급은 심한 무지 상태에서 부도덕에 빠져 있었다. 그와 반면에 교회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진리의 사업을 지탱할 힘이나 믿음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루터가 그렇게도 분명히 가르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는 이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로마교의 교리가 그 대신 자리를 차지하였다. 국교회의 교인이었던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찾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경건한 생활과 종교적 의식을 모두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한 번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가 병이 들어 죽음이 다가오는 것처럼 생각되었을 때, 그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무엇에다 두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나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다”고 대답하였다. 그 질문을 한 친구가 그 대답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나의 노력이 소망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못 된다는 말인가? 나의 노력을 하나님께서 절취하신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달리 신뢰할 만한 것이 없다”(John Whitehead, Life of the Rev.John Wesley, p.102). 그와 같이 짙은 암흑이 교회를 덮고 있었으므로, 속죄를 가려 버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빼앗고, 사람들의 마음을 구원의 유일한 희망, 곧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의 피에서 떠나가게 하였다.
웨슬리와 그의 동료들은 참된 종교는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은 말과 행동에는 물론이요, 생각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외부에 나타나는 행위의 바름뿐 아니라 마음의 성결이 또한 필요한 것을 확신하였으므로 새 생애에 들어가기를 힘썼다. 그들은 가장 근면하고 경건한 노력으로 그들의 육신적 마음의 사악함을 극복하고자 애를 썼다. 그들은 극기와 박애와 겸비의 생애를 살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게 해주는 성결, 곧 그들의 가장 열망하는 것을 얻는 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방법을 매우 엄밀하고 정확하게 준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였다. 정죄의 상태에서 놓여나고 죄의 세력을 깨뜨리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허지로 돌아갔다. 그것은 바로 루터가 에르푸르트의 외로운 방에서 경험한 것과 똑같은 투쟁이었다. 그것은 그의 심령을 괴롭게 했던 문제, 곧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고 한 바로 그 문제였다.
개신교의 제단에서 거의 꺼져간 거룩한 진리의 불꽃은 보헤미아의 그리스도인들로 말미암아 여러 세대 동안 전하여 내려온 고대의 횃불로부터 다시 밝혀져야 했다. 종교개혁 후에 보헤미아의 개신교는 로마의 세력에 여지없이 짓밟혔다. 그리하여 진리를 포기하기를 거절한 모든 사람들은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의 더러는 작센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거기서 옛날의 신앙을 보전하였다. 웨슬리와 그의 동료들이 진리의 빛을 받은 것은 바로 이 그리스도인들의 후손으로부터였다.
미국으로 가는 배에서 생긴 일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는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선교 사업을 위하여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모라비아 교도들과 일행이 되어 배를 타게 되었다. 그들은 항해 중에 심한 폭풍우를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웨슬리는 그 때에 아직 자기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의 보증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자기가 맛보지 못한 신뢰와 평안을 그 독일인들은 나타냈다.
그는 말하였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들의 진실한 태도를 관찰하였다. 그들은 다른 여객들을 위하여 영국 사람은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아니할 비천한 일들을 함으로 항상 겸손의 증거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일에 대하여 아무런 보수도 원치 아니하였고, 그것은 자기들의 교만한 마음을 위하여 유익한 것이라고 하며 그들의 사랑하는 구주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더욱 큰 일을 행하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매일 어떠한 장애를 만날지라도 거기에 동요되지 않는 유순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만일 밀침을 당하든지, 매를 맞든지, 넘어뜨림을 당하게 되면 그들은 다시 일어나서 가 버릴 뿐이요, 한 마디의 불평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교만과 분노와 복수의 정신에서는 물론이요 공포심에서 놓여났는지의 여부를 시험해 볼 기회가 왔다. 그들이 언제든지 예배를 시작할 때에 시편을 송영하던 그대로 시편을 읽고 있을 때 바다가 거칠어지고, 큰 돛이 찢어지고, 파도는 배를 삼키려는 듯이 간판 위를 휩쓸었다. 이때에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떠들고 부르짖는 소리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 독일인들은 조용히 송영을 계속하고 있었다. 후에 나는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당신들은 무섭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또 ‘그러나 부인들과 아이들은 무서워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아니요, 우리의 부녀들과 아이들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고 대답하였다”(John Whit-ehead, Life of the Rev.John Wesley, p.10).
사반나(Savannah)에 도착한 후, 웨슬리는 얼마 동안 그 모라비아 교도들과 함께 지냈는데, 그들의 그리스도인적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생명이 없는 형식적인 영국 교회와는 현저하게 다른 그들의 예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매우 단순하면서 엄숙한 그 예배는 모두 나로 하여금 1700년의 시간적 거리를 잊어버리게 하고 형식과 의식은 없을지라도 천막 제조자 바울과 어부 베드로가 지도하였지마는 성령과 능력이 나타났던 당시의 어떤 회집에 참석한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하였다”(John Whitehead, Life of the Rev.John Wesley, pp.11, 12).
웨슬리의 회심 전후 영국으로 돌아오자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의 전도자의 교훈 아래 성경상 신앙을 더욱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자기의 행함을 의지하던 것을 모두 버리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온전히 신뢰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런던에서 있은 모라비아 교도들의 한 집회에서 하나님의 영이 믿는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여 변화를 일으킨다는 내용으로 된 루터의 글이 낭독되었다. 그 말을 듣자 웨슬리의 마음속에는 신앙의 불이 타올랐다. 그는 말하였다. “나는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때에 한 가지 확증 곧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심지어 내 자신까지도 제거해 버리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여 주신 데 대한 확증을 얻었다”(John Whitehead, Life of the Rev.John Wesley, p.52).
괴롭고 쓸쓸한 고투의 긴 세월, 엄격한 극기와 자책과 겸비의 긴 세월을 통하여 웨슬리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한 가지의 목적에 굳게 사로잡혀 있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기도와 금식과 자선 사업과 자기희생으로 얻으려고 애쓴 은혜가 실상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임을 깨달았다.
일단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굳게 서자 그의 온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관한 지식을 어느 곳에든지 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불탔다. 그는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지방에서든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나의 본분이라고 생각한다”(John Whitehead, Life of the Rev.John Wesley, p.74).
그는 엄격한 극기의 생애를 계속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신앙의 근거가 아니고 결과였으며 성결의 기초가 아니고 열매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기초이며, 그 은혜는 순종으로 나타날 것이다. 웨슬리의 생애는 그가 받은 위대한 진리, 곧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새롭게 하는 능력,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 생애에 이루어지는 열매 등에 관한 진리를 전하는 일에 바쳤다.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는 자기들의 소망 없는 상태에 대하여 오랫동안 심각하게 느낌으로써 그들의 사업을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그들이 대학 시절과 전도 사업을 착수한 당시에 받은 멸시와 조롱과 박해의 격렬한 시련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군병으로서 어려움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그들과 그들에게 동조했던 소수의 다른 사람들은 경건치 않은 동료 학생들로부터 메소디스트(Methodists - 규칙 준수자)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칭호가 영국과 미국에서 가장 세력 있는 교파의 하나로 명예로운 이름이 되었다.
웨슬리와 하나님의 기적적 보호 그들은 영국 국교회의 교인으로서 그 교회의 예배 형식에 매우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더욱 높은 표준을 그들에게 제시하셨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전하라고 그들을 강권하셨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권능이 그들의 활동에 함께 하였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였다. 그리하여 그 양들을 약탈하려는 이리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새로운 교파를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감리교(Methodist Connection)라는 명칭으로 한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그 전도자들은 국교로부터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심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 국교 자체에서 개혁을 일으키는 사건들이 일어나게 하셨다. 그것이 전혀 외부로부터 왔었더라면 그것은 그것을 매우 필요로 하는 내부에까지 침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흥을 주장하는 전도자들은 교인들이었으므로, 기회만 얻으면 교회의 내부에서 일을 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방법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문들을 통하여 진리가 들어가게 되었다. 어떤 성직자들은 도덕적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서 자기들의 교구에서 열렬한 전도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형식주의로 마비되었던 교회들이 생기를 되찾았다. 웨슬리의 시대에 있어서는 각 시대의 교회 역사가가 실증하는 바와 같이 각각 같지 않은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이 맡은 직무를 감당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들은 모든 점에 있어서 일치되지는 않았으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을 받고 있었으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목적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와의 견해 차이는 한 때 서로 분리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온유를 배웠으므로 상호간의 인내와 사랑으로 화목해졌다. 오류와 불법이 도처에 충만하고, 죄인들이 멸망으로 빠져가고 있는 동안 그들은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종들은 험한 길을 걸었다. 세력 있고 학식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대적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얼마 후에는 많은 성직자들이 분명한 적의를 나타내었고, 순결한 믿음과 그 믿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교회의 문들을 닫아 버렸다. 강단 위에서 그들을 비난하는 성직자들의 행동은 암흑과 무지와 불법을 자아내는 요소가 되었다. 여러 번 존 웨슬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이적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격노한 폭도의 무리가 그를 습격하여 피할 길이 없는 듯이 보였을 때 사람의 모양을 한 천사가 그의 곁에 나타났다. 그러자 폭도들은 물러가고, 그리스도의 종은 그 위험한 장소에서 무사히 피해 갔다. 격노한 폭도들에게서 건짐을 받은 경우들 중의 한 가지에 대하여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길을 통하여 걸어 내려가고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아래로 떨어뜨리고자 애를 썼다. 만일 내가 일단 넘어졌을 것 같으면, 아마도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비틀거리거나 미끄러지지 않고 완전히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나의 칼라와 옷을 붙잡고 넘어뜨리려고 애를 썼으나 그들은 결국 단단히 붙들 수 없었다. 오직 한 사람이 나의 호주머니 뚜껑을 단단히 붙잡았는데 그 부분만 그의 손에 뜯겨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른 쪽 호주머니에는 은행 수표가 들어 있었는데, 주머니 뚜껑의 절반만이 찢어지고 말았다. …바로 내 뒤에 있던 건장한 사람이 큰 참나무 몽둥이로 나를 여러 차례 때렸다. 그가 만일 그것으로 나의 뒤통수를 때렸던들 나는 그만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때릴 때마다 그 몽둥이는 빗나갔다. 나는 그 때에 좌로나 우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었다. 또 한 사람이 군중을 헤치고 달려와서 주먹으로 나를 후려쳤다. 그러나 그의 주먹은 겨우 나의 머리를 조금 스쳤을 뿐이었다. 그는 ‘이 사람의 머리칼이 어찌 이렇게도 부드러울까’라고 말하였다. …바로 처음으로 회개한 사람들은 그 시가의 깡패 두목들이며,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시끄러운 사태가 생길 때에 돈을 받고 싸우는 일을 지금껏 해오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준비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부드러운 방법을 사용하시는지! 2년 전에는 한 개의 벽돌 조각이 나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후 1년이 지나서는 돌이 나의 양미간을 맞혔다. 지난달에는 한 번 매를 맞고 오늘 저녁에는 성에 들어오면서 한 번, 나가면서 한 번, 두 번을 맞았으나 모두 아무런 일이 없었다. 한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서 나의 가슴을 쳤고, 또 다른 사람은 피가 쏟아지리 만큼 힘 있게 나의 입을 쳤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것에 대하여서도 다만 볏짚으로 나를 치는 정도 이상의 아픔은 느끼지 않았다”(John Wesley, Works, Vol.3, pp.297, 2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