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가 그 경제적 지배를 어떻게 하고 있으며 또 얼마나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려면, 산업화의 시기와 세계 경제로의 편입 시기를 어떻게 맞추는지를 보면 된다. 일반적으로 특정한 정책들과 경제 전략의 성공 등은 정치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즉, 경제 발전은 정치의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고, 사회의 여러 그룹들 사이에서 자원과 기회가 분배될 때의 폭넓은 변화를 좌우하며, 한 나라의 국제적 지위에 영향을 준다.
이 장에서는 영국의 '경제 운영의 정치학'을 분석하며, 그 나라의 '자유방임적 접근'의 함의를 고찰하려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영국의 경제발전과 전후 정착(settlement)의 경험을 역사적으로 개괄하고, 그 나라의 경제 운영의 원칙과 경제발전의 사회적 결과들 및 국제경제 질서에서 영국의 지위가 갖는 정치적 영향 등을 살펴본다.
전후 정착과 그 이후
영국의 전후 정착의 성쇠를 이해하고 경제 운영에 대한 동시대의 논쟁을 다루기 위해서는, 우선 영국의 경제적 성취(performance)에 대한 역사적인 궤적을 분석해야 한다. 최초의 산업 국가인 영국은 또한 가장 긴 경제 침체를 경험한 나라이며, 자신의 성공과 경제발전 방법으로 인해 오히려 희생을 감수하게 된 나라다. 18세기 이후로 영국은 막강한 해군력과 산업 혁명을 통해 제국으로서의 이점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이점을 바탕으로 국제 영역에서의 자유무역 및 국내에서의 무간섭주의라는 신념을 견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산업 공장시설의 현대화에 대한 투자가 적었고, 카르텔과 트러스트 등을 통해 효율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이 때문에, 영국은 기술혁신, 국내 제조업 투자, 생산시설 규모 확충 등의 주요 부문에서 경쟁국들에게 뒤쳐졌다.
1890년대, 영국의 19세기 주요 수출 산업이었던 섬유(textile)산업이 뒤쳐지게 되었고, 영국이 우월함을 유지하고 있던 공작기계 산업 역시도 급격히 붕괴하고 있었다. 철강생산 부문은 당시에 경쟁력의 주요한 지표였는데, 이 부문에서 독일과 미국은 영국을 따라 잡았으며 그 차이는 더욱 벌어졌다. 이처럼 한 세기가 넘게 영국은 이러한 경제침체("영국병"이라고 부른다)의 문제에 직면해 왔다. 20세기에 들어서, 영국 정부의 정치적 운명은 불충분한 대안적 처방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게 되었다.
간섭주의 국가(interventionist state)는 1차 세계대전 기간에 산업을 통제함으로써, 양차대전 사이에는 산업을 적극적으로 관리함으로써 발전하였고,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국가는 케인즈주의적 특징을 갖고 있다. 케인즈주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즉, 국가 예산 적자는 수요를 팽창하기 위해 사용되며, 경제가 나쁠 때는 소비와 투자를 증가시키게 된다. 정부지출의 삭감과 신용 및 재정의 긴축 등은 수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용하는데, 높은 성장이 물가인상이나 국제수지(payment balance)의 적자를 가져올 때 사용한다. 이렇듯 팽창적 경제 운영과 복지 제공이라는 새로운 의제는 케인즈적 (복지)국가의 특징이며, 전후 정착의 시기를 거치면서 정부의 정책을 감독하게 되었다.
전후 질서의 처음 20년 동안에, 영국은 다른 유럽의 산업 민주주의 국가들과 매우 우호적인 경제적 조건들을 공유했었다. 노동 생산성의 증가는 국내 투자율을 촉진하였고, 낮은 실업률과 점진적인 경제성장을 향유했다. 양차대전 사이의 시기와 비교하면 영국의 전후 경제 성장률은 2.8퍼센트로 성공적이었다(그러나, 이는 서독의 6.7% 이탈리아의 6.0% 프랑스의 4.5%에 비하면 훨씬 모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전후 호황의 규모는, 국내 산업에 대한 낮은 투자와 생산기술의 연구개발에 대한 빈약한 투자 등으로 인해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또한 다른 나라들에 비해 구식 공장들과 장비들이 많았기 때문에, 경쟁력은 더욱 약화되었다(독일, 일본과 비교하면 영국의 제조 공장들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적었다) 나아가 영국은 제국의 붕괴에 수반했던 모든 상업적 이익들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낮은 성장률 때문에, 영국의 정책 수립자들은 다른 경쟁국들보다 정책운영의 여지가 적었다.
이제 이러한 경향은 역전되었을까? 1987년 대처가 총선에서 거둔 마지막 승리의 시기에, 영국경제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는 "경제 기적"이라는 말을 낳았고, 대처리즘이 영국병을 치유했다는 희망을 불러 일으켰었다. 하지만, 1990년 중반에서 92년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침체는, 물가인상과 산업투자와 생산의 감소 등으로 나타났는데, 경제 기적이라는 평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한편, 1990년 중반에 이르러 영국경제는 대부분의 주요 경쟁국들의 경제보다 잘 움직였던 것은 사실이다.
1992년의 침체가 끝난 이후에, 영국의 물가는 낮게 유지되었고, 이자율의 감소는 소비자 구매를 자극했다. 실업률은 여전히 높았지만 일정 정도 내려갔고, 성장은 미미하지만 있었다. 수출에서의 가격 경쟁력은 향상되었다. 이는 평가절하, 생산성 향상, 저임금 정착 등의 요소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사업 투자의 비율과 수준은 매우 경쟁적이었다. 이는 영국의 경제발전에서 역사적으로 약점이었던 것이 바뀌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영국이 유럽을 침체로부터 이끌어 내고 있다는 정부의 확신에 찬 주장에도 불구하고, 경제에 대한 낙관주의적 판단이 깃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황이 더욱 나빠질 것이라는 광범위한 예상들이 우세했다. 이것은 메이저 정부에 대한 일반적인 불만과 함께 토니 블레어의 새노동당 정부에 대한 기대가 현실화되는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우려에 대해 객관적인 배경이 있었다. 예를 들어, 실업률 저하는 대체로 여성들의 비정규직(part-time) 취업의 증가를 반영하지만, 남성들의 정규직 실업에 대한 절망감은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이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는 Southeast 지역만 해당하였다. 한편, 경제정책은 단기적인 정치적 압력에 따라 지나치게 많이 움직여 왔다. 특히 선거가 임박한 시기에 세금삭감 또는 사회적 지출의 증가 등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경제의 긴축과 확대를 번갈아 하는 이러한 'stop-go 정책 싸이클'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기에, 높은 발전과 낮은 물가라는 패턴은 지속되기 힘들 것으로 보이며, 대처리즘은 영국병을 치료했는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앞으로의 전망은 어두워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기를 웬만한 성공조차도 전략적인 구상보다는 우연한 기회에 보다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한편, 경제운영을 위한 현안들 및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한 대안적인 처방들은 여전히 정부와 투표자를 사로잡고 있다. 그런데, 영국이 EU의 경제정책을 받아들이기를 꺼리고 있는 것은 경제회복과 경쟁력 제고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경제침체와 불확실성이 갖는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운영에 대한 영국의 접근방법을 상세히 고찰해야 할 것이다.
국가와 경제
독일, 일본과 같은 후발산업국들은 산업의 도약기에 정부의 강력한 지지에 의존했지만, 영국에서 산업혁명은 자유시장과 자유무역 원칙에 더욱 기반했었다. 최소한의 국가의 간섭은 주로 국내의 시장보호와 국제적인 범위에서의 영국상품을 위한 시장개방을 지지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의 경제운영은 다른 나라들보다 자유방임주의라는 전제에 철저했고, 그것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조직된 경제 이익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관계맺도록 제도화를 추진해왔던 국가들이 보다 일관된 발전을 경험하였으며, 경쟁력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표2.2를 보면, 영국은 일본, 독일, 프랑스보다 매년 성장률이 낮았다) 영국은 국가기구, 경영자, 노동자 등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기보다 주요 경제활동국들과의 국가적 관계 유지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영국의 정치문화는 자유시장과 개인주의를 중요시했으며 대처리즘 역시 이를 지지했기 때문에, 국가는 경제에 대한 전략적인 조절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러한 기업문화와 자유방임경제의 전통이 갖는 이점들은 오늘날 상당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영국의 이러한 정치문화적 요소들이 독일, 일본 같은 나라들과 경쟁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는지, 새로운 성장을 위한 효율적 기초가 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질문이 그것이다. 만약에 대처와 메이저가 자유방임적 접근을 통해 영국병을 고쳤다면, 경제 이익들을 제도적으로 조직하여 얻는 이익들은 의심스럽게 될 것이다. 이처럼, 영국의 경험은 생산과 교환이라는 문제(조직화 vs 자유방임)와 독일, 일본 등이 영국을 앞질렀다는 판단에 대한 일종의 기준이 되고 있다. 이러한 영국의 정치학의 중심 현안들에 대한 평가진행은, 경제형성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은 무엇이고 그 한계와 정치적 함의는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을 통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 운영
영국은 경제를 관리하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1979년부터 결정적인 개입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힘의 균형을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첫째, 산업의 민영화를 통해 공적인 부문을 사적인 부문으로 이동시키고 둘째, 노동조합의 파괴적인 힘을 제한하고 경영권을 강화함으로써 노동자의 힘을 경영자의 힘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영국은 국가가 뒷받침하는 경제계획 또는 산업정책 등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프랑스는 Commissariat du Plan을 통해서, 독일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통해서, 일본은 Ministry of International Trade and Industry를 통해서 경제를 형성하고 경쟁력을 향상시켰다. 이에 비해 영국은 National Economic Development Council(NECD 또는 "Neddy")을 1962년에 보수당 정부가 도입하였지만 재무성의 견제, 경영자와 노동조합 사이의 이견 등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정부정책 방향의 비일관성 때문에 제대로 된 활동을 펼칠 수 없었다. 즉 Neddy는 경제적 기능을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Neddy는 1992년 메이저에 의해 폐지되었고, 경제정책에 관한 경영자-노동자-정부 대표자들의 3자간 협의는 30년 전통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거시경제 정책의 한계 영국에서 경제정책은 결합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 효율성에 한계가 있었다. 특히 국가적 수준의 정책과 산업적 부문에서의 활동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거의 없었다. 프랑스, 일본, 독일의 경우에, 주요 경제정책의 수단들은 거시경제 정책(실업, 물가, 성장 등)과 산업정책(특정 산업에 대한 전략적 투자와 산업관계의 조정을 통한 경쟁력 향상을 목표로 함)을 연결시킨다. 전후 영국 경제정책에서 가장 취약했던 점은 이러한 두 수준을 연결하지 못했던 데에 있다. 1979년에 들어서야 거시경제 정책이 지배적이게 되었고, 물가에 대한 관심이 다른 정책목표들보다 우선했다.
재무성과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이 주도하는 거시경제 정책들은 반응적(reactive)이거나 때로는 변덕스러웠다. 정책을 경기순환의 변동에 맞추면서 단기적인 정치 상황에도 대응해야 했으므로, 정책의제가 갑작스럽게 바뀌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경제 운영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특히 1979-1981년과 1990-1992년 사이의 침체를 막지 못했다.
영국에서 경제운영 전략의 반응적이고 최소주의적인 지향은 영국의 전후 정치학의 두 시기를 잇는 요소가 된다. 하나의 시기는 집합적 합의와 케인즈적 복지국가에 대한 폭넓은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1979년까지의 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복지국가의 원리와 케인즈주의를 부정하고 자유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대처와 메이저 정부가 이끌었던 시기이다.
합의의 종말 대처 이전의 보수당은 전후 정착의 조건들을 수용했다. 그들은 계층화된 사회에 대한 신념과 사회의 영원한 이익에 대한 역사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원한 사회적 필요로서 권위있는 리더쉽과 온정주의(Paternalism)를 중시했다. 당시의 보수당은 케인즈주의적 접근과 복지 국가 및 완전 고용에 대해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침체는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1970년대 이후로 경제성장은 없었고, 정치적 불만은 증가했다. 1970년에서 1974년의 보수당 정부(수상 Heath)는 최초로 침체의 모든 책임을 져야 했으며,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경영자들과 적대적이었던 노동자들 모두의 정치적인 반대를 받게 되었다. 물가인상과 성장둔화라는 스태그플레이션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침체로 인해, 집합주의적 합의와 전후 정착의 조건들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정치적 합의라는 영국의 전통이 극적으로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다.
1974년에서 79년의 노동당 정부는(Harold Wilson, James Callaghan) '정부가 사태를 더 이상 수습할 수 없다'는 인상을 더욱 심어 주게 되었다. 이는 정치와 경제 모두에서 새로운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윌슨은 보수당의 노동문제 때문에 당선되었는데,(비슷하게 마가렛은 1978-79년 겨울에 있었던 노동당 정부에 대한 파업으로 선거에게 승리했다) 노동당은 국민적 리더쉽을 위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산업연관 정책을 고려하여 노동당은 국민들에게 각 당의 차이가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보수당은 산업적 투쟁을, 반면에 노동당은 협력과 조화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노동당의 전략은 영국 노동조합 연맹(TUC)을 경제와 사회 정책에 대한 폭넓은 의제에 참여시킴으로써 경제안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사회민주주의로부터 신자유주의적 정치문화로 바뀌어 가면서, 노동당정부 시기의 사회적 계약의 실패는 다른 어떠한 변화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다.
사회적 계약은 1973년 2월에 TUC와 노동당의 만남에 의해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것은 일관된 경제적, 사회적 전략의 맥락 속에서 임금과 가격 통제에 대한 요구를 담고 있었다. 이것은 경제문제를 극복하고, 노동조합과 정부 사이의 협력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고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물가인상과 파운드의 심각한 유출 때문에, 사회적 계약 중에서 비용 부담이 큰 것들은 폐기되었다. 사회적 지급(social provision)의 확장에 대한 약속은 폐기되었고, 산업과 경제의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은 모호한 상태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1974년 노동당의 집권 이후에 나왔던 소득(income) 정책은 개별 노동조합, 일반조합원들, TUC 등의 지지를 매년 감소시켰다. 윌슨의 사임과 76년 칼라건으로의 교체 이후, 영국정부는 IMF에 임금 제약과 사회프로그램에 대한 지출감소 등을 약속하고 파운드의 급격한 유출을 완화하기 위해 39억 달러의 신용을 받았다.(이것은 파운드의 신용을 떨어뜨렸으며, 가치를 붕괴시켰다)
노동조합은 임금제약의 고통에 저항했다. 1978년 TUC와 노동당은 연례적인 8월 회의에서 임금제약의 실행을 반대했고, 사회적 협약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비공식적인 파업과 공식적인 파업이 계속되었고, 1978 -1979년 겨울에는 체불된 임금지급을 요구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있었다. 노동당은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노동조합과 일을 잘 처리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산업 현장에서의(industrial) 불만은 매우 높았으며, 결과적으로 1979년 3월에 대처의 선거 승리를 낳았다. 사회적 계약의 붕괴는 영국의 전후 시기를 지배했던 정치의 합의에 대한 전망이 끝났음을 알려주었다.
전후 정착의 시기를 거치면서, 노동당과 보수당 주류들 사이의 낯선 공생관계는(영국의 전후 정착의 조건을 일반적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에) 결국 그 실패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경제침체가 근본적으로 선택의 폭을 제한했기 때문에, 양당은 노동조합의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결국 칼라건은 합의주의 정부의 제약 안에서 사용가능했던 모든 선택들을 다 썼다. 이제, 새로운 신념과 정책 방향을 위한 시간적 조건이 성숙하게 되었다.
전후 정착 이후의 정책 지향 전후 정착의 집합주의적 합의와 케인즈주의는 1974년에서 79년 사이에도 있었다. 그런데 이미 당시의 노동당 정부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환상지우기'(사회적 합의의 폐기)는 대처와 메이저의 경제전략에 의해 보다 확대되었다. 이에 통화주의가 새로운 경제적 조류로 등장했다. 케인즈주의가 실업수준을 조정하고, 정부의 정책결정에 따라(통화 및 재정 혹은 예산 정책) 경제를 안정화시킬 수 있다는 가정이라면, 통화주의는 노동시장에 의해 결정되는 "자연 실업률"을 가정했다. 예산적자를 늘리는 정부지출은 더 이상 유용한 수단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전반적인 경제효율과 성장을 위해서 정부는 사회적 지출을 줄이고 국가산업을 민영화하거나 노동자의 힘을 축소하여 공공부문을 소형화했다.
이러한 통화주의는 경제운영에 대한 전후의 합의로부터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적극적인 정부개입은 불필요하고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통화와 재정정책은 수동적으로 사용하며, 개입은 화폐공급 증가의 적정한 비율을 도와주며 저물가를 유지하는 방법에 한정되었다.
케인즈주의와 통화주의의 이러한 이론상의 차이점은, 정작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정부는 경제정책을 만들 때 어떠한 경제이론도 일관되게 따르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까지 통화주의는 완전히 폐기되었고, 그 이후로는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데 모든 경제정책이 집중되었다. 경제적 지향의 정치적 결과들은 보다 중요했다. 각각의 경제 학설은 사회에 대한 도덕적 문화적 전망을 정당화하고, 국가정책에 동기부여를 하고, 대안적 가치체계를 발전시켰다.
사회적 정책
복지국가의 사회적 정치적 역할은 지출의 규모뿐만 아니라 정책의 목표와 수단들에도 달려 있다. 예를 들어, 보조의 방식을 현금, 현물, 가격 중 어느 것을 통해 할 것인지, 그 범위는 제한적인지 보편적인지, 그 효과는 임시적 필요에 의한 것인지 사회적 재분배를 위한 것인지 등이 그것이다.
전쟁기간 동안 정부와 노동당의 확장된 역할은 영국에서 복지국가의 발전을 위한 길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덜 포괄적이며 사적 제공(private provision. 아마도 종교단체의 구호활동 같은 것이 아닐지...)을 위한 보조금에 의존하고, 생활보호자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책결정자는 복지국가의 제공이 시장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을 꺼려했으며, 집단간의 불평등의 해소를 복지국가의 목표로 삼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NHS(National Health Service)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의료보호를 하지만, 주된 강조는 생활보호자 등에 맞추어져 있다.
대중들은 복지국가 정책에 대해 높은 지지를 보내지만, 정작 제공되는 서비스에 대해서는 불만이 높았다. 그들은 "우리가 얻는 것은 결코 우리가 원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제공되고 행정처리되는 방식은 우리의 실질적 필요를 반영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정서는 모순되게도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을 강화시켰다. 보수주의자들은 복지국가가 비효율적이고, 관료화되어 있으며, 너무 비싸다는 주장을 했었다. 결국, 상황은 1970년대에 이르면 예산긴축과 사회적 제공의 감축을 가져왔고 영국의 새로운 우파의 힘을 키워주게 만들었다.
대처와 메이저 시기의 복지국가 1979년 이후, 보수당정부의 사회지출 내역은 다소 혼합되어 있다. 이는 '반복지국가'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실망스러운 것이다. 보수당 정부의 복지개혁의 노력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제약을 받았다. 1979-90년 사이의 지출감소 정책은 유지될 수 없었다. 이것은 경기침체에 따른 소득보조와 실업수당의 상승 때문이었다. 또한 정부가 억누를 수 없는 비용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의료보호제공의 비용은 복지시스템이나 정책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산업 민주주의국가들에서 급격히 증가했다. 여기서의 비용이 인구의 고령화와 같은 비정책적 요소들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1978-92년의 복지국가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은 증가하였지만 GDP의 몫은 그대로였다. 결과적으로 지출은 그러한 프로그램들 사이의 자원이 이동한 것에 불과할 뿐, 전반적인 지출의 감소는 없었다. 이처럼, 보수당이 표방했던 복지국가에 대한 개혁은 결정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총지출 유형은 매우 중요한 정책 변화를 감추고 있다. 주택문제에서 국가 정책과 제공의 변화는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중요한 것이었다. 일찍부터 대처는 주택문제에 관한 정책을 내놓았는데, 공공(public) 주택에 있는 모든 차지인(tenant)들에게 시장가격의 50%로 자신의 집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녀는 약속을 지켰고 125만 이상의 공공주택이 팔렸다. 대처의 주택정책은 정치적으로나 선거상으로나 매우 중요했다. 1979년에 대처는 총선에서 승리했다. 또한 주택문제는 노동계급운동을 선거상에서 갈라놓는데 결정적이었다. 노동계급운동은 1976년 이후의 노동당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화가 나 있었고, 복지국가의 불충분함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주택 소유의 유혹은 강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1988-89년에 저당금(mortgage payment)의 가파른 상승(6%)은 주택문제를 더 이상 보수당에게 유리하게 만들지 못했다.
복지국가에 대한 영국인의 태도 주택을 사유화하는 캠페인에서 보수당이 크게 성공했지만, 대다수 영국인들은 기본적인 필요에 대한 집합주의적인 제공의 원칙을 굳게 지지하였다. 이 때문에 정부가 정책을 바꾸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대처는 1989년에 NHS에 시장의 경험을 도입하는 개혁을 시도했으나 의료보호 부문의 전문가 단체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러한 '내부시장의 도입'은 의사나 병원들에 인센티브를 줄 지는 몰라도, 부자와 빈자에게 제공되는 의료서비스가 이원화되는 체계를 만들어 빈자 혹은 약자에게는 더욱 불리한 조건을 만들기 때문이다.
메이저 정부는 의료 보호(health care)에 예전보다 많은 지출을 했다고 설명하였지만, 의료 보호 문제는 메이저를 1992년 선거에서 큰 타격을 주었다. 노동당은 의료 보호 문제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이러한 개혁에 대한 적대는 상당 부분 없어졌다. 심지어 노동당은 개혁을 되돌릴 의도가 없다고 했다. 이처럼 예산 제약과 공공부문 효율은 1990년대 중반의 영국에서의 정치학의 새롭게 합의되고 있는 요소들을 대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타격은 있었다. 메이저는 복지지출을 늘렸고 복지정책에서 삭감과 향상을 균형적인 수준에서 병행하면서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의료와 교육부문에서의 내부시장 문제에 부딪혀 신뢰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사회와 경제
보수당 정부의 장기집권의 유산이 어떠한 사회정세 속에 있는지를 알아보려면, 경제적 정책과 사회적 정책들에 대한 태도와 실행들이 함께 나타나는 국면을 살펴야 한다. 대처와 메이저의 경제적, 사회적 정책의 분배효과는 무엇이었는가? 정부정책은 소수자들과 여성들의 삶의 조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정책선호와 무관한 경제 활동(performance)의 결과와 정부 정책의 사회적 결과를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경제적 불평등이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소수 민족들과 여성들은 경제적, 사회적 수준에서 심각한 불이익을 경험했다. Peter Jenkins에 따르면 대처 시기의 정책들의 결과는 고실업, 빈자에게 불리한 세금정책 변화, 복지수당의 실질가치 감소 등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증가시켰다. 80년대에는 "두국민"(부자와 빈자)이라는 말조차 나왔다.
불평등과 소수민족
영국은 다인종 사회의 현실에 적응하는데 매우 느렸고 그 성과 또한 별로 없었다. 전후시기에 영국은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인내심이 점차 침식되고 있음을 목격해 왔다. 흑인, 특히 어린 흑인들은 경찰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육체적인 괴롭힘을 경험해야 했다. 민족적, 종족적 소수자들은 문화적 고립감을 경험해야 했으며, 교육체계, 직업훈련기회, 노동시장 참여 등으로부터 주변화 되었다. 영국에서의 1980년, 90년대의 발전들은 복지수당의 감소 및 높은 실업률이 하위계층에 미치는 압박과 결합되어 민족적, 인종적 종족적 구분을 더욱 심화시켰다. 대처시기에 이민과 시민권에 대한 토론들은 당파적인 정치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다소 인종적인 톤으로 띠었다. 1982년의 Falklands/Malvinas의 전쟁은 이러한 소수자들의 문화적 고립감을 심화시켰다.
불평등과 여성
영국에서 노동시장에 여성이 참여하는 것은 많은 점들에서 여전히 불평등하였다. 대처와 메이저 정부는 임시직(part-time) 노동자에 대한 경영유연화와 노동비용 삭감이, 노동현장에서 성적 불평등을 감소시키려는 노력에 우선할 것이라고 말했다. 1993년 현재 1천10만의 여성노동자 중에서, 4백60만에 달하는 50%가 넘는 여성들이 임시직이다. 그들은 동일노동을 하는 남성들과 비교하여 75%의 보수밖에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정부정책이 노동의 배치에 있어 경영유연화를 격려함에 따라, 덜 안전하고 덜 보수가 나오는 직업에서 일하는 여성의 노동비율이 증가했다. 그리고 복지삭감의 맥락 속에서 진행되는 고용정책은 여성에 대한 낡아빠진 관념들을 고착화하는 경향이 있다. 즉, 여성들은 용돈이나 벌려고 일한다거나 집에서 남편, 애들, 약자와 노인들을 돌보는 일에 신경써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그것이다. 한편, 이러한 정부정책은 여성 가장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는데 소득유지를 위한 적정선을 낮추거나, 파트타임으로 인한 시간수당의 가치를 하락시켰다. 직위 상승에 있어서도 여성들은 불이익을 받았다.
영국의 정치경제와 국제적인 정치경제
영국은 산업혁명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를 창출하는 주요 수단을 국제무역에 두었다. 영국은 다른 선진 산업국들보다 세계경제에 보다 의존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경제정책에 대한 외부적인 압력을 보다 많이 받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치적 선택들은 중요한 경제적 결과들을 가져왔고, 경제 정책에 대한 선택들은 매우 정치적으로 되어갔다. 어떤 방식이든 그 결과는 상당한 것이 될 수 있다.
북해 석유에 대한 선택
대처의 집권시기와 일치하는 짧은 기간 동안에, 영국은 북해에서의 석유생산을 통해 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에서는 1985-86년의 한창일 때, 석유에서 나온 수익은 다른 경쟁력 저하의 요소들로부터 경제를 안정시켰으며 국가 수익을 증진시키고 국제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북해석유가 스털링의 환율을 증가시켜서 영국의 수출품의 가격을 비싸게 만들었고 제조산업을 약화시켰다. 더욱이 대처의 경제해법은 공공지출을 줄이고 과세를 징수하는 것이어서, 이 산업에 대한 투자와 경쟁력 강화보다는 오일 수익을 단지 대차대조표를 맞추는 데 사용하였다. 이러한 모순된 정치적 결정은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제조상품 수입이 수출을 초과하는 경제적 결과를 낳았다.
유럽통합의 딜레마
EC는 1987년 유럽단일법안을 비준하고 1992년 12월 31일을 물리적, 기술적, 재정적 장애를 철폐하는 날로 선택했다. 1979년에 도입된 EMS(European Monetary System 또는 ERM)는 유럽경제의 안정화를 도모하고 EC국가들간의 무역을 증대시키기 위해 도입되었다. ERM의 성공은 EC국가들의 경제전략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ERM은 EC의 모든 나라들이 같은 성장률과 인플레이션률을 갖도록 하였기 때문에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불일치와 후퇴로 인해 기회를 놓쳐버리기 전에 통합과정을 시급히 완성하려는 압력이 있었다.
1980년대, 대처는 영국이 ERM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다. 경제정책에 대한 주권적 통제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의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1990년대 인플레이션의 급등이 1980년대의 경제적 성과를 침식하자 결국 경제주권을 행사할 수단을 독일과 분데스방크에 건네주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유럽통합에 동참하는 것이 영국의 인플레이션을 낮추고 경쟁력을 강화시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메이저는 ERM 참여가 갖는 상징적, 정치적 중요성을 중시했다. 그는 ERM 멤버쉽이 유럽무역을 안정화시킬 것이며 반물가전략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92년 9월에 EMS는 붕괴했다. 독일의 통일로 인해 투자유치를 활성화하기 위해 이자율을 높였는데 이것이 영국을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고이자율 전략에 가두었던 것이다. 이것은 영국의 침체를 가속화시켰다. 스털링의 가치를 유지하려는 필사적인 노력과 함께 ERM에의 참여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하루만에 5%의 이자율 상승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메이저 수상의 명성은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그의 경제통합 계획은 유보되었다. 이처럼 ERM은 대처와 메이저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왔다. 이처럼 세계경제질서에 국가가 편입되는 것은, 국가의 주권통제가 제한되고, 그 결과 가장 안정된 민주체제라 할지라도 예기치 못한 문제에 심각히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