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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8_마가29_무엇이 보이느냐?
마가복음 8장 22~34절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할렐루야! 지금 이곳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곳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옆 사람과도 함께 인사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저는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을 배경으로 ‘무엇이 보이느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3D 영화의 안경
지난 주중에 둘째 아이와 함께 ‘팬’이라고 하는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영원한 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피터팬’에 대한 영화인데,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피터팬 이야기의 프리퀄(prequel)입니다. 프리퀄(prequel)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야기가 있게 된 그 전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피터팬이 어떻게 네버랜드에 오게되었고 하늘을 나는 아이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줄거리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화면에서 피터팬이나 해적선이 날아다닐 때의 화면이었습니다. 화면을 보면서 ‘아, 이것이 3D 입체영화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3D 입체영화로도 나와 있더군요. 요즘은 옛날에 비해서 자주 3D 입체영화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관에서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테마파크나 대형마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3D 입체영화를 보려면 3D 안경을 써야합니다. 안경을 벗고서 보면 화면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고 이중으로 흐려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3D 안경을 쓰고 보면 화살이 나를 향해서 날아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절벽 아래로 떨어질 때는 내가 떨어지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3D 안경이 두가지 다른 화면의 초점을 하나로 모아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평면의 영화를 입체적으로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도 입체적으로 읽게된다면 얼마나 재미있고 흥미진진할까를 생각해 봅니다. 저도 성경을 읽다보면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왜 이런 이야기가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들 속에 성경을 보는 3D 안경같은 것이 놓여져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써서보면 말씀의 의미가 더욱 분명하고 입체적으로 보여집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이 바로 그런 3D 안경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경이야기
오늘 본문의 22절부터 26절까지는 벳새다에서 예수님께서 앞 못보는 맹인 한사람을 치료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지난 두 주 정도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왜 이 본문은 여기에 있을까? 이 이야기는 마태와 누가복음에는 없는 이야기인데 굳이 여기에 있는 이유가 뭘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묵상을 해왔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앞못보는 맹인을 고쳐주셨다라고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치료하시는 모습이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보통 예수님의 치료는 단 한번에 끝납니다. 손을 대시던지 혹은 말씀을 하시면 그 즉시로 치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맹인은 한번에 치료가 안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을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치료하신 후에는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한 이유와 설명은 없습니다. 다만 이 사람이 사는 곳이 ‘마을’이 아니겠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왜 두 번에 걸쳐서 안수하시며 맹인을 고치셨는지에 대해서도 이렇다할 어떤 설명이 없습니다. 설명이 없으니까 그냥 그런가보다 하면 되기도 하는데, 저는 성경이 그렇게 단순하게 쓰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마가가 이 복음서를 최초로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기록했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이 맹인의 이야기가 바로 성경을 입체적으로 보게하는 3D 안경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가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분명하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셨는지 알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앞못보는 맹인과 같은 제자들
첫째로 제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는 오늘 본문의 말씀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이 떡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얼마나 답답하셨던지 예수님의 폭풍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또 일곱 개를 사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막8:17-21)
2주전의 말씀이지만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 뒤에 제자들의 대답이 마가 복음에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2절에는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조심하라는 뜻이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하지만, 마가는 일부러 ‘제자들의 무지함’을 더 드러내놓고 있는 것처럼 아무런 언급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의 다음에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질문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본문은 특히 마태복음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예수님이 칭찬하시며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는 말씀이 나오기도 하는 아주 중요한 장면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여기에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 이야기는 빼버렸습니다. 베드로와 동역했던 마가가, 베드로의 복음이라고까지 하는 마가복음에 왜 예수님이 베드로에 대한 칭찬이야기는 빼버린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베드로에 대한 책망의 말씀을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마가와 베드로 사이에 무슨 나쁜 감정이라도 생긴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의 관심도 베드로의 관심도 단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만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다음 주일에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교회에 대하여 더 다루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이 종교개혁기념주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오늘 맹인을 치료하신 이야기의 위치는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말씀에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말씀과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있은 이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항변하자 예수님이 베드로를 크게 꾸짖는 말씀 사이에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 맹인이 제자들의 모습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에게 처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을 때,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맹인이 말했습니다. 그는 치료가 되었지만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질문하시자 제자들은 “세례요한이나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선지자중의 한사람이라고도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의 대답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전혀 모르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때 용감한 제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정확한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들으시자 이제 제자들에게 정말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쳐야 하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메시야, 하나님이 보내신다고 약속하신 세상의 구원자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항의하며 따지듯 한 것입니다. 마가는 어떤 말로 항변했는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마태의 복음서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라고 말한 내용이 있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버린 바되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며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충격적이어서 너무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다고 했는데, 항변이라는 말의 헬라어 에피티마오는 ‘비난하다, 책망하다, 훈계하다’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멱살을 붙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같은 베드로 성격에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을 책망하듯 훈계하였던 것입니다. “어! 예수님 그러시면 안됩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안됩니다!”
방금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예수님이 한번 더 찬물을 끼얹듯 말씀하십니다.
막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리고는 제자들과 무리들을 함께 불러모아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34절)
제자의 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싶으셨던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며,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회도 예수님을 따르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핵심이며 그분을 따라는 교회와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 제자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 그러시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치료 과정 가운데 있던 맹인의 모습입니다. 맹인은 치료받았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치료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보입니다만, 나무같은 것들이 걸어가고 있습니다.”라고 완전하게 보지 못한 말을 합니다.
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맹인을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가신 것처럼 우리들을 세상으로 불러내셔서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눈이 밝지 못합니다. 아직도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신앙의 길을 걷기보다는 마을로 돌아가서 마을 사람들이 걷는 세상의 길을 걷고 싶어합니다.
어쩌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도 아직 미련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베드로와 제자들처럼 세상의 성공과 부요함이라는 축복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생활은 내 문제를 해결받고 내 인생의 복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직 눈이 밝아지지 못한 맹인과 같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은 있지만 그것이 내 삶에 이루어져야 할 삶의 내용은 아직도 내가 원하는대로 내가 하고싶은 대로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막아서고 ‘주님, 그러시면 안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겨우 십자가에 죽으시려고 이 고생을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따라다니는 것이 겨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함입니까? 그러시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베드로가 우리 모습이 아닌가요?
예수님은 추상같은 말씀으로 책망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33절) 베드로가 눈물이 찔끔 났을지도 모릅니다. 속 좁은 사람은 이제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향으로 돌아갔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가룟 유다는 이때부터 예수님을 팔아버릴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과 의도는 분명하셨습니다.
우리는 3D 안경을 쓰고 이 부분을 분명하게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분명히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버린 바 되시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실 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감으로써 삶으로 세상에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지금도 우리에 대한 부르심입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다시 보게 하시는 분
우리는 자주 우리의 길을 놓치고 삽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길을 걷고 싶어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느꼈던 안타까움도 이와 같았습니다.
갈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우리는 보는 것을 믿게 됩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아람군대가 자신들의 집을 둘러싸고 있을 때는 두려움 가운데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그의 눈을 열어 불말과 불병거가 하늘에 가득한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보여지는 것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을 열어야 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아무것이나 영적인 것으로 믿고 받아들여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보아야 할 것은 세상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욕심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걸어가신 길입니다. 세상의 길이 아니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맹인으로 볼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엘리사와 같이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해 주실 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 되시고 우리 눈을 열어서 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직 완전히 보게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떠나지 않고 계속 우리의 눈을 열어 주님을 보게해 달라고 기도하면 결국 주님이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밝히 볼 수 있도록 치료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또다른 메시지입니다.
25절,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다시 안수하시는 은혜의 손길이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자기 자식을 잊고 사는 부모가 없듯이 주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심장에 새기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로 우리에게 확증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빌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다시 안수하시는 은혜’가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이 밝아서 보아야 할 것 분명히 보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주님이 우리에게 물어보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내 앞에서 앞서 가시며 십자가에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주님이 보입니다. 내가 주님을 따라갑니다. 세상의 영광의 빛을 따라가지 않고 십자가를 통해 내게 비추시는 하늘 영광의 빛을 따라 갑니다. 믿음의 고백으로 하루 하루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