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난화로 뜨거운 아스팔트를 안고 있던 여름도 계절의 순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더위를 피해 떠나 있던 선선한 바람이 제법 귓가를 간지럽히고 있다. 들판에는 벼가 여물고 과실수들이 한해의 결실을 가지에 달아매고 있다. 자연의 수확물들을 보며 인생을 한번 뒤돌아 보게 된다. 나의 가을은 어떤 결과물들이 나올까?
밤이 깊었다. 한 줄의 글도 써지지 않아 인터넷 서핑을 하다 템플 스테이가 눈에 띄었다. 취업, 퇴직, 창업, 실패, 재기의 과정을 거치며 롤러코스트 같은 삶을 뒤돌아 보고자 40대 후반에 아무 생각 없이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흥국사로 템플 스테이를 간 적이 있다. 주제가 ‘참 나를 찾아서’였으니 오십 목전까지 앞만 보고 정신없이 살아온 나 자신에게 딱 맞는 주제이기도 했다.
태생부터 혼자 살 수 없는 구조인 현대 사회, 수많은 관계와 관계가 시절인연으로 맺어진 터라 잠시 멈춤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 관계의 멈춤은 핸드폰에 있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하루 종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핸드폰을 끄고 잠시 분절의 시간,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은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흥국사로 가는 길목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는 광고 카피가 차창 밖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흥국사는 서기 661년 신라 문무왕 때 당대 최고의 고승 원효대사가 지은 절이다. 상서로운 빛이 일어난 곳이라 앞으로 많은 성인들이 배출될 것이라 했다. 북한산 북서쪽 서기(瑞氣)를 발견하고 흥성암을 창건하였고,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전쟁으로 고통 받는 민초들의 삶을 위로하였다. 그 후에 조선 영조대왕이 어머니 숙빈 최 씨의 묘소를 갈 때마다 여기를 들러 나라를 흥하게 하는 절이라 하여 흥국사로 이름을 바꾸고 약사전의 편액글씨를 직접 써서 하사하였다고 하니 그 역사의 크기가 경건하고 엄숙한 나를 빚는다. 입구에 들어서니 초가을 날씨, 저잣거리의 공기와 풍경이 다르다.
일주문을 지나 많은 계단을 올라 불이문을 통과하였다. 불이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3문(三門)중 절의 본전에 이르는 마지막 문을 말한다. ‘불이’는 진리 그 자체를 달리 표현한 말로, 본래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한다.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가 이 불이문을 통하여 재조명되며, 불이(不二)의 경지에 도달하여야만 불(佛)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이 문을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템플스테이에 35명의 인원이 참석했는데 주로 여성들이 많았고, 남성들은 10여 명 정도 되었다. 남자들은 거의 40대에서 50대였다. 두 초등학생 자녀를 데리고 온 아빠, 젊은 연인, 또는 홀로 찾아온 20대 여성. 신랑이 일방적으로 신청해 같이 온 부부, 각기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이유는 달라도, 저마다 참 나를 찾아보고 조용히 마음을 들여다보며 성찰해보고 싶은 마음은 다르지 않았으리라.
도시는 너무 바쁘게 돌아가고, 죽순처럼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지는 세상이다 보니 자기 자신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특히 4-5십대 중년들은 사업을 하거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생업에 매달려 가정경제를 이끌어 가야 되니, 앞만 보고 달려올 수밖에 없는 현실. 그렇게 살다 보니 가끔은 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사실 관계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정보, 이를테면 동물, 남자, 49세, 회사원, 서울거주 등과 같은 정보들은 자연 또는 사회 계약 안의 ‘나’의 위상을 알려줄 뿐 ‘나’라는 존재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도와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누군가의 아들, 사위, 아빠, 남편, 친구, 직장동료 수많은 관계 속에서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데 그럼 진정 나는 누구인가? 나는 분명 존재하는 거 같은데 나는 어디에 있는가? 자아(自我)는 있는가? 이날 참가자 중 불교 신자는 1명에 불과했고, 불교에 막연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기독교나 천주교 신자도 몇 분 계셨다. 종교라는 관점을 벗어나 '나'라는 관점에서 나를 보는 일은 쉬운 기회가 아니였다.
사찰 생활의 기본이 되는 합장과 반배, 절을 하는 법을 배우는 오리엔테이션 시간은 미리 따로 주어졌다. 남녀노소 아래위로 똑같은 황토빛 수련복을 입었다. 사찰 내에서는 묵언이 기본이었다. 부득이 급한 상황이 되면 귓속말로 하여야만 한다. 각종 소음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고요함이 얼마나 좋은지, 침묵이 얼마나 힘든지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침묵은 물과 같아서 다이아몬드 보다 강한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재식을 거치고 주지 스님의 특강. 불교에서 ‘너와 나는 무엇인가?’였는데 모든 존재들 간의 상호 의존적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연생기(因緣生起)를 설명하며 나와 모든 생명은 둘이 아님 즉, 자타불이(自他不二)를 일깨워 주었다. 결론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게 아니고 더불어 모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게 불교의 큰 특징이라며 강의를 마무리하셨다. 소승불교의 시선이 아닌, 대중성이 있는 대승불교의 영향이 삶에 보탬이 된다는 의미였다.
저녁 공양시간. 봉사자들이 공양을 짓는 것을 보고, 한 그릇의 공양이 만들어지기까지 보이지 않는 수고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발우라는 그릇을 사용하는 스님들의 식사법인 ‘발우공양’을 처음으로 하였다. 김치 한 조각을 남기고 밥과 반찬을 모두 먹은 후 남겨두었던 김치와 숭늉으로 발우를 씻는다. 발우에 고춧가루나 밥풀이 남아 있는 물은 버리지 않고 마신다. 그래서 밥 한 톨, 고춧가루 한 개도 떠 있으면 안 된다. 환경문제를 생각하고 이 음식이 나오는데 봄부터 가을까지 비와 바람과 햇볕을 아낌없이 준 자연에 감사하며, 그 자연에 순응하며 땀 흘리고 수고한 농부를 비롯하여, 우리 식탁에 올라오기까지 여러 사람이 고생한 공덕에 감사하며 저녁 공양을 했다. 언제 음식을 이렇듯 진지하게 음미하며 감사하게 먹었던 적 있던가? 발우공양 체험은 나를 더불어 살아가야 할 미래를 성찰하는 시간이었고 소중한 체험이었다.
다음 순서는 연등 만들기. 종이컵에 붉은 꽃잎을 붙여 만드는 약식 연등이지만 초를 넣고 불을 켜니 더 이상 예쁠 수 없다. 초를 들고 한 줄로 서서 탑돌이를 하니 그동안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수많은 별들이 총총하다. 나의 잘못된 말과 행동이 저 별처럼 많았겠거니…. 탑돌이 후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인 참선과 명상 시간. 결가부좌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을 이미 아는 스님은, 반가부좌를 틀고 허리를 꼿꼿이 펴라고 지도했다. “눈을 감으면 잡념이 들어오게 됩니다. 눈은 아래로 지긋이 뜨되 한 곳을 정해 응시하세요. 그리고 머릿속의 모든 상념을 지웁니다. 비우세요, 깨끗하게 비워내세요.” 주지스님이 이끌어준 명상시간까지 마친 뒤 각자 방으로 돌아가 11시쯤 잠에 들었다.
새벽 4시. 30분, 새벽 예불이 시작됐다. 세상의 미물까지도 잠에서 깨운다는 타종을 하며 각자의 소원도 빌었다. 새벽산책에서는 자연과 호흡하며, 바람과 대화하며, 자신 안에 있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을 찾기도 했다.
“살아있는 존재라면 이미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나려 하거나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옵니다. 남을 괴롭히거나 고통을 주는 일이 결코 없기를 원하옵니다. 그릇된 견해에 말려들지 않고 바른 견해 갖기를 원하옵니다. 스스로를 잘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기를 원하옵니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고 참으로 향기로운 말을 하겠습니다. 내가 잘되는 이치는 항상 주는 마음이기에 흔쾌히 베풀겠습니다. 집착하는 마음 버리고 애착의 고통에서 벗어나겠습니다. 제가 이제 남김없이 참회합니다…” 라는 백팔예참문 일부가 아직도 기억나는 것을 보니 무척 인상적인 시간이었나보다.
태어나 처음으로 백팔배를 하며 다리와 관절이 아파 땀을 뻘뻘 흘렸지만 백팔가지 인간이 행하여야 할 덕목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하심(下心)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여러 행사가 끝나고 각자의 느낌을 1분 동안 발표하는 시간에 참나를 찾아서 왔다가 나의 마음을 비우고 나를 좀 더 버리고 간다는 말로 나의 느낌을 발표했다. 1박 2일 동안 얼마나 나를 찾았겠는가? 다시 세속의 전쟁터로 돌아가면 마음에 번뇌가 가득 찰 것이고 그때에는 다시 2박 3일. 그다음에는 3박 4일 이렇게 와서 비우다 보면 어느 사이에 선(善)해져 있는 나 자신이 되어 있지 않을까? 나를 찾은 다음에는 나를 필요로 하는 어렵고 힘든 곳에서 작게나마 봉사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을까 싶다. 백팔배와 명상과 참선과 가부좌를 하느라 온몸이 쑤시고 다리가 아팠지만 마음만은 평화로운 1박 2일.
평생이 걸려도, 30년이 걸려도 참 된 나를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참 된 '나'라는 것의 정체성을 아직도 모르고 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참 된 '나' 이전에 시선을 돌려 내 주변에 있는 자연과 관계, 섭리의 운행법칙. 들꽃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들에 나가야 하며, 아픔을 알기 위해서는 아파봐야 한다는 진리. 좀 더 광의적으로 생각하면 참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참 된 '너' 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나에게 무엇인가를 깨닫기 전에 당신에게 내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중요하다. 어쩌면 짧은 템플스테이에서 내가 배운 것은 참 '나'가 아닌, 참 '너'를 찾는 방법을 배운 것 같다. 나의 연극무대는 아직 진행 중이다. 커튼콜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연극이 끝난 후, 관객이 떠난 텅 빈 객석에 앉아 나의 무대를 보면서 흐뭇할 수 있다면 홀로 일어서 기립박수를 보낼 것이다. 나에게. 내가 꿈꾸는 소박한 희곡의 시놉시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