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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동마을의 기운을 서백당 후손이 잇는다
손삼호 울산 동구 노동자 출신 비평가
경주 양동마을의 형성은 가문의 선택에서 시작된, 공간과 질서의 축적이다.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孫昭, 1433~1483)는 청송부 안덕현에서 태어나 풍덕 류씨 류복하의 사위가 되며 양동으로 들어왔다. 처가살이를 하던 그는 1454년(단종 2), 분가와 함께 송첨 고택을 건립했다. 이 집은 손소 개인의 거처를 넘어, 그의 장녀가 여강 이씨 이번과 혼인하면서 손씨와 여강 이씨가 함께 세거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고, 그 결과 오늘날 양동마을이라는 거대한 집성촌이 형성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송첨 고택은 양동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이자 손씨의 종택이다. 문화재 지정 당시에는 ‘손동만의 가옥’으로 불렸으나, 사랑채 대청에 걸린 편액의 글귀를 따라 ‘송첨고택(松簷古宅) ’, ‘서백당 고택’으로 명칭이 정리되었다. 서백당(書百堂)이란 ‘참을 인(忍) 자를 백 번 새긴다’는 뜻으로, 이 집이 지향한 삶의 태도이자 가문의 윤리를 상징한다. 이는 힘을 과시하기보다 절제와 인내를 통해 가문의 지속을 도모하고자 했던 조선 사대부의 자기 규정이었다.
이 고택의 배치는 지형과 예법을 동시에 존중한 결과물이다. 집은 서남향으로 자연 지세에 순응해 앉았고,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구릉에는 막돌을 쌓아 축대를 만들어 안정감을 확보했다. 일자형 대문채를 지나면 안채·사랑채·아래채가 ㅁ자형으로 둘러서 있으며, 좌측에는 곳간채가, 뒤편 높은 곳에는 사당과 신문(神門)이 자리한다. 『주자가례』의 원칙에 따라 사당을 몸채보다 높은 동쪽 터에 둔 점은, 이 공간이 단순한 생활의 집이 아니라 제례와 혈통 계승의 중심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안채
공간 구성은 유교 사회의 질서를 일상 속에 구현한다. 중문을 기준으로 안채와 사랑채를 나누고, 내외담을 통해 남녀의 영역과 시선을 분리했다. 큰사랑과 작은사랑을 따로 배치해 웃어른과 아랫사람의 공간을 구분한 점은, 위계질서가 관념이 아니라 생활 동선 그 자체였음을 말해준다. 이 집에서 질서는 규범이 아니라 습관이었고, 자연스럽게 체화되는 교육이었다. 안채는 종택의 실질적 중심이다. 넓은 대청과 산실방, 제기고, 안방 위 다락과 환기를 고려한 광창은 가족의 삶과 제례 준비가 긴밀히 맞물린 구조를 이룬다. 특히 네 개의 둥근 기둥을 사용한 안채 대청은 실용을 넘어, 종택이 지녀야 할 품위와 상징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송첨 고택은 사는 곳이면서 동시에 ‘집안의 격’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사랑 마당 위에 자리한 사당과 향나무, 낮은 기단의 대문채와 행랑 공간은 이 고택이 한 가문만의 폐쇄적 공간이 아니라, 주인·노비·외거 노비로 이어지는 조선 사회 전체의 질서를 포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송첨 고택은 한 집안의 역사이자, 조선 사대부 사회의 축소판으로 기능해 왔다.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사랑채
오늘날 송첨 고택의 가치는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데 있지 않다. 자연과 예법, 생활과 의례, 권위와 절제가 공간 속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 바로 그 질서의 완성도에 있다. 기운은 혈통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질서를 세우고 그것을 끊임없이 실천해 왔는가에서 축적된다. 풍수적으로 이 터는 인물의 기세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형국이며, 『주자가례』가 말한 “가문은 공간을 통해 인간을 기른다”는 원리가 실현된 자리다. 끝.
첫댓글 사호파 경기 광주문중 총무 손종혁입니다.
밀직공 25세로 종손 성훈님과 항열이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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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문중 카페에 올리고자
스크랩 해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