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화포럼
제9차 정기모임
이화포럼 제9차 8월 정기모임을 개최했다.
지난 6월에 일정을 잡았다가 난데없는 메르스 사태로 2개월 연기를 하게되었다.
어제가 말복(末伏)이였으니 이제 삼복도 지나고 가을이 가깝다.
생각해보면 잊고 살아왔던 세월의 흐름이 실감나게 빠르다는 걸 새삼 느낀다.
금년봄 남한산성 탐방때 얼굴을 보고 4개월만에 만나니 반갑다.
한때는 제석산악회 원년의 멤버들이기도 했던 용사들이다.
이젠 이빨빠진 호랑이가 되었지만 기백들은 여전하다.
2015년8월13일(목) 오전10시30분 동대문역에 집결했다.
오늘 감기기운이 있어 김남규씨와 장융규씨가 불참을 했고 3명은 연락 두절이였다.
열성당원 10명이 예전 이화부속병원 자리에 들어선 팔각정에 올랐다.
병원 건물은 그대로 인데 한양도성박물관으로 변신을 했다.
병원을 목동쪽으로 이전시키고 그 자리에 박물관을 조성했다고 한다.
서울촌놈이 따로없다. 월당쌤은 생소한 장면이였다.
오늘 이화포럼 주제는 한양 도성길 역사 탐방이였다.
태양출판사 주인장 답게 이화포럼을 위해 24페이지 칼라판 자료집을 준비해왔다.
태조5년(1396) 음력1월9일 전국에서 12만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축성한
한양 도성길 약19km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이젠 제법 문화해설가 다운 면모로 발전을 한 강센이 달리보인다.
직업 의식을 떠나 노력하는 자세가 보기 좋다.
교제 16쪽에 보면 훈련도감 순라지도와 김홍의 그림이 들어있다.
도성 4대문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모습이 뚜렸하다.
지금으로부터 620년전 중장비도 없었던 시절에 맨손으로 도성을 쌓았다.
세종실록에 보면 이런 상소문이 눈길을 끈다.
" 만일 고쳐쌓은 뒤 무너지게 되면 처음에 쌓던 관원을 시켜서 다시 쌓도록 하소서 "
공사는 모두 철저하게 구간별 책임제하에 실시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돌에 구간 책임자와 감독자의 성명을 새겨 놓았다.
현대에 들어와 교량과 고속도로 구간 건설에 회사명의 돌비석을 세운 것과 같다.
옛 선인들의 슬기로움을 도성길에서 재확인 해보고자 한다.
동대문의 성벽이 연결되고있는 예전 이대병원 건물 위용이다.
파리 몽마르뜨 언덕위에있는 성당을 연상케하는 주변 풍경이 어쩐지 이국적인 것 같다.
이젠 한양 도성박물관으로 변해버린 이대병원 건물을 바라보니 감회가 깊다.
저 병원10층 병동에 간암 말기판정을 받아 입원해있던 후배 생각때문이다.
노래를 좋아했던 그는 항상 월당쌤을 친형보다 더 좋아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병원 건물을 숙연한 마음으로 지나간다.
오른손을 까딱거리며 박자를 맞추던 모습이 그립다.
한양도성박물관 윗쪽에서 내려다분 흥인지문(동대문) 전경이다.
방금 자료집을 펼쳐놓고 교육을 받었던 팔각정도 보인다.
한양 도성길을 한바퀴 돌게되면 다시 이곳으로 도착하게 될 것 이다.
금년내로 답사를 끝내기로 약속들을 했다.
답사가 끝나게되면 한양 도성길에대한 시험을 본다고 한다.
만약 F 학점을 받게되면 이화포럼에서 탈락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하여간에 골때리는 강센 때문에 웃고 산다.
창신동 고갯마루턱에 올라서자 도성길은 평탄해진다.
동대문부근을 지날때 진고개 식당 뒷편쪽으로 올려다 보았던 언덕배기 동네다.
미루나무가 하늘높이 솟아있는 성벽길은 햇살이 따거웠다.
바람이라도 좀 불었으면 좋으련만 숨통이 막혀온다.
이 부분은 근래에 성벽을 다시 신축한 것 같다.
산동네와 연결하는 쪽문도 아담하게 설치해 놓았다.
담쟁이넝쿨이 뜨거운 열기를 식히고 있다.
옛날에는 이 성벽을 경계로 창신동과 성북동을 구분했을 것 이다.
도성의 4대문 안쪽에는 주로 양반들과 대상들이 살았고 밖있쪽은 양민들이 거주했다.
이 거대한 세계적인 도시 한복판에 이런 도성길이 조성되어있는 것도 특이하다.
성벽길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을 무더기로 만난것도 그때문이다.
몸매가 아담한 체구의 아가씨가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한국인은 아닌 것 같아보여 " you are china ? " 하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 no japan " 하며 웃어준다. 월당쌤의 영어가 통한 것 같다.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데 아마 방학을 이용해 온 모양이다.
얼굴이 복스럽게 생겼고 귀염성도 있어 100점 이였다.
사진을 부탁했더니 친절하게 확인까지 시켜준다.
얼굴대신 뒷 모습만 담아 보았다.
일본인 여학생이 서울대병원쪽을 배경으로 찍어주었다.
하늘은 구름이 많았고 서쪽방향에는 먹구름까지 깔려있어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오늘 지광민씨가 이화포럼에 처음 참석을 해주었다.
지방에서 10년정도 생활을 하다가 서울로 입성을 한 뒤 처음 만남이다.
선배님들께 귀경 신고식도 할 겸 무조건 춠헉 했단다.
제석산악회 100산 등정 기념패를 가보로 간직한 사나이다.
낙산은 한양도읍의 주산인 북악산의 좌청룡에 해당 된다.
이렇게 소중한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지닌 낙산은 일제의 강점기때 거의 소실이 되고 말았다.
특히 196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 무분별한 도시계획으로 주택이 난립해 유물로 기능을 상실했다.
근래에 들어 서울시에서는 공원녹지확층 5개년 계획을 세워 복원사업을 추진해 왔다.
서울에 살면서도 낙산을 모르는 시민들이 많은 것도 그때문이다.
낙산의 위치는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선상에 걸쳐있는 화강암으로 된 산이다.
산의 모습이 낙타의 등을 닮았다고 해서 낙타산(駱駝山)으로도 불렀다.
이곳에서부터 성벽의 위용이 본격적으로 들어났다.
서울의 도심속에서 이렇게 고색창연한 성벽을 볼수있어 행복하다.
비록 군데군데 보수된 흔적이 겹쳐있기는 했어도 유연하게 이어지는 곡선은 끝내준다.
큰돌과 작은돌의 맛물림에서 세상살아가는 이치를 보는 듯 하다.
뒷따라가는 월당쌤을 아랑곳 하지않고 강센은 좆빠지게 도망가기만 한다.
그놈의 버르장머리는 세월이 흘렀어도 변하지를 않는다.
메모하고 사진찍고 진짜 월당쌤이 좃빠진다.
이곳 도성길을 연인과의 데이트 장소로 추천을 한다.
밤에는 가로등과 성벽을 비춰주는 조명등까지 설치되어있어 환상적일 것 같다.
동대문에서 혜화동 까지 약1시간30분 정도 밤길 죽여줄것 같다.
성북동 일대의 야경도 한몫을 더해줘 금상첨화가 분명하다.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자세로 걷고있는 뒷모습이 예술이다.
황토흙을 깔아놓아 맨발로 걸어도 좋을 것 같은 길이다. 그동안 울지못했던 매미가 자지러진다.
저멀리 북한산 백운대쪽 흰머리가 뿌연 스모그 현상속에서도 손짖을 해온다.
어떤 장난꾸러기가 " 한양도성을 주세요 " 라고 만들어 놓았다.
화장실에 낙서하던 버릇을 아직도 못버린 것 같다.
오늘 오전 답사구간으로 정했던 혜화문이 반겨준다.
성벽길은 여기 뚝 잘려나가고 혜화문은 고성처럼 외롭게 언덕위에 쓸쓸하다.
성가신 전봇대의 어지러움때문에 사진 찍는데 힘들었다.
남들은 열심히 돈벌려고 애를 쓰는데 팔자좋은 사람들 여기있다.
정오를 가르키는 시계바늘이 배꼽시계와 작당을 했는지 슬슬 시장끼가 들었다.
혜화역 사거리 건늘목을 건너 혜화문 쪽으로 건너간다.
반트럭에 운전수가 카메라를 들이대는 월당쌤을 째려보고 있다.
뜨거운 대낯에 미친놈들도 다있다는 표정이다.
이 녀석은 용케도 말복(末伏)을 잘 넘겨 생명을 유지했다.
사냥개 처럼 보이는데 대로변에다 개장을 만들어 놓아 오가는 사람을 향해 연신 짖어댄다.
새끼까지 무려 네마리가 동시에 악을 써대는데 이웃집들 인심도 좋다.
몸집은 커도 눈망울이 순애빠져 거부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사람도 첫 인상이 좋아야 하는 것 과 똑 같다.
혜화문에 올라 오전 탐방의 일정을 끝내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 문은 성북구 동소문동에 위치해있다. 일명 홍화문으로도 불리고 있는데 1397년에 축조되었다.
그당시 혜화문은 의정부와 양주 포천을 있는 종용한 관문 역활을 톡톡이 했다.
혜화문에는 봉황이 그려저 있는데 이 부근에 새들이 많아 이를 막으려했다고 전한다.
이 건물을 1994년에 새로 복원한 것 이고 위치도 약간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데 성문의 벽모양이 시멘트로 그냥 발라놓은 것 같다.
좌대쪽의 밑돌은 낙안읍성의 성벽돌과 같아 보였다.
사각의 모서리는 다듬질을 해서 부드럽게 곡선으로 맛물리도록 처리를 했다.
혜화문의 성벽을 보수한 돌에비해 자연스럽고 멋까지 들어난다.
옛 선인들의 돌 다루는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한양 도성의 성벽들은 성북동에 들어서자 이상해진다.
어떻게 해서 성벽을 이용해 담벼락을 안쳐놓았는지 기가찰 일이다.
두산빌라 ... 성벽을 이용한 사용료를 톡톡히 지불해야 할 것 같다.
도성길 성벽의 상태가 소실된 구간이 한동안 이어진다.
축구로 유명해진 경신중학교 담벼락을 따라 걸어간다.
이 구간은 아에 성벽의 흔적을 찾아볼 길이 없었다.
이곳 성북동은 1911년에는 경기도 숭신면 성북동에 속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3년 6월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거 경성부에 속하게 되었다.
성북동에 오면 시인 김광섭씨의 " 성북동 비들기 " 가 떠오른다.
한양 도성의 주춧돌이 성북동 삼거리에서 아픔을 들어낸다.
높은 벽돌담이 머리통을 찍어 누룬체 호사를 누린다.
성북동 삼거리에는 이름난 음식점들이 줄지어 입맛을 자극하고 있다.
언젠가 한번 들렸던 것 같은 헴버거 가게도 그대로 였다.
시원한 냉면을 먹자는 의견들이 대부분 이다.
어제도 점심에 냉면을 먹었는데 또 냉면 타령을 한다.
성북동 삼거리 나산가든 식당이 눈에 들어와 찾아들었다.
시원한 물냉면을 먹을까 하다가 양구에서 맛있게 먹었던 회냉면 생각이나서 청했다.
결론은 갈비탕쪽이 훨씬 좋았을 것 같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침식사를 일찍 한 탓에 시장끼가 들어 억지로 그릇을 비웠지만 씁슬하다.
월당쌤을 따라 회냉면을 시킨 조원용씨도 ㅆㅂ 소리를 해댄다.
그래서 냉면 메뉴를 꼴지쪽에 써놓은 것 같다.
친환경 음식문화 자율참여 업소에대한 내용이 눈길을 끓었다.
총8개항을 적어 놓았는데 성북구에서 구민의 건강에 꾀나 신경을 쓰는 것 같다.
먹을 만큼 제공한다. 저염도 식단을 제공한다. 화학조미료 사용금지한다.
그런데 간이 안맞으면 음식맛이 제대로 나올지 모르겠다.
청량리 시장골목에가면 할머니냉면집이 있는데 번호표를 받아야만 한다.
냉면 한그릇 값은 4천원이다. 점심시간대는 엄두가 안난다.
그래도 30분씩 기다려가며 냉면먹기를 고집들 한다
똑소리나게 맵고 맛은 죽여준다.
점심식사를 끝내자마자 강센이 갈길을 재촉해댄다.
이제 와룡산 공원을 향해 돌계단길을 올라서는데 회냉면이 뱄속에서 우글 거린다.
남산쪽에서는 소내기가 내리는지 먹장구름과 함께 천둥소리도 들려온다
어차피 땀으로 젖은 옷인데 차라리 시원하게 한줄기 쏟아젖으면 좋겠다.
평소에 전철역에서 계단 오르기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생활속의 다리 훈련은 그래 필요한 것 이다.
첫번째 돌계단을 올라서자 기분좋은 산책길이 기똥차다.
서울 도심에서 이정도의 공원길이라면 일본 교또의 공원길에 비해 손색이 없다.
여름철의 성악가 매미란 놈들이 귀청이 따갑도록 2옥타브의 목청을 뽐낸다.
매미는 우리가 어린시절부터 함께 놀았던 자연속의 친구였다.
이 녀석들이 살충제 없는 숲속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
잠시도 입을 닫지않는 경암선생께서 죽는 소리를 해댄다.
지난 겨울에 산길에서 발목을 다쳐 고생을 하더니 아직도 완전치 않는 것 같다.
우리 나이에 한 번 삐끗 했다면 치유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제는 자만하지 말고 천천히 걷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60년 넘게 고생해준 육신을 위해서 말이다.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한 와룡공원 정상 쉼터에 도착했다.
와룡(臥龍) 이란 뜻은 누워있는 용(龍)을 말한다. 이곳 지형의 형태를 표현한 말이다.
원래 이 와룡공원은 흙의 층이 얕아 수목생육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 비교적 잘 자라는 아카시아 나무로 조성을 했으니 주민들이 팔을 걷고 나섰단다.
생명의 나무 1.000만 구루 심기 행사를 벌려 수목을 심고 가꾸웠다고 한다.
이제는 계절별로 아름다운 꽃이 만개하는 공원으로 탈바꿈 했다.
와룡공원에서 부터는 본격적인 북악산 성벽길의 시작이 된다.
이곳에서 말바위전망대 이정표를 따라 성벽을 바짝끼고 돌아가는 길은 운치가 그만이다.
이런길은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잡고 소곤소곤 걸어보야 제맛일 것 같다.
아무리 속이상했어도 이길 한 번 걷고나면 풀어질 것 이다.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는 조사장이 카페지기를 불러세웠다.
이 사진을 삭제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올리기로 했다.
자꾸 튀여나오려는 뱃살의 흉칙함을 증거로 남겨두기 위해서다.
1년후에도 이모양 이라면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억겹의 세월을 성벽과 함께 견디어온 노송의 위용이다.
말 그대로 토종 조선 소나무인데 잉꼬부부처럼 가지 두개가 나란히 정겹다.
젊은 엄마가 꼬마 손을 잡고 내려오다가 잠시 멈춰선다.
카페지기의 카메라를 의식해서인지 모르겠다.
성벽길은 잠시 이곳에서 고약스런 숲속길로 바뀐다.
" 말바위 안내소 가는길 " 안내판을 따라 왼편 급경사 길을 택해도 된다.
이정표 말뚝 꼭대기에 화살표 안내길을 따라 편한길로 들어섰다.
구태여 산길을 훼손해가면서까지 샛길을 만들 필요는 없다.
차라리 왼쪽 길은 페쇠를 했으면 좋겠다.
말바위 안내소로 올라서는 목제 계단길이 멋지다.
성벽 꼭대기로 연결된 목제 계단은 군인들이 주둔하고있는 사무실과 연결된다.
이곳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출임신고서에 신상명세를 기재한다.
신분 확인이 끝나면 번호가 적힌 목걸이를 착용하게 된다.
신분증이 없으면 성벽길 통과가 불가능하다.
말바위 전망대에서 당겨본 그 유명했던 "대원각 " 전경이다.
지금은 법정스님에게 대원각 전체를 시주하여 길상사 라는 절집으로 변했다.
박정희 대통령시절 요정정치의 본산이였던 대원각... 그 사연을 길다.
대원각의 여주인은 김영한 이라는 기생 출신의 요정 마담이였다.
김영한은 1916년에 태여나 1999년에 세상을 떠난 한많은 인생을 살아온 여인이다.
15세의 어린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남편은 우물에 빠저 죽고 청상과부가 됐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뒤 함흥으로 이주를 했고 그곳에서 연인을 만난다.
고교 스승이였던 백석을 만나 운명적사랑에 빠지고 만다.
백석은 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주고 3년간 동거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백석의 부친께서 아들을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켜 버렸다.
백석은 결혼 첫날밤 도망을 친뒤 영한에게 돌아와 외국으로 함께 떠나자고 제의를 해왔다.
영한은 백석의 앞날을 위해 자신이 그 곁에서 사라지기로 결심을 한다.
결국 백석은 홀로 러시아로 떠났고 그들의 인연은 끝이 됐다.
해방을 맞게되자 영한은 서울로 들어와 요정을 열어 큰돈을 벌었다.
영한은 살아생전 백석의 생일이 돌아오면 곡기를 끊고 방안에서 불경을 읽으며 백석을 기다렸단다.
또한 그당시 2억원이라는 큰돈을 기탁해 백석문학상을 재정해 문학도를 지원했다.
영한은 이렇게 한많은 사랑을 저승에 가서 이루겠다고 법정스님을 찾았다.
그의 전재산 1천억원을 법정스님에게 시주를 하겠다는 것 이였다.
법정스님은 이를 거절하고 자신이 머물고있는 송광사에 기증을 하게 된다.
그당시 영한은 " 1천억 재산이 어찌 백석의 시 한줄에 비할수 있으랴 ~ " 라는 명언을 남겼다.
길상사라는 절 이름은 법정스님이 영한에게 선물한 " 길상화보살 " 이라는 법명이다.
1997년 11월 대원각이 사찰 길상사로 변하는 날 수많은 관중앞에서 한 말이있다.
" 저는 죄많은 여인입니다." "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 "
"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 갈아입는 곳이였습니다. "
"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입니다. "
영한은 1999년 한많은 세상과의 연을 끊고 백석에게로 돌아갔다.
이승을 떠나기 하루전 목욕 제개하고 절에 들어와 참배를 한 뒤 길상현에서 마지막 밤을 지냈다.
화장을 한 그녀의 유골은 유언에 따라 첫눈이 내리던 날 길상현 뒷쪽 언덕바지에 뿌려젖다.
길상사에서는 그 자리에 조그만한 비석하나로 공덕비를 세워주었다.
잠시 길상사에 얽힌 이야기로 도성길이 삼천포로 빠젖다.
길상사가 있는 성북동 일대에는 각국의 대사관 관저가 37나 자리잡고 있다.
그래 도모명도 " 대산관로 " 이다. 각나라별 국기들이 장관을 이룬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성북동의 모습은 알프스를 방불케 한다.
서울의 이색적인 풍경에 한동안 넋을 잃었다.
지난번 도성길 첫번째 나들이때 길상사를 들렸었다.
우선 절집의 인식에서 크게 벗어난 건물들이 눈길을 끓수 밖에 없었다.
10년전 1천억원 이라면 그 돈의 가치를 평가하기 힘들다.
부처님께서 그 시주금액을 알고 계실지 모르겠다.
여인의 사랑 .. 현세에서는 없을 일이다.
말바위 전망대에서 경관에 취해 한참을 서성거렸다.
이제 북악산 서울성곽길 탐방로를 따라 말바위 안내소로 향한다.
잘 자란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갈림길 전경이다.
입산 신고를 하기위해 말바위 안내소에 올라섰다.
이 구간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있어 카메라를 배낭에 넣고 들어가야 한다.
안내소 건물 1층에는 화장실이 갖춰져 있어 편리했다.
사복 차림을한 젊은 군인들 4명이 신고서 작성을 받고 신분증과 대조를 했다.
이곳을 두번째 찾아온 카페지기는 동료들을 도와주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북악산 성벽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좌측편 목제담장 안에는 군부대 시설들이 성벽을 따라 들어서있다.
저멀리 산꼭대기에 숙정문의 집웅도 눈에 들어온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초소가 설치되어 탐방객 감시를 한다.
청와대 바로 뒷산인 관계로 경계가 삼엄하다.
숙정문(肅靖門) 밖았쪽에서 현판을 향해 모습을 담았다.
문 안쪽에 만들어 놓은 사슴이 진짜처럼 보여 재미있다. 일명 숙청문(肅淸門)이라고도 한다.
1395년 태조4년에 숙청문으로 건립이 되었다가 1413년 태종13년에 폐쇠를 했다.
그것은 풍수지리학상 이 숙정문의 위치가 주산인 북악산을 혜친다고 해서다.
또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들이 음란해진다고 믿었다.
그래 항상 이 숙정문을 닫아 놓았다고 하니 무용지물이다.
음기(陰氣)가 쎄다는 숙정문 안쪽 쉼터에서 땀을 씻는다.
비록 영감들이긴 해도 아직 마음들은 청춘인지라 장안의 바람난 여인이라도 건젖으면 좋겠단다.
1523년(중종18년) 이후의 각 실록에 숙정문으로 개칭되어 기록되어 있다.
어떤 연유로 숙청문을 개명했는지 원인은 알수 없지만 " 정숙하고 고요한 문 " 의 뜻은 좋다.
어쩌면 풍수지리적 음기를 몰아내기 위한 개명인지도 모른다.
청운대(293m) 정상으로 가는길에 뒤돌아본 북악산 성벽길 이다.
말바위 전망대에서 여기까지 줄곳 오르막 돌계단길이여서 무릎이 팍팍해 진다.
지금 땀을 팟죽같이 쏟아내며 박상길 회원이 계단길에서 힘들다.
카페지기 고향에서는 수제 집안으로 소문이난 부러움의 대상이였던 분이다.
3형제 모두가 서울대학교를 단번에 붙어 고을에 경사가 낮다.
그런데 머리 좋은것 과 다리심은 전혀 관계가 없다.
북악산(342m) 정상의 동생겪인 청운대 돌비석이다.
첫댓글 서울둘레길 끝나면 제2탄으로 부탁 드립니다.
청와대 뒷산 성벽길이 너무 멋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