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1. 관노비들.
일제강점기. 조선시대 천민들은 가장 차별받았지만 이같은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고전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도 없지 않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초 인물화로 명성을 떨친 최경은 경기도 안산에서 소금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발휘해 도화서 화원이 됐다. 최경은 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의 초상화를 그렸다. 성종(1457~1494·재위 1469~1494
)은 태어나던 해에 의경세자(1438~1457)가 갑자기 사망해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아들은 기억에 없는 아버지를 늘 그리워했다.
오세창(1864~1953)이 편찬한 한국 역대서화가 사전 <근역서화징>에 따르면, 성종은 초상화가 완성되자 깊은 감회에 빠졌다. 마치 살아있는 아버지를 대하듯 울컥했다. 성종은 너무 감격한 나머지 천한 출신의 최경에게 당상관의 벼슬을 하사했다. 하지만 언관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실록은 지배자들이 주인공이지만, 고전은 한국사의 잊혀진 아웃사이더들도 주연으로 등장시킨다. 성종 때 문신 이륙(1438~1498)의 <청파극담>도 최경을 언급하는데 "화공 최경은 70여 세가 되었어도 눈이 밝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일찍이 덕종대왕(의경세자)의 초상을 그리니 임금께서 보고 사모하다가 특별한 은총을 내렸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최경은 배움이 짧아 인품이 그다지 높지 못했던 모양이다. 권력에 아부하고 권력자를 팔고 다녔다는 것이다. <청파극담>은 "최경은 사람됨이 경박하여 당시의 문벌 재상들이 모두 자신의 절친한 친척이라 말하였다.
상당부원군 한명회 공이 두 임금의 장인이 되어 권세가 세상을 뒤엎을 만하자 최경은 공을 상당형이라 받으면서 환심을 샀다"고 전한다.
중종어진 제작에 참여한 이상좌는 최경 보다도 신분이 더 낮은 노비였다. 그러나 그림 실력이 뛰어나 도화서 화원으로 발탁됐다. 그는 아들 이흥효와 함께 부자화가로 이름을 빛냈다.
<근역서화징>는 "이상좌는 노비였지만 어릴 때부터 그림솜씨가 널리 알려져 중종의 특명으로 양민으로
신분이 격상돼 도화서에 배속됐다. 그는 중종이 승하하자 중종의 어진을 그렸다.
명종 1년(1546)에는 공신들의 초상화를 제작해 훗날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그의 재주를 물려받은 아들 이흥효도 명종의 어진을 그려 수문장직을 하사받았다"
고 했다. 대를 이어서 왕의 총애를 받았던 것이다.
역시 천민인 백대붕은 천재 시인이었다. 그런 그는 특출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신분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 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1681∼1763)이 펴낸 <성호사설>에 따르면, 백대붕은 전함사(전함을 수리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노비였다.
글을 어깨 넘어로 배웠지만 문장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백발로 풍진을 무릅 쓰는 종의 신세"라고 한탄했다. 종의 처지였지만 공경대부도 그의 문장에 감탄해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백대붕은 일본통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백대붕의 재주는 묻히게 된다. 임진왜란 때 순변사 이일의 휘하에 들어가 상주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것이다. 이익은 "천인은 아무리 기이한 재주가 있더라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고 한평생 천인으로 살아야 한다. 나는 그를 매우 가엾게 여긴다"고 안타까워했다.
백대붕은 같은 천민 출신의 유희경(1545~1636)과 절친이었다. 문학모임을 만들어 현실의 울분을 시로 달랬다. <성호사설>은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가 한 질이나 됐다"고 소개한다. 유희경은 그러나 백대붕과 달리 92세까지 장수했으며 말년엔 벼슬 운도 따라 종2품 가의대부에 올랐다.
정3품 수군절도사를 지낸 유극량(?~1592)도 천민이었다. 18세기 후반 작자 미상의 전기 <좌계부담>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 옥대가 영의정 홍섬(1504~1585)의 노비였다. 옥대는 옥술잔을 깨자 처벌을 두려워해 도망쳤다. 조령에 이르러 탈진해 쓰러진 것을 유좌수란 인물이 구해 살렸다.
유좌수는 옥대의 미모에 반해 후처로 삼고 유극량을 낳았다. 유극량은 무예를 배워 선조 초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장수의 재주를 지녀 벼슬이 계속 높아졌다. 유극량의 어머니는 아들의 신분이 탄로 나 곤경에 처할까 항상 두려움에 떨었다.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유극량은 홍섬을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고 벌 줄 것을 청했다. 그러자 홍섬은 이를 기특하게 여겨 "너는 나의 노비가 아니다"며 양인으로 방면했다. 유극량은 벼슬이 전라좌수사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임진강 전투에서 적의 복병을 만나 싸우다가 목숨을 잃는다.
정조때 발간된 조선 태조에서 숙종때까지의 주요 인물 전기집 <국조인물고>는 희안하게도 양반으로서 어진제작에 참여한 인물도 다루고 있다. 바로 채무일(1496~1546)이다.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채무일은 궁중 화가가 아니라 문과에 급제한 사대부였다.
45세이던 1540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종4품 한성부서윤에 이르렀다. 경사(經史)와 역(易)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음률, 의학 등에도 소질이 있었다. 그런데 중종이 승하한 후 천거를 받아 종종의 어진을 그려 많은 상과 벼슬을 받았다. 그는 풀벌레 그림을 특히 잘 그렸다.
천민 등 낮은 계층에서 주로 승려로 출가하지만 놀랍게도 양반으로서 승려가 된 사람도 있었다. 그는 시를 잘 썼다.
<좌계부담>은 "('9차 직교라틴방진'을 발견한 조선 최고 수학자) 최석정(1646~1715)이 청나라 사신으로 가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를 지어줬다. 그들 중에 '처묵'이라는 승려도 포함됐다. 그의 성은 최 씨이며 양반으로 중이 됐다"며 "여러 곳을 유람하면서 시를 지었는데 대부분 뛰어난 작품이었다.
최석정에게 써 준 '요하의 만리 바람은 거센데. 천년의 화표주(고대 중국 궁궐 입구에 세우던 기둥)에 달빛은 다시 비추네. 슬프다, 그대 이 길을 떠나니…'라는 시가 처묵의 여러 작품 중 가장 훌륭하다"고 논평했다.
고려시대 화가 이녕은 한국의 역대 화가 중 최고의 대가로 꼽힌다. 하지만 중국 황제 중 가장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가졌던 송나라 제8대 휘종을 놀라게 한 솜씨를 지녔는데도 오늘날에는 그 자취를 찾기 힘든 '잊혀진 대가'다.
<근역서화징>에 그의 업적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이에 따르면, 이녕이 사신단에 끼어 송나라를 방문하자 휘종은 그를 시험하기 위해 우리나라 예성강을 그려 보라고 명했다. 휘종은 이녕이 그림을 그려 바치자 감탄하면서 "고려 화공 중 이녕이 제일 뛰어나다"고 극찬했다.
그러면서 중국 화가들에게 그의 그림을 배우도록 지시했다. 이녕의 재주를 보여주는 일화는 이 뿐 아니다. 고려 제17대 인종(1109~1146·재위 1122~1146)은 송나라 상인에게서 그림을 선물 받자 "중국의 진기한 물건을 얻었다"고 기뻐하면서 여러 화사들에게 자랑했다.
그림을 보던 이녕이 앞으로 나서 "그것은 신이 송나라 사람에게 그려준 것"이라고 고했다. 왕이 놀라며 표구를 뜯어내자 과연 뒤에 그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25. 천민이 그린 아버지 초상화에 울컥한 성종 [역사의 아웃사이더2] / 매일경제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