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74
ㅡ 중국 대륙북방세력과 수나라의 고구려침략 이유 ㅡ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대륙과 해양세력이 만나는 위치에 있다.
중국이 대표하는 북방대륙세력, 일본의 동쪽해양세력 외세로부터 자주 침략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외침받은 횟수를 명확하게 집계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중요한 침략과 외세개입 사례를 기준으로 약 1,000회 가까이 된다.
우리나라 역사기록에 나온 최초 가장 큰 외침은 기원전 2세기 말,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에 막 자리 잡으려하고 있을무렵 중국 한나라 '무제'는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여 한반도 북부 지역을 지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고구려는 건국초기부터 한나라등 중국북방대륙세력과 마찰이 있었다.
고구려는 중국북방대륙세력에 맞서면서 자립과 성장기반을 다져왔던 것이다.
고구려는 계속되는 한나라 위협을 받으면서도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한사군'등 주변소국을 통합하고 강력한 방어력을 갖추며 대륙세력 에 대항한다.
중국대륙은 한나라가 멸망하고 그 유명한 <삼국지의 삼국시대>가 도래한다. 위, 촉, 오 삼국 중 고구려와 국경을 맛대고 있던 '조조'가 세운 '위나라'와 자주 마찰이 있었다.
고구려는 위나라 침입에 맞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서기 244년 '동천왕' 때에는 위나라장군 '관구검'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
관구검은 당시 고구려 수도 '환도성'(丸都城, 현재 중국 지안 시 인근)까지 진격해 환도성과 주변지역을 함락시킨다.
동천왕은 환도성을 버리고 도망쳐 피신해야 했고, 고구려 국토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결국 위나라 침략을 막아내면서 고구려 방어능력과 독립의지가 강해졌고, 이후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영토를 더욱 확장해 나갔다.
우리는 <나관중 삼국지연의>라는 소설 덕택에 중국 삼국시대 역사 에 대해서 우리나라 역사보다 더 상세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중국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중국왕조에 대해서도 <한나라, 삼국시대, 그리고 약간 혼란기를 거쳐 수나라>로 직진한다.
그러나 삼국시대 통일과 수나라에 의한 재통일 과정에는 200여년 가까이 중국역사에 중요한 기간이 있었다. 그 과정을 간략히나마 살펴보자.
중국대륙은 서기 263년, 위나라 출신 '사마염'(사마의의 손자)이 유비 '촉'을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이후 사마염은 위나라 조조가문을 몰아내고 위나라를 장악한 후, 266년에 '진(晉)나라'를 세운다. 진나라는 280년 오나라를 멸망 시키고 마침내 중국을 다시 통일 하면서 삼국시대는 막을 내렸다.
'진나라'는 삼국을 통일했지만, 사마염 사후 정치적 불안정과 권력다툼이 지속되었다. 이 틈을 타서 북방 이민족들이 남하하면서 진나라는 힘을 잃는다. 진나라는 '서진'과 '동진'으로 나누어 진다. 서진은 이민족 선비족이 세운 '전조'(前趙)에 의해 316년에 멸망한다.
서진 몰락이후 중국은 '5호 16국' 혼란기와 '동진'의 남북분열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중국북방에서는 여러 이민족들이 세운 작은 나라들이 나타났고, 남쪽에서는 '진' 왕족이 도망가서 '동진'을 세워 정통성을 이어갔다.
이 시기를 '남북조시대'라고 한다.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는 중국 역사에서 5세기에서 6세기까지 약 150년간 지속된 분열, 대립의 시기였다.
이 시기가 우리나라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 삼국시대와 동행하면서 많은 관계를 가진다.
'남조'(南朝)는 양쯔강 이남을 지배하였으며, 대표적인 왕조로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이 있었다. 주로 한족이 통치하며,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편이었다.
'북조'(北朝)는 북방민족 지배하에 있었으며, 위(魏), 북위(北魏), 서위(西魏), 동위(東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등 왕조가 존재했다. 특히 북방유목 민족인 선비족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며 북위를 세웠다. 북위는 중국화를 추진하며 한족 문화를 수용하고 제도를 정비 했다.
이 시기에는 남북이 서로 다른 체제와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정치적·군사적 경쟁을 벌였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또한 불교가 널리 퍼지고 발전하여, 불교사원과 불상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불교도 대부분 이 시기에 전래 되었다.
이처럼 남북조시대는 중국통일을 이룬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기틀을 마련하는 중요한 전환기 역할을 했다.
'북주'에서 권력을 잡은 '양견'(수 문제)이 '수나라'를 세우고 북중국을 통일한 후, 589년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을 멸망시키며 중국을 재통일하게 된다.
'수문제'는 한동안 혼란스러웠던 중국대륙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 했으며, 중앙집권적이고 효율적인 통치체제를 확립했다.
그리고 나서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한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 가장 두려울 때는 중국대륙이 통일되기 직전이나 되었을 때이다. 한, 당, 원, 청 모두 건국하기 직전이나 건국 후 우리나라를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중국 통일왕조 중 우리나라를 대대적으로 침략하지 않은 나라는 진, 송, 명 뿐이다.
우리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단 한 번 침략하여 '살수대첩'에서 대패 하여 그 원인으로 멸망한 것으로 배워왔다.
그러나 수나라는 수문제, 수양제 에 걸쳐 총 4번 고구려를 침략 했다. 그 4번 무리한 고구려 침략 때문에 수나라가 건국된지 37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그런데 왜 수나라는 그 짧은 기간 에 4번이나 고구려를 침략한 것 일까?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한 이유 는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목적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수나라는 중국 통일을 이루고 주변국가를 압박하며 강력한 제국을 세우고자 했다.
1. 동북아시아 지배권 확립
수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뒤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패권을 확립하려 했다. 고구려는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북부를 차지한 강국으로서 수나라 동북아시아 지배에 큰 장애물로 여겨졌다. 수나라 문제와 양제는 고구려를 정복함으로써 동북아시아를 완전히 장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2. 고구려 성장과 요동지역 분쟁
고구려는 4세기 이후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해 왔으며, 요동 지역을 중심으로 수나라와 영토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특히 고구려는 요동 지역에서 수나라의 세력확대를 막기위해 여러차례 충돌했으며 고구려가 먼저 수나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적대적 으로 보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고구려가 요동방면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수나라 통제력을 위협했기에 '수양제'는 고구려를 정벌대상으로 삼았다.
3. 고구려의 외교적 자주성
고구려는 중국 통일왕조가 등장할 때마다 조공을 바치며 외교적 관계를 유지했지만, 완전히 속국이 되기를 거부하며 자주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예속시키고 중앙집권적 통제를 가하려 했지만, 고구려 저항과 자주적 태도는 수나라에게 부담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력침공을 선택한 것이다.
4. 수양제의 정치적 목적과 권위 과시
수양제는 내정에서 반란과 정치적 불안이 잦아 권위가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외부정벌로 공적을 세우려 했다. 특히 고구려를 정벌함 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과시하고 중국 내 불안 요소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5. 경제적 이익
고구려를 정복하면 고구려 영토와 자원을 차지할 수 있어 경제적 이익도 기대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고, 군사적 요충지 이자 교역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를 차지하면 수나라에 커다란 경제적 이익이 될 것으로 여겼다.
이처럼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 으로 작용해 수나라는 고구려를 정복하려 했지만, 고구려 강력한 저항과 을지문덕 전략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어서 <을지문덕과 살수대첩>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