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규: 비유강해 074. 잃은 양의 비유. 눅15:4-6
[오찬]
사람 사이에 가장 친해지기 쉬운 방법이 식사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그래서, 많은 직장이나 모임 또는 교회에서도 식사를 통한 식탁교제를 매우 많이 활성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줄지언정, 절대로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식사에 초대한다]는 것이 그를 용납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5장1절에 세리와 죄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받아들이시고, 바리세인들의 지적과 같이 종종 세리와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하셨습니다. 여기서 죄인이란 유대인들이 볼 때에, 세리와 창기만 아니라, 그들의 종교의식에서 먼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소위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찾아야 할 대상을 발견하며, 그 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방법을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왜 하필 목자인가?
예수님은 비유 하나를 드실 때에도 의미 없이 것을 사용하신 것이 없습니다.
(1)바리세인(랍비)들은 목자를 매우 싫어하였다.
통상 우리는 목자를 매우 좋은 모습으로 떠올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양의 목자임을 주장하셨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예레미아스의 [비유]라는 책에 보면, P132 죄인의 목록에
①비도덕적 생활을 하는 자(간음하는 자, 속이는 자, 눅18:1)
②불명예스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즉, 공공연하게 사람을 부 정직과 부도덕으로 유인)
따라서 공직 피임권과 법정 증언권을 박탈당한, 사람들 (세리, 세무관, 목자, 당나귀 몰이꾼, 행상인, 피혁공)
(2)왜 싫어했는가?
원래 유대인들은 유목민이기 때문에, 유대 랍비들도 구약의 목자를 존경하였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목자는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 이유는 명확치 않지만, 추정하기는, 이 당시의 목자는 구약시대의 유랑하는 목자와 달리, 정착하여 집이 있는 목자들로,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목자이다. 그들은 양을 치기 위해 종종 남의 땅을 지나야 했고, 남의 재산(도적질)이라고 할 수 있는 풀을 먹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미워하였을 것이다.
(3)따라서 예수님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바리세인들에게,
눅 15장 4절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만일에 너희가 목자라면, 이라고 하시면서, 바리세인과 서기관에게 공격적인 자세를 취 하고 계시는 것이다.
(4)이를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증거하고 계시는 것이다.
눅 5장 29절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눅 5장 30절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눅 5장 3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눅 5장 32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2. 목자는 왜 양 한 마리를 찾으러 나갔는가?
(1)양 백 마리는 어떤 의미인가?
유대에서 양을 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수는 대개 5-15마리 정도의 양을 가지고 있 었고, 100마리 정도를 소유한 사람은 매우 부유한 측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예레 미야스에 의하면 300마리 정도를 소유한 사람은 대농에 속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케네드 베일리(시인과 농부)는 말하기를 100마리를 소유했다기 보다는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그 이유는 그 정도의 양을 가진 사람은 품꾼을 두든지 아니면, 가난 한 친인척에게 양을 치도록 하든지 했을 것이기 때문에 40마리 정도면 몰라도 100마리라면, 목자는 자기 양과 남의 양을 함께 치는 위탁받은 사람일 것이라는 것이다.
즉, [양이 있는데]에 사용된 [엑코]라는 말은 의문문에서 [위탁 관리하다]라고 쓰이기도 하며 따라서, [양 일 백 마리를 돌볼 책임이 있는]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양을 찾은 목자]가 왜 이웃을 불러 기쁨을 함께 하는지 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양을 찾은 것이 바로 [공동체]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2)왜 찾아 나섰는가?
남의 양을 위탁받은 사람은 양을 매일 수를 세어 잃어버린 것이 발견하면 바로 찾아 나서야 합니다. 비록 죽은 양을 찾아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찾아옴으로써 자신의 혐의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3)99마리를 두고 1마리를 찾아가는 것이 합당한가?
많은 사람들은 항상 이 부분에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가?
다른 양들을 맹수가 있는 들에 버려 두고 갔을까? 당신이라면 과연 그렇게 할 까?
물론 아닐 것이다. 예수님의 초점이 [잃은 양]을 찾아 바로 나섰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양들은 들에 버려졌을까?
물론 아니다. 그 양들은 다른 목자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통상 이스라엘에서 양을 치는 것은, 특히 많은 양을 칠 때에는 혼자서 들에 있는 것이 아니 라, 두 세명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4)찾은 양을 왜 메고 왔는가?
통상 목자를 잃은 양은 헤매다가 피곤에 지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목자는 양을 어깨에 메고, 한 손에 두 다리씩 잡고 조심스럽게 돌아오는 것이다. 그것은 양에 대한 목자의 지극한 사랑을 포함한다. 자신도 양을 찾기 위해 피곤하고 지친 몸이지만 찾은 양을 기쁨으로 메고 오는 것이다.
(5)왜 목자는 이웃과 더불어 잔치를 베푸는가?
앞서 설명한 대로 그 양은 자신의 것이거나 공동체의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목자들은 집에 돌아오며, 우리 시골에서처럼 저녁 식사 후에 모여서, 이야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작은 것이지만, 양을 되찾은 기쁨을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다.
**** 예수님의 의미*****
예수님은 당시에 자칭 의롭다하는 바리세인들에게, 그들이 싫어하는 목자를 통하여, 잃었던 양을 찾음에 대한 기쁨을 소개함으로써, 죄인이 회개함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자신이 죄인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오심을 증거하고 계시는 것이다.
3.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우리도 역시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작은 목자이다.
(1)즉시 찾아 나서야 한다.
우리는 잃어버린 양이 없는가?
우리 주위에 아직도 죄악 가운데서 헤매는 죄인은 없는가? 내 가족 중에, 내 형제 중에, 내 집안 중에, 내 구역 중에, 내 이웃 중에...우리는 이제 즉시 찾아 나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들짐승이 양을 헤치듯이 우는 사자같이 돌아다니는 사탄에게 잡히고 만다. 비록 그 길이 험한 골짜기라도, 바위틈이라도, 절벽이라도, 또는 그 길에 사자가 있고 곰이 있고 사나운 들짐승이 있더라도...그래서, [잃은 양]을 찾기까지 찾아 나서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즉시] 찾아 나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찾으면 [메고] 와야 한다.
양을 찾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어디에서 찾았든지 그 양을 안전하게 집으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지쳐 일어서지도 못하는 양을 목 위에 얹고 네 다리를 양손으로 잡아 가슴에 모으고, 힘 이 들지만, 집까지 돌아오는 것입니다.
전도는, [잃은 성도]를 되찾는 것은 이와 같이, 한 번에 복음 소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신앙이 성숙할 때까지, 함께 하며, 도와주며, 희생하는 것 입니다.
이제, 우리도 한 명의 [잃은 양]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로 인도하기까지,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참 신앙인이 될 때까지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로 말미암아, 믿음의 자녀를 생산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찾으면 공동체의 기쁨이 된다.
예수님은 말씀하기를 눅 15장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라는 말과 [기뻐함]이라는 말을 재미있게 사용하셨습니다.
아람어에서 하나는 [하드흐 hadh]이고 기뻐함은 [헤드하 hedhwa]입니다. 즉, 예수님은 비슷한 발음을 통하여, 의미를 더욱 분명히하고 계십니다. 잃은 양을 찾는데 기쁨이 있습니다. [회복의 기쁨]입니다. 잃은 양을 데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에 공동체가 함께 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이 전도하여 열매를 맺음의 기쁨을 소유해야 합니다. 새 신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의 공동체에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도하여 얻은 교인에 대하여,
①[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 하였습니다(빌4:1)빌 4장 1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
②[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같이]하였다고 했습니다(살전2:7)살전 2장 7절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③그들을 위해 목숨을 주기까지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살전2:8)살전 2장 8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기쁨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 론 : [잃은 양을 찾자]
즉시 나서자. 찾을 때까지 찾자. [메고] 돌아오자. 거기에 천국 기쁨이 있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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