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9년 룡정 “3.13”반일운동이후 연변을 중심으로 동북 각지에는 30여개의 조선인반일무장단체들이 활동하고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북로군정서는 주요한 반일무장단체중의 하나였다. 이 반일무장단체의 지도자가 바로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이다. 1881년 2월 26일, 서일은 조선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김희동에서 태여났다. 그의 본명은 서기학이고 초명(初名)은 서정학(徐正学)이다. 호는 백포(白圃), 본관은 리천(利川)이다. 족보에는 아간공(阿干公) 36세손이고 량경공파(良景公波), 양근(杨根)계렬의 함흥문중사람으로 알려진다. 서일은 소년시절에 고향의 서당에서 한학(汉学)을 배웠다. 몇년 동안 서당에서 공부한후 경성함일사범학교의 전신인 “유지의숙”에 입학하였다. 유지의숙은 함경북도 근대화운동의 선구자인 리운섭선생이 세운 의숙인데 몇해후에 “경성함일사범학교”로 개칭되였다. 이 학교는 많은 민족운동가들을 양성해낸 학교이기도 한데 간도국민회군 사령 안무, 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간부인 김병철, 서대문순국자 김학섭 등 독립운동가들이 바로 이 학교출신들이다. 1902년 봄에 서일은 경성함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나서 1910년 “한일합병”때까지 지방에서 교편을 잡았다. 서일은 1911년 가족과 함계 께 두만강을 건너 연변의 왕청현 덕원리로 이주하였다. 서일은 이곳에 발을 붙인후 이해 3월 재기를 도모하는 반일의병들과 대종교인들인 현천묵, 계화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단체 “중광단(重光团)”을 조직하고 본영을 덕원리에 두었다.1912년 10월, 서일은 대종교에 정식으로 입교한 뒤 일부 동지들을 대종교의 포교활동에 내세워 왕청현 덕원리와 그 일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을 대종교에 포섭하였다. 한편 1913년 4월 1일에 5년제 명동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당시의 학생은 32명이고 교원은 2명이였는데 서일이 직접 교장을 맡아나섰다. 1919년 조선에서 전민족적인 “3.1”반일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나고 룡정에서 “3.13”운동이 일어나자 지대한 고무를 받은 서일은 1919년 4월에 원 “중광단”의 토대우에서 대종교 교인들을 핵심으로 하고 반일의병과 공교회 회원들을 더 규합하여 “대한정의단”을 설립하고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8월에 산하에 독립무장단체―“대한군정회”를 조직하고 신민회계통의 무관출신들인 김좌진, 조성환, 리장녕을 초빙하여 군정회를 맡아보도록 하였다. 독립군편성을 위한 서일의 전략적결책이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정의단”은 본영을 왕청현 서대파구에 두고 연변각지에 5분단, 70여지단을 설치하였으며 “단지(断指)결사대” 1,000여명을 두었다. 1919년 봄에 상해에서 대한민국림시정부가 수립된후 서일은 림시정부의 령도를 받기로 하고 그해 10월에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로 개편하였다. 12월에 “대한군정부”는 상해림시정부의 명령에 의해 그 명칭을 “대한군정서”로 개칭하였다. 서간도에 “서로군정서”가 있는데 비추어 “대한군정서”는 “북로군정서”라는 별칭을 가지였다. 서일은 북로군정서의 총재로 부임하였다.당시 북로군정서는 동북의 조선인반일독립단체가운데서 가장 정규적이고 가장 유력한 무장단체로서 500~600명의 병력에 보총 500여자루, 권총 40자루, 기관총 3정을 가지고있었다. 사관련성소는 서일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1920년 3월 1일에 정식으로 개학하였다. 소장은 김좌진이였다. 사관생은 300여명이였는데 주로 대종교산하의 청년들과 명동중학교의 학생들로 이루어졌다. 학습내용은 군사교육과 무기 사용방법, 제조 등이였다. 1919년 12월에 “대한군정부”가 “대한군정서”, 즉 “북로군정서”로 개칭된후 서일은 사관련성소를 세워 군사골간을 양성하는 한편 재무부장 계화와 함께 병력확대와 무기구입에 전력을 다하였다. 1920년 6월, 서일과 계화가 무장경비대를 인솔하여 로씨야 연해주에 가서 많은 무기를 운반해옴으로 하여 사관생들은 전부가 무장을 할수 있게 되였다. 일제측의 자료 “간도에 있어서의 불령선인단의 상황”에 의하면 1920년 8월 북로군정서의 무력은 독립군 약 1,600여명, 군총 1,300자루, 기관총 7정이라고 밝히였다. 동북에서의 독립군의 흥기는 일본제국주의의 지대한 불안을 자아냈다. 이자들은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뒤 7월에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세우고 동북군벌 장작림에게 압력을 가하여 서북간도에 대한 련합“토벌”을 강요하였다. 장작림이 길림성 성장과 연길도윤에게 일본군과 협동작전하여 조선인반일무장대오를 소멸하라는 명령을 내린것은 두말할것 없다. 그러나 조선인의 반일활동을 진작부터 동정하고있던 연길도윤과 륙군퇀장 맹부덕은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빨리 전이할것을 바랐다. 1920년 9월 5일에 맹부덕퇀장산하의 중국군 160여명이 십리평 잣덕에 가서 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 등을 찾았다. 그들은 일본측의 강경한 교섭하에 중국측에서는 부득불 “토벌”하지 않을수 없으므로 연길도윤 도빈과 맹부덕의 명령에 좇아줄것을 간곡히 권유하였다. 군정서 간부들은 처음에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중국측에서 북로군정서의 철수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답복하자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9월 7일, 무기구입에 나섰던 총재와 재무부장 등이 돌어오자 북로군정서는 9월 9일 오전 10시에 본영에서 제1회 사관생졸업식을 앞당기고 298명을 졸업시켰다. 북로군정서의 1,000여명 무장대오는 서일의 령에 좇아 선발대와 본대로 나뉘여 총과 탄약 등 군수품을 4대의 소수레에 싣고 9월 17일부터 근거지를 떠나기 시작하였다. 선발대는 대감자로, 본대는 유수천방면으로 떠나기로 하였다. 이때 유수천방면에 이미 중국군이 동원되였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본대는 서대파의 세번째 부락에서 숙영하고 18일에 대감자의 한 마을에 이르렀다. 부대는 이곳에서 땅속에 묻은 총기 50여자루와 탄약 1,000여발을 파냈다. 또한 군정서 간부들은 회의를 가지고 당지에 100여명 대오를 남기였다.부대가 다시 머무른 곳은 위자구였다. 21일 부대는 위자구를 떠나 남양촌을 거쳐 연집의 신흥동에 이르러 숙영하였다. 다음날 부대는 팔도구부근을 거쳐 차조구일대로 우회하면서 화룡현 청산리일대로 움직이였다. 서일은 후방부대 등을 이끌고 동으로 진출, 수차의 전투속에서 많은 일제침략군을 쓰러눕혔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6일간에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등 부대와 더불어 백운평부근전투, 천수동전투, 왈리구전투, 어랑촌전투, 고동하전투 등 크고작은 10여차의 전투를 진행하여 일제침략군 약 1,200명을 섬멸하였다. 유명한 청산리전투는 서일장군의 방침과 전략포치에 따라 진행한 불멸의 전투였다. 1920년 10월의 청산리전투후 서일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과 신민단, 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등 9개 독립무장단체의 3,500여명 대오는 밀산에 모여 대회합을 이루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는데 서일이 신생한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로 추대되였다. 3,500여명의 독립군부대들은 밀산현 당벽진에서 여러개 부서로 편성된후 로씨야의 원조를 받으며 새로운 투쟁을 도모하고저 로씨야 원동지구의 자유시로 전이하였다. 그러나 로씨야 자유시로 간 리청천, 안무 등의 부대는 뜻하지 않게 로씨야군의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며 무력충돌에서 많은 독립군전사들이 쓰러지고말았다. 이 사건을 “자유시사변” 또는 “흑하사변”이라고도 하는데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산산이 흩어지고만다. 그래도 서일은 쉽게 맥을 버릴수 없었다. 밀산에 남았던 그는 당지에서 둔병제(屯兵制)를 실시하여 다시 힘을 키우려 했으나 마적의 습격은 남아있는 근거지마저 훼멸의 일로에로 몰아넣었다.로씨야 “자유시사변”, 밀산에서의 마적의 습격 등은 서일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 모든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느낀 서일은 1921년 8월 28일 밀산현 당벽진에서 대종교의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调息法)으로 자결하였다.
첫댓글 서일총재 자결 1921년8월27(음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