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하게 잊혀가고 있는 '망각의 공간'이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143~2 춘원 이광수의 옛 집터이다.
사릉역에서 걸어서 20여분 떨어진 사릉천 가까이 있는 '춘원의 옛집' 터이다.
이 공간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역사를 다루는 지역해설사들에게 그 길을 물었다.
또 사릉역 관계자들에게 춘원 옛집을 찾았다.
택시운전사들에게도 그 길을 찾았으나
한마디로 '모른다' '처음 듣는다'는 답변이었다.
결국은 택시를 탔다.
네비게이션에 사릉리 143~2를 입력하고 그를 따라갔다.
그 근처에서 하차하였다. 공사장 일꾼에게 '춘원 옛집'을 물었다.
외제차를 모는 주민도, 지나는 나이 든 여성도 '모른다' '처음 듣는다'고 했다.
"예, 저 나무를 돌아가면 오른쪽에 공터가 나와요. 바로 그곳입니다."
나이가 지긋한 팔순을 바라보는 남성이 자세히 말해서 겨우 찾을 수 있었다.
1944년 3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일제가 발악하던 때였다.
부인 허영숙이 조그마한 농가 기와집 한 채를 지었다. 춘원 이광수가 지낸 곳이다.
춘원은 당시 ‘몸은 지칠대로 다 지쳐서 글 쓸 기력도 없었다.’
그 만큼 건강이 나빴다. 그 당시 춘원은 훼절자로서의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쪽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을 강요했다.
그 틈에서 춘원은 지칠대로 지쳤다.
휴양을 겸해서 세상만사를 잊고 농사나 지으며 살려고 사릉생활을 시작한다.
춘원 옛집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참으로 많이 변했다.
춘원 옛집 뜰앞에는 '사릉리 춘원의 옛집'터임을 알리는 네덩리의 푯돌이 있다.
춘원 이광수 탄생 100주년의 날(1992년 3월 4일)에 '춘원 이광수선생기념사업회'에서 마련한 푯돌이다.
'춘원 이광수 선생의 문학산실'임을 알리는 푯돌이다.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가 1997년 6월 4일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이 유서 깊은 곳에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이 푯돌을 세웠다고 밝히고 있다.
'일제말기인 1944년부터 을유 광복 후 1948년까지 텃밭을 가꾸면서
칩거하는 동안 수필집 <돌벼개>를 초하고 자전소설 <나 스무살 고개편>을
집필한 문학산싫이다.'
그의 수필집 <돌벼개> 서문을 옮겨 새긴 푯돌이다. 사릉리의 삶을 그리고 있는 그 서문이다.
한국근대문학의 아버지 춘원 이광수 선생의 생애를 간결하게 담은 푯돌이다.
이곳 사릉리(思陵里)는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사릉에서 나온 이름이다.
춘원 이광수는 그의 소설 <단종애사>에서 단종을 죽음으로 몰고간 변절자들을 질타했다.
신숙주를 변절자의 상징으로 그렸다. 신숙주의 부인이 단종복위운동에 나선 사육신들이
죽어가던 날 무사히 귀가한 신숙주를 꾸짓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그렸다.
변절자들의 칼춤에 단종은 죽었다. 정순왕후 송씨는 궁에서 쫓겨났다,
그는 도성 밖 낙산 자락 숭인동 청룡사 정업원에서 힘들고 가난한 삶을 꾸려갔다.
그렇게 산 삶을 81세의 일기로 마감한다.
그리고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시댁인 해주 정씨의 선산에 묻힌다.
왕비가 아니였다. 군부인의 자격으로 왕릉이 아닌 묘에 묻힌 정순왕후이다.
후일 단종이 복위되고 정순왕후의 무덤은 사릉(思陵)으로 격이 높아진다.
그 사릉리에서 춘원 이광수는 '변절의 변명'을 고민했다. 그리고 변절의 글을 남겼다.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와 함께 춘원 이광수는 조선이 낳은 3대 천재라고 불렸다.
그는 그들 함께 동경에서 유학하며 꿈을 키웠다. 최남선과 이광수는 반민족 변절자로 돌아섰다.
춘원은 '나의 고백'에서 친일 행각을 이렇게 해명했다.
"전쟁 중에 내가 천황을 부르고 내선일체를 부른 것은
일시 조선 민족에 내릴 듯한 화단(禍端)을 조금이라도 돌리자 한 것이다."
매일신보는 1944년 1월 1일자에 춘원의 자작지 <새해>를 실었다.
“씩씩한 우리 아들들은 총을 메고 전장으로 나가고 /
어여쁜 우리 딸들은 몸뻬를 입고 공장으로 농장으로 나서네 /
이날 설날에 반도 삼천리도 기쁨의 일장기 바다 /
무한한 영광과 희망의 위대한 새해여“
'홍제원의 목욕'은 아주 유명한 해괴한 변명이다.
"우리는 삼천만 민족 전체로서 홍제원 목욕을 하고
다시는 죽더라도 이민족의 지배를 받지 말자고
서약함이 옳기도 하고 효과적이기도 할 것이다."
병자호란 때 청으로 끌려간 여인들은 정절을 잃었다고
받아주지 않았다. 어렵게 조국에 돌아와 고생하다 목숨을 끊기도 한다.
조정에서는 홍제원 냇가에 목욕공간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목욕을 하면
잃은 정절을 회복한, 회절(回節)한 것으로 여긴다는 정책을 마련한다.
1945년 8월 16일 춘원은 집앞 사릉천으로 산책을 나왔다.
참으로 이상했다. 사릉천에서 일하던 보국대 일꾼의 수가 아주 적었다.
그나마 일꾼들은 일도 하지 않았다. 삽을 세워놓고 서성거렸다.
보초병도 없었다.
그때 육촌동생 운허 스님이 두루마기 고름을 풀어헤친 채
바쁜 걸음으로 냇둑을 걸어오며 이광수를 향해 소리쳤다.
“형님, 일본이 항복하였소.
어저께 오정에 일본 천황이 항복 방송을 했다오.
나는 지금 서울로 가는 길이오.”
이광수는 혼란스러웠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춘원은 8·15 해방 이곳에서 근 4년 동안 지난 날에 대한 스스로의
채찍질로 돌베개를 베었다. 1949년 반민법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곧 병보석으로 출감되었다. 또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그의 생애 중 가장 평온하고 행복했던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 평온하고 행복했던 시절도 잠시 동안이었다.
1950년 6월 25일 6·25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고혈압과 폐렴을 치료하던 그에게 부인 허영숙은
피난하자고 요청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서울까지야 오겠소? 대한민국이 그렇게 약하지는 않소.”
거듭된 부인 허영숙의 요청에 “내일 떠나야지”하고 다짐한다.
피난가기로 한 7월 12일,
춘원은 평복에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선두로 한 세 사람에게 끌려갔다.
“담배 서너 곽만 주시오.”
“혈압도 높으신데 한 곽만 가져가세요.”
춘원은 부인 허영숙의 말대로 한 갑을 말없이 받아 넣었다고 한다.
문 밖에는 ‘조그만 하이야’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춘원이 납북 되어가던 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경춘선 사릉역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이정표가 있다.
그 이정표를 지나면 곧 만나는 사릉천이다. 그 사릉천을 건너는 사릉교이다.
사릉교를 건너 왼쪽 사릉천 둑을 걸어서 5분만 가면 '춘원의 사릉리 옛집 터'를 만난다.
사릉천 둑의 왼쪽 아래에 있는 '춘원의 옛집'이다.
1892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으로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1904년에 한성으로 상경하였다.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그는 이지 학원에서 수학하면서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가 발생한 직후, 메이지 학원을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잠시 교편을 잡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17년 그는 결핵에 걸려 고생을 했다.
이 때 간호했던 당시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학생 허영숙과 사귀게 된다.
그는 917년 신한청년당에 가입한다.
신한 청년당 활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최초의 장편 소설 <무정>을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했다.
<무정>은 다음해 단행본을 내어 1만부가 팔렸다.
춘원 이광수는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 문인으로 꼽히게 되었다.
이광수는 여운형의 추천을 받아서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했다.
임시정부 독립신문의 발행을 맡는다.
이광수는 1921년 2월 16일 국내 최초의 산부인과 여의사 허영숙을 다시 만났다.
그는 안창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1년 4월, 허영숙을 따라서 귀국을 택하게 된다.
두 사람은 귀국한지 한달 후인 1921년 5월에 결혼한다.
귀국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인물임에도, 총독부로부터 체포되지 않았다.
이광수는 이때부터 상해 임정 요인들 사이에서 이광수가 일제의 스파이가 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이광수는 1922년 5월 월간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함으로써 친일파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가 변절하기 몇 년 전, 만해 한용운의 성북동 집 심우장을 방문한다.
"네놈은 반드시 배신을 할 놈이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만해 한용운은 그의 행동거지를 살펴본 뒤 심하게 꾸짓고 쫓아냈다.
춘원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이듬해 정신적 스승인 안창호가 사망한다.
춘원은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졌다.
결국 병보석 상태에서 수양동우회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그는 전향을 선언했다.
그 즉시 조선신궁을 참배했다.이렇게 본격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한 춘원 이광수이다.
한국문단의 거목 춘원 이광수, 그의 문학의 산실 옛집은 찾는 이도 없다.
이웃도 거의 잊고 사는 '망각의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