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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 종말적 삶을 산 사람들
성경은 구원받을 수 있을 만큼 의로운 대표적인 인물로 노아, 다니엘, 욥, 세 사람을 예로 들고 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4:14, 20). 이 세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구원을 보장하신 인물들이다. 우연히도 이 세 사람은 모두 다 종말적 삶을 산 사람들이었다.
노아는 패역한 세상의 멸망과 하나님의 심판을 120년 동안이나 외치고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으로 세상이 홍수로 멸망하는 것을 본 사람이었다. 다니엘은 종말에 관한 연속적인 계시를 보면서 혼절하여 앓기까지(단 8:27) 했으며, 베옷을 입고 간구하며(단 9:3) 종말을 느끼고 종말을 체험하며 산 종말의 선지자였다. 욥은 죽음이라는 종말에 직면하여 매순간을 종말적 긴장 속에서 탄식하며 살았던 인간의 종말적 실존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가장 긴박한 종말적 삶을 살았던 세 사람을 하나님께서 택하여 가장 의로운 사람의 상징으로 내세우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이 세 사람의 종말적 삶을 추적하여 그들의 삶속에서 종말적 삶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노아의 종말적 삶
사실 성경의 종말론은 노아 홍수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약 성경은 거듭해서 마지막 종말의 때도 노아 홍수 때와 같겠다고 경고하고 있다(마 24:37-39). 따라서 그 당시 노아가 종말에 대해서 어떻게 대비하고 어떤 종말적 삶을 살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이제 마지막 종말을 눈앞에 두고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필수적인 일이다.
그래야 우리는 종말을 잘 준비하는 일에 보다 더 분명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 그때부터 노아의 종말적 삶은 시작되었다. 홍수는 노아나 그 시대 사람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방주도 만들어 본 경험이 없었다. 노아는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인기 없는 기별을 외쳐야 했다. 방주가 모습을 드러낼수록 조롱의 강도는 커졌고, 노아의 외로움도 깊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실하게 일하므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노아는 종말의 소식을 전파함으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다.
그가 전하는 소식은 그 자신도 듣고 본 일이 없는 기별이었다. “믿음으로 노아는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히 12:7)”.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만이 그로 하여금 아직 보지도 못한 일을 전파하도록 했다.
그러나 노아의 종말적 외침에도 불구하고 천연계에는 어떠한 변화도 발생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가자 처음에는 두려워하던 자들도 이제는 안심하고 그 기별을 일대 망상으로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노아를 조롱하고 광신자로 몰아 붙였다. 그러나 노아는 폭풍우 가운데 반석같이 굳게 섰다. 멸시와 조롱에 둘러싸여 그는 거룩한 성실과 확고부동한 충성으로 스스로를 구별하였다.
노아의 기별이 인기가 없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재림 기별은 인기가 없고 사람들의 주의를 별로 끌지 못한다. 현대인들은 그들의 풍요와 향락이 언젠가 끝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런 시대에 재림 기별을 전한다는 것은 노아처럼 애타는 심정과 언행일치의 생활과 확고부동한 신뢰가 필요하다.
노아는 또한 방주를 지음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실행하는 모본을 보여 주었다. 그가 만일 멸망의 기별을 외치면서도 방주는 짓지 않았다면 그의 외침에는 힘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또한 세상 끝이 올 것을 경고하는 방주를 지으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토지를 넓히고 그의 가옥을 건축하기 시작했다면 방주는 정말 조롱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그가 소유했던 모든 것을 방주를 짓는데 바쳤다. 그러기 때문에 노아가 방주를 건축하는 망치 소리 하나 하나는 백성들에게 종말을 외치는 살아 있는 경고가 되어 울려 퍼졌다.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재림 기별이 힘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외치기만 하지 그것을 위해 준비하는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재림 기별을 외친 다음에는 노아의 경우처럼 방주의 망치 소리가 울려야 하는데 도무지 방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방주를 짓기 위한 어떤 헌신도 가시화되는 것이 없다면, 우리의 대화와 활동과 관심이 방주와는 관계없는 것들이라면 우리 기별 속에서 종말의 긴장은 사라질 것이다.
노아의 종말적 삶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의 모든 시간과 관심과 삶 자체가 종말을 위한 준비였다. 매일 아침 일찍 그는 방주에 가서 하루를 설계했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하루를 살아갈 능력을 간구하고 한편으로는 심판을 외치며, 한편으로는 망치질을 했을 것이다. 하루가 성과 없이 헛되이 지나간 것처럼 보이고 저녁이 오면 그는 또 방주에서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고 부동의 믿음을 일깨웠을 것이다. 그는 자주 하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맑고 푸른 하늘, 에덴동산처럼 아름다운 천연계는 그의 기별을 조롱하는 듯이 보였고, 비가 오거나 홍수가 오는 단 하나의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들을 방주를 만드는데 보냈다.
그가 휘두르는 망치 소리 하나 하나는 그대로 기별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전달되었다. 노아는 끊임없이 깨어 있었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우리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였다. 아마 네 살이나 다섯 살쯤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밤마다 나는 이불에 나란히 누워 이 꼬마에게 성경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러면 텔레비전도 없는 가정에서 사는 이 아이는 눈에 빛을 내면서 성경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다가 잠들 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는 여러 개의 성경 이야기를 해주어도 이 아이가 잠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계속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해줘요” 하면서 조르는 것이었다.
나도 이제는 지치고 졸음이 오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재울까 궁리를 하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그것은 성경 이야기를 해주기는 하되 모두 잠자는 이야기만 골라 해주는 방법이었다. “현민아, 아브라함이 잠잤데. 야곱도 자고, 요셉도 잤단다. 자다가 이상한 꿈도 꾸고 했지. 모세도 자고, 여호수아도 자고, 삼손도 자고 … ”
이만하면 효과가 있겠지 싶어 가만히 아이의 얼굴을 훔쳐보니 자기는커녕 당황한 얼굴로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당황했다. 도대체 누가 잤다고 해야 이 애가 납득을 하고 잠이 들것인가? 그 순간 내가 노아를 빼먹은 것이 생각났다. 노아 할아버지야말로 이 애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옳지, 노아 할아버지가 잤다면 저도 별 수 없이 잠이 들겠지 싶어서 한참 숨을 가다듬은 다음에 말했다. “현민아 노아 할아버지도 코 잤단다 그러니까 너도 자라”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나는 효과가 빠른 것에 놀라면서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잠든 줄 알았던 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아빠! 노아 할아버지는 안 잤어요! 안 잤는데요” 나는 깜짝 놀라 아이를 쳐다보았다.
무슨 중요한 사실이나 발견한 것처럼 아이의 얼굴에는 진지함과 자랑스러움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나는 다시 우겼다. “아냐! 노아 할아버지도 잤어. 왜 안 자!” 그러나 우리 아이의 다음 설명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아빠, 노아 할아버지는 안 잤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잤는데요 노아 할아버지는 손에 망치를 들고 배를 만들면서 안 잤어요. 안 잤다니까요!” 아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그 애는 잠이 들었지만 그날 밤 나는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 노아는 잠들지 않았다. 모두가 깊은 영적인 잠을 자고 있을 때라도 그는 깨어 있었다.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기 없는 기별을 외칠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지만 그는 끊임없이 망치질을 하면서 외로움과 불신을 떨쳐 버리고 확신과 믿음의 못을 박았다. 나는 그런 믿음의 망치를 지금 가지고 있는가? 내 자신과 내 가족을 깨우고 이웃과 민족을 깨울 그런 기별의 망치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그날 밤 깊은 종말적 상념 속에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찬하신 노아와 그 손의 망치를 생각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재림을 위해 준비하며 살아가야 할 이 때에 우리의 삶은 지금 어떠한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우리의 영적 방주는 짓고 있는가? 그 방주를 위해 우리들의 삶과 시간은 투자되고 있는가? 믿음의 망치는 우리 손에 굳게 쥐어져 있는가?
그 망치 소리는 멸망을 향해 치닫는 세상과 우리의 이웃에게 복음의 기별로 울려 퍼지고 있는가?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의 삶은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노아의 삶처럼 종말적인가? 그런 것들이 노아의 삶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이다.
2. 예언적 종말의 선지자 다니엘
다니엘은 종말적 계시 속에서 살았던 선지자였다. 그 종말적 계시가 얼마나 생생하고 그를 놀라게 했는지 그는 “혼절하여 수일 동안 앓기까지(단 8:27)” 하였다. 그는 예언과 종말적 문제를 위하여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단 9:3)”하였다. 따라서 그의 삶은 종말적인 삶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다니엘의 종말적인 삶이었는가?
첫째로 종말에 대한 긴장과 무거운 부담이 그의 생애를 꼴 짓고 있었기 때문에 다니엘은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단 2:21)는 분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역사는 결국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의 일부분이며, 다니엘의 삶 자체도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의 역사 속에 들어가 있음을 그는 절감하였다. 사실상 세계 최대 제국인 바벨론의 총리인 다니엘의 삶이야말로 이 세상 역사와 구속의 역사에 깊이 맞물려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이라는 유대의 한 포로 청년을 통하여 구속사를 이끌어 가고 계셨다. 오늘날 우리도 종말적 역사관과 나의 삶이 그 종말적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의 삶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고 함부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우리 삶의 한순간 한순간이 구속사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은 종말적 긴장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깊이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세상의 운명을 짊어진 사람들이요, 세상의 마지막 종말을 볼 사람들이고, 구속사의 중심인물이요, 마지막 주자들이다.
따라서 재림을 기다리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니엘처럼 종말적 부담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사의 마지막에 내 삶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어야 한다.
둘째로 다니엘의 종말적 삶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기도였다. 사실 다니엘처럼 기도하기 힘든 사람이 없었다. 하나님이 택하셨던 그의 조국은 멸망하였다. 그의 부모는 아마도 죽임을 당하였을 것이며, 그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던 성전은 이방인들의 말발굽에 무참히 짓밟히고 무너져버렸다.
수많은 기도들의 응답을 하나도 보지 못한 채, 그들은 불같이 뜨거운 사막 길을 4개월 이상, 쇠사슬에 묶여 개처럼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무슨 기도를 더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다니엘은 기도를 쉬지 않았다. 다니엘은 기도야말로 역사를 이끌어 가는 힘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 그는 물론 기도하였다(단 2:18-19). 평상시에도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단 6:10-11). 그리고 그의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는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자기 동족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간구하였다.
그는 그가 기도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단 6:10) 하였다. 유명한 다니엘 9장의 간절한 기도가 시작되자마자 가브리엘은 즉시 다니엘에게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 기도는 천사도 움직일 수 있으며 역사도 바꿀 수 있는 힘이다.
셋째로 다니엘의 종말적 삶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느브갓네살이나 다리오같이 특별한 믿음이 없는 이방의 왕들도 비록 신하지만 다니엘을 부를 때는 꼭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라고 불렀다. 그의 삶을 보기만 해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살아 계신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종말적인 삶의 가장 큰 특징이다.
오늘날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떠한가? 누가 보던지 혹은 그렇지 않던 간에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적 삶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깊이 돌아보아야 한다.
종말적 삶은 때로는 처절할 정도로 절실한 것이어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오늘이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인것처럼 진실 되게 살아가는 그 종말적 절실함은 사실상 매우 큰 에너지를 지닌 것으로서 자신과 주위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다.
넷째로 다니엘의 종말적 삶의 특징은 그의 신앙이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갈 때나 왕 앞에 설 때나 사자굴에 갇혀 있을 때나, 총리로 있을 때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의 태도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니엘은 대제국의 총리로 있을 때에도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어떠한 교만도 찾아 볼 수가 없었으며, 늙은 몸으로 사자굴에 들어가 죽게 되었을 때에도 두려움이나 원망함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오늘 죽는다 해도 그 죽음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는 절대 신앙, 그것이 바로 이 순간을 영원처럼, 영원을 이 순간처럼 사는 종말적 삶의 특성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도 다니엘과 같아야 한다.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녔다 할지라도 그 신앙이 변덕스러우면 그것은 종말적 삶이 아니다. 자기의 신앙과 뜻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타락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태도, 혹은 교회가 자기를 인정해 주어야만 믿음이 생기고, 제직으로 뽑아 주어야만 열심이 생기는 그러한 유형의 신앙생활은 재림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종말적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3. 개인적 종말의 삶 – 욥의 삶
오늘이 자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종말적인 삶을 산 사람 중 가장 절실한 사람을 하나 예로 든다면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욥을 들 수 있다. 사람의 중심을 통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욥에 대해 증언하시기를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고 하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욥은 견디기 힘든 고난을 당하였다. 그는 날마다 죽기를 간구하나 그것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매순간 그는 생명의 한계와 부딪치는 종말적 고뇌를 경험하면서 고통스러워하였다. 심지어 그는 차라리 죽음을 사모할(욥 3:11) 정도로 고통스러워하였지만 그는 그러한 큰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치 아니한 것을 기뻐했다(욥 6:10).
그는 고난 중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뢰하였다. 그는 그 고통의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종말적인 삶이란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마지막인 것처럼 맞이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평안하고 안일한 삶이 아니다. 그러한 삶은 외롭고 힘든 삶일지 모르나, 그 모든 길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쓰라린 시련까지도 정금으로 단련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 믿고 살아가는 적극적인 삶이다. 욥은 그런 종말적 삶을 살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적 삶이란, 언제 나의 생명의 끝날지라도, 언제 갑자기 주님의 재림이 있을지라도,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을 사는 것이다. 종말에는 개인적 종말이 있고 역사적 종말이 있다. 자신이 죽는 시간이 개인적 종말이고, 예수께서 재림하는 시간이 역사적 종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개인적 종말의 시간은 역사적 종말의 시간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죽으면, 죽는 그 순간의 상태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것이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에 눈에 안대를 하고 잠이 들었다가 깊은 잠을 잔 후에 아침에 일어나면 안대를 하고 있듯이, 죽음에서 부활하는 순간, 죽을 때의 상태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노아, 다니엘, 욥 같은 사람들은 그런 삶을 산 사람들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노아의 때와 같은” 혼란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다니엘처럼 다가 올 미래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역사의 종말적 흐름을 주시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또한 매 순간의 삶을 종말적 결단의 순간으로 맞이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 살고 있다. 노아, 다니엘, 욥의 종말적 삶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본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들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은 우리에게 큰 용기가 된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