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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스겔 1:4-28절
제목 : 내가 보니
일시 : 2019년 7월 13일
1.
얼척 없다. 이게 뭐람. 괴이한 생물과 바퀴다. 그발 강가에서 포로로 강제노역 중인 에스겔에게 하늘이 열렸다. 하늘이 열렸다 함은 하나님의 등장을 뜻한다. 학자들은 고상하게 신 현현(theophany)라고 한다. 그 동안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보았던 것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에스겔이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들이 흉물스럽다. 무섭다. 도대체 무엇이고, 뭘 말하려는 걸까?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논술과 글쓰기 강의를 할 때, 종종 하는 말이 있다. ‘각 문단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잘 쓰라. 그 가운데는 욕을 써도 괜찮다.’ 욕 하라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만큼 처음과 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곳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 주장하고 싶은 말을 임팩트있게 써야 독자나 심사관의 시선을 잡아챌 수 있다. 그리고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써야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가 모르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글 전체의 여는 말과 닫는 말, 한 단락의 첫 문장과 끝 문장쓰기에 신경을 써야 한다.
희한한 이상을 기록한 본문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과 끝을 읽으면 에스겔이 말하려는 바가 보인다. 그리고 그 굵직한 줄기를 잡고서 앞으로 나아가면 길이 열린다. 퍼즐 맞히기는 전체를 먼저 보고 부분을 맞출 수 있다면, 시간 단축하고, 효과적인 것과 비슷한 이치다.
2.
이 단락의 처음과 끝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첫 부분을 1자 1절로 보면,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 보여준 환상’이고, 4절부터라면,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는데’이다. 그럼 마지막은? ‘주님의 영광이 나타난 모양’이고 ‘말씀하는 이의 음성을 들었다’이다. 여기서 결론을 확정할 수 있다. 하나님이 등장하고 계신 것이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이, 그발 강가에서 포로살이하는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뭔가 할 말이 있어서 나타나신 것이다.
그렇다면, 저 처음과 끝 사이에 있는 내용들, 즉 에스겔이 보았던 네 생물과 바퀴, 보좌, 궁창, 사람과 비슷한 형상은 모두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들이다.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문자화하고, 이미지화한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하려고, 하나님이 짠하고 나타나시기 전에, 이제 곧 하나님이 나타나실 것인데, 그분의 전령이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에스겔은 10장에 가서 이 기이한 형상의 정체를 한 단어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일단, 네 생물의 모양과 바퀴 등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저것이 하나님의 등장, 현현이라고 했다면,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서두와 말미에 담겨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4절은 ‘북쪽에서 거세게 불어오는 폭풍’이다. 이 자체로 놓고 보면, 어렵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밤늦은 시각의 쓸쓸하고 외로운 한 사나이, 한 여인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닐 터. 그럼 뭘까?
예레미야 1장에도 나오고, 하박국 3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남 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활동했던 예언서에서 저런 표현을 자주 본다. 그렇다. 북쪽은 바벨론이고, 폭풍은 심판이다. 더 세게, 더 정확하게 말하면, 멸망이다. 국가의 멸망, 성전의 파괴 말이다. 그러니까 에스겔은, 아니 하나님은 ‘내가 너희 조국 유다를 파멸시키기 위해 일어섰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럼 맨 마지막은 주님의 영광이라고 했다. 무서워서 벌벌 떨며, 제 힘으로 서 있을 수 없어, 다리에 힘이 쭉 빠져서 그대로 털썩 주저앉게 되는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구약의 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화로다, 화로다, 화로다를 외쳤고, 신약의 한 사람은 죄인된 자신을 제대로 인식한 결과, 떠나달라고 간청했다. 이 사람,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다.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그럼,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심판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사실 매치가 잘 안 된다. 그림이 맞지 않다. 영광은 승리와 보상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곧 바로 ‘누가 크냐’를 두고 자리싸움했던 것이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유다의 대적 또는 하나님의 원수를 제압하고, 고통 받던 백성이 승리를 환호하며 영광스러운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 세상의 공식이다. 그런데 영광이 심판이고, 심판이 영광이라니.
3.
실은, 에스겔이 이 환상을 볼 때쯤, 아직 남유다는 망하지 않았다. BC597년에 이곳으로 왔고, 5년이 흘렀다. 아직 BC 586년이 되려면 몇 년 남았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저 심판의 모습은 내가 왜 내 백성 유다를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결의를 보여준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포로로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왜 하나님이 선택한 특별한 백성이요 나라인 유다가 멸망한 것에 대한 이유를 묻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그것은 2장부터 나올 것이니 지금은 여기까지.
요는, 유다의 멸망이, 유다에 대한 심판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이 또한 앞으로 에스겔서를 읽으면서 수면 위로 계속 떠오를 사안이니 여기서는 요지만 간략히 말하자. 유다의 멸망은 곧 유다의 신의 패배라는 것이 당시의 세계관이었다. 그에 따른다면, 남 유다의 멸망은 곧 하나님이 바벨론 신에게 항복한 것이다. 신과 국가의 일체화인데, 성서는 이것을 거절한다.
오히려, 성서는 하나님이 능동적으로 자기 백성을 심판했다고 말한다. 이에 관해서는 예레미야서에서, 그리고 다니엘 1장 1절을 보면 뚜렷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나타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도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위배되기는커녕 부합한다.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에 입각해서 보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해서 심판을 면제 받을 수 없다. 더 가혹한 징벌이 기다리고 있다.
자, 정리하자.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며, 그 심판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다. 아, 참으로 무서운 하나님이로다. 참으로 잔인한 하나님이로다.
[마르틴 루터의 하이델베르크 논제에 나타난 영광의 신학 vs. 십자가의 신학 이야기를 나중에 더 추가할 것]
4.
에스겔이 정밀하게 묘사한 것을 처음과 끝을 통해 가닥을 잡았다고 해서 허투루 넘어가는 것은 올바른 성서 읽기가 아니렷다. 그가 자세히 묘사했던 것은 우리로 하여금 천천히 주목해서 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심판하지만 영광스러운, 영광스럽지만 심판하는 하나님의 실재(reality)를 주시하라는 것이다. 해서, 에스겔은 내가 보았다는 말을 이 단락에 세 번(4절, 15절, 22절)이나 사용했다. 생물을 볼 때, 바퀴를 볼 때, 단과 보좌를 볼 때이다. 그가 본 것을 우리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의 각각의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수리에 관해서 성경 전부를 훑고 과학 지식을 총동원해서 독수리가 의미하는 바로 설교 한편을 만드는 그런 일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에스겔의 환상은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따로 설명할 것이 없으리만치 잘 소통되는 친숙한 이미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에스겔이 바벨론에 살고 있으니 한편으로 유대적이면서도 바벨론적인 신의 이미지가 어느 정도 겹쳐질 것이고, 그러면서도 동일하지 않은 어떤 점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밝히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지금으로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개별 요소에 집착, 집중하지 말라는 것 정도이다. 그리고 네 생물의 이미지가 어떻든지간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너무 너무 분명하다. 그걸 잊지 않으면 된다.
네 생물이 친숙한 신의 이미지라고 가정했는데, 특징은 내가 보기에 두 가지다. 하나는 불 혹은 빛이고, 다른 하나는 기동성이다. 1장에서 불, 빛, 광채 등의 단어를 찾아보라. 수두룩하다. 모세가 불타는 가시떨기에서 하나님을 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의 신인 제우스가 번개의 신이라는 것도 신과 불은 고대의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다.
나는 기민한 움직임에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얼굴과 바퀴가 사방에 있으니 사방 어디로 가던지 간에 곧 바로 직진하면 된다. 방향을 틀기 위해 고심하거나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이 결정을 내리면 밝은 빛을 내면서 엄청난 속도로 즉각 움직인다.
이것은 네 바퀴도 마찬가지다. 바벨론에서 발견된 그림과 조상에서 신들은 바퀴달린 무엇인가를 – 마차/수레일 것이다 – 타고 있다. 스피드가 장난 아이다. 게다가 이것은 전후좌우, 사방 면만이 아니라 위아래로도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인 이 네 생물과 그 생물에 달린 네 바퀴. 뭘까? 무슨 뜻일까? 바로 뒤의 이미지와 하나이라서 그걸 잠깐 보고 이야기하자.
5.
이번에는 보기에 심히 두려웠다는 말로 에스겔은 자신의 공포감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이때 본 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읽은 개역과 개역개정에서 궁창이라고 하는 것인데 새번역에서는 창공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학자들에 의하면, 저 궁창을 ‘단’ 혹은 ‘플랫폼’이라는 뜻도 있단다. 그러니까 교탁을 올려놓은 교단이고, 설교하는 강대상을 두는 곳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서 있는 ‘단’인 것이다. 그래서 이 ‘단’에 대한 묘사 다음은 보좌이다. 보좌는 일반인이 아니라 왕이 앉는 곳이다. 그냥 앉는 의자가 아니다. 식사용이 아니다. 어전회의를 할 때 앉는 의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통치를 묘사하는 이미지들이다.
6.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심판의 역설을 주목했고, 이후에는 네 생물과 네 바퀴, 단과 보좌의 이미지를 통해 공포스럽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형상과 속도와 기동성을 주의했다.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뒤의 것을 먼저 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멀지 않다는 것, 강력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심판이라는 방식을 통해서도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겔은 그 기이한 하나님이 놀라고 무서워서 땅바닥에 엎드렸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니. 그런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니. 그가 본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다. 심판함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
이제 하나님의 성전 이야기할 차례다. 저 환상 속의 이미지와 성전이 어떤 관련이 있을까? 바로 앞에서 네 생물과 네 바퀴가 무슨 뜻일까, 라고 물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현의 상징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의 형상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눈치 챘을 것이다. 그리고 대번에 반문할 것이다. 저게 성전이라고? 예루살렘의 성전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런데 정확하게 저 생물은 체루빔이다. 10장에 보면, 저 정체를 밝힌다. 바로 ‘그룹’들이다. 히브리어로는 체루빔. 그러나 10장에서 그룹은 성전을 떠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 생물들이 천사들이기에 성전으로 등치시킬 수 없지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임에는 틀림없다.
요지는 이것이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직 망하지 않은, 곧 망하게 될 예루살렘 성전에서 떠날 것이다. 무서운 심판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임재가 고정된 건물 형태가 아니기에 어디로든지 이동 가능하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동 가능한 성전 vs. 이동할 수 없는 성전.
하나님을 특정한 공간에 가두는 성전 vs.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나님, 그 하나님의 자유롭게 하고, 자유롭게 신앙하게 하는 성전의 대결 구도이다. 슬프지만 장중하고도 공포스럽게 하나님이 건물 성전으로부터 탈주를 감행하신다. 오늘날 교회 건물 짓느라고 다들 애쓴다. 안쓰럽다. 하나님이 떠나면 그냥 시멘트 덩어리거늘 성전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의 임재 여부가 중요한데 말이다.
하나님이 성전을 심판하신다. 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왜곡하니까.
나는 이 대목에서 에스겔의 눈물을 본다. 제사장 출신으로 성전에서의 하룻밤이 다른 어떤 곳, 고급스런 호텔이나 휴양지에서의 천 날 보다 낫다고 시인(시 84:1)은 노래하지 않았던가. 차라리 문지기를 하더라도, 그것은 왕으로 사는 것 보다, 돈 많은 부자로 사는 것 보다 의미 이고 가치 있는 삶이라고, 보람된 삶이라고, 왕과 부자로 사는 일생과 성전 문지기로 보낸 하루를 맞바꿔도 아깝지 않다고 했던 시인이 제사장 출신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지만, 성전이 없는 곳에 강제노역하며 사는 이 사람, 에스겔에는 오매불망 그리운 성전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성전의 멸망에 대한 환상을 보고 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다.
내 감정에 휩싸여서 벗어났다. 돌아가자.
에스겔은 아니 하나님은 건물로서의 성전, 건축물로서의 성전에 대한 날선 비판의 한 복판에 희망의 여운을 슬쩍 드리운다. 바로 무지개(28절)다. 퍼뜩 노아홍수 때의 그 무지개 생각했을 것이다. 맞다, 맞어. 아직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다. 하나님의 잔인한 심판 속에서도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고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던, 하나님과 노아 사이의 언약, 하나님과 온 인류와 체결한 언약의 중심이 희망이다.
하지만, 희망을 말하기에는 지금은 절망의 시기이다.
당신의 영광을 위해 당신의 성전마저 뭉개버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이 무서운 하나님을 에스겔을 통해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건물로 제한하고, 건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얄팍하고도 이기적인 나와 우리 교회들을 본다. 나와 교회를 보시며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 에스겔이 들었으니, 에스겔이 들은 것을 통해 나도 주의 음성 들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