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사에 대한 간략한 정리(1879 - 1871)
1. 19세기 정치사회에 관한 글을 읽다 보면 가장 많이 인용되고 분석되는 것 중 하나가 ‘프랑스의 혁명’에 관한 내용이다. 좌파 정치사상의 태두인 마르크스는 프랑스 혁명 3부작을 썼고, 보수주의의 주역 버크 또한 ‘프랑스 혁명’을 냉정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들 위대한 사상가 뿐 아니라 이후 수많은 소설과 에세이 그리고 정치평론에서 프랑스의 정치 상황은 다양한 이론과 정치적 지평을 제시하는 하나의 공간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각 사상가들의 정치적 관점에 접근하기 전 최대한 이 시대의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분명해진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 이해를 통해서만 학자들의 주관적인 개념과 주장의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1789년부터 1871년까지의 시간 동안 프랑스는 급격한 정치적 변화를 동반했다. 1789년 민중의 폭동으로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입헌군주제로 변하였고 결국 1792년 상퀼로트의 시위로 왕은 페위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공화정의 권력을 장악한 자코팽파는 혁명적 이상의 급격한 실현을 위하여 국가를 중앙집권체제로 통치하며 잔혹한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결국 수많은 충돌과 희생자를 배출한 후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에 의해 권력층은 교체된다. 자코팽파가 몰락하고 온건한 지롱드파와 기타 다른 세력은 ‘총재정부’를 수립한다. 혁명정부는 프랑스에 대한 다른 유럽국가들의 위협에 대항하여 곳곳에서 전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전쟁의 일상화는 정치군인들의 입지를 강화시켰고 결국 1799년 나폴레옹은 쿠테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3.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1804년 스스로 황제에 올랐고 제1제정이 수립되었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이상적인 가치를 수용하는 합리주의적 정책을 집행하고 나폴레옹 법전이라는 근대의 법적 지배의 원칙을 확립하였지만, 프랑스의 전통을 유지하고 팽창주의를 통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정책과 함께 여성차별적인 가부장적 정치질서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과거의 권위주의적 정책 또한 그대로 유지하였다. 나폴레옹의 보수적인 정차태도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통해 드러난다. “여성은 두뇌가 명석하지 못하고 생각이 변덕스럽기 때문에 그들의 사회적 운명은 오직 종교를 통해서만 개척될 수 있다.”
4. 나폴레옹의 위대한 정복 전쟁은 1812년 러시아 원정의 실패, 1815년 워터루 전쟁의 패배로 완전한 실패로 마무리되었다. 프랑스는 다시 부르봉 왕가 후손에 의한 왕정을 수립하였다. 이때의 왕이 루이18세와 샤를 10세였다. 이들은 혁명 이전의 국가체제로 돌아가려 시도했지만 그것은 이제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롭게 변화된 정치사회적 환경은 과거로의 회귀에 대해 저항하였고 그런 시도를 할수록 정치적 입지는 약화되었다. 결국 제1왕정은 1830년 7월 혁명이라는 민중 봉기에 의해 무너진다. 새롭게 왕위에 오른 인물은 루이 필립이었다. 한 역사가는 이러한 역사적 변화 속에서 생성된 다양한 정치 세력(부르봉파, 보나파르트파, 공화파 등)의 경쟁이 프랑스의 역사를 이끌어간 중심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남은 19세기 전반 동안 프랑스는 정당화를 위해 대안으로 제시된 형식들 사이의 충돌과 경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각각의 형식은 정치문화를 통해 경쟁하였고, 거기에는 그들만의 언어, 상징, 지지자들이 있었다.”
5. 루이 필립의 7월 왕정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게 공격받았듯이 ‘부르주아적 왕정’의 성격이 강하였다. 프랑스는 혁명 이후 만들어진 프랑스의 사회의 원칙, 즉 ‘법 앞에서의 평등’과 ‘능력에 따른 출세’라는 질서가 수립되었지만 부르주아 중심의 정치적 환경은 하층민중들의 불만을 자아내었고 결국 1848년 2월 상퀼로트의 후예들에 의한 폭동에 의해 7월 왕정은 무너지게 된다. 정치가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공화정을 선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6월 민중들의 집단적 봉기가 다시 발생한다. 하층계급의 봉기는 프랑스 보수 세력의 공포를 자극했다. 1792년에서 94년에 걸친 공포공치의 끔찍한 기억이었다. ‘적색공포’에 의해 지지를 받은 프랑스 군대는 잔혹하게 봉기를 진압하였고 그해 선거를 통해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선출되게 된 것이다. “우경화의 추세가 나타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남성 보통선거의 도입이었다. 유권자의 수는 25만 명에서 9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새로 포함된 농민들의 투표성향은 파리 노동 운동의 급진주의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6.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 쿠테타를 통해 공화정을 제정으로 전환시켰고 스스로 나폴레옹 3세로 등극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 대하여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소극)으로”이라고 촌평한 것이다.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는 권위주의적이고 후진적인 체제로 운영되었지만 외부적 여건과 시대적 변화에 따른 경제적 발전의 혜택을 어느 정도 받았다. 파리시 정비나 교역량 증가, 국가은행 시스템 수립, 수에즈 운하 건설, 식민지 확장 등과 같은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섣부른 군사적, 외교적 팽창정책은 결국 프로에센과의 전쟁에서 패배를 가져왔으며 결국 제2 제정은 몰락하게 된다.
7. 프랑스 정치인들은 프로이센에 대해 항복을 선언했고 굴욕적인 협상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때 알퐁스 도테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된 ‘알사스와 로렌’의 할양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항복의 이행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파리의 시민들은 급진적인 사회정책을 수립하고 전쟁 책임자를 기소할 것을 요구하며 자치적인 지방정부를 수립하였다. 일명 ‘코뮌’정부가 만들어진 것이다. 프랑스의 동족상잔의 비극은 또다시 발생한다. 프로이센의 점령군이 프랑스에 주둔한 상황에서 프랑스군은 파리를 공격하여 끔찍한 학살극을 벌였고 수많은 시민들을 즉결심판을 통해 처형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역사가의 평은 이렇다. “코뮌은 일종의 신화가 되어 마르크스주의적인 좌파가 오랫동안 그 영웅 이미지를 찬양하게 되었다. 우파는 다른 종류의 신화를 만들어 냈는데, 파리는 난동의 온상이며 붉은 혁명가들과 거친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미친 여자들의 전당이라는 것이다.”
8. 1789년에서 시작되어 1871년까지 진행된 프랑스 혁명사는 롤로코스터와 같은 정치적 격변을 수없이 반복한 시기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정치와 사회에 대하여 토론하고 투쟁하였던 것이다. 이 당시의 대표적인 소설가 스탕달과 발자크의 작품 속 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프랑스는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 속에서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대립은 끔찍한 보복과 학살로 이어졌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 발생하였던 자코팽당의 ‘공포정치’ 뿐 아니라, 왕당파와 민중파 사이에 벌어졌던 잔혹한 보복전과 살육은 프랑스의 땅을 피로 물들였다. 민중들의 봉기는 빅토로 위고의 낭만적이고 시민적인 관점 <레 미제라블>와 같이 찬양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끔찍한 적색의 공포로 인식되기도 한 것이다. 그 결과 전쟁의 와중에서도 1871년 파리 코뮌에 대한 우파 세력의 진압은 유래없는 학살로 끝이 난 것이다.
9. 19세기 사상사를 읽다 보면는 1848년 이후 유럽 사회의 혁명적 열기의 좌절과 이상적 가치에 대한 배신 그리고 유럽을 지배한 무력감에 대한 진술을 만나게 된다. 혁명의 열기는 보수적 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유럽은 한동안 제국주의적 가치와 민족주의적 열망 그리고 식민지 확충과 과학적 기술의 발전에 따른 혜택에 더 주목하게 된 것이다. 1789년 구체제 (앙시앙 레짐) 엄혹한 권력의 통제에 저항한 민중들의 봉기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고 봉건제를 폐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완전한 평등과 자유라는 기치로 진행된 급진세력의 개혁은 끔찍한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이후 보수적 정치세력에게는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 당시 프랑스 혁명 운동에 대한 평가는 사상적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각을 전개한다. 그런 시각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적 사건에 대한 최대한의 객관적 정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런 최소한의 준비없이 사상가들의 주장에 접한다면 위험한 편견에 감염될 수 있다. 왜냐하면 각각의 의견들은 너무도 큰 매력을 지닌 주장과 견해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10. 파리 코뮌을 잔혹하게 진압한 제3 공화정 정부는 아이러니하게도 표면적으로는 어떤 정부보다도 안정되고 발전된 프랑스를 이끌게 된다. 일명 ‘벨 에포크’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결과에 대한 해석 또한 다를 것이다. 우파에서는 과잉된 좌파적 개혁이 갖는 문제점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사회의 각 계급의 균형이 이루어졌고 국가의 통합이 가능했다고 평가할 것이지만, 반면 좌파는 이러한 안정은 과거 혁명적 주장과 실천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한 결과라고 주장할 것이다. ‘희생이 없었다면 결과는 불가능하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치열했던 혁명의 역사를 보면서 역사는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 속에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과거의 사건에 대한 교훈을 바탕으로 정치와 사회의 정책이 만들어졌고, 정치의 방식을 조정하였다는 점이다.
11. 한국의 근현대사와 비교했을 때, 프랑스는 더 끔찍한 학살과 살육이 벌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궁금해진다. ‘과거’를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미래에 대한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현재에 집중하라’는 말은 과거와 미래에 영향받지 말고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라는 개인적 실천에 대한 지침이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문제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현재’에만 몰입한다면, 과거의 의미는 사라지고 미래의 가치는 망각된다. 정치는 현재를 사는 것이지만, 그것은 과거의 역사를 바탕으로 미래의 가치를 구현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현재의 승리와 이득을 위해 과거와 미래를 파괴하는 현재의 정치가들을 보며는, 오로지 현재의 권력에 집착하는 정치적 행위의 위험성은 명확해진다. 치열했던 19세기 프랑스의 역사는 인간의 자유와 안정을 둘러싼 투쟁과 충돌의 결과와 영향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례이다. 역사 속에서 벌어졌던 인간의 실천적 행위와 그 행위가 초래했고 만들어냈던 거대한 흐름을 생각해 본다.
첫댓글 - 과거가 없는 현재는 없고, 미래가 없는 현재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