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 이슬람, 석유, 지하드(Jihad), 테러 등 이 모든 것들이 중동지역에서 얽히고설키어 표출된 것이 뉴욕의 9․11 테러이며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꼬리를 끌고 있는 이라크전쟁이다.
이라크 전쟁은 표면적으로 들어나 보이듯이 이라크와 미국만의 단순한 전쟁이 아니다.
제마부대에 이어 추가파병까지 검토되고 있는 우리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전쟁이다.
이라크전쟁은 초현대전으로서 전쟁자체에 대한 연구의 가치도 중요하겠으나 실 전장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의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파병과 관련하여 반드시 전쟁의 원인을 알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원인을 알면 전쟁의 성격을 알 수 있고, 그것과 연관된 대응조치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전장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우리는 결과보다 먼저인 원인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의 원인은 매체를 통하여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보아온 단편적인 정보로써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도 있는 것들이다.
이라크전쟁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전쟁이다. 원인이 원인을 만들어 내고 결과가 또 원인이 되어 되풀이 되는 전쟁으로, 중세부터 시작하여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
그렇기 때문에 전쟁의 원인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번에 이라크전쟁과 관련된 제반내용을 간추려 전쟁의 배경과 원인, 동기 그리고 전개과정과 결과를 설명하려 한다. 부족하고 어눌한지 알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후 나의 개인적인 생각을 이야기 하려한다. 독자의 양해를 바란다.
이라크전쟁을 쓰면서 월남전에 참전하였을 당시에 월남의 전통과 풍습, 기후, 월남인의 정서에 익숙하지 못하여 겪게 되었던 어려움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파병 장병들의 배경지식을 넓혀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라크전쟁으로 인하여 추가파병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단견(短見)이나마 파병과 관련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파병을 하여도, 하지 않아도 장차 우리에게 끼치게 될 영향(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은 대단히 심각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편이든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있다. 이것이 우리가 약소국임을 절감하게 한다.
우리의 입장은 일본이나 이슬람국가인 터키와는 다르다.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우리와 비슷하지만 일본은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 자위대의 변신이다. 고이지미 내각과 여당은 국제적인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공격이 가능한 군대를 보유하려고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이 일본 자위대를 그런 군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
즉 일본은 미국이 파병요청을 하지 않더라도 자청해서라도 갈판이었다.
그런대 미국이 파병요청을 한 것이다. 고이지미에게는 고소원(固所願)이나 불감청(不敢請)이라, 얼른 수락 한 것이다.
둘째, 페르시아 만에 진출해있는 일본의 해저유전개발회사를 보호하기위한 목적이 있다.
그리고 터키는 파병 결정 후 번복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그 이유는 본문에 설명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한국과 미국은 군사와 경제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특수한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미국이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석유는 국가경제의 원동력이다. 우리가 국내에서 소비하고 있는 석유는 거의 중동산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대부분의 유전은 미국의 석유회사들이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파병과 관련하여 석유 수급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파병은 우리의 국익과 직,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파병군인이나 근로자의 안위와 직결되었다고 볼 때, 우리 모두가 보다 냉정하게 전쟁의 실체를 인식하고, 전쟁의 의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역사적 배경(上)
이라크를 포함한 이슬람교도들은 현재 전 세계인구의 약 1/ 7을 차지한다.
그들은 아프리카로부터 중동, 구(舊)소련,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에 집중적으로 분포 되어 있다.
이들은 분포 지역만큼이나 인종과 언어, 그리고 지역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무슬림 사이에 유별난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고 있다.
이슬람의 역사는 7세기경 아라비아에서 무하마드가 출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622년 무하마드와 추종자들이 종교적 목적을 위하여 야트립(Yathrip = Medina ; 예언자의 도시)으로 이주 하였다.
그 이주를 아랍어로 헤지라(Hijrah 혹은 Hegira)라고 하는데 이슬람들은 자신들의 기원 원년을 622년 헤지라로부터 시작한다.
이슬람교 창시 이전까지 아라비아에는 대부분 베두인족 유목민이 살고 있었다.
이 지역은 인접한 로마와 페르시아조차 관심도 두지 않는 낙후한 불모지로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왕래하는 대상이 거쳐 가는 통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6세기 후반부터 이 길목에 있는 메카가 번창하였다. 무하마드는 570년에 메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고아가 된 그는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하여 경제적인 안정을 얻게 되었다.
무하마드가 중년이 되었을 때 알라(Allah)신의 “예언자”가 되었다.
무하마드는 632년에 생을 마감했으나 추종자들이 아라비아에 흩어져 있던 부족을 통일하였다.
아랍인들은 636년에 비잔틴 군대를 패주시키고 시리아의 안티오크, 다마스쿠스, 예루살렘등 주요 도시들을 정복했으며, 651년 페르시아제국(현재 이라크, 시리아, 이스라엘, 이란, 파키스탄)을 석권했다.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빼앗고, 771년에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에스파냐를 정복했다.
이와 같은 이슬람의 군사적 정복은 자연스럽게 이슬람교의 확산으로 연결 되었다. 그러나 권력과 연계된 종교는 내적인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무하마드가 죽자 추종자 중에서 “예언자(무하마드)의 대리인”을 지명하였다. 대리인은 종교, 정치의 최고 권력자로서 전제군주(王)와 같은 지위였다.
그를 “칼리프(Caliph)"라 불렀다. 이 칼리프국가의 전통을 수용한 종파를 수니파(Sunni)라고 부른다.
656년에 칼리프 우트만이 암살되자, 무하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라(신이 아니고 이름임)가 지지자들에 의해 칼리프에 옹립되었다.
알라의 지지자들은 알라의 후계자만이 칼리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들이 결속한 소수 종파를 시아파(Shia)라 하는데 오늘날 이란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라크에도 많이 있으나 현재 전 세계 이슬람인구의 10%에 불과하다.
750년부터 시작된 암바스 왕조 때에 “아라비안 나이트”에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하룬 알라시드”는 실존 칼리프였다.
그는 서유럽의 프랑크 왕국의 위대한 지도자인 “샤를마뉴”와 대등한 외교관계를 유지 했었다. 그 후 10세기 중반에 시아파에 의해 바그다드가 장악되자 암바스 왕국은 분열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슬람의 지배권이 오늘날 터키와 인도에까지 확대 되었다. 그리고 11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초반까지 십자군이 여러 차례 침략했었다.
십자군 원정대는 한때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지중해 연안에 많은 식민지공국을 건설 했었다.
그 후 1258년 몽골군에 의해 바그다드가 함락됨으로써 암바스 왕조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下)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오토만 트루크가 이슬람제국을 장악하였으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동유럽의 여러 곳과 근동 지역을 지배해 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패전국이 된 오토만 트루크제국의 영토는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 등에 의해 사분오열 되었다.
1919년 파리에서, 승리한 연합국의 주도하에 전후처리 문제에 대하여 회담을 가졌다.
회의결과 이라크(쿠웨이트 포함)와 이스라엘 남부, 사우디아라비아 일부는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고, 시리아와 요르단, 이스라엘의 북부는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그리고 어떤 아랍국가도 독립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영국에 배신(후세인-맥마흔협정)당한 것을 알게 된 아랍인들이 반영투쟁과 민족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은 1920년부터 1940년까지 격렬하게 전개 되었는데 이라크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이 “아랍인의 분노의 시대”라고 하는 이 기간에 독립을 쟁취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아랍제국의 분리 독립은 물론 세계열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특히 러시아와 미국의 변화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되었다.
1917년 7월 독․소 전선에서 ‘케렌스키 공세’가 실패하자 러시아 군대는 와해되었다. 혼란 속에서 볼쉐비키 혁명이 성공하여 러시아는 소련이라는 거대 공산주의 공화국 연방으로 탈바꿈하였다.
안정을 되찾은 소련은 세계 도처에서 갓 독립한 나라들을 목표로 하여 공산화의 마수를 뻗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꼭두각시 정부를 세워놓고, 집단화 하여 소련이 종주국으로 군림하며 초강대국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과 이익을 독식하려 하였다.
한편 후발주자인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무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고립주의를 고수하며 세계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에 관여하지 않으려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영․불이 선점하였기 때문에 미국이 개입할 여지도 없었지만, 오늘날 세계전략의 중심축이 된 중동지역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을 주시하고 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나서 미국은 2년이 넘을 때까지 고립주의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1년 10월에 미국의 구축함이 독일 잠수함의 어뢰공격을 받고 격침되어 100여명이 희생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해 12월 8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으며, 독일과 이탈리아가 대미 선전포고를 하게 됨으로써 미국은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미국은 전쟁수행 과정에서 戰勝이라는 동일목적을 위한 연합국의 영국군과 소련군 그리고 추축국의 독일군, 일본군, 이탈리아군 등이 추구하는 목적이 각각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련은 이미 핀란드, 폴란드, 발트 3국과 발칸제국을 병합했으며, 따뜻한 항구가 있는 흑해의 터키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군은 이집트, 인도, 중동의 유전지대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독일군 역시 소련의 지하자원 지대와, 루마니아의 유전지대를 확보했으며, 코카서스의 석유를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아프리카에서 영국식민지 소말리아를 침공 했으며, 리비아에서 이집트를 향해 진격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석유 확보를 위해 남방 자원지대를 석권하고, 걸림돌이 된 미 태평양함대를 공격하였다.
연합국과 추축국을 막론하고 결국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영토와 지하자원에 지향되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