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鏡虛) 선사는 봉건적 잔재를 깨부수고 오염된 조선불교를 깨끗이 씻어냈다. 경허를 통해 한국불교는 다시 생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경허의 문하에서 배출된 고승들이 주도한 1954년 이후 불교정화운동에 의해 현대 한국불교가 그 목소리를 가진 것을 생각해보면, 한국불교는 선구자 경허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경허는 잿밥에만 골몰하며 목탁을 두드리던 구한말 불교계에 선의 정신과 선종교단으로서 한국불교가 지녀야 할 전통의 복원을 이룬 인물이다.” |
‘이단자’라는 숙명을 감수하고 방랑자로 쓸쓸히 소멸되어간 경허선사의 선과 인생을 재조명한 일지스님의 논평은 확고한 논지로 시작된다. 경허선(鏡虛禪)의 세계를 축약한 <경허집>의 1943년 초판을 몇 번이고 숙고하며 독파한 저자는 평전집필을 위해 선사의 체류지에 대한 답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전승과 기록의 전기를 연대와 사건으로 꼼꼼히 확인했다. 특히 상좌 만공스님과의 선문답 복원에 비중을 뒀다. 만공스님은 스승의 입적 소식을 듣고 ‘경허법사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聞鏡虛法師遷化吟)’라는 시를 읊었다. 잘 알려진 만공의 시 구절 ‘술에 취하여 꽃밭 속에 누우셨도다’에서 스승 경허의 고독했던 일생이 함축되고 있다.
이를 저자는 “술은 세속의 술이 아니다. 꽃밭은 세속의 꽃밭이 아니다. 경허의 술은 자신을 이류중행(異類中行, 중생 속으로 들어가다)에 몰아넣기 위한 미망의 술이며, 꽃밭은 경허 자신이 선택한 가시밭이다”고 썼다.
이어 선사가 함경남도 갑산군 옹이방 도하동에서 입적 당시 저고리 속에는 남긴 게송을 인용했다.
“삼수갑산 깊은 골에
속인도 아니요 중도 아닌 송경허라
천리 고향 인편이 없어
세상 떠난 슬픈 소식은 흰 구름에 부치노라.”
선사의 열반 100년 주년을 기해 나온 책은 ‘경허의 신화와 진실’에서부터 ‘경허선사 연보’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정보를 집대성했다. 가장 치열하게 화두 참구를 정진했던 1879년(34세)의 기록은 극적이다. 그해 6월 일본에서 부산으로 전염된 콜레라가 전국에 퍼졌으며 7월 콜레라로 인해 부산 무역정(貿易停)이 폐쇄되었다.
“경허는 콜레라의 거리에서 동학사로 돌아오는 길에 ‘이 생애가 다하도록 차라리 바보가 되어 지낼지언정 문자에 매이지 않고 조사의 도를 닦아 삼계를 벗어나리라(此生永爲痴?漢 不爲文字所拘繫 參尋祖道 超出三界)’고 다짐하고 강의를 폐지하고 학인들을 모두 해산시킨 뒤, 방문을 닫은 채 꼿꼿이 앉아 참선을 시작.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驪事未去馬事到來)’는 화두를 참구. 다리를 찌르고 머리를 부딪쳐서 수마(睡魔)를 쫓으며 필사적으로 정진.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침. 그해 11월15일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는 소가 된다’는 말을 듣고 대오(大悟).” 한암 중원 선사가 경허의 대오(大悟)를 기록한 내용도 기록됐다.
“이처사의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라는 말을 전해들은 화상의 안목은 정히 움직여(眼目定動), 옛 부처 나기 전의 소식이 몰록 드러나 활연히 현전하였다. 평평한 대지가 꺼지고 물(物)과 아(我)를 함께 잊으며 바로 옛사람이 크게 쉰 곳에 이르니 백천법문과 무량한 묘의(妙義)가 당장 얼음 녹듯이 풀렸다.”
1880년(35세, 고종 17년) 현재의 서산시 고북면 천장암에서 개당설법(開堂說法)을 행할 때의 오도송(悟道頌)은 이렇다.
“홀연히 고삐 뚫을 곳이 없다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나의 집이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 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이어 선사는 1882년부터 1899년 해인사로 주석처를 옮기기 전까지 전국 사찰을 돌며 선풍(禪風) 진작에 나섰다. 기록만으로도 동학사.천장암.서산 부석사.마곡사.장곡사.보석사.예산 용문사.대전 묘각사.사불산 대승사.문경 봉암사 등지에 주석하면서 만공월면(滿空月面).수월(水月).혜월(慧月).침운(枕雲) 스님 등의 제자들을 지도했다. 천장암에서 혜월과 수월에게 보조 지눌의 <수심결(修心訣)>을 강의하고, 승화상인(承華上人)에게〈계차청심법문(契此淸心法門)〉을 설하고 천장암에서 <장상사와 김석두에게 보내는 글(上張上舍金石頭書)〉과〈자암거사에게 보내는 글(上慈庵居士書)〉등의 서간을 썼다.
책은 1884년(39세)에 동학사에서 제자 도암(道岩, 훗날의 滿空)을 처음 만나는 기록에 주목한다. 또 제자 한암 스님과의 만남은 그해 겨울 청암사 수도암에서이다. ‘청암사 수도암에 오르며(上靑巖寺修道庵)’를 쓰고 <금강경>을 강의했다.
이어 1899년 해인사로 주석처를 옮겨, 고종의 칙명으로 대장경을 인출하는 불사와 수선사(修禪社)를 설치하는 불사의 법주(法主)로 추대돼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고 상당법어(上堂法語)를 행하고, ‘해인사수선사방함인(海印寺修禪社芳啣引)’을 작성했고, ‘합천군가야산해인사수선사창건기’, 〈귀취자기(歸就自己)>, 〈범어사총섭방함록서(梵魚寺總攝芳啣錄序)>, ‘남원실상사백장암중수문’ 등을 통해 송광사.태안사.화엄사.지리산 천은사.영원사.실상사 등지의 방문 사실이 확인된다.
저자 일지(一指)스님은 1회 해인학술상(1988)을 수상하고 법사원 불교대학 교수, 민족사 주간을 역임했다. 불교경학연구소를 설립해 경전 강의도 하며 <달마에서 임제까지> 등 수 십 권의 저서를 냈고 2002년 입적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