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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강의(經史講義) 4 ○ 대학(大學) 1 신축년(1781)에 선발된 서정수(徐鼎修), 이시수(李時秀), 홍이건(洪履健), 이익운(李益運), 이종섭(李宗燮), 이동직(李東稷), 이현묵(李顯默), 박종정(朴宗正), 서용보(徐龍輔), 김재찬(金載瓚), 이조승(李祖承), 이석하(李錫夏), 홍인호(洪仁浩), 조윤대(曺允大), 이노춘(李魯春) 등이 답변한 것이다
서(序)
여기에서 ‘천강생민(天降生民)’이라고 하였는데 이미 내렸다[降]고 하고서 또 낳았다[生]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여기의 강(降) 자는 《서경(書經)》 탕고(湯誥)에 나오는 강충(降衷)의 강 자와 동일한 강 자인데 강충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인의예지를 부여해 주었다는 말이니, 내려 준 바는 이(理)이고 기(氣)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유는 대부분 강생(降生)을 한 의미로 보아 전적으로 기에 소속시키고 성을 부여해 주었다는 한 구절은 전적으로 이에 소속시켰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생민이라는 글자는 마땅히 하늘이 내려 준 백성이 되니, 《시경(詩經)》 생민편(生民篇)에 나오는 ‘그 처음 백성을 내시어[厥初生民]’의 생민과 같은 뜻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문세가 끝내 갈라지는 혐의가 생기니, 생을 지닌 백성으로 보는 것이 문세가 순조롭게 붙는 듯한데 강원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익운이 대답하였다.]
내려서 태어나게 한 백성으로 본다면 강(降)이라고 말하고 또 생(生)이라고 말하여 의미가 중첩되는 점이 있고, 생민(生民)과 민생(民生)은 글이 비록 도치되었으나 의미는 실로 같으니, 생을 지닌 백성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성상의 말씀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천자의 원자(元子)와 중자(衆子)로부터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원사(元士)의 적자(適子)에 이르기까지는 이미 모두 국가의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런즉 소학(小學)의 공부가 비록 지극하지 못한 점이 더러 있더라도 공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해서 대인의 학문을 우선 천천히 미룰 수는 없는 것이니, 때문에 나이로써 제한을 삼는 것은 부당하다. 그런데 지금 반드시 8세에 소학에 들어가고 15세에 대학에 들어간다고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또 입학하는 나이에 대해 사람마다 각기 설을 달리한 지 오래되었다. 8세와 15세는 《대대례(大戴禮)》 보부전(保傅傳)에 대한 《백호통(白虎通)》의 설이고, 13세와 20세는 《상서대전(尙書大傳)》의 설인데, 해석하는 자들은 “8세와 15세는 천자의 원자가 입학하는 예이고 13세와 20세는 공경대부와 원사의 적자가 입학하는 시기이다.”라고 말하고, 또 “8세부터 13세까지 모두 소학에 들어갈 수 있고 15세부터 20세까지 모두 대학에 들어갈 수 있으니, 30세에 장가들고 70세에 치사하는 것이 이 한계를 넘지 말도록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어느 설이 맞는가? 그리고 정자와 주자가 특별히 보부전에 대한 《백호통》의 설을 취한 것은 또 근거할 만한 분명한 견해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홍이건이 대답하였다.]
대학과 소학은 본래 두 가지 도가 아니니 소학의 공부가 가령 미진하더라도 해될 것이 없으니 대학 공부 중에 겸하여 치력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입학의 나이는 다만 이 한계를 넘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또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8세에 외부(外傅)에게 나아간다고 하였고 《논어》에서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정자와 주자가 여러 가지 학설을 절충하여 굳이 《백호통》의 설로 귀결을 삼은 것은 아마도 이런 까닭인 듯합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왕자는 8세에 외부(外傅)에게 나아간다고 하였는데 선유들은 이를 천자의 예(禮)로 여겼고, 또 자식이 태어나 10세가 되면 외부에게 나아간다고 하였는데 선유들은 이를 제후의 예로 여겼으니 예의 설이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 게다가 《논어》에서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 것은 바로 성인이 홀로 자신의 진보를 깨달은 말씀이니 더더욱 보통 사람이 감히 비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대체로 정자와 주자가 《백호통》의 설을 따른 것은 그 중간을 잡아서 법도를 일정하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또 이 서문에서는 성(性) 자가 다섯 군데 나온다. ‘인의예지의 성[仁義禮智之性]’이라 하였고, ‘그 성의 있는 바를 알아서[知其性之所有]’라 했고, ‘능히 그 성을 다할 수 있는[能盡其性]’이라 하였고, ‘그 성을 회복하다[復其性]’라 하였고, ‘성분의 고유한 바[性分之固有]’라고 하였다. 어느 것이 본연(本然)의 성이고 어느 것이 기질(氣質)의 성이며, 어느 것이 본연과 기질을 겸해서 말한 것인가? 본연과 기질에 대한 학설은 송유(宋儒)들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인간의 성은 하나일 뿐인데 이미 본연의 성이 있고 또 기질의 성이 있다면 두 개의 성이라는 혐의가 있지 않은가?
[홍이건이 대답하였다.]
다섯 개의 성(性) 자는 모두 본연의 성을 지적한 것인 듯합니다. 기질과 본연의 두 가지 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질 안에서 기와 섞이지 않은 본체를 논하여 본연이라 한 것입니다.
학문을 의미하는 학(學) 자는 《서경》 열명(說命)에서 처음 보이는데 학교의 학 자는 어느 책에 처음 보이는가? 사도(司徒)와 전악(典樂)의 관직이 비록 요순(堯舜)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선유들은 오제(五帝) 때에도 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요순 시대 이전의 학교의 명칭을 지금 또한 상고해 볼 수 있는가?
[서정수가 대답하였다.]
복희(伏羲) 때에 처음으로 팔괘(八卦)를 그리고 서계(書契)를 만들어 백성들이 쓸 것을 미리 마련하여 가르침의 도가 비로소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말하는 자들은 반드시 복희를 먼저 내세웁니다. 선유(先儒) 진력(陳櫟)의 《사서발명(四書發明)》에 이르기를, “요순 이전에 가르침의 도는 이미 세워졌으나 가르치는 방법은 아직 구비되지 않았고 학교의 이름은 알려진 것이 없다.”고 했으니 신이 감히 억측하여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학기(學記)에 이르기를, “대학에서 처음 가르침에 피변(皮弁)을 쓰고 채소를 제사에 올리는 것은 공경의 도리를 보이는 것이다.” 하였고,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무릇 처음 학교를 세우는 자는 반드시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석전(釋奠)을 올린다.”고 하였다. 이 두 설을 살펴보면 상고 시대에 이미 석전의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세에 비록 공자를 철식(腏食)의 주인으로 삼고 있지만 공자 이전에 선성과 선사로 삼아 석전을 올린 대상은 누구인가?
[서정수가 대답하였다.]
상고에 제사한 바는 각기 당시 종주(宗主)로 삼던 성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周) 나라가 천하를 소유하고 나서 사대(四代)의 학(學)을 세웠는데, 우상(虞庠)에서는 순(舜)을 선성으로 삼고 하학(夏學)에서는 우(禹)를 선성으로 삼고 은학(殷學)에서는 탕(湯)을 선성으로 삼고 동교(東膠)에서는 문왕(文王)을 선성으로 삼은 것이 이것입니다.
시관 정지검(鄭志儉)이 이시수(李時秀)에게 선성과 선사의 차이점을 물었는데 이시수가 같다고 대답하였다.
이는 그렇지 않다. 선사(先師)라는 것은 무릇 한 가지 기예의 스승으로 예(禮)에서의 고당생(高堂生)이나 악(樂)에서의 제씨(制氏), 《시경》의 모공(毛公), 《서경》의 복생(伏生)이 이들이다. 《주례(周禮)》에 이른바 “인재를 교육한 자가 죽으면 그를 고종(瞽宗 은 나라의 학궁)에서 제사 지낸다.”는 것이다. 선성(先聖)이란 요, 순, 우, 탕, 문왕, 무왕, 주공, 공자가 이들이다. 예컨대 주 나라에서는 주공(周公)을 선성으로 삼고 노(魯) 나라에서는 공자를 선성으로 삼았으며, 자기 나라에 성인이 없으면 다른 나라의 성인을 빌려서 제사하였으니, 이른바 ‘석전(釋奠)에는 반드시 합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후한(後漢)의 명제(明帝)가 주공을 선성으로 삼고 공자를 선사로 삼으니 선유가 예가 아니라고 하였으며, 당(唐) 무덕(武德) 초년에는 조서를 내려 공자를 선사로 삼았다가 태종(太宗)이 급히 방현령(房玄齡)의 의논을 써서 바로잡았으며, 명(明) 나라의 장총의(張璁議)가 공자를 선성과 선사로 삼자 식자들이 기롱하였다. 선성과 선사를 어찌 혼용하여 칭해도 되는 것이겠는가. 이는 강원이 미처 고찰하지 못한 듯하다.
이 서문에서 허무적멸(虛無寂滅)을 이단(異端)의 학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유학에서도 허령불매(虛靈不昧)니, 적연부동(寂然不動)이니, 정허동직(靜虛動直)이니, 무적무막(無適無莫)이니 하는 설이 있다. 똑같은 허적(虛寂)인데 우리 유학과 이단이 서로 반대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마음으로 마음을 본다는 것[以心觀心]’은 바로 허령불매한 마음과 같은 것이고 세상의 일을 끊어 버린다는 것도 또한 부동에 가깝다. 허적의 아래에 어떤 글자를 놓아야 바야흐로 이단으로 떨어지지 않겠는가?
[이시수가 대답하였다.]
무(無)라 하고 멸(滅)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단이 된 것입니다. 우리 유학은 텅 비었으면서도 능히 있고 고요하면서도 능히 감(感)하는 것입니다.
대학의 규모와 절목은 인군의 직분 내의 일이 아닌 것이 없다. 지금 “몸소 행하여 마음으로 터득한다.”고 한 것은 마치 밖으로 말미암아 안에서 얻어지는 것이 있는 것 같으니 이것을 가지고 저기에 행한다면 혹 도와 더불어 둘이 되는 혐의가 있지 않겠는가?
[이시수가 대답하였다.]
규모와 절목이 아무리 상세하더라도 배우는 자가 능히 마음으로 터득해서 몸소 행하지 못한다면 바로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한다고 한 것이지 자기의 성분(性分) 밖에서 구한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총명하고 예지한 사람이 있어[一有聰明睿智]’의 일유(一有)는 혹 만인 중에 이런 한 사람이 있다는 뜻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일(一) 자를 혹(或) 자의 의미로 보기도 한다. 이런 한 사람이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면 글을 쓰는 것이 의당 유일(有一)이라고 해야지 일유(一有)라고 해서는 안 되며, 혹(或) 자와 같은 의미라고 본다면 자의(字義)가 반드시 유래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진술해 보라.
[이시수가 대답하였다.]
신의 생각에는 숲처럼 많은 사람 중에 이런 명을 받은 한 사람이 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예기》에 우(虞) 나라에는 상상(上庠)과 하상(下庠)이 있고 하(夏) 나라에는 동서(東序)와 서서(西序)가 있고 상(商) 나라에는 우학(右學)과 좌학(左學)이 있고 주 나라에는 동교(東膠)와 우상(虞庠)이 있어 나라의 원로를 봉양하고 일반 노인을 봉양하는 구별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정강성(鄭康成) 이후로는 마침내 상상, 동서, 우학, 동교를 대학(大學)이라 칭하고 하상, 서서, 좌학, 우상을 소학(小學)이라고 하니 이 설이 그럴듯하다. 후세의 유생들은 또 논란하기를, “왕제(王制)에 분명히 이르기를, ‘우상은 나라의 서쪽 교외에 있다’ 하였고 또 ‘소학은 궁궐 남쪽의 왼쪽에 있고 대학은 교외에 있다’고 하였은즉 일반의 노인을 봉양하는 곳이 반드시 소학이라 할 수 없다. 무엇을 가지고 대학과 소학의 이름을 구별하겠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천자의 대학과 소학이 각기 그 명칭을 가지고 있었으니 제후의 대학과 소학도 반드시 명칭이 있었을 것이니 이에 대해 진술하라.
[이시수가 대답하였다.]
사대(四代)의 학교 제도는 각기 가감한 점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수도에 있는 것을 귀하게 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교외에 있는 것을 귀하게 치기도 하였는데, 신은 그 설에 대해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후국의 학교 명칭으로 말하자면 《예기》에서 “천자의 것은 벽옹(辟雍)이라 하고 제후는 반궁(頖宮)이라 한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여기에서 ‘옛날 대학’이라고 하였는데 옛날이란 상고(上古)를 가리키는 것인가, 삼대(三代)를 가리키는 것인가? ‘《대학》이란 책은 옛날 대학에서[大學之書 古之大學]’의 두 개의 대(大) 자는 구본(舊本)에서는 애초 두 가지 음이 없었는데 영락본(永樂本)부터 아래의 대 자를 태(泰)로 읽기 시작하였으니 여기에서 책과 제도로 나뉘어진 것이다. 제도는 어느 시대의 제도이며 책은 누구의 책인지 모르겠다. 사도(司徒)와 전악(典樂)을 학교 제도의 시작으로 삼는다면 이는 당우 시대의 관명이 되는 것인데, 위에서 또 복희, 신농, 황제를 인용한 것은 무슨 뜻인가? 만약 공자가 짓고 증자가 계술(繼述)한 것이 책의 주가 된다면 한(漢) 나라 가규(賈逵)가, “공급(孔伋)이 송(宋) 나라에서 궁하게 살면서 대학(大學)을 지어 경(經)으로 삼고 중용(中庸)을 지어 위(緯)로 삼았다.”고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서용보가 대답하였다.]
《사서몽인(四書蒙引)》에서 이르기를, “고(古) 자는 아마도 삼대(三代)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설도 통합니다만, 삼대 이전에 설(契)이 가르침을 펴고 기(夔)가 주자(胄子)를 교육하였다는 것이 분명히 《상서(尙書)》에 나타나 있으니 상고까지 통틀어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욱 완비된 듯합니다. 복희와 신농씨에 대한 말은 다만 그 도통의 유래를 근원한 것이고, ‘하늘을 이어 법을 세웠다[繼天立極]’는 네 자가 총결론을 맺은 말이 되며, 사도와 전악 이하는 다시 요순이 가르침을 베푼 바를 미루어 부연해서 반복한 것이지 복희 시대에도 사도와 전악의 관직이 있었다고 이른 것은 아닙니다. 무릇 대학의 제도가 시행되지 않은 뒤에야 《대학》 책이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니 부자(夫子)가 경 1장(經一章)을 지었다는 것이나 증자(曾子)가 십전(十傳)을 지은 것에 대해서는 비록 근거할 만한 고문은 없으나 정자와 주자가 이에 대해 반드시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자신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니, 대개 의리를 가지고 추측해야지 이리저리 방증을 찾아 끌어댈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예기》의 명당위(明堂位)에 미름(米廩), 서(序), 고종(瞽宗), 반궁(頖宮)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학교인가? 학궁(學宮)을 반드시 국자(國子)라고 칭하는데 그 뜻은 또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서용보가 대답하였다.]
미름은 우(虞) 나라의 학교이고 서는 하(夏) 나라 때의 학교이고 고종은 은(殷) 나라의 학교이고 반궁은 주(周) 나라의 학교입니다. 학궁을 반드시 국자라고 칭하는 것은 그 뜻을 대개 국중의 자제를 모아 가르친다는 데서 취한 것입니다.
예(禮)로 몸을 다스리고 악(樂)으로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의이다. 그러므로 예악 중 어느 하나라도 폐할 수 없는 것은 수레에 두 바퀴가 있고 새에 두 날개가 있는 것과 같으니, 화(和)를 알아 화만을 하고 예로써 조절하지 않는 것은 또한 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당우(唐虞) 시대에는 전악(典樂)이 주자(胄子)를 가르쳤으니 이미 악(樂) 한쪽으로만 치우친 점이 없지 않고, 주 나라에서는 대사악(大司樂)이 성균의 법을 관장해서 나라의 학정(學政)을 다스렸은즉 학교의 정사가 자못 악(樂) 외에 다른 일이 없었던 듯하니 이는 어째서인가?
[서용보가 대답하였다.]
옛사람이 가르치는 방법은 매양 혈맥을 움직이게 하고 정성(情性)을 함양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터득하게 하고자 하였으므로 반드시 음악으로써 교화하여 인도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습니다. 예와 악이 서로 표리가 되어서 음악의 절주와 춤의 행렬과 저 중화(中和)의 큰 근본이 어느 하나라도 예(禮)가 그 사이에 행해지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소학(小學)에서 동자에게 먼저 육예(六藝)의 문(文)을 가르친다고 하였는데, 문이란 실제로 얻고 몸소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명물(名物)과 도수(度數)일 뿐이다. 그러나 8세 된 어린아이는 어른을 위하여 물 뿌리고 쓸고 응대하는 것이 본래의 직분인데 명물의 학을 먼저 가르치는 것은 너무 성급하지 않겠는가. 어떤 이는 “응대하고 진퇴하는 것이 예의 일이고 작(勺)으로 춤추고 상(象)으로 춤추는 것이 악의 일이니 비록 소학의 동자라 하더라도 어찌 일찍이 예악을 버려두고 학을 하겠는가.”라고 말하는데 이는 진실로 그렇긴 하지만, 길흉군빈(吉凶軍賓)의 예(禮)와 운소호하(雲韶濩夏)의 악(樂) 같은 것을 어찌 8세 된 어린애가 알 수 있는 바이겠으며 어린애가 의당 먼저 해야 할 바이겠는가. 글자에도 상형(象形)과 회의(會意)가 있으니 인(人) 자와 언(言) 자가 합쳐져 신(信) 자가 되고 지(止) 자와 과(戈) 자가 합쳐져 무(武) 자가 된다는 따위를 어린애가 어찌 능히 이해하여 알 수 있겠는가. 구수(九數)의 학은 더더욱 범위가 넓고 미묘하니 어린애가 어찌 알겠으며 비록 알게 한다 하더라도 동자의 초학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김재찬이 대답하였다.]
비록 8세의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능히 육예의 문을 익힌다면 그가 대학에 들어간 후에 미쳐서 효과를 거두기가 쉽습니다. 또 도수(度數)의 학을 가르쳐서 명목(名目)의 말단을 알게 하는 것은 육예를 배움으로써 시간을 그냥 보내지 않게 하려는 뜻입니다.
여기에 ‘다스리고 가르쳐서[治而敎]’라고 하였다. 치(治)는 어떤 뜻이며, 교(敎)는 또한 어떤 방법인가? 그리고 먼저 다스린다고 말하고 나중에 가르친다고 말한 것은 또 어째서인가?
[김재찬이 대답하였다.]
다스린다는 것은 법제와 금령 같은 것이요, 가르친다는 것은 예악과 정교입니다. 대개 수많은 백성들은 제각각이어서 가지런하지 않으므로 임금과 스승의 책임을 맡은 자는 먼저 법제로써 그 가지런하지 않은 것을 가지런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연후에 다시 예악으로 가르쳐 감화시키는 것이니 순서가 부득불 그러한 것입니다.
시관 심염조(沈念祖)가 말하기를, “위 구절에서 만백성의 임금과 스승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 다스리고 가르친다고 하여 위의 군사(君師)란 말을 결론지은 것입니다. 만일 그 선후를 구분한다면 가르치는 것이 의당 다스리는 것보다 먼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다스림과 가르침은 반드시 선후를 구분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대체로 임금이 정사를 펴고 인을 베풀어서 한 명의 남자나 한 명의 여자라도 남김없이 다 그 본연의 성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 치(治)라는 한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예컨대 요임금이 능히 큰 덕을 밝히시니 백성들이 이에 변하여 화하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성인이 완전히 성(性)을 다하여 완전하게 다스려 태평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말하자면 정치와 교육은 비록 의당 병행해야 하겠지만 정치는 더욱이 위로도 통하고 아래로도 통하여 처음과 끝을 이루는 일이다. 대개 다스린다는 것은 자신을 다스리고 남을 다스리는 것을 모두 치(治)라고 이를 수 있으나 가르침에 있어서는 단지 남을 가르친다고는 할 수 있어도 자신을 가르친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서문에서 군사(君師)의 도를 미루어 논하였으므로 비록 치(治)와 교(敎) 두 자를 대로 들어 말하기는 했지만 만약 가르침이 다스림보다 먼저라고 한다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다스린 뒤에야 남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인데 가르침도 남을 다스리는 일이니 어찌 스스로를 다스리지 않고서 먼저 남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 치(治) 자는 자못 대로 말한 것과 같으니 굳이 다스림과 가르침의 선후를 딱 잘라서 나누어 놓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또 여기에 이른바 속유(俗儒)들의 기송(記誦)과 사장(詞章)의 습속이라 하였는데, 옛사람들이 기송이라고 한 것은 정강성(鄭康成)과 유원보(劉原父) 같은 무리들이 이들이며, 사장은 한퇴지(韓退之)와 구양영숙(歐陽永叔) 같은 이들이다. 그렇다면 낙민(洛閩)의 여러 현자들이 경서의 뜻을 새기고 해석한 것은 유독 기송의 유가 아니란 말인가?
[김재찬이 대답하였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는 의리의 본원을 통찰하였으므로 그 경전에 대한 조리와 분석을 통하여 옛 성인을 계승하고 후세의 학자를 열어 준 공이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대(漢代)의 유자들로 말하자면 오로지 명물(名物)과 훈고(訓詁)만을 서로 숭상하였기 때문에 큰 본원에 대해서는 어둡고 천착하는 병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성을 회복한다.[復其性]”고 하였는데 대개 성(性)이란 찾을 만한 형태도 없고 볼만한 자취도 없어서 잡을 수도 없고 일정한 방소도 없는 바로 이치일 뿐이다. 만일 그것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장차 어디에 손을 대야 하겠는가? 선유들은 《논어》의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가지고 복성(復性)의 뜻을 증명하지만 예(禮)란 성(性) 중의 한 가지 덕인데 예를 회복한다면 성의 온전한 덕이 회복되지 않는 것이 없을 수 있겠는가?
[김재찬이 대답하였다.]
인욕(人欲)이 물러나면 천리(天理)는 저절로 회복되는 것이니 성을 회복하는 공부는 진실로 극기보다 먼저 할 것이 없습니다. 예란 천리의 절문(節文)이니 모든 일마다 다 천리에 합당하게 된다면 이것이 복성(復性)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대학》이란 책은 구본(舊本)의 순서가 착란된 것을 명도(明道)와 이천(伊川)이 고쳐 정한 것이니 이미 차이가 없을 수 없다. 주자가 실로 이천의 본을 사용하여 약간 고정(考訂)을 가하여 이 《대학장구》 한 편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의 평생의 정력이 모두 이 책에 있다고 하였은즉 마땅히 만세토록 받들고 믿기를 한결같이 해야 한다. 그런데 후대의 유생으로 왕노재(王魯齋)나 채허재(蔡虛齋)같이 주자의 문하에 귀의한 자들조차도 또한 각기 이론(異論)이 있었고, 심지어 명유(明儒)와 우리나라의 여러 유자들은 더더욱 그 설이 말할 수 없이 분분하였으니, 정자와 주자의 견해가 완전히 좋지만은 못한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후대의 유생들의 식견은 믿지 못할 것이 있어서인가?
[홍인호가 대답하였다.]
선정신 이언적(李彦迪)의 보유(補遺)는 대개 왕노재의 설을 따라 청송장(聽訟章)을 격치전(格致傳)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주자가 정한 정본이 있으니 다른 설은 진실로 논할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권모술수와 백가(百家)의 온갖 기예’라고 하였는데 진신안(陳新安)은 해석하기를, “권모술수는 관중(管仲)과 상앙(商鞅) 같은 무리가 이것이고, 백가의 온갖 기예란 구류(九流) 같은 무리가 이들이다.” 하였는데 구류의 조목을 일일이 거론할 수 있는가? 또 이 《대학》 서문을 선유들은 혹 6개의 큰 문단으로 나누기도 하고 더러는 4개의 큰 문단으로 나누기도 하고 또 3개의 큰 문단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어느 설이 맞는가?
[이종섭이 대답하였다.]
구류의 조목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 말한 유가류(儒家流), 도가류(道家流), 음양가류(陰陽家流), 법가류(法家流), 명가류(名家流), 묵가류(墨家流), 종횡가류(縱橫家流), 잡가류(雜家流), 농가류(農家流)가 이것입니다. 문단을 나누는 의논은 진신안(陳新安)은 6절로 나눌 것을 주장했고 허백운(許白雲)은 4절을 주장했고 왕장주(汪長洲)는 3절을 주장하였는데 피차의 득실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확정하지 못하겠습니다.
석씨(釋氏)도 인욕을 끊어 버리고 우리 유학도 능히 인욕을 제거하는데, 유학에서 사욕을 이기는 것은 예를 회복한다고 하고 석씨가 욕심을 끊는 것은 인의를 막는다고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정자는 일찍이 “인이란 혼연히 상대와 동체가 되는 것이다.”고 말하였고, 불가에도 또한 중생의 마음속엔 모두 부처가 있어 혼연히 일치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나정암(羅整菴)이 그것이 서로 매우 비슷하지만 실은 상반된다는 것을 힘써 변론하였으니, 불교가 인의를 막게 되는 까닭을 쉽게 간파해 낼 수가 없는 것이 이와 같다. 한번 극론해 보라.
[박종정이 대답하였다.]
우리 유가의 학은 마음을 보존하고 성(性)을 기르는 것이고, 불교의 도는 마음을 밝히고 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학은 그 정을 알맞게 조절하나 불교는 그 정을 막아 버리니 정을 막는 폐해가 끝내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는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것이 인의를 막게 되는 연유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나름대로 붙여서 그 빠지고 소략한 부분을 보충하였다.”고 한 것을 주설(註說)에서는 보망장(補亡章)이라고 하였는데, 보망장에서는 또 “간간이 나름대로 정자의 뜻을 취하여 보충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후대의 유생이 기롱하여 말하기를, “자신의 뜻인가, 정자의 뜻인가?”라고 하였는데 그를 기롱한 자들에 대해서는 굳이 많은 변론을 할 것도 없겠지만 자신의 뜻을 붙였다는 데 이르러서는 아마도 보망장으로 해당시켜서는 안 될 듯하다. 혹시 장구 간에 별도로 주자의 뜻으로 보충하였는데 사람들이 미처 고찰하지 못한 것이 있는가?
[이조승이 대답하였다.]
혹 성의정심장(誠意正心章)이 위 글을 잇고 아래 글을 일으키는 설로써 주자가 자기의 뜻을 보충해 넣은 것이라고도 하는데, 달리 근거할 데가 없으므로 감히 반드시 그렇다고 확신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정자(程子)의 학은 대개 주자(周子)의 학을 계승한 것이고 주자(周子)의 학문은 공자와 맹자 천 년의 끊긴 통서를 잇고 하락(河洛) 정자로 이어지는 백세의 전승을 연 것이다. 그렇다면 정자가 계승한 통서는 의당 주자의 학문이어야 할 터인데 《맹자》 편말의 집주에서 맹자의 학을 정자가 이었다고 하고 이 서문에서도 또 정자가 맹자의 통서를 이었다고 하여 주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만일 주자가 일찍이 《대학》을 표장(表章)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맹자》 중에는 어디에 《대학》을 발명한 말이 있기에 반드시 맹자가 증자의 통서를 이었다고 하였는가?
[이석하가 대답하였다.]
사서(四書)는 서로 표리가 되니 《맹자》의 어느 글인들 《대학》의 뜻을 발명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주자(周子)가 도통(道統)에 끼지 못한 것은 장사증(張師曾)도 일찍이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는데, 신은 변론할 만한 설이 없으니 감히 억측으로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대학》 한 책의 취지는 삼강 팔조목(三綱八條目)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삼강이 팔조목의 강령이 되고 명덕(明德)이 또 삼강의 강령이 되니, 주자(朱子)가 《대학》의 서문을 지으면서 마땅히 ‘명명덕(明明德)’이라는 세 글자로 반복하여 그 뜻을 미루어 밝혀야 할 터인데 위아래 수많은 글 중에서 한마디도 명덕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어쩌면 그것에 대해 말하였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살피지 못한 것인가?
[이노춘이 대답하였다.]
주자가 심(心)이란 한 자로 《중용》의 서문을 삼았고 성(性)이란 한 자로 《대학》의 서문을 삼았습니다. 선유는 《중용》 본문에서는 성만 말하고 심을 말하지 않았으며 《대학》에서는 심을 말하고 성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서문에서는 각각 경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바로써 미루어 연역하고 발휘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서문 중에서 성을 부여해 주었다는 대목부터 그 공용(功用)을 역력히 말하였으니 비록 심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심은 또한 그중에 있는 것입니다.
심(心)과 성(性)의 구분을 분명히 말할 수 있는가? 불교에서 지각(知覺)을 성이라 하자 유자들이 그르다고 여겼는데 장자(張子)는 또 성과 지각을 합하여 심이라 이름한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심과 성이 다시 구분이 없는 것이다. 또 선유는 “정(情)은 성이 동(動)한 것이고 의(意)는 심이 발(發)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정과 의의 발현이 둘 다 근원해 나온 바가 따로 있다면 심과 성은 진실로 한가지 물이 아니다. 과연 성과 심은 각자 따로 주장하여 서로 관섭(關涉)하지 않는다는 혐의가 없겠는가? 우리나라의 선유 중에도 혹 “사단(四端)은 이(理)의 발이고 칠정(七情)은 기(氣)의 발이다.”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발하게 만드는 것이 기(氣)이고 발하는 연유는 이(理)이다.”라고 말한 자도 있는데, 이 두 가지 설은 누가 맞고 누가 잘못된 것인가?
[이노춘이 대답하였다.]
기(氣)의 허령(虛靈)한 것을 심(心)이라고 하고 이치가 마음에 부여된 것을 성(性)이라고 말하니 심과 성이 어찌 구분이 없겠습니까. 다만 인심은 지각이 있고 도체(道體)는 작위가 없으니 정(情)과 의(意)의 조작이 비록 모두 성에 근본한 것이긴 하지만 실은 모두 심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선정신 이황(李滉)은 일찍이 이발기발(理發氣發)의 설로써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변론하였는데, 선정신 이이(李珥)는 그것이 이기호발(理氣互發)의 병통이 있다는 이유로 또 스스로 설을 세워서 이르기를, “발하게 하는 것이 기이고 발하는 연유는 이이다.”라고 했습니다. 두 선정의 득실을 신이 어찌 감히 망녕되이 논할 수 있겠습니까만 후대의 유자들은 대부분 이이의 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상은 서(序)이다.
[序]
此云。天降生民。旣曰降。而又曰生者。何也。此降字。與降衷之降同一降字。而降衷云者。卽與之以仁義禮智之謂。則所降者理。而不屬於氣。故先儒多以降生。爲一義。專屬於氣。與之以性一句。專屬於理。然則此生民字。當爲天所降生之民。而與厥初生民之生民同義。如此看則文勢終嫌割裂。而恐不如有生之民 之爲妥帖。未知講員之意何如。益運對。以降生之民看。則言降又言生。未免意疊。生民與民生。文雖倒而義實同。則恐不如有生之民者。聖敎誠允當矣。自天子之元子衆子。以至公卿大夫元士之適子。旣皆有國家之責。則小學之功。雖或未致其極。不容以工夫之未致。姑徐大人之學。此不當以年數爲限。而今必曰八歲入小學。十五入大學者。何也。且入學之年。人各異說也久矣。八歲十五。保傅傳白虎通之說也。十三二十。尙書大傳之說也。而解之者有曰。八歲 十五。天子元子入學之禮也。十三二十。公卿大夫元士適子。入學之期也。又有曰。八歲至十三。皆可以入小學。十五至二十。皆可以入大學。如三十有室。七十致仕之只要勿踰此限。何說爲得。而程朱之特取保傅傳白虎通者。抑有的見之可據而然歟。履健對。大小學。本無二道。小學之工。雖使未盡。不妨於大學之中。兼致其力。則入學年數。特欲其勿踰此限而已。且禮云。八歲出就外傅。論語云。十有五。志于學。程朱之折衷衆說。必以白虎通爲歸者。抑以此歟。禮云王子八歲。出就外舍。而先儒以爲天子之禮。又云子生十年。出就外傅而先儒以爲諸侯之禮。禮之說。亦何常之有哉。至於論語之十五志學。卽聖人獨覺其進之辭。尤非凡人之所敢况。大抵程朱之從白虎通。所以執其中而槩其法耳。且此序有五性字。曰仁義禮智之性。曰知其性之所有。曰能盡其性。曰復其性。曰性分之所固有。則何者是本然。何者是氣質。何者是兼言本然氣質歟。抑本然氣質之說。自宋儒始焉。人之爲性一而已。旣有本然。又有氣質。得無二性之嫌耶。履健對。五性字。似皆指本然。而氣質本然。非有二性。特就氣質之中。論其本體之不雜乎氣者。曰本然也。學問之學。始見於說命。而學校之學。始見於何書耶。司徒典樂之官。雖自堯舜始。先儒言五帝亦有學。則堯舜以前學校之名。今亦可考歟。鼎修對。自伏羲始畫八卦。始造書契。以前民用而敎之道始立。故凡言敎者。必以伏羲爲首。而先儒陳櫟四書發明云。堯舜以前敎已立。而敎之法未備。學之名未聞。則臣不敢臆對也。學記曰。大學始敎。皮弁祭菜。示敬道也。文王世子曰。凡始立學者。必釋奠于先聖先師。觀於此二說。則上古已有釋奠之名。可以知已。後世雖以孔子爲腏食之主。而孔子以前。以爲先聖先師而釋奠之者。誰也。鼎修對。上古所祀。各以當時所宗之聖人。故周有天下。立四代之學。而虞庠。以舜爲先聖。夏學。以禹爲先聖。殷學以湯爲先聖。東膠。以文王爲先聖是也。試官鄭志儉。問時秀以先聖先師之同異。時秀答以同。是不然。先師者。凡一藝之師。禮之高堂生。樂之制氏。 詩之毛公。書之伏生是也。所謂敎育人才者。沒而祭之瞽宗也。先聖者。堯舜禹湯文武周公孔子是也。如周以周公爲先聖。魯以孔子爲先聖。而其國無聖。則借他國之聖人以祭之。所謂釋奠。必有合也。故後漢明帝。以周公爲聖。孔子爲師。而先儒以爲非禮。唐武德初。詔以孔子爲先師。而太宗急用房玄齡之議。釐正之。皇朝張璁議。以夫子爲先聖先師。而識者譏之。先聖先師。豈容混稱耶。此則講員似未及考也。此序以虛無寂滅。爲異端之學。而吾儒亦有虛靈不昧。寂然不動。靜虛動直。無適無莫之說。同一虛寂。而吾儒異端之相反。何也。以心觀心。便一不昧。斷棄世務。亦近不動。虛寂之下。下得何字。方不墜於異端耶。時秀對。曰無曰滅。所以爲異端。若吾儒則虛而能有。寂而能感矣。大學之䂓模節目。莫非人君分內事。今曰躬行心得。有若由外而得諸內。以此而行乎彼。無或有與道爲二之嫌耶。時秀對。䂓模節目雖詳。而學之者不能心得而躬行。則便非己有。故曰躬行心得。非謂求之於自己性分之外也。一有聰明睿智之一有。或以萬人之中有此一人看。或將一字。作或字義看。若謂之有此一人。則立文當曰有一。而不當曰一有也。若謂之與或同義。則字義必須有來歷。其陳之。時秀對。臣意則似當以林葱之中。有此受命之一人看矣。禮。以虞之上庠下庠。夏之東序西序。商之右學左學。周之東膠虞庠。謂有養國老養庶老之別。而鄭康成以下。遂稱上庠東序右學東膠。爲大學。下庠西序左學虞庠。爲小學。此說似矣。後儒又難之曰。王制明云虞庠在國之西郊。而又云小學在公宮南之左。大學在郊。則是養庶老之所。未必爲小學。將何以辨大小學之名。抑天子之大小學。各有其名。則諸侯之大小學。亦必有名。其陳之。時秀對。四代之學。各有損益。或貴在國。或貴在郊。臣未詳其說。而至若諸侯學名。記稱天子曰辟雍。諸侯曰頖宮是也。此云。古之大學。古者。指上古耶。指三代耶。大學之書。古之大學。兩大字。舊本初無二音。而自永樂本。下大字。始讀爲泰。於是乎書法分矣。未知法是何代之法。書是何人之書。若以司徒典樂。爲法之始。則此爲唐,虞官名。而上又引伏羲,神農,黃帝者。何義。若以聖作賢述。爲書之主。則漢賈逵之言以爲孔伋窮居于宋。作大學以經之。作中庸以緯之者。何故。龍輔對。四書蒙引謂古字。疑只是三代。此說亦通。而三代之前。契之敷敎。夔之敎胄。班班見於書。則通指上古。似尤完備。至於伏羲,神農。特原其道統之所自。而繼天立極四字。爲總結之語。司徒,典樂以下。更以堯,舜之所設敎。推衍以反復之。非謂伏羲之時。亦有司徒,典樂之官也。及夫法之不行而書始作焉。則夫子之經一。曾子之傳十。雖無可據之古文。程,朱於此。必有的確之見。自信而然。蓋以義理推之。而無所事於旁引曲證也歟。禮之明堂位。有曰米廩。曰序。曰瞽宗。曰頖宮。此是何代何國之學歟。學宮之必 稱國子。其義又何據也。龍輔對。米廩。有虞之學也。序夏后之學也。瞽宗。殷之學也。頖宮。周之學也。而學宮之必稱國子。其義蓋取於合國中之子弟而聚敎之也。禮以治躬。樂以治心。古今之通義也。故禮樂之不可偏廢。如車輪鳥翼。不曰知和而和。不以禮節之。亦不 可行也乎。然唐虞典樂之敎胄子。已不免專就樂一邊。而至周之大司樂。掌成均之法。以治建國之學政。則學校之政。殆若樂外無餘事。此何說也。龍輔對。古人敎人之法。每欲動盪血脈。涵養情性。使人自得之。故必以樂爲化道之先務。而禮與樂。相爲表裏。樂之節奏。舞之行綴。與夫中和之大本。無一不禮行乎其間也。小學。童子先敎以六藝之文。文者。非謂實得躬行。只是名物度數。然而八歲小兒。爲長者灑掃應對。固其職分。而先之以名物之學者。無或太驟乎。或者。曰應對進退。禮之事也。舞勺舞象。樂之事也。雖是小學童子。何嘗舍禮樂而爲學哉。是固然矣。而至若吉凶軍賓之禮。雲韶濩夏之樂。則此豈八歲之所可知。而童子之所當先者耶。書亦有象形會意。如人言爲信。止戈爲武等類。小兒豈能與知耶。九數之學。尤爲汗漫微妙。則童子何知。而雖使知之。亦何益於童子之初學耶。載瓚對。雖是八歲兒。能習六藝之文。則及其入大學之後。收功也易。且敎以度數之學。使知名目之末者。欲其游於藝。而不放過之意也。此曰。治而敎之。治是何義。敎亦何術。而先言治。後言敎者。又何也。載瓚對。治者。法制禁令。敎者。禮樂政敎。蓋億兆之衆。有萬不齊。故任君師之責者。不得不先以法制。齊其不齊。然後復以禮樂。敎以化之。序不得不然也。試官沈念祖曰。上句云億兆之君師。故此句以治而敎之。結上君師。而若分其先後。則敎當先於治矣。治與敎。似不必分先後。大抵人君之發政施仁。使一夫一婦。盡復其本然之性者。不出治之一字。如帝堯 克明峻德。以至黎民於變者。卽聖人十分盡性。而十分治平處。由此言之。治敎雖當竝行。而治尤是徹上徹下成始成終之事。蓋治者。治己治人。皆可謂之治。至於敎。則只可曰敎人。而不可曰敎己。此序推論君師之道。故雖以治敎二字對擧言之。而若謂敎先於治則不可。人能自治而後可以治人。敎亦治人之事。則何可不治而先敎乎。况此治字。殆同暎說。恐不必以治敎先後。截然分開矣。且此所謂俗儒記誦詞章之習。古人以爲記誦。如鄭康成,劉原父輩是也。詞章。如韓退之歐陽永叔是也。然則洛閩諸賢之訓釋經旨者。獨非記誦之類乎。載瓚對。程朱洞見義理之源。故其條析經傳之間。繼往開來之功。於乎至矣。而至若漢儒。則專以名物訓詁相尙。故所以於大本大原上。有茫昧穿鑿之病也。此云。以復其性。蓋性者。無形可尋。無迹可見。沒把捉沒方所。卽是這理而已。如欲復之。將何下手。先儒以論語之克己復禮。證明復性之義。而禮者。性中之一德。復禮則性之全德。可無不復者歟。載瓚對。人欲退聽。則天理自復。復性之工。固莫先 於克己。而禮者。天理之節文。每事盡合於天理。則此非復性而何。大學爲書。古本錯亂。明道伊川之所更定者。已不能無異同。朱子實用伊川之本。而稍加攷訂。爲此章句一篇。且曰。某平生精力。盡在此書。則宜其萬世尊信。如出一轍。而後儒如王魯齋,蔡虛齋之依歸朱門者。亦各有異議。以至明儒及本朝諸儒。尤不勝其紛紜。豈程朱之見。有未盡善者存歟。抑後儒之識。有未能信得及歟。仁浩對。先正臣李彥迪之補遺。蓋因王魯齋之說。 以聽訟章。爲格致傳。而旣有朱夫子所定之本。則他說固在不論也。此云。權謀術數百家衆技。而陳新安釋之曰。權謀術數。如管仲,商鞅之類是也。百家衆技。如九流之類是也。九流之目。可以歷擧歟。且此序。先儒或分六大節。或分四大節。或分三大節。何說爲是。宗燮對。九流之目。漢藝文志所謂儒家者流。道家者流。陰陽家者流。法家者流。名家者流。墨家者流。縱橫家者流。雜家者流。農家者流是也。分節之論。陳新安主六節。許白雲主四節。汪長洲主三節。而 其彼此得失。臣不敢硬定也。釋氏絶去人欲。吾儒亦克去人欲。而吾儒克己。則曰復禮。釋氏絶欲。則曰充塞仁義。何也。程子嘗言。仁者渾然與物同體。而佛家。亦有心佛衆生渾然齊致之語。故羅整庵。力辨其酷相似而實相畔。佛氏之所以充塞仁義。有未易覰破也如此。試極論之。宗正對。吾儒之學。存心養性。佛氏之道。明心見性。故吾儒則節其情。佛氏則閉其情。而閉情之害。終至於無父無君。此所以爲充塞仁義也。竊附己意。補其闕略。註說以爲補亡章。而補亡章。又云。間嘗竊取程子之意以補之。故後儒譏之曰。己意耶。程子意耶。譏之者固不足多辨。而至於竊附己意。則恐不容以補亡章當之。抑章句之間。別有以朱子之意補之。而人未及考者歟。祖承對。或以誠意正心章。承上起下之說。爲朱子之己意補闕者。而他無所據。未敢信其必然也。程子之學。蓋接乎周子。而周子之學。接洙泗千載之統。啓河洛百世之傳。則論程子所接之統。宜莫如周子。而孟子篇末集註。繼之以程子。今此序文。又以程子接孟子之統。而不及於周子。何也。若曰周子。未嘗表章大學云爾。則孟子七篇中。有何發明大學之語。而必以孟子接曾子之統耶。錫夏對。四書相爲表裏。則孟子一部。何莫非發明大學之義者耶。若夫周子之不列道統。張師曾亦嘗起疑。而臣未有可辨之說。不敢臆對也。大學一書之旨。不出於三綱八條。而三綱爲八條之綱。明德又爲三綱之綱。則朱子之序大學也。當以明明德三字。反復推明。而上下數千言。一不及於明德。何也。豈言之而人自不察歟。魯春對。朱子以心之一字。爲中庸序。以性之一字。 爲大學序。先儒謂中庸言性而不言心。大學言心而不言性。故序各以經文之所不言者。推演發揮。此固然矣。而此序中。自夫賦與之性。歷言其功用。則雖不言心。心亦在其中也。心與性之界分。可明言耶。佛氏以知覺爲性。而儒者非之。然張子又云。合性與知覺。而有心之名。則是心與性。更無界分矣。且先儒以爲情是性之動。意是心之發。情與意之發。兩有所自。則心與性。固非一物。而抑果無各自主張。不相關涉之嫌耶。我東先儒。或謂四端理之發。七情氣之發。或謂發之者。氣也。所以發者。理也。二說者。又孰得孰失。魯春對。以其氣之虛靈者。而謂之心。以其理之賦於心者。而謂之性。心與性。豈無界分。但人心有覺。道體無爲。情意造作。雖無不本於性。而實皆心之所主張也。故先正臣李滉。嘗以理發氣發之說。與奇大升往復論辨。而先正臣李珥。以其有理氣互發之病。又自爲之說曰。發之者。氣也。所以發者。理也。兩先正得失。臣何敢妄論。而後來諸儒。多從李珥之說矣。以上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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