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닭 없는 사랑으로 형통(창24)
- 땅 구입의 의미
창23:1에서 이삭이 서른일곱 살이 되었을 때 사라가 127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 사라가 죽은 그때도 아브라함에게는 많은 가축과 재물이 있었지만, 땅은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을 떠나온 대가입니다. 자기 소유의 땅을 이방인의 땅에서 가진다는 것은 고대에서 더욱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23:4절에서 헷 족속에게 나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그러자 헷 족속이 아브람을 ‘주’여 라고 부르며 존칭하며 말합니다.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11절)
아브라함은 크게 감격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길 곁에 묻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죠.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고 싶은 ‘장소’를 얻는다는 것은 분명 큰일입니다. 더구나 옛 히타이트족, 성경에 헷 족속이 모인 곳에서 인정받으며, 무덤뿐 아니라 밭까지 얻게 되었으니 아브라함에게는 참 다행입니다.
다시 아브라함은 겸손히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힙니다. 그들의 선대에 감사한 것이죠. 그런데 선물로 주겠다고 한 것을 아브라함은 돈을 주어 삽니다. 심지어 이들이 하찮게 여기는 땅을 아브라함은 비싼 값을 주어 소유하게 됩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에게 자기 소유의 땅이 생긴 것은 매우 소중한 사건입니다. 되돌 수 없죠.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고 있다는 과정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내의 무덤을 얻은 과정을 한두 줄로 쓰지 않고, 헷 족속의 땅에서 머물며 아브라함이 어떤 평판을 들었고, 또 얼마나 신중하게 처신했는지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쏟아내지 않고, 받아쓸 줄 알았던 사람인 것입니다.
자식이 일가를 이룬다는 의미
이제 아브라함은 아내를 장사하고, 땅까지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 땅은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될 땅이 됩니다. 또 아들 이삭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죽으며 이삭은 크게 슬퍼했습니다. 이삭은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장사한 지 3년 후 아들 이삭의 혼인이 이뤄집니다. 이 과정도 한두 줄로 적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무 꼼꼼할 정도로 대화들이 적혀 있고, 금과 은이 오가는 등 에브론 밭과 무덤을 살 때처럼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신부 구하기는 아브라함이 자기 소유를 맡은 종을 불러 명령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큰 살림을 맡은 종답게 그는 주인 아브라함처럼 신중했습니다. 종도 주인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혼사 과정도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며 했던 기도와 응답의 구조로 적혀 있습니다. 그렇게 창24장에서 형통을 의미하는 단어는 4번이나 등장합니다.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그(종) 사람이 그(리브가)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21절) - 이때 종은 아브라함의 고향 땅에서 우연히 만난 리브가를 두고 기도했었습니다. 정말로 예비한 사람이라면..이라는 단서가 붙은 기도였죠. 우연히 길에서 만난 그녀가 예비된 신부일 경우의 수는 매우 낮은 확률이었습니다.
“주인이 내게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의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너는 내 족속 중 내 아버지 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이니라”(40절) - 종이 리브가의 가족 특히 지렁이같이 욕심 많은 라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는데, 이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인정받는 일 자체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베푸시는 형통임을 보여줍니다. 기적에 가깝죠.
“내가 오늘 우물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내가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진대”(42절) - 바닷가에서 생수를 찾는 것처럼 여기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중요한 혼인 성사 여부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하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56절) - 종은 마지막까지 주인 아브라함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훗날 이삭의 아들 야곱이 아내를 얻은 대가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야반도주하는데 걸린 시간이 20년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기적이죠.
이처럼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 이삭을 얻은 기적에서 시작해서, 시종일관 기적과 같은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좁은 길을 돌파하는 형국입니다. 그래서 “형통”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도 “짤라”인데, 그 뜻은 돌파한다.입니다. 그런데 이 돌파의 면면이 어떤가요? 과연 돌파가 맞을까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 75세에 고향 땅을 떠납니다. 그리고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죽고, 140세에 마흔 먹은 아들 이삭이 아내를 얻습니다.
늦었긴 했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하늘의 별만큼 많은 자손을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시작된 것입니다.
에브론 밭을 살 때도, 아내 리브가를 얻을 때도 성경은 답답할 정도로 꼼꼼히 적고 있었습니다. 거저 받아도 되는 무덤 딸린 밭도 비싼 돈을 내고 삽니다. 심지어 이 무덤 딸린 밭을 사는 데도 아브라함의 평판이 총동원된 모양입니다. 그는 지도자지만 토착민 허락이 아니면 밭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종을 통해 며느리를 구하는 과정조차 훨씬 더 낮은 확률로 적합한 여성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과정들은 분명 돌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꼭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 밀려나는 것처럼 더뎠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사건들은 증언합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시고, 믿는 자에게는 똑같은 은혜가 이뤄질 것이다. 창15:6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 그러니까. 이 믿음 때문에 하나님이 복주시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 까닭 없는 사랑으로밖에 고백이 안 되는 이유
그러므로 형통과 ‘믿음’은 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난다고 하지만, 듣는다고 꼭 믿음이 생기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또 믿음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가능하다는 뜻이죠. 심지어 예수님도 ‘성령으로 난 사람’(요8:3)을 바람과 같다고 하십니다. 바람은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것이죠. 다른 말로 까닭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까닭 없는 사랑의 열매들
하지만 까닭이 없다는 이 말에 비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거절당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자책을 하는 분도 있겠지만, 까닭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상대에게 이상하게 끌리지 않은 스타일일 수 있겠죠. 하지만 충분히 좋은 감정을 가지고도 맺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나는 왜 태어났는가? 라고 물어봤자. 부모님의 결합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태어나게 해 주신 것과 왜 살아야 하는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보통 사춘기와 청년의 때에 이 질문에 고민을 합니다. 뭐를 하고 살아야 하는가란 문제도 연결되어 있죠. 하지만 딱히 그 까닭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답을 모르면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감이 떨어지죠. 세상 살이에 대한 믿음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결혼, 출산 가당치도 않게 되죠.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놀랍게도 사랑에는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널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사라지면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결혼은 무모합니다. 까닭도 모르는 감정 때문에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기 때문이죠. 그래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서로에 대해 까닭이 없어야 하죠.
처음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부모님이 날 이렇게 키웠구나 하고 눈시울이 젖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님께 물었습니다.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그 일을 했어요?” 어머님은 “자식이니까 했지” 실제로는 이유가 없습니다. 무조건 사랑한 것입니다. 고대 유대인들과 교회의 신앙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까닭도 날 선택하신 까닭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이다. 그 핵심적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것이죠. 요3:16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이 말씀에도 까닭은 적혀 있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까닭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 사랑으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또 그 사랑으로 아브라함을 형통하게도 하셨죠.
까닭이 없습니다. 대신 까닭 없는 사랑에는 긴 이야기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이 최고의 ‘형통’의 길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까닭 없는 사랑이라도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그의 종처럼 쏟아내지 말고, 믿음으로 받아쓰시길 축복합니다. 까닭이 없다고 값싼 은혜는 아니니까요. 오늘 말씀으로 ‘까닭 없는 사랑으로 살아내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