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翩翩黃鳥 (편편황조) 훨훨 나는 꾀꼬리는
雌雄相依 (자웅상의) 암수 다정히 노니는데
念我之獨 (염아지독) 외로울사 이내 몸은
誰其與歸 (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가리.
<삼국사기>
이 시는 유리왕 3년(B.C17년)에 지어 졌으며, 기원전 1세기 경, 동명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2대
왕이 된 유리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 이레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두 여자가
심하게 다투게 되었다. 이때 화희가 치희를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한나라의 천한 계집의 몸으로
어찌 이렇게 무례히 구느냐?" 라고 하니, 치희는 부끄럽고 분하여 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이
돌아와 이 말을 듣고 곧 말을 달려 쫓아 갔으나, 치희는 노여워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왕은 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있었는데, 때마침 쌍쌍이 노니는 꾀꼬리를 보고 왕이 느낀 바 있어,
황조가로서 외로움을 읊었다.
*불우했던 유리명왕(琉璃明王)
유리왕은 주몽이 동부여에서 있을 때 본 부인인 ‘예씨’ 사이에서 태어난 유복자로, 이붓아버지가
되는, 동부여의 금와왕 아래서 외롭게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뒷날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는 소문을
듣고 친아비를 찾아 내려와 부러진 칼을 증거로 들이대고 친자확인 요구했다. 바로 우리들이 지나
왔던, 오녀산의 졸본산성에서 벌어진 일로, 그 때가 고구려 건국 19년 되는 봄이었다. 그리고 그
가을, 유리왕자는 동명성왕의 뒤를 이어 극적으로 옥좌에 오른다. 그런데, 그 배경이 정략결혼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당시 떠돌이 유리왕자는 막강한 연타발(延陀勃) 가문의 딸이며 주몽을 왕으로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소서노(召西奴)왕비와 그의 두 이복이부(異腹異夫)의 아우들과 왕위를 다툴만한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유리왕자는 소서노와 대적할 수 있는 세력가인 송양(松讓)과 정략적
제휴로 그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다.
송양은 졸본지방 토착세력의 수령으로, 주몽이 직접 다물후(多勿侯)란 봉호를 내리고 비류국의 왕
으로 대접한 인물인 반면, 소서노는 사서에 따라 편차가 큰 야사적인 인물이다.
이후 소서노는 유리왕자와의 왕위쟁탈전을 포기하고, 그의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설득
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여걸로 알려져 있다.
유리왕은 어렵게 왕위에 올랐지만, 정치적 기반을 굳히기도 전에 송씨왕비가 요절을 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이에 유리왕은 다시, 같은 수순을 밟아, 그 빈자리에 두 명의 왕비를 맞아 들였다. 바로
화희(禾姬)와 치희(雉姬)라는 이름의 여인들인데, 여기서 화희는 전처 송씨왕비와 같이 왕의 지지
기반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선택한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었고, 반면 치희는 한족출신의 천한 신분
이지만, 빼어난 미모 하나만으로 왕비에 선택된 인물이다.
유리왕은 두 여인의 질투로 인한 불협화음을 염려하여 궁여지책으로 따로 궁을 만들어 서로 떼어
놓았으나 유리왕이 사냥을 간 사이에 두 여인 사이에 한 바탕 싸움이 벌어져, 치희(雉姬)는 분노와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궁궐을 떠나고 만다. 왕이 뒤늦게 이를 듣고 급히 쫓아갔으나, 결국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 대목을 사서들은 모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자세하게 그
전말을 적고 있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두 왕비의 이름이 화희(禾姬, 벼)와 치희(雉姬, 꿩)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고구려를 구성하는 부족간의 갈등관계로 보거나 또는 수렵유목생활에서 농경사회로
전이되는 과정을 설화로 표현했을 것이란 견해를 펴기도 한다.
유리왕의 황조가가 쓰인곳은 현재 집안 환인(桓仁)의 오녀산성에서 좀 떨어진 우모오진(牛毛塢鎭)
의 성정산(城頂山)이라 불리는 산 정상에 있는 산성이라는데, 자료에는 오녀산성과 자매산성이라고
쓰여 있고 산 중턱 바위에 ‘황조가’ 구절을 흰 글씨로 새겨놓고 유리왕이 치희를 그리던 황조암
(黃鳥巖)이라고 설명하고, 유리왕의 아들 대무신왕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효모방(孝母房)이란
곳도 조잡하게 복원해 놓고 있다.
(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