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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눅 18:9-17절)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요즘 사람들은 몰래 카메라(camera)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몰래 훔쳐보고, 나쁜 용도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진심을 알려면, 그의 태도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의 행동과 아무도 안 볼 때의 행동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태도를 낫낫이 다 알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보고 있을 때는 열심히 기도하는 것 같은데,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눈을 뜨고, 장난을 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장황하고 길게 기도하다가도, 자기 혼자 있을 때는 전혀 기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문제를 놓고, 은밀한 중에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몰래 카메라(camera)는 우리의 중심(中心)을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33:13-14절)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 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 살피시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 자세 ①다른 사람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항상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살전5:16-18절)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강단에서 기도할 때,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혼자 있는 것처럼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②환자가 의사에게 진찰 받는 태도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진찰받을 때, 자기의 건강을 자랑하려고 진찰받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환자는 자기의 아픈 부분과 고통스러운 부분을 의사에게 솔직히 말합니다. 그래야 의사가 정확하게 진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③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는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6:6-8절)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가 고백(告白)한 모든 죄가 사하여 졌다는 확신을 주십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시면서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가르쳐 주신 내용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몰래 카메라(camera)에 의해 불의(不義)가 드러났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의 모습이 사람이 없을 때와 있을 때가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의 기도는 사람을 의식(儀式)한 기도였습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큰 거리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마6:5절)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賞)을 이미 받았느니라.”
그에 비해 세리(稅吏)는 하나님 앞에서 못된 짓을 많이 했지만, 그들의 기도는 진실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있든지, 없든지, 기도하는 내용이 사람을 대상으로 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상으로 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리들의 기도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Ⅰ.바리새인들의 경건 예수님은 왜 이 비유(比喩)를 말씀하게 되셨는지 그 배경(背景)을 먼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9절)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자부심(自負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만 *의롭고*, 다른 사람들은 *불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무시(無視)했고, 업신여겼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蔑視)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의 생활이 더 종교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 보다는 기도도 많이 하는 등 종교 생활을 열심히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을 멸시(蔑視)한데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정죄(定罪)하고 판단(判斷)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우선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 것은 남다른 신앙적 열심과 봉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들보다 종교 생활을 오래 했고, 봉사나 기도를 많이 한 것에 대한 자부심(自負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의롭다*는 것은 본인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의롭다*거나 *불의한 것*은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지,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히 의(義)로운 사람도 있고, 불의(不義)한 사람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불의(不義)한 것을 치료받아야 의(義)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병이 *공적 사상*입니다. 자기가 열심히 종교적 헌신을 하면, 공적(功績)이 쌓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죽은 종교의 특징입니다. 살아 있는 종교는 공적(功績)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치료받으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공(功)을 쌓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功)을 쌓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例)가 불교인데, 불교는 지성(知性)을 많이 드리면, 공(攻)을 쌓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주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주교도 종교적 의(義)를 많이 쌓으면, 공적(功績)이 쌓인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공적(功績)쌓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자기 죄를 자백하면, 그 자리에서 용서해 주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공적(功績)을 쌓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적(功績) 쌓는 자는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恩惠)를 모르는 무식(無識)한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아무리 예쁘고, 좋은 옷을 입고, 병원에 왔어도 일단, 진찰을 받으러 온 이상 그에게는 이상이 생긴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멋을 부려도 그는 환자입니다. 의사는 그 사람을 환자로 대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종교적 열심이나, 봉사로 우월감(優越感)을 갖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들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스스로 의인(義人)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의롭다*거나, *불의하다*는 판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福)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罪人)이란 사실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물론 죄(罪)가 많다 해서 죄(罪)를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恩惠)를 주셔야만 깨닫게 때문입니다. 오직 복음(말씀)만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罪)를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스스로 *의롭다*고 우월감(優越感)을 갖는 이유는 복음(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 1:8절)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찬송가 284장 *오랫동안 모든 죄 가운데 빠져*
Ⅱ.바리새인의 기도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기도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진실한 기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10-12절)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이 서서 따로 기도했다는 것은 자기는 더 거룩하기 때문에 다른 죄인들과 함께 기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서 기도할 수 없다고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다른 사람과 같이 취급하는 것을 가장 기분 나쁘게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자기 자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즉 그는 자기가 죄(罪)를 짓지 않음을 하나님 앞에서 자랑했습니다.
말로는 *감사 하나이다* 했지만, 실제로는 거룩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는 남의 돈을 토색(强奪)하지도 않았고, 불의(不義)한 일도, 간음(姦淫)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성공적인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정도로 한 주간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즉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남을 속이거나, 음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다면, 성공적인 믿음 생활을 한 셈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은 이것도 대단한데,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외모(外貌)로 볼 때, 흠잡을 데 없는 종교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의 외모(外貌)를 보지 않고, 몰래 카메라(camera)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中心)을 보신 것입니다. 그들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죄(罪)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남을 미워했고, 판단했고, 악(惡)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물론 행동이로 짓는 죄(罪)는 마음으로 짓는 죄(罪)보다 더 죄인(罪人)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각과 마음으로 짓는 죄(罪)는 죄(罪)가 아니냐? 는 것입니다.
즉 일주일 내내 남을 미워하고, 입으로는 저주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자기 자랑이 나올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몰래 카메라(camera)에 다 찍혔습니다. 물론 그들이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것은 하나님께 잘 보이려는 의도(意圖)였습니다. 일종의 뇌물(賂物)성 금식이요, 대가(代價)성 십일조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난 한 주간을 승리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恩惠)요, 이렇게 주일을 지킬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恩惠)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6:44절)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조금도 가식(假飾) 없이 정직한 모습으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즉 믿음으로 잘 살았으면, 감사한 마음으로, 연약(軟弱)하여 죄(罪)를 짓고 실패했다면, 그 모습 그대로 죄 짐을 가지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오기는 했지만, 그 목적(目的)이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온 환자가, 자기 진찰은 받지 않고, 옆에 있는 다른 환자에게 자기를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우리가 아무리 믿음으로 승리했다고 해도,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악(惡)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Ⅲ.세리의 기도 세리(稅吏)는 세무공무원으로서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사실 세리(稅吏)들은 바리새인들과 한 자리에서 기도할 수 없는 나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하나님께 나와서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13절)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다같이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이다*
세리들은 남의 돈(稅金)을 도둑질 했습니다. 그런데 죄(罪)라는 것은 사람을 완전히 절망(切望)하게 만듭니다. 세리는 남의 돈(稅金)을 토색(强奪)하면서부터 간음(姦淫)도 했고, 불의(不義)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이 세리는 복음(福音)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며, 누구든지 자기 잘못을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용서해 주신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는 정말 죄를 용서받고 싶어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지성소까지는 기지 못하고, 이방인의 뜰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세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같은 죄인도 부르시고,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믿음 하나로 나온 것입니다. 이 세리는 자기 자신을 말씀 앞에 비춰보니까,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죄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는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리셨습니까? 14절)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죄인 세리를 바리새인보다 *의롭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불의(不義)와 죄(罪)를 치료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靈魂)의 의사(醫師)이십니다. 그런데 누가 치료받을 수 있습니까? 자신의 죄(罪)를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오는 사람입니다. 즉 정직하면 정직할수록 더 많은 치료와 깨끗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찬송가 287장 *예수 앞에 나오면*
Ⅳ.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세 예수님은 토색(强奪)이나, 불의(不義)나, 간음(姦淫)을 권장(勸獎)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금식(禁食)이나,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리고 남의 돈을 떼어먹고, 방탕한 삶을 산 사람이 더 옳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의 의(義)란 사람의 눈에는 대단하게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롬3:10-12절)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사람들은 가끔 자기는 *남들 보다 악(惡)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는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교회는 나가지 않아도 된다.* 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하나님 앞에 큰 죄인(罪人)입니다. 요즘 국토부소속 토공처럼 악법(惡法)을 이용하여 불의(不義), 토색(强奪), 간음(姦淫)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변화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나 같은 죄인도 변한 걸 보면, 당신도 예수께로 가면 가능하다*고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정직하게 찾아오는 자를 깨끗하게 치료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軟弱)함과 부족함을 깨닫는 자는 복(福)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軟弱)한 부분을 고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병든 부분을 내 놓지 못하게 막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존심(自尊心)이요, 체면(體面)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큰 은혜(恩惠)를 받으려면, 우선 자존심(自尊心)과 체면(體面)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14절下)...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나님 앞에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는 것이 가장 복(福)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난 후, 믿음으로 산 결과 불의(不義)와 토색(强奪), 그리고, 성적(性的) 유혹(誘惑)도 이겼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와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승리의 보고(報告)요, 감사(感謝)의 산제사(祭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연약(軟弱)함을 치료하기 위해 금식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제물(祭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승리의 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순간순간 악(惡)하고 더러운 생각을 한 것을 솔직히 부인(否認)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中心)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의 위선(僞善)된 기도는 *의롭다* 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리(稅吏)는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한 결과 그는 죄 사함을 받음으로 *의롭다*고 인정(認定)을 받은 것입니다.
기도는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시간은 죄를 치료받는 시간이요, 우리가 정직하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곧 치료해 주십니다.
이때 본인은 치료 받았다는 증거로 마음이 평안과, 만족함과, 더 의롭게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다음 15절 이하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져 주심을 기대하고, 자기어린 아기를 하나 데리고 왔습니다. 아마 이 아기를 축복(祝福)해 달라는 뜻일 것입니다. 즉 아기가 건강하고 지혜롭게 잘 자라도록 기도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그의 부모를 책망했습니다. 15절)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왜냐하면, 아이들은 소중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떠들기만 하고, 장난만 치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오면,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16-17절)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16절)...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할 때, 어린 아이의 어리석음과 유치함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어린 아이는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남의 말을 잘 받아들입니다. 또 복잡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단순하게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讀者)여러분,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생명의 말씀)을 사모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할 때, 이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믿음이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전파하는 수단(media)이 비록 카페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가명(假名)으로 가입한자나, 조회(照會)하고 먹 튀 할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여! 우리의 생각을 단순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열방으로 생명의 말씀이 전파되어 날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복된 알곡 성도로 열매 맺게 하옵소서. 아-멘 전12:13절)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니라” 찬송가 179장 *주 예수의 강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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