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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귀하.
코비드19 팬데믹과 송년의 시너지로 퍽 쓸쓸한 기운입니다. 모쪼록 별고 없기를 바랍니다. 선생님의 옥고 배려로 포지션 2020 겨울호(통권 32호)가 발간되었습니다. 정중히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지난 주말 발송을 마쳤으니 이번 주 초 받아보실 것입니다. 창간 8년을 채웠습니다. 단 한 번, 단 한 사람에게 구독이나 후원을 권한 적 없음에, 단 한 건의 광고를 게재하지 않음에, 제 자신을 잠깐 칭찬해 주었습니다. 인간의 사물화를 야기하는 수많은 프레임에 걸려들지 않으려는... 방패 역할을 얼마나 실천하는 포지션인지, 문학 정론을 얼마나 숭상하는 포지션인지도 궁금합니다. 지켜봐 주시고 애정 어린 고견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원고료는 1월 말 일괄 지급됩니다. 사정이 급한 분 계시면 따로 연락 바랍니다. 선생님과 가족의 건승을 바라며 갈음합니다. 포지션배.
쓸쓸한 세모를 보내던 중 뜻밖의 편지 한통을 받았다. 메일의 홍수 속에 하마터면 휴지통으로 사라질 뻔 했다. 간신히 전달된 메일에는 슬픔의 연한 빛깔이 배어있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메시지에 한참을 머물렀다. 물론 답장은 하지 않았다. 나는 사정이 급하지 않았고 필진에 대한 단체 안부 성격이 강한 글에 답장은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 포지션 겨울호가 도착했다.
책장을 열자 검은 장막의 블라인드가 눈앞에 펼쳐진다. '블라인드 시'를 읽으면서 나는 절망했다. 몇 번이나 검색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소양의 일천함을 한탄하지만 검색을 하면서까지 시를 붙잡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반문하고 싶다.
「벨라스케스 구름」을 보면서 문득 오래전 마주했던 두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분은 대추 이야기에 또 한분은 배추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상대방 이야기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귀가 어두운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과 소통한다. 올해 배추농사가 풍년이라 대추 값이 걱정된다고 서로를 다독인다. 벨라스케스 구름을 보는 느낌도 비슷하다. 그것이 새털구름이든 뭉게구름이든, 설령 무지개라도 상관없다. 각자의 방식으로 감상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할 뿐이다. 어차피 구름은 모였다가 다시 흩어진다.
「그림이 있는 실내」에서 그녀는 "액자 속의 그림만을 좋아"한다. 액자는 갇혀 있는 세상이다. 만약 "서라운드 그림 앞에 섰다면 졸도했을"지도 모른다. 액자 속의 그림이란 고착된 풍경을 의미한다. 세상과 단절하고 자신의 세계와만 소통한다. 「파묻힌 씨앗의 삽화를 그리다」는 윌러스 스티븐슨의 '단지의 삽화'를 패러디한 시이다. 덕분에 스티븐슨의 원작 시까지 읽게 되었다. 문학적 갈증에 따라 이쪽저쪽의 테네시 언덕을 몇 번 오르내리다보니 초점 밖으로 밀려나간 시야가 흐릿해지긴 했으나 "아무튼 나도 여기 놓였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안개 나라」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모습마저 똑바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며 자기를 유추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불확실한 세계로 상징되는 안개 나라에 대한 상상이 너무 확연하지 않나 싶다. "누런 모래 안개 깊숙이 가뭇가뭇/ 저 고독한,/ 저 무거운 뒷모습의 저들은/ 살아서 내가 알던 누구일까" 안개 나라에서 상상력은 마음대로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메쿠메뇌 Anokumene」는 삶의 영역을 확장한다. "전갈 한 마리 찾아오지 않는 이곳에선"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다. 나는 "거세된 남근과 깨어진 거울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통신권 이탈의 세계이다. 나의 뇌구조를 닮은 휴대폰이 방전되면 나를 찾는 작업은 더욱 막막할 것이다. 휴대폰을 통해서만 자아를 찾아가는 현대인들의 슬픈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어떤 텍스트이든 그 자체 구조 내에서 이해 가능해야 한다던데, 망점이 다른 렌즈로 시를 들여다보느라 많이 방황했다.
무던히도 슬펐던 지난 한 해, 슬픔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새해를 맞는다. '詞筵詞林'을 펼친 내 마음도 자꾸 슬픈 책갈피에 손길이 머문다.
『동물의 자서전』을 펴낸 이기성의 시는 차분하고 덤덤하지만 언뜻언뜻 묻어나는 슬픔의 목소리는 돌올하다. "너를 묻고 나는/ 노래하는 사람이 되었다" 「풀」이나 "설거지를 마친 검은 상자 속에 그녀는 누워 있다. 죽음을 하얀 베일처럼 얼굴에 덮어쓰고서, 눈과 코와 입술이 하얗게 고요하다." 「우리는 왜 동물처럼 울지 못하는가」처럼 죽음을 앞에 두고도 "우리는 딱딱한 빵을" 뜯어 먹는다. 50년의 세월을 품으며 치통과도 같은 끔찍함을 끌고 다니면서도 여전히 시를 질질 끌고 왔다. "백 년 동안 검은 전염병이 창궐한 뒤에도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검은 정장을 입은 시인의 다짐에서 느껴지는 슬픔의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하다.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을 읽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김희준 시인은 2020년 7월24일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94년생이니 아직 20대의 짧은 생을 살았다. 그녀의 26번 째 생일인 9월10일, 그녀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요절한 故김희준 시인을 위한 올리브 공원 조성과 시비詩碑 건립이 추진된다는 소식이다. 시민단체 후원으로 그녀가 나고 자란 통영에. 김희준 시인의 '제페토의 숲'이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시' 수상시로 선정됐다는 소식이다. 이 모든 기쁜 소식마저 슬프다.
김현의 『호시절』은 슬픔의 역설이다. "아들아 무섭니?// 인생을 진작부터 끝내고 싶어 하는 너는/ 털보 며느리인 너는 구슬픈 목소리로/ 내게 미래를 발설한다" 「미래 서비스」에서 말하는 시선의 뼈대는 소수자적 정서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난 뒤 수염이 나고 목소리가 굵어진다. 여성성을 간직한 그들에게 숨어있는 남성성이 발현한 것이다. 그들은 보편적인 쓸쓸함과 함께 사랑에 대한 위태로움에 직면한다. 관성의 통로에서 벗어난 사랑이 사회적 관념의 배수로를 범람하게 만들면 미셸 드 세르토의 말처럼 "물이 빠지면 그 길 끝에는 다른 풍경, 다른 질서가 나타날 것이다."
특집 '문학장의 참여 행위들'에는 독자와 소통하는 다양한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시를 쓰기도 하지만 독자이기도 하고 때론 시에 대한 글도 쓰는 터라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번호도 매겨있고, 밑줄도 쳐있고 이탤릭체로 강조도 하면서 실속있게 보여주어 수험생처럼 밑줄 그으며 탐독했다. '해설을 얼마나 신뢰할 것인가?'라는 글에 대한 신뢰도가 급상승한 것은 물론이다. 독자와 해설자 사이의 신뢰, 해설과 해설자 사이의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점검도 끝냈다. 뿐인가 리뷰나 평론이 아닌 해설을 읽거나 쓸 때 특별히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설문조사까지 마쳤다. "작품과 별개이거나 설명으로만 읽지 않고 한 권의 작품으로서 읽는다." 여러 답변 중 하나를 독해의 예시로 참고하기로 한다.
'독자 생각' 정다연의 경우, 독자를 상상하는 감각이 생겨나면서부터 시작된 독자를 향한 구애가 절절하다. 유튜브 채널 '문장입니다영'과 그림책과 계절 우편을 통한 독자에 대한 사랑은 또 얼마나 애틋하던지. 그 역시 소통의 한 방법이리. 무엇이든 독자에게 전해질 때, 그것은 그것대로 가닿아 독자의 손끝을 따뜻하게 적셨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소박한 바람을 응원한다. '부수적인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하다.' 는 시인이 독자를 만나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전통적 공간인 책방의 추억 속에서 자라서 독립서점에서 독서 모임을 갖기도 하고 합평 모임도 하며 책방 시 모임에 함께 한다. 도란도란 시를 낭독하는 책방 모임은 더욱 독자와 폭넓게 소통하는 기회일 것이다.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디에도 시가 있고 독자가 있고 시인이 있는데.
'구독과 좋아요를 눌러주세요'는 <던전>이라는 온라인 문학플랫폼에 대한 이야기다. 연식이 좀 되는 나로서는 어디에 어떻게 구독과 좋아요를 눌러야 할지 몰라 일단 검색창에 던전을 쳐본다. 던전의 의미가 무엇일까. 어딘가 뜻을 말해주는 곳이 있는지 찾아본다. 없다. 게임 요소를 많이 차용했다고 하니 점점 난감해진다. 우선 던전 운영자의 글에 집중하기로 한다. 던전은 네 가지 장점을 내세운다. PC나 스마트폰에 접속해 언제든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과, 연재작은 투고 작품으로 꾸며진다는 것, 한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20편 가량의 작품집 형태로 연재된다는 것, 문학채팅방이 존재하여 누구든지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장점으로 내세운다. 그럼에도 소통의 어려움은 여전하다.
독자가 사라져버린 시대, 문학의 생산자가 유통까지 담당해야 하는 문학 현장이 씁쓸하다. 농산물 직거래처럼 문학의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직접 판로를 개척한다. 유튜브와 계절 우편으로, 전통적인 책방과 작품 합평을 통해, 온라인 문학 플랫폼을 통해 독자와 소통한다. 독창적이고 번뜩인 프로젝트란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 씁쓸하다. 문학소매상으로 등락한 작가. 그것을 감당하기엔 너무 낡아버린 나의 뇌구조가 더 슬프다.
쓸쓸한 마음을 가다듬어 '신작시'를 펼친다. 일회용 눈물처럼 맑고 투명한 슬픔을 다스리기에는 슬픈 시가 제격이다.
지금 좀 와 줄래?
머리끝이 쭈삣 서는 침묵이 병실에 번진다
목소리를 들었을 땐 이미 나쁨에 들어선 때다
오래된 질서 하나 무너진 때다
배경 없는 감정의 끝이 흐릿해지고
소독약 냄새가 쏟아진다
그러니 시한부 선고는 밤이 적당하다
-안영미, 「오전 나쁨, 오후 보통』 부분
종양. 악성. 병실. 시한부 선고라는 단어에 훅, 간다. 이건 분명 직업병이자 의사로서의 자의식이다. 그녀의 시에 영혼까지 푹 잠긴다. 이런 시를 읽으면 왜, 내가, 말기암환자처럼 아득해지고 아늑해지는지 나도 모르겠다.
손바닥에 나무와 풀이 무성할수록
풀벌레 소리, 욕망과 기도 소리 쌓여갈수록
내 저울은 우매함 쪽으로 기울어진다
가만히 손바닥 들여다보면
기우뚱, 절반의 생애가 이미 추락 중이다
- 이주언, 「천칭」 부분
나 역시 절반의 생애에서 다시 얼마쯤 더 추락하고 있으니, 공감과 동감에 바싹바싹 말라가는 감성에 촉촉해지고 있다. 지금 내 저울은 이주언 시인 쪽으로 완전 기울어지고 있단 말이지.
당신은 표정 절반을 지우고 빗줄기 속에 서있는 아이 같았다. 당신은 너무 젖어서 찢어질 것처럼 얇은 여자. 당신은 지난여름에 아이를 잃은 자그만 여자. 피를 다 비운 듯 창백한 여자. 당신의 절반은 이승의 것이 아니었다. 당신은 당신의 절반을 어디에 묻었을까, 어디에 흘렸을까.
-조정인, 「흘러다니는 우물」 부분
이런 기분. 오래 동안 흘러 다니는 우물 속을 오래 동안 흘러 다니고 있는. 덕분에 밤새워 장편소설 읽은 기분.
이번 호 '집중조명'은 함기석 시인이다. 함기석이란 텍스트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한 번도 집중하지 못한 그에게 집중하고자 '시인의 말'부터 펼쳐 본다. 근데 이게 시인지 시인의 말인지 도무지 헷갈린다. 선문답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피해 가지만 실은 그 속에 함의를 품고 있다.
"어찌해야 합니까/ 어찌해야 제 마음이 잔잔한 물이 됩니까/ 죽어가는 오동나무 등에 붙어/ 가지 끝 마지막 이파리에게 물으니// 마음을 가져 오너라/ 마음을 가져오면/ 오동나무 관에 넣어 불 질러 태워주마/ 그 재를 먹어라// 먹었으나 먹을 입이 없습니다/ 찾긴 찾았느냐/ 찾았으나 찾을 눈이 없습니다/ 그럼 울어라// 그날 이후, 매미는 울기 시작했다/ 지금도 매미는/ 그녀를 찾아 시를 찾아 없는 음을 찾아/ 땅에서 하늘에서 나무에서/ 밤에도 낮에도" -<시인의 말> 중에서.
전기철 시인은 '백색소음 속 언어의 낙처를 찾아서'란 글에서 그의 시 세계를 분석한다. 함기석은 집단적 주체에서 오는 소음에서 떠나기 위해 선(禪)이라는 방법적 매개를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난 누굽니까
넌 돌멩이다 진흙이고 지렁이고 불탄 숯이다
그럼 난 누굽니까
넌 바위다 진흙소고 낙타고 구름이다
그럼 난 물입니까
그래 불이다 훨훨 맹렬히 타는 얼음이다
그럼 나는 불입니까
그래 빙하다 활활 맹렬히 얼어붙은 숲이다
그럼 난 물이고 불인 달입니까
그래 달그림자다
-「장미」, 부분
이 대화법은 너와 나, 하늘과 땅, 위와 아래 등 모든 다중적 소음을 극복하고 평등심을 이끌어내는 방식이다. 대화 속에는 어떤 물음도 답도 극복된다. 함기석은 이 대화법을 차용해 자신의 기호적 언어, 소음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여기에 백색소음이 나타난다. 백색소음 속에서 주체의 내면은 한없이 고요해지고 맑아진다는 것이다. 열심히 시평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선사에 머무르는 것 같다. 얼룩얼룩한 나의 내면 역시 조금은 고요해지고 맑아진 기분이니.
'당신들의 말'은 기획의도대로 3인 3색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오늘치의 반란'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예술가답게 소소한 이야기를 편안한 느낌으로 잘 풀어 놓는다. 『고사리 가방』 『귤사람』 『용기있게 가볍게』를 쓰고 그린 영감도 이런 소소한 일상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김성라 작가는 쓰고 그리는 행위에 대한 자신의 바람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와 빤하지만 다채롭게 진부하고 놀랍도록 구체적인 된장과 참기름과 무릎 이야기를 종이 한 귀퉁이에 그림으로, 글로 남겨본다. 언젠가 이 기록이 또 다른 기록과 이어지길 바라면서, 이어진 기록들이 언젠가 이야기가 되어 시시한 이야기를 진짜 재미있어할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문학과 삶의 연속성'을 게재한 고봉준 평론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꾸준히 내고 있는 중견 평론가이다. 오늘날 한국문학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문학과 삶을 불연속적 관계로 설정하는데 기인한다는 그의 지적에 백번 공감한다. 문학의 존재 이유를 김현의 주장대로 '쓸모없음의 쓸모' 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상품의 논리나 도구적 기능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문학이 일상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지금의 일상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좋은 문학은 자명한 것들을 의심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한다. '신념'보다는 '의심'에 대한 믿음이 조금 더 문학적인 것에 가까운 듯하다.
'애옹애옹한 김하늘의 세계', 자신만의 목소리로 시를 쓰는 시인의 육성은 어떤 것일까.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은 제목에 귀를 쫑긋하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조곤조곤 들려주기엔 지면의 인터뷰가 더 잘 어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 형식의 글을 읽으면서 소설로부터 출발한 시인이고 고양이를 네 마리나 기르고 있으며 『샴토마토』라는 시집을 낸 톡톡 튀는 감각의 젊은 여류 시인임을 눈치 챈다. "거울을 보고 자주 웃고, 바뀐 계절마다 그에 맞는 옷들을 꺼내놓고, 자정에는 잘자, 하고 밤인사를 건네고 내일을 기약하는 시간도 좋아요. 집에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데도 군소리하지 않는 그에게는 역시 고마운 것 투성이네요." 고양이처럼 시크하고 도도하고 긍정적인 결혼관에 기꺼이 한 표.
'두 글자의 사유'에서 사유하고자 하는 두 글자는 시간이다. 인생처럼 막막하고 우주처럼 광활한 시간에 대해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필자는 철학자답게 욜로 (You only live once.), 카르페 디엠(Carpe diem), 롱 뒤레(longue duree), 메멘토 모리 (menmento mori) 등 시간의 아포리즘을 설명해준다. 고맙다. 이번에야말로 시간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히는 기회다 싶다. 나도 차렷하고 배우는 자세로 라틴어를 받아 적는다. 카르페 디엠과 롱 뒤레는 무한함을 생각 할 줄 아는 인간에게만 허락된 지혜이고 욜로는 카르페 디엠의 영어 버전이라니 정리가 좀 되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럴싸한 사유의 철학적 가르침도 현실의 높은 벽 앞에선 무기력한 경구일 뿐일까. 연전에 어떤 열 살 소녀가 자신을 학교로 태워다주던 60세의 운전기사에게 무슨 가정교육을 그따위로 받았느냐고 호통 친 사건이 있었다. 열 살이 예순 살을 나무랐다. 어린 세월이 늙은 세월을 올라타 짓밟았다. 시간은 순리만 따르는 게 아니라, 이처럼 횡포도 일삼는다. 필자는 아이에게 들려 줄 가장 좋은 말로 탈무드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소개한다.
"너의 생각을 주목하라. 그게 곧 네 말이 된다. 너의 말을 주의하라. 그게 바로 네 행동이 된다. 너의 행동을 조심하라. 그게 곧 네 습관이 된다. 너의 습관을 의식하라. 그게 바로 네 성격이다. 너의 성격을 주목하라. 그게 곧 네 운명이다."
'나를 위한 시쓰기'는 친절한 설명이 인상적이다. 이번 주제는 '자연스럽게 말해야 자연스럽게 리듬이 생긴다'이다. 이것은 다시 소주제로 나뉘는데 '생래적인 리듬은 즉흥적인 글쓰기에서 드러난다.'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시 쓰기 방법론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구절이 있어 그대로 옮겨 본다.
시적 대상에 대해서 1분이든 5분이든 10분이든 짧은 시간 안에 글을 채워 나가는 연습을 권해 봅니다. 긴 시간을 두고서 써나가는 것보다 짧은 시간을 정해두고 그 시간에 쫒기면서 써나갈 때, 자신의 생래적인 말투가 더 잘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급한 순간에 자신의 고향말(모국어든 사투리든)이 툭 튀어 나오는 것처럼 짧은 시간 안에 시를, 시라는 생각도 잊은 채 어떤 글을, 메모하듯이 낙서하듯이 써나가는 와중에 오히려 자기 고유의 말투가 살아나서 올라옵니다.
'해외 현대시 읽기' 가 주목한 시인은 루이스 그릭이다.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검색창에는 루이즈 글릭이라고 해야 그녀에 대한 정보가 뜬다. (필자의 글머리를 참고 바란다.) 그릭은 1943년 미국 태생으로 국내 독자에게는 생소하지만 퓰리처상, 전미도서상, 미국 계관 시인을 지낸 바 있어 미국 내에서는 잘 알려진 시인이다. 익히 알다시피 노벨문학상은 작품이 아니라 시인의 전 생애, 그 모든 작품 활동에 대해 평가가 이뤄지는 상이다. 때마침 이번 호의 노벨문학상 시인에 대한 탐구는 참으로 시의적절해 보인다.
불안한가요, 당신은 불안한가요?
하루가 끝나기를, 당신의 형이 책으로 귀환하기를, 기다리고 있는가요?
충직하고 고결한, 그런 밤이 귀환하여
당신과 부모 사이의 간격을, 짧게나마,
수선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가요?
-루이스 그릭, 「충직하고 고결한 밤」 부분
그릭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문제보다 개인적 일상과 기억을 시의 주된 제재로서 다룬다. 이슈를 점하는 쟁쟁한 작가들 사이에서 그릭이 노벨문학상으로 선정된 것은 역설적으로 그이가 상대적으로 탈미국적이기 때문일 수 있다. 그릭의 매력은 서정적 호소력이외에도 그녀의 시가 사적이면서도 동시에 공적인 것을 들 수 있다. 한국의 서정시인들은 그릭의 시를 통해, 개인적 서정이 공적 영역의 어떤 것들에 의해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해 지극한 눈길을 주어야 할 것 같다는 양균원 시인의 주장은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다.
'이 계절의 첫'은 늘 새롭다. 첫 시집을 내는 시인답게 형식이나 내용면에서 언제나 새로움을 선사한다. 이번 시집은 제목마저 신선하다. '우리의 초능력은 우는 일이 전부라고 생각해' 빨리 읽고 싶다. 시의 발현몽들이 시보다 더 시처럼 펼쳐져 있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무슨 말인지 알지, 하니까 그냥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라니 읽는 나도 애닯은 마음이 된다. 시를 대하는 마음가짐 '우리에게' 역시 시를 닮았다.
마음이 다했음을 직감한 직후에 짧은 여름은 마침내 끝이 났습니다. 나는 이제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그 어떤 의미도 찾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우리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을 것이고 나는 이제 우리의 얼굴 속으로 두 번 다시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이제 무기력자입니다. 나는 이제
'지난 호 독회'를 다시 본다. 자기 글을 읽는 것은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불편하다. 낯선 문학판에 처음 발 디딜 때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다. 슬픈 방독면을 뒤집어 쓴 주치의처럼 슬픈 연대를 되짚어 본다.
여전히 팬데믹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슬픔과 상실을 동반한 지난한 삶, 문학판도 그 거대한 물결을 피해가진 못했다. 허둥대는 낙엽위에 둥둥 떠내려가는 한 마리 개미처럼 주어진 시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나도 둥둥 떠다녔다. 시간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삶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삶의 자유를 누리는 자 만이 영혼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 텐데. 그래도 문학잡지를 샅샅이 뒤지고 훑는 것은 행운이었다.
디스토피아의 삶을 살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도 문학은 지속되고 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학 비전공자인 내게 시 전문잡지인 '포지션' <독회>를 청탁한 의도는 전문적 서평 보다 일반 독자의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어서이리라. 지금까지 내가 쓴 글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감정에 치우친 글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밝혀 둔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이나 반박은 하지 마시라. 그런 논쟁이야말로 포지션이라는 슬픔을 극복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슬픈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 계간 <포지션> 2021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