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김씨 영분공파 계보에 관한 소고
최근 <경주김씨 영분공파는 과연 경순왕의 후손인가>라는 글을 통해 경주김씨 영분공파는 경순왕의 후손일 수 없다는 논증을 하였다.
논증의 근거로 삼았던 자료는 다음과 같다.
김자류묘지명(金子鏐墓誌銘)-1146년(인종24년)
황보양처김씨묘지명(皇甫讓妻金氏墓誌銘)(1149년, 의종3년)
김유규묘지명(金惟珪墓誌銘) (1158년, 의종 12년)
고려사열전(김인경편)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삼한공신명단(박천식, 1988년,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삼한공신 김예겸이 경순왕의 후손이 될 수 없다고 보는 결정적인 근거는 김자류 묘지명-신라왕의 후손인 삼한공신 대광 시중(三韓功臣 大匡 侍中)이라는 기록과 김예겸의 손자 김의진(?-1070년 8월)에 관한 고려사절요의 기록이다.
고려사절요에 김의진의 졸기가 나타나 있는데, 문종 24년 (1070년 ) “가을 8월에 평장사로 치사한 김의진(金義珍)이 졸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나이 70세가 되면 치사(퇴임)하므로 1070년에 세상을 떠난 김의진은 분명히 1000년 이전에 출생했을 것이다.
김예겸이 삼한공신이므로, 그의 손자인 김의진의 졸기(1070년)와 비교해 보면, 역사적인 연대가 맞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삼한공신 대광 시중 김예겸은 경순왕, 고려태조와 동시대인물이므로 경순왕의 후손이 될 수 없다.
<경주김씨 영분공파는 과연 경순왕의 후손인가>라는 글에서 일련의 고증을 통해 다음의 계보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신라왕후손-
예겸(禮謙)-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수지(壽之)-영고(永固)-인경(仁鏡)-연성(鍊成=)
예겸(禮謙)-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황보양처김씨
예겸(禮謙)-주정(周鼎)-의선(義先)-후백(侯伯)-유규(惟珪)-이용(利用)
현(鉉)
예겸(禮謙)-( )-은익(殷翼)-성행(成幸)-공신(公信)-관(琯)-자류(子鏐)
자류(子鏐)-순▨(淳☐-취정(就正)
취명(就明)
경주김씨영분공파가 경순왕의 후손이 아니라는 근거가 될만한 오래된 족보가 하나 있다.
금요경매라는 경매사이트에 나온 경주김씨족보, 1785년(정조9년) 발간된 목간본이다.
<경주김씨족보, 1785년(정조9년) 발간된 목간본>
경매사이트 설명에 맨앞에 1711년에 쓴 이웅징의 서문이 있다고 하는데, 이 족보를 보면 영분공파 계대를 볼 수 있다.
경순왕(敬順王)--영분공(永芬公)--임흥공(林興公)--파간(波干) 억종(嶷宗)--파간(波干) 계옹(季邕)--아개공(阿盖公)-예겸(삼한벽상공신)--주정--의진--후덕--수지--영고--인경--궤(연성)--영(塋)-서인(瑞仁)-충한(沖漢)
족보를 자세히 보면 궤(연성)의 아들로 영(塋)과 승무(承茂)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파간(波干) 억종(嶷宗), 파간(波干) 계옹(季邕)이라는 기록이다.
파간이란 도대체 뭘 말하는 것일까?
波干(파간)이란 신라시대 관직인데, 波彌干(파미간)이라고도 하니 신라 관직 17등급 중 4등급으로 진골이 갖는 벼슬이다.
파간(波干)이란 신라시대에만 쓰던 관직으로 고려시대엔 쓰지 않는 관직이다.
따라서 파간 억종과 파간 계옹은 신라시대 사람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족보의 기록만 놓고 보면, 파간(波干) 억종(嶷宗)은 경순왕의 3세손이고, 파간(波干) 계옹(季邕) 경순왕의 4세손인데, 이는 뭔가 잘못된 기록이라는 것을 단번에 짐작할 수 있다.
1785(정조9년)년 발간된 이 족보를 보면 영분공의 이름이 없다.
경주김씨족보에서 경순왕의 아들들의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은 1784년(정조8년) 대안군 은열의 묘지명이 발견되고 나서부터다.
형은 (鎰)이고, 다음은 황(鍠)이며, 그 다음은 명종(鳴鍾)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이고,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이다.
<대안군 은열 묘지명에서>
1785년 대안군 은열의 묘지명이 발견된 이후 경주김씨족보에서 종(鍾)이 영분공의 이름으로 기록되기 시작했고, 영분공이 경순왕의 셋째 아들(명종)로 굳어졌다.
그리하여 경순왕(敬順王)--영분공(永芬公)--임흥공(林興公)--파간(波干) 억종(嶷宗)--파간(波干) 계옹(季邕)--아개공(阿盖公)-예겸(삼한벽상공신)--주정--의진--후덕--수지--영고--인경--궤(연성)--영(塋)-서인(瑞仁)-충한(沖漢)이라는 계보가 내려오게 된 것이다.
관직명 파간이 붙어 있는 것으로 봐서, 파간 억종과 파간 계옹은 분명히 통일신라시대인물일 것이다.
따라서 파간 계옹은 삼한공신 예겸의 조부로 보이며, 파간 억종은 예겸의 증조부로 보인다.
그리고 영분공은 파간 억종의 할아버지로 통일신라시대인물일 것이다.
첫댓글 족보 다시 정립해야겠습니다. 1세 알지 2세새한이 동일 인물입니다.
1785년 대안군 은열의 묘지명이 발견된 이후 경주김씨족보에서 종(鍾)이 영분공의 이름으로 기록되기 시작했고, 영분공이 경순왕의 셋째 아들(명종)로 굳어졌다.
그리하여 경순왕(敬順王)--영분공(永芬公)--임흥공(林興公)--파간(波干) 억종(嶷宗)--파간(波干) 계옹(季邕)--아개공(阿盖公)-예겸(삼한벽상공신)--주정--의진--후덕--수지--영고--인경--궤(연성)--영(塋)-서인(瑞仁)-충한(沖漢)이라는 계보가 내려오게 된 것이다.
관직명 파간이 붙어 있는 것으로 봐서, 파간 억종과 파간 계옹은 분명히 통일신라시대인물일 것이다.
따라서 파간 계옹은 삼한공신 예겸의
경순왕(敬順王)--영분공(永芬公)--임흥공(林興公)--파간(波干) 억종(?宗)--파간(波干) 계옹(季邕)--아개공(阿盖公)-예겸(삼한벽상공신)--주정(周鼎)--의진(義珍)
김예겸이 삼한벽상공신인데, 경순왕, 고려태조와 동시대인물인데 어째서 경순왕의 7세손으로 되어 있는 이상한 족보가 만들어졌을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이상한 족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이 무엇일까?
파간 억종과 파간 계옹은 분명히 통일신라시대인물일 것이다.
따라서 파간 계옹은 삼한공신 예겸의 조부로 보이며, 파간 억종은 예겸의 증조부로 보인다.
그리고 영분공은 파간 억종의 할아버지로 통일신라시대인물일 것이다.
고려사열전 김인경, 황보양처김씨묘지명, 김유규묘지명, 경주김씨족보를 종합하면, 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이 일치를 보이고 있으므로,
예겸(禮謙)-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수지(壽之)-영고(永固)-인경(仁鏡)으로 보는 것은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경주김씨족보(1934년)는 인경의 아들을 궤(軌)로 기록했는데, 그 옆에다 초휘(初諱)는 연성(鍊成)이라고 달아놓았다. 그러므로 연성=궤 동일인이다.
신라왕후손-예겸(禮謙)-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수지(壽之)-영고(永固)-인경(仁鏡)-연성(鍊成=궤(軌))----영(瑩)
요(瑤)
효무(孝茂)-성(成)-연수(延壽)
승무(承茂)
평무(坪茂)
충무(忠茂)-자손기록
경주김씨족보(1934년)는 인경의 아들을 궤(軌)로 기록했는데, 그 옆에다 초휘(初諱)는 연성(鍊成)이라고 달아놓았다. 그러므로 연성=궤 동일인이다.
신라왕후손-예겸(禮謙)-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수지(壽之)-영고(永固)-인경(仁鏡)-연성(鍊成=궤(軌))----영(瑩)
요(瑤)
효무(孝茂)-성(成)-연수(延壽)
승무(承茂)
평무(坪茂)
충무(忠茂)-자손기록
신라왕후손-예겸(禮謙)-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수지(壽之)-영고(永固)-인경(仁鏡)-연성(鍊成=궤(軌))----영(瑩)
요(瑤)
효무(孝茂)-성(成)-연수(延壽)
승무(承茂)
평무(坪茂)
충무(忠茂)-자손기록 없음
영(瑩)-두계공파, 수은공파, 시어사공파, 참찬공파
요(瑤)-병판공파, 판삼사사공파, 평장사공파, 밀직부검랑공파
승무(承茂)-월성부원군
추사 김정희는 문무왕비문 속의 성한왕은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라고 결론지었다
조상님 계보를 바르게 찾아주신 김수범종친님께 감사하다는
글을 올립니다
영분공 예의판서공 계림공 그외몇파가 선조가 김예겸삼한공신
신라에서 가장위대한 원성왕 김경신 태종무열왕 김춘추 후손으로 기록이있군요
남북통일 되면 고려역사를연구하여 차차 기록으로 선조님을 바로 잡아야겠습니다
이제부터 삼한공신 김예겸할아버지가 우리직속 직계할아버지로알고 경순왕김부할아버지는
친척 사촌할아버지로 섬기겠습니다 김수범종친님께 다시한번 감사하다는 말을전하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