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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주사 신라비 2. 전횡장군 당신 3. <보령 가는 길에서> 4. <보령에서 자며> 5. <오서산 정상에 올라> 6. 대천 한바다 7. 나무도 바위 돌도 |
*보령 맛집 <하니쌈밥> http://cafe.daum.net/koreawonderland/iVDa/18
1. 성주사 신라비
보령 성주사 터에 남아 있는 <낭혜화상백월보광지탑비명>(朗慧和尙白月葆光之搭碑銘>는 최치원(崔致遠)이 짓고 글씨를 썼다. 대낭혜(大朗慧)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고승 무염(無染)의 행적을 서술한 내용인데, 최치원이 자기 생각을 나타낸 내용도 있다.
‘심학’(心學)을 하는 낭혜화상과 ‘구학’(口學)을 하는 자기는 당나라에 가서 공부한 것은 다를 바 없는데 차별하는 것이 불만이라고 했다. “心學者高 口學者勞耶”(심학을 하는 사람은 고귀하게 놀고 구학을 하는 사람은 수고롭기만 하단 말인가)라고 한탄하고, “心學者立德 口學者立言”(심학에서 덕을 세우고, 구학에서 말을 세우는 것)이 대등한 평가를 얻어야 한다고 했다.
불교와 문학이 ‘심’과 ‘구’, ‘덕’와 ‘언’을 분담했다고 한 것은 적절한 견해이다. 그런데 세상의 평가가 달라 불만이라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인지 더 논의하지 않았다. 말을 다듬는 데 그치고 이치를 따지지는 않아 문학이 글쓰기 기술에 머무르게 했다. 자기가 하는 문학이 바로 그 점에서 결격 사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 대한민국 시대의 비는 흔히 쉽게 망가져 글자가 보이지 않는데, 신라시대의 이 비는 천년 이상 건재하고 글씨가 또렷한 것이 기이하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시대의 비에는 하나마나 한 말만 있어 오래 남을 필요가 없고, 신라시대의 이 비에 새긴 글은 불변의 가치를 지닌 줄 알면 보존 상태의 차이가 기이하지 않고 정당하다.
2. 전횡장군 당신
보령 외연도에서는 중국의 전횡장군을 당신으로 모신다. 전횡(田橫, ? ~ 기원전 202년)은 제나라의 왕 전광(田廣)의 숙부이다. 항우(項羽)에 의해서 상제왕(上齊王)에 봉해지고 제나라의 북쪽을 다스리게 되었다. 한신(韓信)이 군대를 이끌고 기원전 204년 제나라를 공격했을 때, 임치성을 방어하지 못하고 전횡은 박양성으로, 제왕 전광은 고밀성으로 도피했다. 전횡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제왕 전광이 고밀성에서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자 한군이 박양성으로 밀어닥쳤는데, 성을 버리고 등주의 영성으로 도피하다가 쫓아온 한장 관영에게 죽임을 당했다 한다. 둘째는, 영성으로 도망쳤다 멀리 등주의 해도로 갔는데, 유방이 천하통일 후 전횡과 500명의 병사를 항복시키기 위해 불렀다. 전횡과 500명의 병사는 항복을 부끄럽게 여겨 자결하였다고 한다.
전횡장군을 외연도에서 마을 당신으로 모신 내력을 당집에 걸려 있는 <전공사당기>(田公祠堂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공의 성은 전 씨요, 이름은 횡이다. 옛날 제나라의 이름난 집안 사람이다. 한나라가 흥하고 제나라가 망하자 의리로 절개를 굽히지 않고 오백여 명의 군사와 더불어 바다 건너 반양산(半洋山)에 들어와 살았다. 한나라가 두려워해 사신을 보내 부르자, 공은 부득이 두 사람의 빈객과 함께 낙양에 이르렀으나 상화점(霜花店)에서 스스로 목을 베었다. 오호라, 공이 부름에 응한 것은 실제 한나라의 위세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참화를 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함께 간 두 사람 역시 한나라의 벼슬을 받지 않고 슬퍼하다가 공의 무덤 옆에 구덩이를 파고 죽었다. 섬에 남아 있던 오백 명도 역시 한날한시에 함께 죽으니 천만 년 옛적부터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일이다. 공의 의로움이 어찌 이토록 지극하였는가. 비록 서산이나 동해로 가려 하였으나 반양산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반양산은 지금의 외연도이다. 지금에 이르러 수천 년이 지났지만, 오히려 사당을 세우지 못하고 다만 석대(石臺)로 신을 제사하는 당을 삼았었다. 섬 사람들이 그 절의를 잊고 있다가 신명에 감동하여 나무를 베어 비로소 사당을 건립하고 희생을 진설하여 제를 지내게 되었다. 공의 정령이 완연히 위에 머물러 있으니 어찌 풍성하지 않을 것이며, 어찌 공경하지 않으리오.
외연도의 당제는 매년 음력 2월 14일 저녁에 시작하여 다음 날 정오 무렵 끝난다. 처음 뒷산에 올라가 산제로 시작하여 전횡장군 사당제를 모시고 나면, 지태라고 부르는 소를 희생 제물로 삼는다. 보름날 새벽 5시경에 당산에 팥떡을 가져가서 올리고, 올렸던 제물을 수습하여 당을 내려온다. 이후 팽나무제와 등장마당제 그리고 용왕제와 띠배 퇴송으로 이어지며, 끝으로 당샘제와 안당제를 모신다.
=> 중국 제나라의 장수 전횡의 혼령을 모시는 사당과 제사가 한국의 한 섬에 있는 것이 아주 흥미롭다. 전횡은 소정방이나 이여송처럼 싸우러 오지 않고, 싸움에 져서 쫓겨와 자살한 것이 안타까워 동정을 받다가 숭앙의 대상이 되었다.
3. 보령
송상기(宋相琦) <보령 가는 길에서>(保寧途中)
老木含風響 늙은 나무는 바람 머금고 울고,
荒城羃雨陰 황량한 성은 비에 덮여 어둡구나.
民憂空滿目 백성의 근심 공연히 눈에 가득하고,
行役更關心 부역에 더욱 마음 쓰이는구나.
鸛鶴村墟靜 학 마을은 허물어진 채 조용하고,
帆檣海口深 돛배는 포구 깊숙이 와서 머물렀네.
臨歧忽自笑 갈림길에 서서 문득 홀로 웃노라,
何事負山林 무슨 일로 산림을 저버렸는가.
=> 해만 마을의 쓸쓸한 모습을 그리다가 자기 말을 한다. “산림을 저버렸는가”는 산림처사 노릇을 저버리고 벼슬을 하게 된 것을 말한다. 벼슬을 하고서도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니 서글프다는 말이다.
4. 오서산
정약용(丁若鏞) <오서산 정상에 올라>(登烏棲山絶頂)
碧落岧嶢石作臺 하늘 높이 솟은 산 석대에 올라오니,
山河萬里鬱盤回 만리에 펼친 산하 얼기설기 얽혔네.
錦川秋色橫雲斷 금강 가을빛은 구름 가려 끊어지고,
吳粤天光過海來 오월 하늘빛은 바다 넘어 비쳐드네.
魯聖乘桴良有以 뗏목 타고 오시려던 공자님 까닭이 있고
周王遷國亦悠哉 주왕 나라 옮겨온 일 아련한 옛일이라.
神京北望知何處 북쪽 하늘 바라보니 서울은 어디더냐,
煙靄蒼蒼數雁哀 푸르른 안개 속의 기러기 소리 애달프구나.
=> 보령에 있는 오서산은 가을 억새가 유명하다. 정약용이 오서산 산정에 올라 이런 시를 지은 것이 놀랍다. “吳粤”은 중국 남쪽인데 오서산에서 보이는 남쪽 지방을 지칭하는 말로 썼다. 공자가 오고 싶어 했던 일을 되새기며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임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고 했다. “주왕 나라 옮겨온 일 아련한 옛일이라”는 구절에 “백제 문주왕(文周王)이 맨 처음 도읍을 웅천(熊川)으로 옮겼다”는 주를 달았다. 백제의 일을 중국 주나라에 견주었다.
5. <대천 한바다...>
대천 한바다 속 헌 배 탄 저 사공아
갈 길을 재촉 말고 풍랑을 삼갈새로
예부터 이곳에 든 이 아니 패한 이 없나니
=> 대천 바다는 시련을 겪어야 하는 험한 곳이다.
6. <나무도 바위 돌도...>
나무도 바위 돌도 없는 뫼에 메게 쫓긴 까투리 안과
대천 바다 한가운데 일천 석 실은 배에 노도 잃고 닻도 잃고 용총도 끊고 돛대도 끊고 키도 빠지고 바람 불어 물결 치고 안개 쉬섞여 잦아진 날에 갈 길은 천리만리 남은데 사면은 검어어둑 천지 적막 까치노을 떴는데 수적 만난 도사공 안과
엊그제 임 여인 내 안이야 어디다 가을하리오
=> 대천바다는 물결이 험한 곳으로 이름이 나서 이런 사설시조가 이루어졌다. 사설시조답게 단순한 구조를 교묘하게 활용하면서 많은 말을 한다. 초장 말미의 “까투리 안과”, 중장 말미의 “도사공 안과”, 종장의 “내 안이야”, “어디다 가을하리오”라고 한다. “안”은 “마음”이다. “가을하리오”는 “견주리오”이다. 까투리의 마음, 도사공의 마음, 자기의 마음은 너무 절박해 견주어 말할 데가 없다고 했다. 까투리의 마음, 도사공의 마음, 자기의 마음을 동격으로 열거해 자기의 마음을 이미 그 둘에 견주어 말하고서 견주어 말할 데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앞뒤가 어긋난다. 앞뒤가 어긋나는 줄도 모르고 이말 저말 해서 다급한 심정을 더 잘 나타낸다.
초장에서는 “나무도 바위 돌도 없는 뫼에 메게 쫓긴 까투리 안”을 말했다. 죽지 않고 살아날 길이 없는 상황이다. 종장에서는 “엊그제 임 여인 내 안”을 말했다. 이 둘만 연결시켜도 무엇을 제시하는지 알 수 있는데, 초장과 중장 사이에 길게 이어지는 중장이 있다. 중장에서 “도사공의 안”에 관해 하는 말은 너무 장황해 몇 토막으로 나누어 살필 필요가 있다.
“대천(大川) 바다 한가운데”는 넓은 바다에 나섰다는 말이다. “일천 석 실은”은 짐이 과도하다는 말이다. “노도 잃고 닻도 잃고 용총도 끊고 돛대도 끊고 키도 빠지고”는 배 여러 곳에 고장이 생겨 항해 불능 상태라는 말이다. “바람 불어 물결 치고 안개 쉬섞여 잦아진 날”은 기상 조건이 아주 나쁘다는 말이다. “갈 길은 천리만리 남은데”는 목적지까지 많이 남았다는 말이다. “사면은 검어어둑 천지적막 까치노을 떴는데”는 날이 저문다는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바다 도적 “수적(水賊)”을 만났다고 한다.
도사공의 마음을 내 마음보다 훨씬 길게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내 마음을 그냥 말하면 말이 막힌다. 신음 소리만 늘어놓고 말 수는 없다. 도사공의 마음에다 견주어 내 마음을 말해야 말이 이어지고, 전후의 상황을 알릴 수 있고, 탄식을 하면서 자기를 돌아볼 수 있다. 인생이 항해라고 여기면 자기도 도사공과 같은 수난을 당했다고 할 수 있다. 수난 당한 사태를 파악하면 희망이 생길 수 있다. 까투리의 마음을 생각하다가 도사공의 마음으로 옮아가고 자기의 마음을 되돌아보는 것은 불행에 매몰되지 않은 열린 의식을 지녔기 때문이다.
*<대천해수욕장>
*<대천해수욕장>
*<충청수영성>
<영보정>
<오천항>
* 충청수영성 <영보정>
조선은 세조 12(1466)년에 충청도 수군사령부인 충청수영을 이곳 오천에 설치하여 왜구의 침탈로부터 방어하고자 하였다. 충청수영성은 철새의 천국인 천수만 입구와 연계되어 풍광이 수려한데, 그중 압도적인 곳이 바로 영보정(永保亭)이다. 영보정은 정약용, 이항복, 이수광, 장유 등이 누각의 뛰어난 경치를 호중, 혹은 전국 으뜸으로 꼽았다는 정자다. 풍광이 빼어나 시인묵객의 걸음이 멈추지 않아서 수많은 시인이 제영(題詠)을 쓴 곳으로도 유명하다. 유실된 정자를 보령시에서 오랜 조사 끝에 2015년에 복원해 놓았다.
영보정에 올라서면 오천항이 통으로 내려다 보인다. 오천항은 보령 북부 생활권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중국과의 교역 통로였으며 방파제가 필요 없는 천연 항구로 알려져 있다. 식사를 하고 소박한 규모의 오천항구도 돌아보고 수영성과 영보정을 돌아보면 천하진미와 천하절경을 다 품는 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