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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불이의 공전보(共戰譜)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10회 가가와·도쿠시마②
이것으로 승리했다!
여러분이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다
‘썬플라워 7호’
1979년 4월 24일, 이케다 선생님이 회장을 사임했다. 회합에서 지도하거나 기관지에 실릴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학회본부에서 전국 각지에서 선생님의 방문을 희망하는 편지가 도착했지만, 선생님의 행동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한 때에 시코쿠 벗은 스승을 구도하여 행동을 일으켰다. 그 드라마가 제30권(상) ‘자복(雌伏)’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광포사에 이름 드높은 ‘썬프라워 7호’가 떠나는 여정이다.
“선생님의 행동이 제한받고 계시다면, 우리가 선생님을 뵈러 갑시다!”
시코쿠의 간부는 서로 이야기하는 속에 함께 결의했다. 그리고 1979년 12월 시코쿠장 구메가와 세이타로는 가나가와문화회관에서 신이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부탁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이곳 가나가와문화회관에 계실 때, 시코쿠 멤버 800여명과 함께 이곳으로 오려고 합니다. 가능하다면 배를 빌려서 가까운 항구로 올 예정입니다. 저희가 도착하면 멤버들을 만나주시겠습니까?”
신이치는 웃으면서 말했다.
“시코쿠 동지들이 나를 만나러 일부러 와주시는군요. 알았습니다. 만나겠습니다. 그 의기가 참으로 기쁩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동지들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준비했다. 이듬해 1980년 1월 13일, ‘썬플라워 7호’가 다카마쓰항을 출발해 스승이 있는 가나가와를 향해 파도를 가르며 달렸다.
얼마 뒤 배 안에서 간부회가 열렸다. 구메가와의 인사말은 시코쿠 동지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 어떤 힘으로도 절대 선생님과 우리의 유대를 끊을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의 행동이 제약을 받는다면, 우리 제자들이 스승의 슬하로 달려가면 됩니다. 불타오르는 구도(求道)의 일념이 있는 한. ‘불가능’이라는 장벽 따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시코쿠가 앞장서서 선생님과 함께 창가학회 창립 50주년의 개막을 축하하지 않겠습니까!”
14일 정오 전, 배가 요코하마항에 들어섰다. 갑판 위에 선 멤버들은 오산바시를 바라보았다. ‘가나가와에 잘 오셨습니다’라고 쓴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부두에서는 시코쿠의 노래 ‘우리의 천지’의 선율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환영연주를 하는 사람들 앞에는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신이치의 모습이 있었다.
멤버들을 맞이한 신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 몸은 괜찮은가? 잘 왔네. 이것으로 승리했다! 21세기를 보았다. 여러분이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다.”
손전등
오후 1시 반부터 시코쿠와 가마가와의 교류간부회에서 신이치는 모든 참석자와 함께 근행하고 벗에게 차례로 말을 건넸다. 그 뒤 회식을 겸한 간담회에서는 ‘다이난코(大楠公) 등을 피아노로 연주하여 동지를 위로했다.
스승의 진심에 시코쿠의 벗은 이렇게 서원했다.
‘저희는 학회정신을 단호히 계승하겠습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광선유포의 길을 활짝 열겠습니다. 시코쿠는 지지 않겠습니다. 창가승리의 깃발을 흔들겠습니다!’ 다케무라 후사에 씨(전국부인부 주사, 시코쿠 부인부 총주사)의 가슴속에는 지금도 그날의 감격이 빛나고 있다.
“이케다 선생님은 소설을 비롯해 수필이나 장편시, 스피치 등에서 몇 번이나 ‘썬플라워 7호’의 역사를 칭찬해주셨습니다.
그날 ‘선생님을 뵙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배에 오른 우리는 복운과 사명을 깊이 새겨 투쟁했습니다.”
요코하마에 도착했을 때 극진한 환영에 시코쿠 동지는 가슴이 뭉클했다. 훗날 다케무라 씨는 선생님의 배려였음을 알고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돌아가는 배에서 ‘선생님과 사모님이 손전등을 흔들고 계신다.’는 말을 듣고 가나가와문화회관을 바라보았습니다. 맨 위층에서 흔들리는 빛을 보았을 때, 우리 가슴에 용기와 희망의 불이 켜졌다고 실감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선생님과 함께!’라고 모두 서원했습니다.”
정의로운 반전공세의 출발은
항상 시코쿠였다
<빛나는 무대> 도쿠시마강당
도쿠시마현 기타지마초에 있는 도쿠시마강당은 1981년 11월에 낙성해 9일에는 이케다 선생님을 모시고 기념근행회를 개최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잠시만이라도 도쿠시마에 가서 약속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으로 왔습니다.”라는 스승의 말에 모두 가슴이 뭉클했다.
10일에도 자유근행회를 열어 선생님은 이틀 동안 4000여명의 동지를 격려했다.
선생님은 1985년 4월 15일에도 도쿠시마강당을 방문해 강당에 모인 벗을 위해 ‘봄이 왔다’와 ‘다이난코’ 등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도쿠시마강당 낙성
이케다 선생님은 장편시 ‘시코쿠 합중국의 찬가’에서 드높이 구가했다.
”창가의 역사에 불멸하는/ 정의로운 반전공세(反轉攻勢)의 출발은/ 항상 시코쿠였다.“
‘정의로운 반전공세의 출발’이라는 말은 제30권(하) ‘승리의 함성’에 씌어 있다.
1981년 11월, 도쿠시마의 벗은 신이치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었다. 7일부터 도쿠시마강당 낙성기념행사를 시작했다. 세이쿄신문에도 신이치가 도쿠시마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요인과 회견, 여러 행사의 참석 요청이 많아 ‘선생님의 도쿠시마 방문은 미정’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결국 7일과 8일에 신이치는 참석하지 않았다.
9일 오후, 도쿠시마강당 낙성기념근행회를 시작했다. 식순이 끝나고 간부 지도도 끝났다.
그때였다. 강당 뒷문이 열리고 거기에는 신이치가 서 있었다.
“드디어 왔습니다!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소설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신이치는 참석자들에게 말을 건네면서, 참석자들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강당 앞쪽으로 갔다. 스승과 제자의 마음은 하나가 되어 불타오르고, 이곳에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시코쿠투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도쿠시마 대학부의 현위원장인 나카노 히데오 씨(도쿠시마총현 부총합장)는 이 드라마의 배경을 이렇게 말했다.
“제1차 종문사건 당시, 도쿠시마에도 학회를 중상하는 폭풍우가 휘몰아쳤습니다. 역풍 속에서 대화도 생각처럼 진전되지 않아 침체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일선 조직에서 적은 인원이 모여 반좌담회를 철저히 열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멤버 한 사람 한사람에게 ‘내 안에 학회가 있다. 내가 학회의 전권대사다.’라는 자각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1981년 9월, 〈세이쿄신문〉에도 도쿠시마강당 낙성기념행사에 선생님이 참석할 예정이라고 보도되었다. ‘반드시 실현시키자! 승리해서 선생님을 도쿠시마에 모시자!’고 모두 불타올랐습니다. 제목을 부르고 또 부르며 절복을 위해 뛰어다니고 대확대의 결과로 11월을 맞았다.
“선생님은 ‘도쿠시마 여러분의 제목에 이끌려 오늘 이곳에 올 수 있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이 도쿠시마강당에 나타나셨을 때는 순간 정적이 흐른 뒤 강당을 뒤흔들 듯한 폭발적인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나카노 씨)
지도에 나선 선생님은 “도쿠시마가 여기 있다는 것을 전 일본에 밝히고 싶군요.” “나는 도쿠시마를 응원하고 싶습니다.”라며 진심으로 성원을 보냈다.
선생님은 시코쿠에 머무는 동안 ‘도쿠시마도 노래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멤버들은 기념근행회에서 받은 지도를 바탕으로 가사를 만들어 제출했다. 선생님은 거듭 퇴고하여 ‘도쿠시마’라는 말을 여섯 군데에 넣어주셨다. 그리고 도쿠시마현 애창가 ‘사랑하는 도쿠시마’가 탄생했다. 도쿠시마의 동지는 스승의 진심에 감사하며 도쿠시마의 광포를 새롭게 서원했다.
<기고> 자 도쿠시마여, 자 일어서라
도쿠시마 총현장 요시모토 가즈히로 / 총현부인부장 다나카 다에코
1981년 11월 9일과 10일 이틀간, 도쿠시마강당 낙성기념근행회에 참석하신 이케다 선생님은 도쿠시마의 동지들에게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도쿠시마(德島)’라는 지명은 현(縣)의 이름으로는 최고입니다. ‘공덕의 섬’ ‘덕이 높은 사람들이 모이는 섬’이라는 뜻에도 통합니다. 이 도쿠시마에서 시코쿠 광포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주십시오!”(제30권<하> ‘승리의 함성’)
제1차 종문사건이 한창일 때, 광선유포를 향한 ‘사제의 서원’을 가슴에 품고 비열한 악승들과 필사적으로 싸워 학회의 정의를 끝까지 외친 도쿠시마의 동지에게 사제가 반전공세를 시작한 도쿠시마 지도는 생애 원점으로 빛납니다.
훗날, 선생님이 역사적인 11월 9일을 ‘도쿠시마현 부인부의 날’로 정해주신 일은 도쿠시마 부인부의 영예입니다.
이틀간의 도쿠시마 지도를 마치고, 가가와현의 시코쿠연수원으로 이동한 선생님은, 남자부 애창가 ‘태양의 노래’에 이어서 “도쿠시마도 노래를 만들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셨습니다.
그 뒤, 선생님은 몇 번이나 거듭 퇴고해 드디어 완성한 노래에 도쿠시마현 애창가 ‘사랑하는 도쿠시마’라고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곡의 마지막에는 “자 도쿠시마여, 자 일어서라”라는 가사로 끝맺으셨습니다. 이 구절은 ‘사랑하는 도쿠시마의 땅에서 광포확대를 향한 승리의 실증을 확립해야 한다!’는 스승이 제자에게 거는 기대라 여기고 도쿠시마의 동지는 분기했습니다.
그 뒤 우리 지역을, 도쿠시마를 사랑하며 사제공전으로 승리의 실증을 확립해 묘법에 감싸인 대공덕의 인생으로 ‘도쿠시마가 여기에 있다!’는 기개를 보여주었습니다.
2020년은 도쿠시마지부 결성 60주년 그리고 2021년은 ‘반전공세의 도쿠시마 지도’ ‘도쿠시마현 애창가 사랑하는 도쿠시마’ 탄생 40주년의 가절을 맞습니다.
우리 도쿠시마의 동지들은 지금 다시 한번 스승과 새긴 원점을 가슴에 품고 사랑하는 도쿠시마에서 새롭게 사제공전으로 승리의 결과를 확립하겠습니다.
그리고 ‘자 도쿠시마여, 자 일어서라’고 외치신 스승의 기대에 온 힘을 다해 보답할 것을 결의합니다.
평화행동전
이튿날인 10일, 신이치는 도쿠시마강당을 출발해 시코쿠연수원으로 갔다. 제30권(하) ‘승리의 함성’에 그곳에서 시코쿠 청년부가 기획하고 추진한 신이치의 ‘평화행동전’을 언급했다.
당시 가가와 대학부의 현위원장인 다카하시 히로유키 씨(부회장, 부시코쿠장)는 이렇게 회고했다.
“제1차 종문사건 당시, 시코쿠 청년부는 ‘이케다 선생님이 세이쿄신문에 실릴 수 없다면 제자인 우리가 선생님의 진실을 알리자.’며 전시를 열기로 정했습니다. 먼저 선생님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오셨는지 조사해야 했습니다.”
세이쿄신문 축쇄판을 면밀히 조사해 지성과 나눈 회견이나 선생님의 행동을 분야별, 연대별로 나누어 자료를 수집했다. 조사를 하면서 ‘선생님은 이렇게까지 평화를 위해 거듭 행동하셨구나!’ 하고 모두 경탄했다.
전시는 시코쿠연수원에서 열기로 했다. 당시는 모든 패널의 글자를 손으로 써야 했다. 매우 힘든 작업이지만 멤버들의 가슴에는 스승의 위대함을 선양할 수 있다는 긍지가 빛났다.
평화행동전은 1981년 10월 3일부터 한달에 걸쳐 열려 6만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관람했다. 이듬해인 1982년에는 시코쿠이케다평화기념관이 완공되어 환경전과 우주전 등 다양한 전시를 거듭 개최했다.
다카하시 씨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일관되게 ‘시코쿠(四國)’ ‘시코쿠(詩國)’ ‘시코쿠(師國)’라고 써서 선양해주셨습니다. 그에 감동한 지성도 많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스승의 마음과 행동을 끝까지 말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지휘를 하겠습니다!
창가사제의 유대
1981년 11월 10일, 이케다 선생님은 시코쿠연수원에서 개최한 11·10 ‘가가와의 날’ 기념간부회에 참석했다.
제30권(하) ‘승리의 함성’에는 그 광경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신이치는 드높이 선언했다.
“다시 한번 지휘를 하겠습니다! 더 이상 여러분에게 걱정을 끼치거나 고생을 시키지 않겠습니다. 내 마음을 아시는 분들은 함께 투쟁합시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이치의 가슴에는 ‘창가사제의 유대가 강할수록 그 어떤 사악(邪惡)도 반드시 타파할 수 있다. 불의불칙(佛意佛勅)의 광선유포의 단체인 학회의 전진이 횡포한 중들의 권위에 더 이상 막히면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반전공세(反轉攻勢)의 때이다!’라는, 단호한 맹세의 불꽃이 불타올랐다.”
이튿날인 11일, 신이치는 새로운 시코쿠문화회관과 다카마쓰강당을 둘러보고 연수원에서 시코쿠 간부와 간담했다. 그때 열렬한 기백으로 이렇게 강조했다.
“나는 시코쿠에서 창가사자(創價師子)로서 광선유포를 다시 지휘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곳에서 새로운 시대건설의 막을 열겠습니다. 왜냐하면, 시코쿠야말로 광선유포의 ‘선구의 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 황금의 역사를 아무쪼록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당시 가가와현 여자부장인 이노우에 구미코 씨(시코쿠방면 부부인부장)는 “이케다 선생님이 시코쿠에 오시고 나서 마치 멈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라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노우에 씨는 선생님이 시코쿠에 머무는 동안 스승의 행동을 가슴에 새겼다. ‘더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라며 회원들과 차례로 만나 간담을 나눴다.
‘태양의 노래’를 퇴고하면서도 전 세계에서 보낸 보고에 재빨리 손을 썼다. 벗에게 보내는 휘호도 거듭 써 내려갔다.
윙윙 소리를 내며 광포가 회전하는 듯했다.
“시코쿠에서는 ‘이케다 선생님이 있는 곳이 광포의 본진이고 제일선’이라며 다 함께 대화하고 스승에 대한 구도심을 불태우며 전진했습니다. 실제로 선생님의 격투를 직접 보고 ‘광포의 제일선은 지금 여기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노우에 씨는 사제공전의 서원을 품고 날마다 벗을 격려하고자 힘쓰고 있다.
후계의 바통은 그대들의 손에 있다
‘태양의 노래’
제30권(하) ‘승리의 함성’에서는 시코쿠 방문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튿날 12일, 신이치는 시코쿠 청년부 대표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이야기가 일단락 되엇을 때, 시코쿠 청년부장 오키미쓰가 일어섰다.
“선생님! 시코쿠 남자부의 애창가를 만들었습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신이치에게 가사가 적힌 종이가 전달되고 카세트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은 가사이다. 하지만, 좋은 말만 늘어놓은 듯한 느낌이군.”
그리고 신이치는 청년들의 부탁으로 가사를 손보기 시작했다. 1절부터 3절까지 가사를 30여 군데 수정하고 이렇게 말했다.
“좀 더 생각해보겠네. 청년부를 위해, 영원히 계속 부를 수 있는 최고의 노래를 남기고 싶다. 광선유포의 반전공세를 선언했다고 증명하는 노래를 완성시키자.”
신이치는 행사 중간에도 몇 번이고 가사를 수정하거나 곡을 듣고 조언했다.
“창조는 ‘안이하게 타협하려는 자신의 마음과 맞서 싸우는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마음을 이겨내면서 극한까지 도전하고, 노력하고, 거듭 궁리해야 비로소 새로운 길이 열린다. 신이치는 그 창조의 투혼을 후계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14일 밤, 스무번 넘게 퇴고한 끝에 ‘태양의 노래’가 완성됐다.
그리고 ‘태양의 노래’에 담긴 스승의 진심이 이렇게 씌어 있다.
“‘아아 저 붉고 붉은 태양이 솟아 …’
구름을 뚫고 붉은 태양이 떠오른다. 하늘은 시시각각 붉은 빛으로 물들고, 신생(新生)의 아침이 찾아온다. ‘붉은 태양’은 우리 흉중에 불타는 원초(元初)의 태양이다! 시대를 열겠다는 뜨거운 투혼이다! 젊은 생명력의 빛이다!
오, 욱광(旭光)처럼 세계광포를 위해 선구를 달리는 늠름한 창가청년들이여!
지금 ‘생명의 세기’를 알리는 효종(曉鐘)이 드높이 울려 퍼지고, 영광의 아침이 도래했다. 영광이란, 불요불굴의 도전이 가져오는 행복과 승리의 광채이다.
청년이여, 두려워하지 마라! ‘거센 노한 파도’를 그리고 모든 장마를 물리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광선유포는 정의와 사악이 맞서 싸우는 투쟁이다. 정의라고 해서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악이 번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불법(佛法)은 승부이다. 지용의 사명에 살아가고, 불법이라는 정의의 깃발을 내건 우리는 절대 지면 안 된다. 이겨야만 하는 책임이 있다.
지용보살(地涌菩薩)이란 우리 창가의 민중군상(民衆群像)이다. 고뇌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려고 일부러 오탁악세(五濁惡世)의 말법(末法)에 출현했다.
쓰라린 아픔과 인내 속에서 씩씩하게 자신을 연마하고 인생승리의 드라마를 연기해, 불법의 위대한 공력(功力)을 증명하겠노라며 씩씩하게 이 세상에 뛰어나왔다.
숙명의 폭풍우가 몰아칠 때도 있다. 고뇌 없는 인생은 없다. 그러나 광선유포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용기를 불태워 투쟁하면 희망의 무지개가 뜨고, 고뇌는 환희로 바뀐다.
인간은 겁쟁이가 되고, 도전을 멈추고, 희망을 버리고, 포기하는 마음을 가지게 됨으로써 자신을 불행에 빠뜨리는 법이다. 우리는 묘법이라는 근원의 법에 따라, 넘칠 듯한 생명력으로 과제 하나하나를 극복하면서 광포로 달린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빛내면서 자타 함께 행복을 구축하기 위해, 넘치는 환희를 가슴에 안고 자랑스럽게 ‘민중의 깃발’을 내걸고, 민중이 부르짖는 ‘승리의 함성’을 드높이 울려 퍼지게 하기 위해.
‘훼예포폄(毁譽褒貶)하는 자들아 / 물러나가라 …’
‘훼예’는 ‘비방하고 칭찬한다.’는 뜻이고, ‘포폄’은 ‘찬양하고 헐뜯다.’는 뜻이다. 절조와 신념도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손바닥을 뒤집듯이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내려다보면서 숭고한 ‘신념의 길’을 나아가는 것이 창가사제(創價師弟)이다. 그것이 참된 ‘인간의 길’이다.
초대 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선생님을 위대한 교육사상가로서 우러르던 사람들이 군부정부의 탄압으로 선생님이 체포·투옥되자, 태도를 바꿔 아무렇지도 않게 ‘마키구치에게 속았다.’고 하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또 전쟁이 끝난 뒤에 도다 선생님의 사업이 곤경에 처했을 때도, 선생님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이 그 은의(恩義)를 잊은 채 악구(惡口)와 중상(中傷)을 거듭했다.
그런 무리들의 말에 일희일우하면 안 된다. 광선유포라는 신념의 ‘빛나는 왕도(王道)’를 유유히 나아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사제의 대도(大道)를 걷는다.’는 더없이 커다란 긍지가 있다. 함께 맹세한 부자(父子)의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
청년 여러분이 있는 한, 나는 안심이다.
아무쪼록 나를 토대로 하여, 나를 능가하는 거목으로 성장하기 바란다.
나는 경애하는 마음을 담아 그대들을 우러르고, 상찬하고 싶다. 신세기의 드넓은 하늘로 나아가는 그대들이여! 미래를 위해 자신을 연마하고, 단련하고, 일하고, 배우고, 기쁜 마음으로 노고해야 한다.
‘청춘의 / 황금의 땀’이야말로 틀림없이 자신을 영원히 장엄하게 장식하는 재산이 될 것이다.
나에게는 보인다. 파릇파릇한 잎이 무성한, 내일을 향해 성장하는 나무들 꼭대기 위에서 찬연히 빛나는 영광의 무지개가!
자, 젊은 영재들이여! 지평선 저편에 치솟듯이 힘차게 뛰어나와라!
만엽(万葉)의 인간찬가의 시대를, 현란한 생명존엄의 신세기를 열기 위해 기쁘게 춤추며 나아가라!
창가청년의 정열과 힘으로 21세기 대승리의 막을 단호히 열어야 한다.
후계의 바통은 그대들의 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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