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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교육청, "유시민 의원 본인에게만 자료 공개하겠다"
박선협大기자
나는, 대전 e조은뉴스의 송 모 대표기자가 나선 유시민의원의 과거사 현장취재를 목도했다. 그 장본인으로서의 나는 유시민의원의 변명을 소가 지나다 껄껄거리는 형국이라고 풀이한다해도 이는 과언이 아니라는 판단을 한다.
나는 송 기자를 도와 경북교육청 중등교육과를 취재했다.
그 취재 과정에서 경북 교육청 중등교육과가 보관하고 있는 인사기록에 유태우란 동명이인 4 사람의 기록카드를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러한 사실을 확인것이야말로 이 취재의 백미였다.
취재원의 이름밝히기를 거절한 중등교육과 담당자, 그는 분명 그 중 한사람이 유시민의원이 자인한 만주의 한 소학교에서 근무한 기록이 있으며 그 직책은 훈도였다는기록이 있으며 그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시인했다.
그리고 담당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서 본인 말고는 정보공개가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했다.
어쨌든 유태우씨는 일제하 훈도를 경력으로 삼아 미 군정시대와, 대한민국의 교사, 교장으로 승진하면서 교장을 마지막으로 퇴임하기에 이른 것은 숨길 수 없은 사실임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유시민의원이 태어난 생가 터로 왼쪽에 남아 있는 집에서 유의원의 조부가 살았다고 하며, 우측 뒤의 터에서 유의원이 태어났다고 하나 현재는 집이 다 헐려 밭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을 유시민의원이 알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 아버지 유태우씨의 신상기록을 확인할 수 있도록 대한민국 교육행정은 그 자료를 철저히 기록 보관해 오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유시민의원이 부친의 과거사를 자기 변명으로 합리화시키려 들었다면, 이는 유의원 본인이 그동안 논객으로 쌓아올린 유명세를 이용하여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었고, 과반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실력자로 부상한 지금이라도 자신의 부친에 대한 최소한의 자료라도 연구하고 변명 했어야 했을 것이다..
유의원은 도대체 어디가서 무슨 자료를 들쳐보았단 말인가?
국민과 네티즌이 알고싶은 자료가 아니라 어떻게든 교언영색으로 덧칠해서 국민과 네티즌의 이목을 손으로 해 가리듯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어떻게 부친의 치부를 미화(美化)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했을까?
진실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 세상사의 이치라지만, 같은 소재를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데 능수능란한 모습을 보이는 유의원의 모습을 상기하면 카멜레온의 생존술을 뻬어 닮은 자태에 그냥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실로 가상한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일제하 훈도(訓徒)란 당시 일제 교육수칙상 제1의로 삼은 "덴노헤이까(天皇陛下)에의 충성을 가르치는 선봉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맹세치 않은 사람이 발을 붙일 수 없는 일제수호를 위한 신성불가침의 자리였다.
1940년 대 당시는 죽으나 사나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만주를 병탄한 후 중국을 넘보던 시기였고 대 일본 제국이란 명칭에 걸맞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대였으며 이 시대에 일제의 교육은 식민지 국민들을 황국신민화 시키려는데 혈안이 되었던 시대였다.
즉 황국신민화를 의식화시키는데 둘 째 가라면 서러운 직책, 그것이 소위 훈도였으며 그들의 사명이 일제의 영광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분명함에도 유의원은 지금 자신의 논리로 비약에 비약을 거듭하며,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자는 이런 사실로비춰볼 때 그의 박명한 재질을 서러워 한다. 그렇게밖에 나설 수 없는 처량한 행색을 차마 정색하고 보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유장하게 늘어진 버들고을에 노랑새가 살았단다
시도때도 접어두고 홀홀날며 살았단다
민심이 하수상하니 돌아간들 어떠리
2004/09/08 [12:36] ⓒ브레이크뉴스
* 아래는 송인웅기자의 기사
"선친이 만주서 뭐했는지 잘 모른다"?
'가족사 연구' 좀 더 일찍 제대로 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송인웅
기자가 유시민의원에게 요구한 두 가지 사항 중 하나에 대해 유의원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유시민의원은 9월 7일 자신의 홈페이지(www.usimin.net)에 '나, 아버지, 과거사 그리고 국가정체성'이란 글을 올려, 지금까지는 관심이 없어 모르고 있었던지 “지난 주말 가족사를 새로 '연구'했다”면서 자신의 '가슴 아픈 가족사'를 전하고 있다.
이 글에서 유의원은 기자가 쓴 “유시민의원 선친 일제하 교사, 백부는 면장”이라는 기사의 내용에 대해 "제 선친은 1942년경에, 대구상업학교를 나온(당시에는 수재들만 갔다고 하더군요.) 둘째 숙부가 회사 업무상 파견 나가 계시던 만주에 가서, 거기 어느 소학교에서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교사였는지, 보조원이었는지, 또는 행정사무를 보았는지는 알 수 없고, 교사 자격이 있었는지 여부도 모르겠습니다"고 답하고 있다.
그리고 "선친은 해방 직후 미군정이 교사 요원 공채를 했을 때 동양사 분야에 응시해 합격했고, 6개월 연수를 받은 후 당시 6년제였던 경주여중에 부임"했으며, "이때 최초로 교원 자격을 얻었고, 일제 때 교원경력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해명하고 있다.
우선 지적하고싶은 것은 "선친이 만주 소학교에서 일을 한 사실은 알면서도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른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또한 "만주 소학교에서 교사 일을 했는지, 교사 자격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하면서 "일제 때 교원 경력은 없는 것으로 안다"는 말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소학교에서 일을 한 사실을 알 정도면 일부러 숨기려 하지 않는 바에야 "무슨 일을 했는지를 모른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을 뿐더러, "당시 교사 자격이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해놓고는 금세 또 "일제 때 교원 경력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하는 게 미덥지 않다.
기자가 취재한 바에 의하면 유의원의 선친(柳台佑)은 1943년경 만주 국민의급학교(소학교라고 함)에서 교직을 시작했으며, 유의원의 선친이 1920년생이므로 23세경부터 이미 교사직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43년경은 분명 일제치하였다. 일제하에서는 교사를 훈도라고 칭한다는 확인까지 하였다.
유의원은 자신의 백부와 관련한 사항에 대해 "백부님은 내남면 또는 인근 산내면 면장을 1년 정도 했다"고 밝히고 있다. 기자가 취재한 바로는 산내면이 아니라 내남면이 맞다. 결국 유의원은 기자가 취재한 내용이 맞다는 걸 확인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유의원은 "송아무개라는 사람이 인터넷 <브레이크뉴스>에 저를 여러 가지로 비난하는 기사를 썼다"는 식으로 마치 기자가 전혀 사실무근인 기사를 작성하여 유의원을 비난 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제 선친의 경력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저에게 적대적인 정치세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마치 기자가 특정 정치세력의 사주를 받고 있기나 한 것같은 뉘앙스의 발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유의원 스스로가 정치적 편가르기에 빠져 있다는 반증일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유의원 자신이 얼마나 협량한 의식의 소유자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얼마 전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유의원을 가리켜 "그에게 있어서 정치의 본질은 싸움이며, 그것도 혈투다"는 지적을 한 적이 있다. 시민기자의 기사 하나를 두고 '정치적 적대세력' 운운하면서 덤비는 유의원을 보니 그 지적이 틀리지 않은 것같다는 생각이다. 강 교수는 이어서 "노 정권은 수명이 다 하는 그날까지 혈투를 포기하진 않을 것"이라고 적고 있는데, 기자가 혹여 그 혈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될 지경이다.
기자는 이미 앞선 기사에서도 밝혔듯이 유시민의원의 선친이나 백부가 일제시대 훈도를 했거나 면장을 한 사실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단 유의원의 선친이나 백부만이 아니라 당시대를 살아야 했던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가슴아픈' 역사인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그 아픈 역사를 살았던 자손들이다.
그럼에도 기자가 유시민의원의 과거 가족사를 취재한 것은 유시민의원이 자타가 인정하는 집권 열린우리당의 실력자이고, 그 정부와 열린우리당에서 주도하고 있는 "친일진상규명의 접근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기자는 '역사 바로 세우기'가 지금과 같은 방식, 즉 "정부나 정치권이 나서 주도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역사학자나 연구소 등이 나서고 맡아 추진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다음 정권이면 역사의 대상이 될 정권이 나서 이 일을 주도하는 것이 상대 정치인을 흠집내기 위한 방편으로 악용되어 이 "훌륭한 의제가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자가 유의원의 가족사 이야기를 취재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즉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이 "역사적 의제를 기껏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삼으려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작 '자기 x 구린 줄은 모르면서 남의 x 구린 것만 탓하는' 열린우리당의 행태를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어쨌거나, 기자의 해명 요청에 성실하게 답을 해주신 유의원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기왕 해명을 해주시는 김에 기자가 요구한 다른 하나의 사실, 즉 유의원이 자신의 저서나 선거공보물 등에서 밝히고 있는 '두 번의 민주화 운동에 따른 옥고'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해명해주실 것을 촉구한다.
2004/09/08 [03:12] ⓒ브레이크뉴스
유시민 선친 일제하 교사, 백부는 면장
역사의 수레바퀴는 지금도 돌고 있다.
송인웅
우리가 흔히 부르는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는 용어도 당시 일부언론과 유시민 등 가해자들과 그 주위의 멋도 모르고 날뛴 자칭 운동권 학생들이 만들어낸 조어이다.
앞으로 1984년에 있었던 일명 '서울대 프락치 사건' 명칭은 좀 길더라도 '서울대 학생단체 조직 간부들의 민간인 체포,감금,협박,폭행,상해,고문강요,조작,왜곡 등 인권유린 반민주적 사건'이라고 칭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향후 기자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는 호칭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명백하게 밝히며 다른 언론사나 기자 분들도 유념하여 주시기 바란다.
민간인의 인권을 유린한 반민주적 폭거였다.
우리가 흔히 '민주화운동'을 이야기 하는데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이 꼭 독재에 항거하거나 부당한 정부권력에 항거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찌 보면 1984년 사건 당시 서울대 유시민 등을 포함한 학생간부와 동조자 근 20여명이 민간인 4명을 불법으로 체포, 감금, 고문, 폭행을 10여 일간 행한 사건을 '프락치 사건'으로 왜곡, 조작을 행한 것으로, 선량한 민간인의 인권을 유린한 반민주적 폭거였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고 이는 법에서 인정한 사실이다.
유시민이 당시 자리에 없었는데도 단지 간부라는 이유만으로 공소되거나 징역 1년의 형이 확정되지 않는다. 아마 일부 '유빠'들이 주장하는바가 사실이라면 다른 단순가담자들처럼' “공소 외”로 구분되어 징역을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시민의원에게 물어보면 안다. 단 은밀하게 묻지 말고 공개적으로 답할 것을 요구해라. 유의원의 답이 어떻게 나올지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는 이제 그만하기를 바란다.
유시민 선친은 일제하 교사 백부는 면장
유시민의원이 태어난 생가 터로 왼쪽에 남아 있는 집에서 유의원의 조부가 살았다고 하며, 우측 뒤의 터에서 유의원이 태어났다고 하나 현재는 집이 다 헐려 밭으로 남아 있다.
열린우리당 유시민(47,고양시 덕양갑,2선,결기도당지부장)의원은 풍산 류씨로 西厓 柳成龍선생이 풍산 류씨 13세손이다. 안동 하회마을에서 시작된 "풍산 류씨의 시조로부터 유의원은 26세손에 해당된다."고 한다.
유의원의 조부 함자는 柳河植으로 4형제를 두었고 선친 柳台佑(1920년생)는 유의원이 가족관계에서 "선친은 역사 선생으로 평생을 보내셨다"고 밝혔듯이 교사를 역임하셨고 일제치하에서부터 교사로 재직하였다.
또한 백부 柳奭佑는 일제통치하에서 내남면장을 지냈다고 한다. 내남면은 유의원이 가족사에서 밝혔듯이 지금의 경주시 내남면을 말하는 것이며 경주 고분공원 근방 동네에서 10년을 살았다고 유의원이 밝힌 것으로 보아 유의원이 태어난 곳은 경주시 내남면 망성동이고 그 후 경주시 천마총부근으로 이사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내남면은 1906년 경주군으로 있을 당시 생긴 면이고 1991년 현재 면사무소가 소재하는 이조리로 이전을 한 13개리 34분동리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 한 동이 망성동이다.
내남면 망성동 새마을 2리 회관 뒤쪽에는 유의원 조부 때 망성동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조부일가 터가 아직 남아 있고 유의원의 조부, 선친, 백부의 묘가 주위의 산에 있다. “유의원 가족들은 유의원이 어릴 적 태어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고 전해 "선친의 임지를 따라 이사하지 않았나?" 추정이 된다.
역사의 한 흐름이었던 과거사 누군들 자유롭겠나
일제통치하에 교사를 지내고, 면장을 지냈다고 하는 것은 그 후의 행적이 어떻든 일제에 부일, 친일 하였나?만을 따지는 현재의 과거사 논쟁에서 중요하다.
그동안 기자가 누차 주장하였던 역사의 한 흐름이었던 일제 통치하.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에 이어 현재의 노무현대통령까지 이어져 내려와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역사임에도 “일제하에서 박정희, 전두환 정권하에서 독립운동하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한 것만이 옳고 나머지는 모두 그르다”는 식의 획일적인 판단이 '역사바로세우기'의 전부인양 인식하고 행위 되는 것이 안타깝다.
앞서 적시한 전모씨 등이 피해를 입은 1984년의 민간인 인권유린 반민주적 폭거도 1984년 당시가 전두환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당시에 발생하였다고 하여 민주화운동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음이 잎서 적시한 바처럼 유시민 등에 의하여 행하여졌음이 밝혀졌다. 이제라도 유시민 등은 전모씨 등에게 진정으로 사과하고 그릇된 역사관과 정치적인 야망으로 진실을 왜곡하여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못 전해지고 있는 사실을 밝혀 기록되도록 협조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남길 역사적 사실이고 후에 우리세대가 죽은 후 후세들이 제대로 된 역사를 바로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멈추려 해도 멈추지 않고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 취재하면서 “과거사를 밝혀 친일 부일 친북 용공을 가려 이제 와서 어찌하려는지 정부가 무엇인가 착각을 하고 있다”며 “이승만 대통령이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오죽하면 친일인사를 기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어르신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운동권만이 제일인양 자신들만이 지금의 민주화를 이루는데 기여를 했고 나머지는 모두 보수이고 그르다는 편협된 생각이 버려질 때 생각과 사상이 발전하고 화합을 이루어 나라가 발전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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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유시민의원이 해명해야 한다
2004/09/04 [09:28] ⓒ브레이크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