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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클라우디스 1세의 둘째 아내 소(小) 아그리피나비의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클라우디우스의 양자였다. 즉 로마 귀족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인 소(小)아그리피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사후, 소아그리피나가 네로의 숙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둘째 비(妃)가 되자 네로는 그의 양자가 되었다. 권력욕이 강한 소아그리피나비는 철학자 세네카를 네로의 가정교사로 만들고 네로를 황제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시켜 그의 동생 브리타니쿠스에 우선하는 제위 후계자로 만들었다. 그러고도 기다리지 못한 소아그리피나비가 54년에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하였고, 네로는 근위병의 추대를 받아 16세에 제위에 오름.
네로는 치세 초기 5년간은 철학자이며 스승인 세네카의 후원과 근위장관 브루루스의 보좌를 받아, 해방노예를 중용하고 매관매직의 폐해를 시정했으며 감세·원로원 존중 등의 선정을 베풀었으나, 소아그리피나가 브리타니쿠스를 지원하자, 네로는 의붓동생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하고 마침내 정부(情婦) 사비나의 꼬임에 넘어가 59년 모친을 살해하였다.
그 무렵 브루루스가 죽고 세네카도 은퇴하자 네로의 폭군적 행동은 극에 달하여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유형을 보낸 뒤 그녀를 살해하였다. 왕비가 된 사비나도 마침내 급사하였다. 한편 네로는 소년시절부터 예술에 관심을 갖고 시를 썼으며, 특히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며 하프연주를 즐겼다. 64년 7월 로마시의 대경기장에서 시작된 원인 모를 화재로 시가지의 대부분이 불에 타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민중들이 네로를 의심하여 동요하자, 네로는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에게 돌려 많은 사람을 대학살 감행. 그 폐허 위에 화려한 황금궁전을 세움. 65년 5월 원로원 의원 피소를 중심으로 한 음모가 발각되자 세네카의 가담을 의심하여 자결을 명하였다. 66년 네로는 그리스로 가서 그리스의 자유를 선언하고 올림픽, 델포이의 경기에 참가하여 미리 짜고 벌인 경기에서 많은 영관(榮冠)을 획득했다. 그러나 68년 갈리아에 이어 에스파냐에서 반란이 일어나 각지로 퍼지면서, 네로는 원로원과 일반민중, 군대에서 버림을 받고 로마를 탈출하였으나 추격이 심해지자 자살하였다. 네로를 마지막으로 율리우스클라디우스 왕조가 막을 내림. 그는 마지막에 <얼마나 아까운 예술가가 나의 죽음으로 사라지는가!>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사후에도 네로가 다시 돌아온다는 풍문이 떠돌았고, 네로에 대한 이야기는 중세에까지 전설로 이어졌다.
성장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AD 40년경에 죽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증손녀인 어머니 소(小) 아그리피나 손에 자랐다. 아그리피나는 2번째 남편을 독살한 뒤, 삼촌인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내가 되어 황제의 친아들인 정통 후계자 브리타니쿠스를 제쳐두고 자기 아들 네로를 후계자로 삼도록 황제를 설득했으며, 황제의 딸 옥타비아를 네로와 결혼시켰다. 그녀는 황제와 결혼하기 전인 48년에 황제의 전처였던 발레리아 메살리나의 살해에 가담하기도 했으며, 55년에는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하는 등 네로를 권좌에 앉히기 위해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고 자신을 반대하는 궁정 고문관들을 제거했으며 54년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마저 독살한 것으로 보인다. 황제가 죽자마자 그녀는 자기편인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근위대장)인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브루루스를 통해 근위대가 네로를 황제로 선포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원로원에서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으며, 로마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17세도 채 안된 소년에게 절대권이 넘어갔다.
집권 초기 아그리피나는 네로가 즉위하자 항상 자신을 반대했던 막강한 해방노예 나르키수스를 제거했고 제국을 직접 다스리려 했다. 그러나 네로의 노스승인 스토아 철학자 루키우스 아나이우스 세네카와 브루루스는 비록 아그리피나 덕분에 세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녀의 영향력 안에 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네로가 자기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독자적인 행동을 하도록 격려했고 결국 모자관계는 점점 냉담해졌다. 56년 아그리피나는 압력을 받아 은퇴했고 그때부터 62년까지 사실상 부루스와 세네카가 제국을 다스렸다. 네로는 이런 분위기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54년 황제로 즉위했을 때부터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 그는 황제 앞에서 열리는 비밀재판이라든가, 부패한 해방노예의 지배 등 클라우디우스 황제 말년에 있었던 나쁜 관례들을 없애고 원로원에 더 많은 독립권을 허용했다. 당대 사람들은 네로를 두고 훌륭한 외모를 갖춘 미남이지만 부드럽고 나약한 성격에 침착하지 못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 묘사했다. 59년 이전까지 전기 작가들은 네로에 대한 일화 가운데 자비롭고 너그러운 업적만을 인용했다. 네로 정부는 경기장에서 살육하는 시합을 금지시키고 세금을 내렸으며 사형을 금하고 주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노예들이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네로 자신은 그를 비난하는 풍자시 작가들이나 심지어 그에 대해 음모를 꾸민 사람들까지도 사면해주었으며 비밀재판을 거의 없앴고 반역죄를 다스리는 법을 발동시키지 않았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원로원 의원 40명을 처형했으나, 아그리피나가 꾸민 살인 음모를 빼면 54~62년까지 네로가 재위한 동안 그러한 사건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네로는 검투경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시·연극·운동경기 경연대회를 열기 시작했다. 재난을 당한 도시를 원조했으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요청을 받아 유대인들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예술적 자만과 무책임 부루스와 세네카는 자기들이 직접 제국을 다스리면서 네로가 무절제하게 취미와 향락을 즐기도록 내버려두었다. 세네카는 네로에게 독재권을 책임감 있게 사용하도록 역설하기는 했지만 네로가 소년으로서 갖는 많은 일시적 충동들을 조절해 책임 있는 행동을 하도록 하지는 못했다. 처음에 네로는 사형 선고에 서명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으며, 세금 징수원들이 백성을 착취하는 것을 보고 58년에는 세금을 없애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뒤에도 그는 원정이나 공공토목사업과 같은 웅대한 계획을 생각해내기도 했으나 대부분 개인의 향락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자기의 지위를 이용했다. 일찍이 56년부터 네로가 밤에 길에서 난동을 부린다는 소문이 떠돌기는 했지만, 네로의 야만적인 행동은 59년 자기 어머니를 살해했을 때부터 62년 6월 아내 옥타비아를 죽였을 때까지 35개월 동안 드러났다. 아그리피나는 아들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에 격노해 비이성적 행동을 한 대가로 살해당했다. 또 네로는 원로원 의원 오토(나중에 황제가 됨)의 젊은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와 사랑에 빠진 뒤, 옥타비아를 버리면 궁정과 민중들이 불만을 품을 것을 두려워하여 옥타비아를 살해했다. 네로는 62년 포파이아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65년에 죽고, 그뒤 귀족 출신의 스타틸리아 메살리나와 결혼했다. 네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질책이나 징벌을 받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과도한 예술적 자만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 자신이 시인이며 2륜전차 기수이자 수금연주자라고 자부했으며, 59년(또는 60년)에는 대중공연을 갖기 시작했다. 그뒤 그는 연극무대에 등장했으며, 극장측은 그가 갖가지 배역을 맡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로마인들은 그의 이런 기괴한 행위를 품위가 없고 범절에 어긋난 수치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네로는 심지어 자신의 시적·음악적 재능을 펴기 위해서 왕위를 버리겠다는 철부지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63년경부터는 이상한 종교적 열성을 보이기 시작해 새로운 종파의 설교자들에게 점점 이끌리게 되었고 그무렵 세네카는 네로에 대한 영향력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62년 부루스가 죽은 뒤 은퇴했다. 64년 로마를 휩쓸었던 대화재로 그간의 네로에 대한 나쁜 평판이 드러났다. 화재로 도시가 파괴된 것을 이용해 네로는 로마를 그리스식으로 재건했으며, 로마 시 전체의 1/3 크기인 궁전 '황금저택'을 짓기 시작했지만 완성하지는 못했다. 화재가 일어났을 때 네로는 로마에서 56㎞ 떨어져 있는 안티움 별장에 있었기 때문에 화재에 책임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로마 사람들은 네로가 자신의 심미적 취향에 맞게 로마를 다시 지으려고 직접 불을 냈다고 오해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 Annals〉와 로마의 전기작가 수에토니우스의 〈네로 Nero〉에 따르면, 네로는 대응책으로 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돌리려 했다 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도들을 여러 가지 나쁜 행위에 가담하는 무리로 여기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로마 정부는 그리스도교도들을 유대인과 명확히 구분하지는 않았다. 뜻하지 않게 네로는 심한 그리스도교도 박해정책을 시작한 장본인이 되었으며, 이때문에 그리스도교 외경(外經) 전설에서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나쁜 평판을 얻었다.
다가오는 종말 그동안 로마는 동방에서 어느 정도 세력을 넓혔는데 당시 대외정책에서 가장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아르메니아였다. 사이가 나쁜 동방의 파르티아에 대항하기 위해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집권 뒤부터 아르메니아에 속왕을 임명해 그곳을 완충국가로 삼는 정책을 써왔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오랫동안 로마의 통치를 못마땅해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 황제 말년에는 파르티아의 왕자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인의 지지를 받아 아르메니아 왕이 되었다. 이에 대응해 네로 정부는 유능한 장군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를 사령관에 임명하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66년까지 코르불로는 군사작전을 수행해 새로운 타협을 하게 되었는데, 티리다테스는 왕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네로에게서 왕관을 받기 위해 로마로 와야만 했다. 그러나 네로는 궁전과 건물의 신축, 총애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선물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속주의 금고를 강탈했기 때문에 속주는 점점 안정을 잃기 시작했고, 선물비용만도 연간 군사비용의 몇 배에 이르는 20억 세스테르케스가 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60년(또는 61년)에 브리튼 섬에서 부디카(보아디케아) 여왕이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으며, 66~70년에는 유대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이무렵 궁정에는 황제 반대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를 반대하는 세력은 원로원 의원에서 에퀴테스(기사)·장교·철학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에 걸쳐 있었는데 이런 반대세력들이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황제로 세우려는 대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음모자들의 노예들이 음모 사실을 네로에게 알려주어 위험을 면했으므로 네로는 겁을 먹지 않았지만 음모에 군장교가 가담했다는 것은 매우 불길한 징조였다. 그는 이 사건에 매우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피소 음모사건에 관련된 41명 가운데 겨우 18명이 두려움으로, 또는 명령에 의해 자살했고(세네카와 시인 루카누스 포함), 나머지는 추방되거나 사면되었다. 66년말 네로는 그리스 여행을 하여 15개월 동안 로마를 떠나 있으면서 해방노예 1명에게 집정정치를 맡겼다. 이 여행 중에 그는 새로운 예술적 면모를 보여주었고 헝클어진 머리에 고행자 같은 옷차림을 하고 맨발로 돌아다녔으며 그리스 문화에 열정을 품고 과거의 영광을 기리는 뜻에서 많은 그리스 도시를 해방시켰다. 68년 2월 로마로 돌아왔는데 그뒤 4개월 동안 예술과 종교를 광적으로 숭배해 원로원 의원과 그에게 재산을 빼앗긴 귀족들에게서 반감을 샀다. 게다가 대부분의 군장교들 역시 이탈리아 중류층 출신들로 보수적인 도덕관을 갖고 있었으므로 네로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레기온(군단)의 일반 군인들까지도 카이사르의 후손이 무대에 올라 대중들 앞에서 고대 그리스의 영웅이나 또는 훨씬 더 비천한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분개했다. 네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레가투스(속주 부총독)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는 "나는 그가 무대에서 임산부역과 처형당하는 노예역을 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스페인 속주 총독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와 갈리아 리옹(프랑스 지방) 총독 율리우스 빈덱스, 그밖에도 동부 변경지역의 총독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 소식을 듣고 네로는 대응책을 취하지도 않고 코웃음만 쳤을 뿐 과대망상적인 과시에 더욱 몰두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네로는 "갈리아에 다시한번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내가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다. 그동안 반란은 더욱 널리 퍼졌으며 레기온은 갈바를 황제로 추대했고 원로원은 네로에게 십자가에 달려 채찍에 맞아 죽는 형을 내렸다. 근위대는 그를 버렸으며 그를 섬기던 해방노예들은 네로가 로마 항구 오스티아에 준비해둔 배를 타고 달아났다. 네로는 로마 시에서 도망해야만 했는데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단검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타키투스가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나 꾸며낸 이야기인 것이 거의 확실함), 네로가 그리스 섬에 도착했으나 이듬해(69) 붉은 머리를 한 거지 왕초이자 예언자로 변장한 그를 키트노스의 총독이 알아보고 체포해 원로원이 선고한 대로 형에 처했다고 한다. 뒤에 로마 민중과 근위대는 그처럼 진보적인 황제를 잃은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신하들에게 네로는 대체로 폭군이었고, 그의 실정 때문에 일어난 반란은 잇따른 내란을 몰고 와 한동안 로마 제국의 존속이 위협받았고 전국이 혼란 속에 빠졌다.
로마를 불태운 네로 황제 로마의 제5대 황제 네로는 폭군으로 유명하다. 기독교 신자들이 일요일 예배 때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이름이 나오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승인한 유다 총독 본디오 빌라도보다도 더 잘 알려져 있다. <!--[endif]-->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솅키에비치의 소설 ‘쿠오바디스(Quo Vadis)’가 영화로 나와 많은 사람들이 본 탓도 있지만 네로 자신이 악의 화신이 된 것은 친어머니 아그립피나와 본처 옥타비스를 살해하고, 스승이자 집정 협력자였던 로마 철학의 대표주자 세네카를 죽이고, 할리우더의 영화 흥행사들을 기쁘게 한 로마시를 불태운 것과, 기독교도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잔혹하게 죽인 것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이다. 네로가 이렇게 잔인한 살인마가 된 것은 어머니 아그립피나에게 잘못이 있다. 아그립피나는 로마 초대황제 아구스투우스(옥타비우스)의 혈통으로 명장 게르마니쿠스의 딸이며 3대 황제 칼리굴라의 여동생이다. 칼리굴라 황제는 낭비벽이 심해 선정과 악정의 바로미터가 되는 세금폭탄으로 로마인들에게 악정을 펴 근위대 대장 두 명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
아그립피나는 34세의 나이에 미모의 8등신으로 과부가 되어, 아버지의 동생(숙부) 홀아비인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유혹, 결혼하여 왕비가 된다. 아그립피나는 권력을 휘두를 야망에 불타는 여자였다. 칼리굴라 황제가 악정을 베풀자 친오빠 암살음모에 가담해 체포되어 나폴리 앞 바다 섬에 유배 되여 수영으로 한 세월 보냈다. 왕후가 된 아그립피나는 교묘한 술수를 부려 남편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독버섯으로 살해하고, 로마근교에 주둔한 군대에 찾아가 돈을 나누어 준 다음 밀약해 황제의 친아들을 제치고 군대의 후원으로 원로원의 지지를 얻어내 네로에게 제위를 찬탈하게 했다. 고대사에 정통했던 아그립피나가 표상으로 삼은 것은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를 모방한 것이다.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가 그리스를 침공하여 그리스를 멸망시키고 새 여자를 후궁으로 들여 그 소생으로 왕위를 계승하겠다고 술좌석에서 발표하자 찬밥이 된 왕후 올림피아스가 아들과 자신의 앞날을 위해 아들의 친구를 꼬여 필립 왕을 암살시켜 알렉산더를 제위에 앉힌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네로는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에 대한 악평이나 반감. 적개심을 견디지 못했다. 이런 성격의 사람은 자칫 극단에 치닫기 쉽다. 잃어버린 지지를 되찾으려고 허둥대는 추태를 보이거나 과민하게 반응하여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정신의 평정을 잃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었다. 네로의 정신적 문제 역시 어머니 아그립피나의 소행으로 생각된다. 외형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삼은 알렉산더의 교육을 본받아 철학자 세네카를 유배에서 풀어주고 네로의 스승으로 삼았으나 네로의 이중성격 심리와 이유가 분명치 않은 잔인한 행동들은 네로에게 동방에서 건너온 비약종류를 복용시켜 정신 상태를 흔들어 꼭두각시로 만들고 배후 집정자로 정권욕을 성취시키려 한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운명이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친아들 네로에게 며느리 옥타비아와 함께 죽임을 당하는데 창녀 출신이며 이미 두 번 결혼한 적이 있는 포파이아와 결혼하는데 장해물이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네로는 자기 절제력이 전혀 없고 사물을 연결하여 사고하는 신경세포가 망가져 있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에서 스승이 아무리 훌륭해도 배우는 사람의 자질이 형편없으면 배움은 소용이 없어진다. 그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예수와 가롯 유다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네로의 재위14년 동안, 서기 54년 16살에 즉위하여 59년 어머니를 살해하고, 64년 나폴리의 야외극장에서 가수로 데뷔하는 등 여러 사건들을 분석할 때 약물중독자로 본 것은 절대 무리한 상상이라 할 수 없다. 서기 64년 7.18일 로마 대경기장 관람석 밑 가게에서 불이나 9일 동안 로마시의 40%를 태웠는데 마침 아프리카 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동남풍으로 소방수들이 있어도 불길을 잡을 수 없었다. 불이 났을 당시 네로는 무더위를 피해 로마에서 50K 떨어진 해변도시 안치오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불이 난 것을 이튿날 알았다. 위대한 정치가란 위기상황이 닥치면 재빨리 적절히 대처하고 승부에서 질게 번한 상황에서라도 신념을 가지고 전력투구하면 승리의 길이 보이는 것이다. 로마에 화재가 났다는 것을 알자말자 네로는 두필의 말이 끄는 전차를 몰고 아피아 가도를 따라 수도에 들어가 화재진압과 이재민 대책을 진두지휘 한 것이 문헌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화재가 진압된 후 불탄 그 자리를 황제의 새로운 황금궁전으로 지을 것과 자연 생태학적인 정원을 조성하려고 하였을 때 문제가 생겼다.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이익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화재를 당해 고통 받는 이재민들의 입으로부터 네로가 로마를 불태웠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순식간에 이 소문은 로마 전체에 퍼져 네로는 시민들이 자기를 죽일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쌓이게 되었다. 이런 때면 어김없이 나쁜 꾀를 내는 사람들이 어느 시대건 있기 마련이다. 기독교도에게 방화죄를 뒤집어씌우기로 한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체포된 기독교도들은 잔인한 고문과 함께 이벤트의 황제 네로의 기획, 연출로 잔혹한 구경거리로 삼아 산채로 불태우고 십자가에 못 박고 동물에게 먹히는 레퍼토리로 바디칸 경기장은 여러 날 축제를 벌어졌다. 하지만 기독교도들이 당한 잔인한 살륙극은 네로의 기대대로 되지 않고 시민들의 동정심을 자극해 저런 잔인한 인간이면 로마를 불태웠을 것이란 확신으로 굳어진다.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이런 이벤트 행사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네로의 잔인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란 것을. 그러나 이때도 잘 넘어 갔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은 정의의 심판은 항상 좀 늦게 온다는 것이다. 이듬해 서기 65년 제2회 로마 올림픽이 열리는 해였다. 이 제전의 당초 목적은 육체와 시와 변론을 겨루는 대회이나, 네로 황제는 이번에 시들어 버린 인기를 만회하려고 자작시에 맞춰 노래하는 경연대회에 자기도 출전하겠다고 말했다. 가수 데뷔는 나폴리에서 이미 끝냈고 박수갈채를 받았기 때문에 잘해 낼 자신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중 앞에 노래를 부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에 당황한 원로원은 “탤런트 황제 등장”이라는 추문을 막기 위해 경연대회가 열리기 전에 재빨리 네로를 변론부문과 가창부문에 우승자로 결의해 버렸다. 그러나 네로는 이를 거부했다. 원로원이 밀어주지 않아도, 뒤 배경이 없어도, 자기는 재능이 있으니까 다른 출전자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겨루어 엄정한 판단에 따라 실력으로 월계관을 쟁취할 것이라 엄명한다. 이제 모두 두 손 들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날 폼페이우스 극장은 노래하는 황제를 보러온 시민들로 만원을 이루었고 무대에 올라가 황제는 리라를 켜면서 자작시를 자작곡에 맞추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남아있는 문헌을 참고할 때 가수의 생명인 목소리는 그런 대로 들어줄 수 있지만 성량이 부족하다는 평가다. 원로원 의원들의 귀속 말 평가는 “제멋에 겨운 풋내기 수준”이라는 악평이나 그런 대로 열심히 노래했고 심판들의 판정을 기다리는 동안 다른 출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대 한쪽에서 리라를 가슴에 꺼않은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그 다음은 기록에 나와 있지 않으나 경연장 밖에 대기하고 있는 근위병들에게 언제나 황제 명예를 훼손한 반역자를 체포하도록 명령할 수 있는 네로에게 월계관을 거부할 수 있는 심판관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존경받지 못하는 지도자는 임무를 추진해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네로는 알지 못했다. 그러자 피소란 귀족의 네로 암살음모가 있었는데 제보자의 밀고로 10여명의 일당은 체포되어 처형 되었으나 고문 받는 중에 이 사람 저 사람 연결되어 스승인 세네카를 위시하여 군대의 사령관 3인의 이름이 나오자 네로는 거짓 지령으로 이들을 로마 근교로 불러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처형해버렸다. 그 중에는 수 없는 전공을 세운 코르불로라는 명장이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즈음 네로에게 밤이면 자기가 죽인 사람들의 망령이 나타나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햄릿에게 나타난 망령은 안개가 끼면 낮에도 나타났으나 네로에게 나타난 망명은 밤에만 나타나는 망령이었다. 로마시민들에게 네로의 노래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안 되어 외면당하자 국외시장을 겨냥한 네로는 그리스 전역을 돌면 노래연주 순회공연을 떠난다. 원로원의 의원 중 가이우스 율리우스란 사람이 격문을 띄웠다. “네로는 제국을 사유화하고 제국의 최고 책임자가 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일관해 왔다. 제국의 지도자로 어울리지 않은 인물이니 한시 바삐 퇴위시키고 제국을 구하자”는 내용이었다. 격문을 받은 사령관 중 루프스라는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간 자는 황제에 충성을 맹세하였기 배반할 수 없다고 응하지 않았으나 장군 갈바는 생각이 달랐다. 황제에 충성을 맹세한 것은 네로가 아니라 로마에 충성을 맹세한 것이며 로마 시민을 위한 것이 충성이라는 갈바 장군의 결심에 이베리아 반도전체가 호응하여 일어났다. 갈바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한다는 소문이 들리지 황제 곁에 붙어 권력을 행사하며 나쁜 꾀를 제공하던 무리들은 모두 도망쳤다. 원로원에서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했다. 서기 68년 6월 9일. 30세의 생애를 네로는 자살로 마감하여 로마인들에게 아마추어 예술가의 노래를 더 이상 들려줄 수 없게 되었다. * 세계역사 3 대 로마제국. 폴 타르크 영웅전. 로마인 이야기 등. |
1. 본명은 Lucius Domitius Ahenobarbus.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둘째 아내인 소(小) 아그리피나 비(妃)의 전 남편(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이후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으며, 그의 딸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하였다. 서기 54년 어머니가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하고 근위병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랐을 때 불과 16세였다. 황제로서 그의 이름은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제르마니쿠스(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로, 치세의 초기 약 5년 동안은 근위장관 브루스, 철학자이며 그의 스승인 세네카의 후원으로 해방노예의 중용, 감세, 원로원 존중, 매관매직의 폐단을 시정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아르메니아를 정복하여 파르티아를 견제하였으며 동방의 방비를 더욱 견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초기 5년의 치세를 넘기면서 점차 어머니의 섭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기질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갈등과 반목을 일으켰다. 먼저 경쟁상대가 되는 의붓동생이자 황제 클아우디우스의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살해하였고 이어서 서기 59년 자신의 좋아하는 여성인 포파이아 사비나와 결혼을 반대하는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살해하였고 황제비 옥타비아를 섬으로 유배시켜 차례로 살해하였다. 네로는 결국 포파이아와 결혼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브리타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동방으로 군사를 파견하여 아르메니아를 점령하고 동방의 강자 파르티아를 굴복시켜 평화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로마에서 네로의 인기는 여전히 높았다.
하지만 그의 최측근이자 근위대장인 브루스가 병사(病死)하자 노쇠한 세네카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문에 네로는 더이상 자신에게 직언을 해주는 보좌관이 없어지게 되었다. 서기 64년 로마에 대화재가 일어나 팔라티노 언덕과 첼리오 언덕의 왕궁과 주택가들이 모두 태웠고 무려 9일 동안 화재가 계속되었다. 네로는 화재진압을 진두지휘하며 이재민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로마를 재건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그의 계획은 좋은 평판을 받았다. 그는 '도무스 아루레아(Domus Aurea)'라고 불리는 왕궁 재건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계획한 왕궁은 일반 로마시민도 이용할 수 있는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는 인공연못과 숲을 조성하여 도심에서 개인 정원을 가질 수 없는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개인의 궁전을 짓기 위해 무리하게 공사를 추진한다는 소문이 돌게되었고 네로에 대한 민심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로마에 대화재가 일어난 원인을 방화로 보고 그리스도교도를 의심하여 약 300여 명을 잔인하게 학살을 하였다. 이 때문에 네로에 대한 나쁜 인식이 확대되었다. 이런 이유로 네로가 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적절하지 못하며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원로원의원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주도하여 네로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모의되었지만 밀고자로 인해 발각되었다. 피소와 함께 암살모의에 가담한 사람은 네로의 스승이자 후원자였던 세네카도 있었으며 시인 루카누스, 근위대 대장 플라우스 등을 포함한 네로의 측근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 모두를 처형하였다. 서기 66년 로마군의 청년장교들이 모의하여 네로암살을 모의하였지만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었고 뒤이어 라인강을 방위하는 두명의 사령관과 동방의 방위를 담당한 코르블로를 처형하였다. 특히 코르블로는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와 평화협정을 주도한 장군으로 로마군 내에서 신망이 높았다. 이때문에 로마군부에서는 네로에 대한 반감이 급속하게 높아졌다. 한편, 그는 그리스 문화에 심취한 예술의 애호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스의 체육 ·예술콩쿠르를 로마에 도입하여 5년마다 제전을 벌였다. 네로는 어려서부터 시(詩)와 노래를 좋아했는데 키타라(Kithara)라고 불리는 현악기를 연주하며 자신이 만든 시를 노래했고 궁중에서 측근들에게 들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극장무대에서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네로는 단지 노래를 부르기 위한 목적으로 그리스를 여행하며 사대제전(四大祭典)을 개최하고 노래경기에도 출전하여 황금월계관을 받았고 로마로 돌아왔을 때는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68년 갈리아땅에서 네로 황제에 반대한 빈덱스가 약 10만명의 민중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며 로마군이 함께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히스파니아(에스파냐)의 총독 갈바는 원로원과 로마시민을 위한 충성을 명분으로 로마로 진군하였다. 네로를 미워한 원로원,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그의 근위군까지 갈바의 군사에 합세함으로써 네로는 로마를 탈출하였다. 하지만 그를 돕는 부하는 없었고 로마 근교 하인의 집에 숨었다가 자살하였다. 이로써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폭군의 전형으로서 네로의 전설이 형성되었는데, 재위시에는 오히려 그의 활달한 성격 때문에 인기 있는 황제로 알려져 죽은 뒤에도 제2 ·제3의 네로라고 일컫는 자가 나타났을 정도라고 전해진다.
2. “플리니우스는 그를 가리켜 ‘인류의 파괴자’이며 ‘세상의 독’이라 표현했다. 그는 원로원에서 국가의 적이라 선언한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후대 사람들은 네로에게서 사악한 인간, 더 나아가 반 그리스도의 전형을 보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라신의 [브리타니쿠스]와 같은 문학 작품에서 그는 모친 살해자나 몰인정하고 잔인한 인간의 상징으로 그려졌다. 또한 그 는 사드 후작의 영웅이기도 했다. ‘더러운 피를 물려받은 타락한 절대권력자’라는 말은 칼리굴라보다 네로에게 훨씬 더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비비안 그린이 [권력과 광기]에서 묘사했듯, 네로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폭군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그보다 더한 잔혹성을 보인 로마 황제들도 있었고, 오히려 네로는 잔혹성 면에서 온건한 편이었는데도 그런 오명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아그리피나의 집념
네로가 황제가 되는 길은 험난했으며, 그것은 그 자신보다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집념의 결과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결혼생활에서 아들을 얻지 못했고, 따라서 딸인 율리아가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었던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낳은 루키우스와 가이우스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 모두 병사하자, 아우구스투스는 어쩔 수 없이 황후 리비아가 자신과 결혼하기 전에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한편, 역시 리비아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드루수스(낙마 사고로 죽었다)의 아들 게르마니쿠스는 수려한 용모에 화려한 언변, 그리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서 세운 혁혁한 공로 등으로 로마 민중이나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그를 자신의 양자로까지 삼아야 했던 티베리우스는 황제가 된 뒤에도 항상 게르마니쿠스를 잠재적 경쟁자로서 꺼렸다. 그러므로 게르마니쿠스가 안티오크에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자, 티베리우스가 손을 쓴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부인인 아그리피나(대 아그리피나)까지 섬에 유배 보내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죽을 때 겨우 세 살이었던 아그리피나(소 아그리피나)는 늘 죽음의 위협 속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오빠인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에 이어 황제가 되자 비로소 운이 트이는 듯했으나, 광기 어린 젊은 황제의 의심을 사서 어머니처럼 코르시카 섬에 유배되고 만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반드시 권력을 움켜쥐어야 한다. 그래서 적들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다짐한 그녀는 스스로는 여자의 몸이었기에 아들 네로에게 모든 기대를 건다. 그녀의 계획은 숙부뻘인 클라우디우스가 칼리굴라에 이어 황제가 되자 그를 유혹하여 황후가 됨으로써 1단계가 성공했고, 다시 클라우디우스를 암살하고 마침내 네로를 황제에 앉힘으로써 2단계까지 성공을 보았다.
네로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장남 네로(처음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태어났을 때 ‘아그리피나가 오빠 칼리굴라와의 근친상간으로 낳은 자식이 아닌가?’하고 의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그리피나가 코르시카에 유배되자 두 살도 안 된 네로를 숙모인 레피다에게 맡겨 버리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레피다는 네로를 살뜰히 보살피지 않았으며, 무용수나 이발사 교육을 시켰다. 아그리피나의 세력이 커지면서 네로도 좋은 생활을 누리게 되었지만, 54년, 고작 열여섯 살의 나이로 로마 황제가 되자 처음에는 귀찮아했다고 한다. 자신은 시나 음악을 즐기며 사는 게 좋지, 정치놀음은 적성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황제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리이며, 황제로서 시와 음악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충고했다. 네로는 이를 귀담아들었으며, 마침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실현하게 된다.
‘예술가 황제’의 ‘포퓰리즘’
“그의 성격의 특징은 대중의 인기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다”라고, 네로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쓰고 있다. 사실 네로는 평생 스스로를 황제라기보다 예술가로 생각했는데, 자신만의 미학의 세계에서 사는 고독한 예술가라기보다 대중의 환호와 애정을 먹고 사는 대중예술가에 가까웠다. 그는 황제로서 원로원이나 민중 앞에서 연설할 때 시적인 운율을 구사했으며, 아그리피나가 그의 스승으로 붙여 준 세네카의 도움 덕에 내용적으로도 알찼던 연설은 많은 갈채를 받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네로는 직접 류트나 리라를 켜면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환호하는 대중에게 환한 웃음과 함께 거액의 화폐를 뿌렸다. 원로원은 이를 황제답지 못한 경박한 일로 여겼으며, 수에토니우스나 타키투스는 네로의 목소리나 시의 수준은 형편없었으나 청중은 황제의 무력과 돈 때문에 마지못해 환호를 보내곤 했다고 적었다.
스승 세네카
젊은 황제의 이런 전시성 행사는 점점 규모가 커졌다. 올림픽을 본떠 ‘네로니아’ 축제를 열었는데 5년에 한 번 개최하기로 했지만 점점 기간을 좁혀 결국 연중행사가 되었다. 전차 경주와 검투사 경기 등에 이어 시와 리라 연주, 웅변 등의 경연이 벌어졌는데 이들 종목에서는 언제나 네로가 우승이었다. 그는 이를 축하하는 뜻에서 막대한 자금을 시민들에게 뿌리고, 축제 기간 중 누구나 자유롭게 목욕탕과 음악당을 사용하게 했으며, 수많은 경기장과 극장을 새로 지어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오락을 서민들도 즐길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 비극에 직접 출연하여 연기를 했는데, 매번 심혈을 기울여 임했으며 어쩌다 작은 실수를 하면 그 때문에 관중들의 야유를 받을까 봐 안절부절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노는 일에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썼으니, 과연 폭군답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폭군은 대개 유혈을 좋아하고 전쟁을 취미로 여긴다. 하지만 네로는 정반대였다. 그는 사형이 확정된 죄인에 대해서도 되도록 집행을 미루며 장기 유배형으로 바꾸게 했으며, 대중이 좋아하므로 검투사 시합을 열었지만 스스로는 즐기지 않았고 끝내 폐지했다. 역시 로마 황제들이 곧잘 벌였던 암살도 적어도 한동안은 저지르지 않았다. (즉위 직후 경쟁자였던 브리타니쿠스를 암살했다고 하지만, 현대의 학자들은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그는 재위 14년 동안 한 차례의 전쟁도 일으키지 않았다. 당시 로마의 가장 큰 적대국은 동방의 파르티아였는데, 네로는 특별히 조련한 군사들을 파르티아와의 국경에 배치해 만일에 대비하고는 파르티아 왕자 티리다테스를 로마로 초대했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거액을 선사하여 양국 사이에 평화 무드가 이어지게 했다. 파르티아에서는 네로에게 큰 호감을 품은 나머지 네로가 죽은 뒤에도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또한 네로는 ‘친서민 정책’을 많이 내놓았다. 과도한 변호사 비용 때문에 서민들이 소송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변호사 비용 상한제를 실시하고, 보석금이나 과태료는 줄였다. 간접세를 일체 폐지하려다가 원로원의 저항에 부딪혀 세율만 낮추었으며, 속주에서 이탈리아에 들어오는 물품에 관세를 폐지했는데 이로써 사실상 무관세 혜택을 받고 있었던 이탈리아 내 대지주들의 기득권이 훼손되고, 생필품 물가는 내렸다. 노예들에게는 주인의 가혹행위에 맞서 주인을 고소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고 보면 그 사치스러운 공연과 볼거리들도 대중에게 정신적, 물질적 만족의 기회를 주고 로마 전역의 경기를 활성화하는 효과를 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래저래 서민들 사이에서는 네로 황제의 인기가 드높았다.
로마 화재와 기독교 박해
그러나 재위 5년째인 59년, 그는 모후 아그리피나를 암살했으며 그것은 서민들 사이에서도 네로의 인기를 ‘조금은’ 떨어트리는 계기가 되었다. 친족 암살은 로마 황실에서 지겨울 정도로 많이 일어났지만, 친어머니를 죽인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네로로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점도 있었는데, 점점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게 실망한 그녀가 새로 얻은 정부를 대신 황제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으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를 시작으로 65년에 스승 세네카에게 자살을 강요하기까지, 네로는 처음과 달리 점점 폭력과 탄압을 늘려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천성적인 소심함 때문에, 그리고 그만큼 기세 좋게 퍼부어댄 결과 점점 뚜렷해지는 재정 부족 때문이었다. 반역이 의심되는 자를 처형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면 일석이조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과의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네로는 스스로 창작한 소극에서 광대에게 이렇게 외치도록 하여 그들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오 황제시여, 당신은 어찌 그리 게으르십니까? 어째서 원로원 의원놈들을 한꺼번에 죽이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서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유지되는 편이었는데, 이를 단숨에 꺼트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바로 64년 7월에 일어난 로마의 대화재였다. 네로가 자신이 생각한 신도시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로마를 불태웠으며,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는 이야기는 수에토니우스 등의 역사가가 기록한 후 [쿠오바디스(Quo Vadis)]를 비롯한 여러 문학과 예술 작품에서도 오랫동안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사실 그렇게 믿을 만도 했다. 불타는 로마를 보며 네로가 시를 읊은 것은 사실이며, 로마의 잿더미를 대체하여 네로 스스로를 위한 웅장한 황금궁전을 포함하는 반듯하고 깔끔한 계획 도시를 건축할 생각도 있었다. 더욱이 네로의 근위대는 불길을 잡기 위해 시가지의 한쪽에 맞불을 놓았는데, 이 광경이 “군대가 방화를 했다.”는 뜬소문의 근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네로 방화설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 화재로 네로가 아끼던 진귀한 수집품들도 불타 버렸다는 점, 네로가 화재 진압과 이재민 구호를 위해 안간힘을 썼던 점, 무엇보다 일반적인 이미지처럼 그렇게 광인은 아니었다는 점 때문이다. 당시 로마는 골목이 좁고 집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어 불이 번지기는 쉬우면서 진압하기는 어려운 구조였으며, 화재가 처음 발생한 팔라티노 언덕 근처에는 올리브유와 옷감을 파는 상점들이 밀집해 있었다. 말하자면 우연히 일어난 작은 화재가 걷잡을 수 없는 대화재로 번졌을 수 있다.
하지만 네로 방화설은 당시의 민중들에게 쉽게 먹혀들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로서는 미칠 것 같은 분노를 쏟을 대상이 필요했으리라. “황제는 친어머니를 죽였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로마 역시 죽이려 했을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는 또 하나의 로마 화재처럼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이 의혹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네로가 기독교도들을 희생양으로 삼자, 그것은 장기적으로 네로에 대한 평가를 더욱 떨어트리는 결과를 낳았다. 기독교는 그 뒤 계속해서 물밑에서 교세를 넓히며 로마 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교인들은 모일 때마다 “사도들이 예언한 종말의 때가 왔으며, 적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네로”라고 속삭였다.
예술가, 또는 광대의 죽음
이로부터 네로가 권력을 잃는 4년 정도의 기간에, 네로는 홀린 사람처럼 점점 더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65년에 발각된 피소의 황제 암살 음모가 그런 추세에 불을 붙였으며, 이제는 반역 혐의자뿐 아니라 황제를 조롱했다거나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거나 하는 사람들까지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여기에 60년에는 브리타니아에서, 66년에는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나 로마군이 타격을 입자 네로의 국방 정책에 대해서도 비난이 쏟아졌다. 62년에 품행이 나쁘다고 소문난 포파에아와 결혼하기 위해 정숙한 황후였던 옥타비아에게 누명을 씌우고 끝내 죽인 것도 황제의 인기를 떨어트렸다. 게다가 로마에 전염병까지 돌아서 수천 명이 죽으니, 민심은 대부분 황제를 외면해 버린다. 마침내 갈리아에서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키고, 에스파냐 총독인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고 나섰다. 네로는 이들을 진압할 군대를 보냈지만, 황금에 굶주려 있던 군대는 도리어 반란군 편에 붙어 버린다.
반란군이 거침없이 로마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에 네로는 갈팡질팡했다. “내가 갈리아로 가서 저들에게 눈물로 호소하면 저들은 무기를 내릴 거야”라 하다가, “파르티아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어” 했다가, “그냥 갈바에게 로마를 넘겨주자. 나는 이집트 총독 정도면 만족해”……. 하지만 결국 친위대까지 그를 버리고 달아나 버리자, 그는 네 명의 하인만 데리고 로마 교외의 별장으로 피신했으나 네로는 잡혀서 갖은 고문 끝에 죽느니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 심약한 인간은 스스로를 찌르는 일마저 주저하며 제대로 못 해, 결국 하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이는 31세.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위대한 예술가가 이렇게 사라지는구나!”
네로는 분명 위대하고 현명한 황제였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라고도 할 만할까? 그는 적어도 카이사르 이래의 군벌들과는 다른 황제상을 제시했다. 그것은 다수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는 정치를 하고, 무력보다는 매력으로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포악한 싸움꾼보다는 인심 좋은 광대가 그나마 나은 지배자가 아니겠는가? 그가 귀족들, 지식인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히 밉보이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심한 오명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수에토니우스는 자신의 네로 전을 마무리하며 네로가 비열하고 우매했다고 비판하고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그가 죽은 날은 그가 옥타비아를 살해한 바로 그날이었다. 온 세상이 환호했다. 시민들은 자유의 모자를 쓰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그의 무덤에 오랫동안 봄꽃과 여름꽃을 바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조각상을 세우고, 토가를 입혀 놓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가 마치 아직도 살아서 황제로 군림한다는 듯, 포고령을 전하며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
로마 제6대 황제(재위 68~69). 네로에 이어 로마황제에 올랐지만 고압적인 통치스타일 때문에 친위대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BC 3 ? ~ AD 69년) 사망, 재위기간(68년~69년)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는 로마의 귀족 출신으로 처음에는 행정관으로 입문하였다. 로마제국의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Tiberius)가 재임할 때 등용되어 속주인 갈리아 지방(현재 프랑스)에 파견되어 행정관으로 근무하였으며 이후 최고행정관 ·집정관을 지냈다. 칼리굴라가 황제로 있을 때 라인강 군단장을 지냈으며 이후 브리타니아 정벌에 참여하였으며 북아프리카 속주에 파견되어 총독을 역임하였다. 원로원에서 의정활동을 하다 에스파냐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이때까지 갈바는 꾸준한 경험을 축적하였으며 그가 통치하는 속주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었다.
반면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네로(Nero) 황제에 대한 여론과 소문은 점점 나빠지기 시작하였고 이에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갈리아의 총독인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에스파냐의 총독인 갈바에게도 함께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고 네로를 대신할 수 있는 황제로 갈바를 내세웠다. 빈덱스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서기 68년 갈바는 루시타니아(Lusitania) 총독인 오토(Otho) 등과 로마군 사령관들에 의해 황제로 추천되어 자신 휘하의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였다. 원로원에서는 표면적으로 갈바를 '국가의 적'으로 간주했지만 실제는 갈바와 연락하며 네로를 몰아낼 전략을 진행시켰다. 마침내 궁지에 몰린 황제 네로가 자살하자 갈바는 로마로 입성하였고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갈바는 정치적 자질이 부족했고 제국을 통치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다. 원로원과 군단 사령관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기는 했지만 70세가 넘은 고령으로 로마제국과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그리고 군사 지휘력이 부족한 인사를 주요 방위군 요직에 배치하여 군부의 반발을 샀다. 마침내 라인강을 수비하는 로마의 최정예 군단을 중심으로 갈바에게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황제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 군부의 신임을 잃고 원로원마저 갈바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원로원 의원 오토를 중심으로 갈바 암살계획이 진행되었고 포로 로마노에서 갈바는 살해되었다. 이어서 원로원은 7대 오토를 로마제국 1인자로 인정하였고 로마황제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 초기의 기독교회는 교리 문제로 분쟁을 벌이는 일이 많았다.
그 중 삼위일체설을 주장한 아타나시우스파에 대해 아리우스파는 반박을 하는 입장이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아타나시우스파의 교리에 손을 들어주어 아리우스파의 교리는 이단이 된다. 이후에도 한동안 두 파간의 논쟁이 그치질 않았으나 결국 아타나시우스파에 의해 아리우스파는 완전히 밀려나게 된다.
제국 내에는 ①로마, ②예루살렘, ③안티오키아, ④알렉산드리아, ⑤콘스탄티노플의 5대 교구가 존재했는데, ①로마를 제외한 4대 교구가 제국의 동방(東方)(②예루살렘, ③안티오키아, ④알렉산드리아, ⑤콘스탄티노플)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후 성상 숭배(聖像 崇拜) 문제 등으로 동로마와 사이가 벌어진 로마 교구는, 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마뉴를 이미 멸망한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하면서 동로마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된다(서로마제국은 476년에 멸망하고, 동로마제국은 145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때부터 유럽은 로마 가톨릭으로,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 정교의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세명의 황제와 플라비우스 왕조:
6대 갈바(재위A.D.68~A.D.69, 스페인지역의 지원으로 권력을 장악, 네로가 자살하자 로마로 입성하여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추대, 정치적 자질과 통치력의 부족으로 군부의 신임을 잃고 원로원 의원 오토를 중심으로 갈바 암살계획, 포로 로마노에서 살해됨)
7대 오토(재위A.D.69.1~A.D.69.4, 네로의 신임을 받은 오토는 네로가 그의 아내 사비나와 사랑에 빠지자 신임을 잃고 루시타니아의 총독으로 보내졌다가 갈바를 몰아내고 황제가 된지 3개월 후 베스파시아누스의 내란진압에 실패하자 자살함)
8대 비텔리우스(재위A.D.54~A.D.68, 비텔리우스 군단은 69년 4월에 오토 군단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황제에 즉위했으나 비텔리우스가 로마에 입성하기 이전 7월에 팔레스타인지역의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를 선포하였다. 로마는 두황제의 치열한 시가전을 펼쳐 베스파시아누스편으로 돌아선 군대가 로마를 장악하고 손을 묶인 비텔리우스는 포로 로마노에서 살해되어 시신은 테베레강에 던져졌다)
9대 베스파시아누스(재위A.D.54~A.D.68,동방의 여러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고 로마에 입성하여 유대인반란을 진압해 환대를 받았고 원로원의 황제즉위 승인을 받음. 로마 평화와 질서회복에 노력. 로마의 콜로세움 원형경기장을 건설, 서기79년에 죽은 뒤 두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가 차례로 황제가 되어 플라비우스 왕조를 이어갔다)
10대 티투스(재위A.D.79~A.D.81, 유대전쟁의 최고지휘자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즉위 후 선정으로 국민의 환대를 받음. 베수비오 화산폭발(화산재에 파묻힌 비극의 도시 폼페이(Pompei)는 서기79년 8월 로마시대에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번영과 쾌락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과 로마 대화재 등을 겪고 로마의 재건과 구제사업에 진력함)
11대 도미티아누스(재위A.D.81~A.D.96, 제9대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아들, 제10대 황제인 형 티투스의 뒤를 이어 11대황제가 됨. 형 티투스의 갑작스런 사망(전염병)으로 30세에 황제가 됨. 그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형 티투스에 비해 전제적인 성격으로 사후기록들이 말살되는 등 비판받은 인물. 치세 15년인 96년 황비 도미티아에게 포섭된 노예에 의해 암살됨)
▶네르바 안토니우스 왕조:
12대 네르바(재위A.D.54~A.D.68)
13대 트라야누스(재위A.D.98~A.D.117)
14대 하드리아누스(재위A.D.117~A.D.138)
15대 안토니우스 피우스(재위A.D.138~A.D.161)
16대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재위A.D.161~A.D.180)
17대 코모두스(재위A.D.180~A.D.193)
▶난립기:
18대 페르티낙스(A.D.193.1~A.D.193.3)
19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재위A.D.117~A.D.138)
▶세베루스 왕조:
20대 셉티미우스 세세루스(재위A.D.193~A.D.211)
21대 카라칼라(재위A.D.211~A.D.217)....
24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재위A.D.222~A.D.235)......
44대 콘스탄티누스1세(재위A.D.306~A.D.337)...
50대 테오도시우스(재위A.D.379~A.D.395) 서로마제국은 A.D.395년 테오도시우스1세의 사망으로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었을때
61대 토물루스 아우구스투스(재위A.D.475~A.D.476)가 최후의 황제이다.
그를 계승한 고트족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 왕으로 군림하자 51대 호노리우스(재위A.D.384~A.D.423)가 계승하여 476년까지 계속한 서반부의 제국을 통치함.
형 아르카디우스는 동로마제국을 맡았다.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은 1대 아르카디우스(재위A.D.395~A.D.408)~11대 유스티누스2세(재위A.D.565~A.D.578)까지로 유스티누스2세는 정신병을 앓다가 은퇴하고 부인 소피아와 티베리우스 장군이 공동정치를 하다가 578년 후계자없이 왕이 사망하자 티베리우스가 황제 즉위함.
▶비잔티움 제국 또는 동로마 제국은 중세 시대에 로마 제국의 뒤를 이은 제국으로,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였고 로마 황제를 직계한 황제가 다스렸다. 이 나라는 ‘로마 제국’으로 불렸고 제국 주민과 주변 나라 사람들은 ‘로마니아’(Ῥωμανία)라고 부르기도 했다. 로마 제국과 달리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어를 썼다.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을 구분하는 것은 주로 현대의 관습에 따른 것으로, 비잔티움 제국이 갈라져 나온 정확한 시점을 잡을 수는 없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나톨리아의 니코메데이아에서 보스포로스 해협의 비잔티온(콘스탄티노폴리스, 혹은 ‘새로운 로마’)으로 천도한 서기 324년이 분수령이다.
서기 330년부터 1453년까지 1123년동안 존속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전제 군주제 국가였고 한때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써 구 로마 제국의 고토를 거의 되찾아 광활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그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심지어 중동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에게 해의 무역로에 자리 잡고 있어 수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게다가 비잔티움 제국은 외적인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아랍에 침략받아 영토를 잃기도 했으나 10세기 말 마케도니아 황조 시대에 국력을 회복하여 동지중해 패권국이 되어 파티마 왕조와 대결했으나 1071년 제국의 심장부인 소아시아 대부분을 셀주크 튀르크 세력에게 잃는다. 12세기에 콤네노스 황조가 영토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 몰후 제국은 쇠퇴기로 다시 접어든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수도를 점령하여 제국 영토가 비잔티움 그리스인과 라틴인의 각축장이 되면서 제국은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한 타격을 입었다. 1261년에 팔라이올로고스 황조가 정권을 탈취한 뒤, 수도를 수복하면서 제국을 재건했으나 14세기 후반 내전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은 사실상 멸망했다.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이 침공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되면서 비잔티움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카이사르(Caesar):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성을 아우구스투스부터 네로까지 황제가 세습한 것을 기원으로 해 "황제"라는 의미가 생겨났다. 독일어 카이저, 러시아어 짜르의 어원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 초대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 원로원이 붙인 칭호로, '위엄있는, 존귀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들의 칭호가 되었으며, 황제의 아내나 딸들에게는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임페라토르(Imperator): 공화정 로마에서 2개 군단을 지휘하는 군사 지휘권(임페리움, Imperium)을 가진 자를 부르는 말로 번역하면 "총사령관"인데, 이후 황제들에게 로마 제국 군수권이 완전히 넘어가게 되자 황제들을 가리키는 칭호가 되었다.
▶프린켑스(Princeps):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군사적인 재능이 없고 병사들의 신망도 크지 않아 "임페라토르"라는 칭호가 자신에게 반감을 드러낼 것을 염려, 원로원에서 제1 발언권을 지닌 이의 별칭인 프린켑스를 사용했고, 이것이 후에 퍼져 시민들과 원로원 의원이 황제를 지칭하는 의미가 되었다.
▶황제의 권력: 황제의 권력은 '호민관 특권'(potestas tribunicia)과 '대행 집정관 권한'(imperium proconsulare)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호민관 특권은 황제에게 거부권(veto)를 부여하게 됐고, 이는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까지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으로써, 본래 공화정 시대에는 서로에 대한 견제의 의미로써 두명의 집정관과 10명의 호민관 모두에게 주어졌던 권한이다. 또한 호민관 특권은 황제의 신체는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었다. 그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그의 의무 수행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자는 저주 곧 사형에 처해졌다. 이는 공화정 시대에는 호민관에게 주어졌던 특권으로, 본래 공화정 시대에는 평민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호민관의 특성상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성격이 더 강했던 특권이었다. 대행 집정관 권한(공화정 시대의 총독 역할을 맡던 대행 집정관의 권한)을 통해 황제는 로마군 통수권을 가지게 된다. 황제는 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과 민회의 몫이었던 전쟁 선언, 조약 비준, 외교 협상 등의 외교권도 가졌으며, 원로원 의원 임명권 등 과거 감찰관이 맡던 여러 권한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황제는 종교 조직을 통제하였으며, 황제는 늘 최고 사제장(pontifex maximus)이며 네 가지 주요 사제단의 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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