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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절가대납(折價代納)
정의
물품으로 내야 할 세금을 값으로 환산하여 대신 납부하는 것.
개설
대납이란 전세(田稅)·군역(軍役)·공납(貢納) 등을 납세자가 관청에 납부할 때 또는 하급 관청이 상급 관청에 납부할 때 그것 대신 다른 물품으로 환산하여 납부하는 것을 의미한다[『숙종실록』 35년 6월 10일]. 절가(折價)란 어떤 물품 대신 다른 물품으로 받을 때에 그 받을 물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것을 지칭한다.
내용 및 특징
절가의 기준으로는 시장에서 형성된 시가(市價) 또는 관아에서 정한 상정가(詳定價)를 이용하는데, 일반적으로 관청에서는 상정가를 채택하였다. 이때 상정가는 어떤 때는 시가보다 낮고 또 어떤 때는 높아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상정가가 시가보다 낮으면 납부자에게 손해가 돌아갔다.
절가의 물품으로 포(布)·쌀·은(銀)·동전이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포는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이전인 16~17세기에 가장 흔하게 사용되던 화폐였다. 당시에는 유통의 용도만을 위한 포가 추포(麤布)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사용되었다.
변천
절가대납은 방납(防納)이라고 하여 원칙적으로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현물을 운송할 때 발생하는 여러 문제 때문에 부세 운영에서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취지로 묵인되었다. 이에 지역 간 또는 계절에 따른 물가 시차를 이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주도되어 민간에 손해를 주는 경우가 많았다.
참고문헌
『대전통편(大典通編)』
『만기요람(萬機要覽)』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간행위원회 편,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한울, 1990.
방기중, 「17·18세기 전반 금납조세의 성립과 전개」, 『동방학지』 45, 1984.
차수고(差需庫)
정의
조선후기에 함경도에서 개시를 운영하는 데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관.
내용
조선후기 함경도의 회령(會寧)과 경원(慶源)에서는 청의 만주 지역과 정기적인 국경무역인 북관개시(北關開市)가 열렸다. 북관개시는 만주 지역 여진인의 생필품을 조달하기 위하여 청(淸)이 요구한 것으로 병자호란 직후인 1638년(인조 16)에 시작되었다. 회령개시는 1년에 1번, 경원개시는 2년에 1번 개설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지만, 만주 지역이 개발되면서 두 개시는 활기를 띠었다.
개시가 열리면 인솔관원인 차인(差人)이 주민과 우마를 이끌고 들어와 최고 20일간 교역을 하였다. 이들이 들어오면 두만강 연안 고을에서는 무역 물종, 관원 숙식, 우마 사료, 예단을 제공해야 하였다. 바로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두만강 연안 고을에서는 차수고(差需庫)를 설치하여 고리대나 민간징렴 등으로 재원을 조달하였다.
용례
關北御史事目曰 咸鏡一道 (중략) 沿江各邑之差需庫 全爲開市所需而設置者也 米布之名色多岐 斂散之式例累變 其間必有奸弊 各別摘奸申飭[『정조실록』 7년 10월 29일]
참고문헌
『함경도회원개시정례별편(咸鏡道會源開市定例別編)』
고승희, 『조선후기 함경도 상업 연구』, 국학자료원, 2003.
초장(草場)
정의
갈대밭과 같이 땔감이나 가축 사료로 쓰이는 재료를 공급하는 초지.
개설
초장(草場)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백성과의 공유(共有)를 선언한 이른바 산림천택(山林川澤)의 하나였다. 제언·염분·어전·초장 등은 모두 산림천택의 구체적인 용도를 나타내는 명칭이었다. 그중에서 초장은 땔감이나 가축 사료로 쓰이는 재료를 제공하는 풀밭을 말하였다. 공유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선공감(繕工監)·사복시(司僕寺)와 같은 기관이나 왕실의 재정기구인 내수사에 일부 초장의 독점적 사용을 인정하였을 뿐, 특정 기관이나 개인의 독점적인 사용은 엄금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 정부는 ‘산림천택’의 공유 이념을 표방하면서, 초장의 사점(私占)을 엄하게 금지하였다. 『경국대전』에는 “초장을 사사로이 점유하는 자는 장 팔십(杖八十)에 처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일찍부터 초장은 사점 대상이 되었다. 이 경우, 다른 사람들이 풀을 베는 것을 금하고 자신이 그것을 독점하기도 하였지만, 개간하여 경작지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세종대에는 이미 경작하여 농지가 되어 버린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관에 소속시키고, 국가의 용도를 제한 외에는 백성들에게 팔기를 허용하여 이익이 편중되지 않도록 하였다.
변천
초장은 쉽게 경작지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권력 기관이나 권세가들이 입안(立案)을 받아 사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인조 연간에는 “시장(柴場)을 사사로이 점유하는 것은 나라에서 엄금하는 바인데도, 개인 소유의 시장과 초장이 산야에 널려 있어 경성(京城) 수십 리에 꼴을 뜯을 곳이 없으므로 원성이 많다.”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초장에 대한 사적인 점유가 성행하였다.
참고문헌
김선경, 「조선후기 산림천택 사점에 관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칙수고(勅需庫)
정의
조선후기 평안도와 황해도의 각 고을에서 칙사 왕래에 소요되는 비용을 담당하는 기관.
내용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사신을 칙사(勅使)라고 하였다. 청나라 사신의 경우 매년 3차례 정도 들어왔는데, 그때마다 예단·연회·접대·운송 등으로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었다. 예단이나 연회는 중앙의 호조에서 책임지지만, 접대나 운송은 이동하는 경로에 있는 고을의 책임이었다. 따라서 칙사의 이동 경로상에 위치해 있는 평안도·황해도·경기도 북부 고을에서는 칙수고(勅需庫)를 설립하여 칙사 지대비를 조달하였다.
칙수고는 관과 민을 모두 편하게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숙종대에 등장하였지만, 방대한 재원을 부실하게 운영하여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이에 영조대에 『속대전』을 제정하면서 “평안도 각 읍에 있는 칙고의 재고는 회계를 마감하여 비변사에 보고하되, 만일 사채·가분·나이·번작 등의 일이 있으면 수령·감관 및 색리는 대동사목례에 따라 논죄한다.”고 하여 중앙 통제를 강화하였다.
용례
領議政洪鳳漢曰 閔百祥爲關西道臣時 設置營勑庫 規模均齊 官民俱賴矣 海西亦爲繼行 則必多其益 本道道臣 已有料量之請 依關西爲之 而令惠堂鄭弘淳備堂李潭 內外消詳 斯速成就 允之[『영조실록』 45년 5월 21일]
참고문헌
『속대전(續大典)』
『칙사등록(勅使謄錄)』
『해서지칙정례(海西支勅定例)』
『평안도내각읍지칙정례(平安道內各邑支勅定例)』
토공(土貢)
정의
지방에서 바치는 공물 또는 공물로 바치는 토산물.
개설
기본적으로 공물은 임토작공(任土作貢), 즉 토산에 입각하여 배정되고 외읍에서 현물로 직접 상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토산물이 아닌데도 공물로 배정되거나, 기후 등의 변화로 더 이상 토산물이 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경우 공물에 상응하는 값의 쌀·포(布)로 대신 납부하거나 다른 지역에서 공물에 해당하는 물품을 구입하여 납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러 폐단이 끊이질 않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토공 대신 쌀을 납부하는 것으로 통일하였다.
내용 및 특징
중앙의 관서와 왕실은 필요한 물품을 조달받기 위해 지역 토산물을 각 군현에 부과하여 상납하게 하였다. 정부는 외방의 공물을 통제하고 파악하기 위하여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을 설치하고 공안(貢案)을 작성하였다[『태종실록』 1년 5월 3일]. 뿐만 아니라 지리지(地理誌)에 토공 조항을 두었다. 한 예로 『세종실록지리지』 「토공」 조항에는 많은 종류의 농산물·임산물·수산물·수공업 제품·광산물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지방에서 상납해야 할 공물이고 그것은 대부분 해당 지역의 토산물이었다.
변천
이를 배정받은 군현은 다시 지역 생산자에게 배정하여 수합하고, 납기일에 맞춰 포장·운송하여 납부하였다. 이때 봉진관(封進官)은 공물을 담당하는 공리(貢吏), 운송인과 함께 진성(陳省)이라는 문서를 가지고 상경하여 납부하였다. 그런데 당국의 자의적인 공물 운영으로 토산물이 아닌 것이 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이전에는 토산물이었으나 산출·작황·토질·기후 등의 변화로 더 이상 토산물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 여기에 중앙의 관부 관원들이 물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점퇴(點退)하는 등의 농간으로 현물을 수령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이에 지방의 관청에서는 지역민들에게 현물에 상응하는 값을 거두어 현물 대신 납부[代納]하거나 시장에서 구입하여 납부[貿納]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한 폐단이 적지 않아 개선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 차원의 개선책이 시행되다가 대동법의 시행으로 대대적인 개혁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대동법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일부 진상과 공물에는 여전히 토공이 남았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Ⅰ』, 일조각, 1984.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德成外之子, 「조선 후기의 공물무납제: 공인 연구의 전제 작업으로」, 『역사학보』 113, 1987.
김동수, 「『세종실록』 지리지의 연구: 특히 산물·호구·군정·간전·성씨항을 중심으로」, 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판계(板契)
정의
관청에서 필요한 목재를 납품하는 공계.
개설
판계란 민간에서 장례용 판재를 조달하기 위하여 만든 계, 또는 왕실이나 중앙 관사에 판재를 납품하는 공계(貢契) 2가지를 의미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대동법 실시 이후 공물 청부를 목적으로 하는 공물주인(貢物主人), 공인(貢人), 주인(主人), 계공인(契貢人)이라고 불리는 계(契)가 결성되었다. 계인은 서울의 방민, 권세가의 노비, 부상(富商), 지방의 토호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본래 공인과는 다른 점도 많았으나 점차 공인의 일종으로 인식되었다. 정부는 공물의 질과 양, 납부 기일, 변상 문제를 개인보다는 계 조직에 전담시키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다. 동시에 소수 특정인의 이익보다는 서울 시민 다수의 생계도 고려하여야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계에는 소수의 부상 외에도 많은 서민이 포함되었다. 계는 납부해야 할 공물의 품종과 소속된 정부 각사(各司)에 따라 조직되었다. 그러므로 그 수나 종류도 시대에 따라 증감이 있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목재를 납품하는 판계(板契)가 등장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선공감(繕工監) 소속의 단판계 공인(椴板契貢人)들은 왕실 어공(御供)으로 소용되는 추판(楸板)·단판(椴板)·추목(楸木)·단목(椴木) 등을 납품하였다. 단판계 공인은 이를 확보하기 위하여 호조(戶曹)의 물침공문(勿侵公文)을 가지고 각 생산지를 돌아다니며 매입하였다. 물침공문은 매입을 침해하지 말라는 공문으로[『정조실록』 11년 3월 8일], 단판계 공인은 이러한 공문을 지녔지만 생산지 고을에서 세금을 부과 당하거나 단속을 당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변천
단판계 공인은 선공감 소속 공인으로서 선공감에 대한 납품 외에도 다른 관청에 사적으로 판매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서울의 군문(軍門)에서 목재를 헐가로 강매(强買)하여 단판계 공인이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또 내수사(內需司)에서 단판계 공인에게 목재를 사들였는데, 값을 바로 주지 않다가 수년이 지난 후에 약간만을 준 적도 있었다.
참고문헌
김동철, 「18·19세기 외도고공계의 성립과 그 조직」, 『한국사연구』 55, 1986
오미일, 「18·19세기 공인권·전계 창설운동과 난전활동」, 『규장각』 10, 1987.
오성, 「조선 후기 목재상인에 대한 일연구」, 『동아연구』 3, 1983.
이욱, 「18세기 서울의 목재상과 목재 공급」, 『향토서울』 56, 1996.
황미숙, 「조선 후기 목재 수요의 증대와 국용 목재의 조달」, 『전농사론』 2, 1996.
포세(浦稅)
정의
① 해세의 다른 말.
② 포구세의 준말로, 포구에 들어온 화물에 부과하던 세.
개설
① 균역법 시행으로 양역의 부담을 1필로 균일화한 후, 부족해진 재정을 메우기 위하여 균역청에서 관리·수세하게 한 어염선세를 말하였다.
② 포세는 지방의 포구에 반입된 화물(貨物)에 부과하던 세금으로, 균역법 성립 이후 특히 19세기 들어 보편화되었다. 균역법 성립 이전에는 어선이나 상선에 대하여 궁방, 아문 등 여러 기관에서 각종 명목으로 중복 수세하여, 포구세(浦口稅)라는 범주가 독립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첩세현상은 균역법의 성립으로 선세(船稅)의 범주가 성립되면서 일단 해결되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 상품경제가 급격히 발전하면서 포구로 반입·반출되는 화물이 증가하고, 그에 따른 상업 이윤의 일부를 포구세로 수취하여 재원에 보충하는 경향이 증가하였다.
내용 및 특징
균역법 성립 이후, 특히 19세기로 접어들면서 포구의 상품유통을 여객주인이 독점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포구의 여객주인들은 잡역(雜役)을 면제받고 상품유통의 독점을 보장받기 위하여 포구세를 부담하였다. 이때 세금을 거두는 주체는 동내(洞內)·군현(郡縣)·감영(監營) 등이었고, 포구세는 이들 기관의 재원이 되었다. 포구세는 여객주인이 선상(船商)에게 수취한 구문 중에서 일부를 상납하는 것이었다. 세액은 정액제로 약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순천 신성포(新成浦)처럼 구문 수입의 40%를 포구세로 징수하는 정률제인 경우도 있었다.
변천
19세기 들어 지방에 있는 포구에서 포구세의 징수가 일반화되자, 궁방·아문 등에서도 포구세를 절수하고자 하였다. 궁방·아문에서는 포구 자체를 절수받아 수세권을 행사하였는데, 이 경우 지방관의 수세 권한은 궁방·아문에게 넘어갔다.
또 다른 경우는 궁방·아문이 포구세에 대한 권리를 절수받는 경우였다. 이는 지방관이 수세하던 포구세에 다시 궁방·아문이 부과하는 포구세가 가중되는 것이었다. 후자의 방식은 대원군 집권기와 개항기에 일반화되어, 여객주인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여객주인들은 중복되는 포구세의 부담을 피하기 위하여 다른 기관의 침탈을 막아 주는 보다 센 권력기관에 투탁하여 포구세를 상납하는 형식으로 대응하였다.
참고문헌
고동환, 『조선후기 서울상업발달사연구』, 지식산업사, 1998.
이영호, 「19세기 포구수세의 유형과 포구유통의 성격」, 『한국학보』 41, 일지사, 1985.
하기(下記)
정의
지출을 기록한 문서.
개설
하기는 기본적으로 지출부를 의미하였다. 하기의 작성은 재정 운영에서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한 회계상의 조치였다. 그래서 하기에는 어떤 항목에 대한 세목과 그 값이 세세하게 기록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기에는 2가지 형태가 있었다. 하나는 해마다 반드시 써야 되는 것을 기록하는 『응하기(應下記)』이고, 또 하나는 해마다 같지 않아서 있기도 하고 때로는 없는 것을 기록하는 『별하기(別下記)』이다. 하기 중에는 수입 내역이 첨가되어 있어서 출납부적 성격을 갖춘 것도 있었다.
내용 및 특징
관공서, 자치 조직, 가정 등 재정 활동을 하는 곳이라면 모두 하기를 작성하였다[『경종실록』 2년 10월 14일]. 그러나 하기는 일반적으로 공공 기관에서 지출 내역을 기록한 문서를 의미하였다. 그들 기관에서는 지출할 때마다 그것을 기록하여 각자 하기를 작성하고 월말이나 연말에 회계를 받아 기관장의 수결(手決), 즉 결제를 받았다. 그래서 지방관청의 경우 각 기관에 따라 관주하기(官廚下記), 현사하기(縣司下記), 제고하기(諸庫下記), 학궁하기(學宮下記) 등을 작성하였다. 본래 돈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갖 물건의 종류를 조목조목 나열하여 번잡하고 자질구레하였으나, 동전이 유통된 뒤부터는 간결해졌다.
변천
조선후기에 이르면 관리들은 책객(冊客)이라는 전문 회계인을 데리고 다니며 그들에게 하기를 전담하게 하였다. 그런데 책객이 수령과 짜고 또는 아전들과 결탁하여 쓰지도 않은 지출을 기록하거나 실제보다 부풀려 기록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로 인한 폐해를 막기 위해서 정약용은 책객 한 사람에게 회계를 맡겨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이와 함께 정약용은 회계의 간소화를 위하여 매년 지출되는 『응하기』를 굳이 작성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까지 제시하였다.
책객은 이중장부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상부의 감사에 대비하여 규정대로 지출한 것처럼 조작된 문서인 회내안(會內案)과 함께 군현의 실제 집행 내역이 적힌 회외안(會外案)이 그것이었다[『순조실록』 22년 5월 25일]. 이처럼 부풀린 문서나 이중장부 그리고 그에 대한 미온적인 감사로 인하여 회계 장부에 대한 부실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참고문헌
『목민심서(牧民心書)』
김덕진, 『조선 후기 지방 재정과 잡역세』, 국학자료원, 1999.
전성호, 『조선후기 미가사(米價史) 연구』, 한국학술정보, 2007.
향공(鄕貢)
정의
향읍에서 중앙 관서나 왕실에 올리는 공물.
개설
향공이란 지방의 군현에서 토산물을 중앙의 관부나 왕실에 현물로 바치는 것을 말하였다. 현물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생산은 물론이고 운송이나 납부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여, 대동법(大同法) 시행 이후 전면 폐지되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구입하기 어려운 일부 물종은 여전히 공물로 남아 향공이나 영공(營貢) 또는 경공(京貢)으로 납부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 중앙 관서와 왕실은 필요한 물품을 조달받기 위하여 지방의 토산물을 향읍(鄕邑)에 공물로 배정하여 충당하였다. 이를 배정받은 향읍은 주민들에게 다시 배정하여 수합한 후 납기일에 맞추어 운송하여 납부하였다. 이때 각 읍의 공리(貢吏)는 자기 지역의 공물과 공물 명세서에 해당되는 진성(陳省)을 가지고 서울로 직접 올라와 납부하였다[『성종실록』 1년 6월 12일]. 본래 공납제는 토산물을 바치도록 하는 임토작공(任土作貢)의 원리 하에 현물로 직접 납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방납(防納)이 나타나면서 15세기 말부터 공납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16세기에는 공물을 쌀과 포(布)로 대신 납부하는 사대동(私大同)이 각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공물에 해당하는 가격만큼 다른 물품으로 환산하여 납부하는 절가대납(折價代納)이나 무역을 통하여 공물을 구입하여 납부하는 무납(貿納)이 성행하였다. 사림파 인사들은 수미법(收米法)이나 공물작미(貢物作米)를 주창하며 사대동의 공식화를 시도하였고, 결국 대동법으로 법제화되었다.
변천
대동법이란 공물을 현물 대신 대동미(大同米)로 대신 납부하게 한 제도였다. 그러나 대동법 성립 이후에도 적지 않은 경각사(京各司) 공물과 왕실로 진상하는 공물이 대동법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러한 공물은 서울에서 구입하기 어려운 임산물이나 수산물, 피혁류가 주종을 이루었다. 이 경우 향읍에서는 예전처럼 직접 서울에 바쳐야 하였다. 하지만 수송에 어려움이 많았고, 공물을 검사하는 관리가 부당하게 퇴자를 놓는 점퇴(點退) 등의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전국적인 유통 경제의 발전에 힘입어 공물이 영공(營貢)이나 경공(京貢)으로 전환되면서 실제 향공은 갈수록 찾기 어려워졌다. 영공이란 감영에 공물 값을 돈으로 납부하면 그곳에서 공물을 구매하여 납부하는 것이고, 경공이란 서울 공인에게 공물 값을 납부하면 그들이 공물을 구매하여 납부하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만기요람(萬機要覽)』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Ⅰ』, 일조각, 1984.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德成外之子, 「조선 후기의 공물무납제: 공인 연구의 전제 작업으로」, 『역사학보』 113, 1987.
김덕진, 「16~17세기의 사대동에 대한 일고찰」, 『전남사학』 10, 1996.
박도식, 「조선 전기 공리 연구」, 『인문학연구』 3, 2000.
향탄산(香炭山)
정의
왕릉이나 후궁·왕자 등의 원묘(園墓)의 제사 때 필요한 향과 땔감을 공급하기 위하여 능 부근에 지정한 산림.
개설
왕이나 후궁·왕자 등의 장례가 끝나면 해당 능이나 원묘의 관리와 각종 제사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위전(位田)과 향탄산을 지급하였다. 향탄산은 위전과 비슷한 기능을 갖기 때문에 향탄위산(香炭位山)이라고도 불리며, 제사 때 사용하는 향과 땔감을 조달하였다. 향탄산은 능관(陵官)이 적당한 곳을 골라 보고하여 정하였고, 향탄산으로 결정되면 그곳에 향탄산임을 알리는 표식을 세우고 타인의 이용을 금하였다.
내용 및 특징
향탄산의 운영은 조선의 산림정책 및 봉산의 지정과 궤를 같이 하였다. 조선전기에는 향탄산을 지정하되 뚜렷한 경계를 설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계 규정의 모호함 때문에 백성들의 산림 이용을 금지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권세가들이 산림을 사적으로 점유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불분명한 경계로는 향탄산을 유지할 수 없다는 위기감도 작용하였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17세기 말 이후 봉산을 지정하여 타인의 이용을 금하였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향탄산도 경계를 확정하고 또 표식을 세워 다른 사람이 이용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향탄산은 봉산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변천
향탄산과 같은 봉산정책은 다른 사람의 산림 이용을 제한·금지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보다 적극적인 산림 관리정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투장(偸葬)·개간·화전·산불·도벌(盜伐)·토석 채취 등을 금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향탄산 관리를 맡은 산직(山直)에게 향나무와 참나무를 기르는 의무를 부과한 점 등에서 보다 적극적인 산림 관리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말 이후 이러한 봉산정책은 보다 강조되었다.
참고문헌
박봉우, 「봉산고」, 『산림경제연구』 4-1, 한국산림경제학회, 1996.
배재수, 「조선후기 봉산의 위치 및 기능에 관한 연구」, 『산림경제연구』 3-1, 한국산림경제학회, 1995.
배재수, 「조선후기 송정의 체계와 변천 과정」, 『산림경제연구』 10-2, 한국산림경제학회, 2002.
호렴(戶斂)
정의
가호를 대상으로 세금을 부과하여 거두는 것.
개설
가호(家戶)를 대상으로 정규세 외에 각종 명목으로 돈이나 곡식 또는 현물을 거두는 것을 호렴이라고 하였다. 호렴은 공용(公用)을 조달하고 민역(民役)을 대체하기 위하여 징수되기 시작하였지만, 그 부과액이 후대로 갈수록 증가하였다. 또 그 과정에서 중간 계층의 부정까지 겹쳐서 민중 저항을 초래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세금은 원칙적으로 토지·사람·가호를 대상으로 각각 일정액이 부과되었다. 가호세의 경우 정규세인 공납(貢納) 외에 추가로 부과되는 것이 있었는데 이를 호렴이라고 하였다. 호렴의 방법으로는 전체 호에서 일정액을 거두는 균등 부과와, 전체 호를 상·중·하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일정액을 거두는 차등 부과가 있었다. 호렴 때에는 인구의 많고 적은 정도와 가계의 가난하고 부유한 정도를 집마다 기록한 장부인 『가좌성책(家座成冊)』이 활용되었다.
호렴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시기는 17세기였다. 당시 지방의 재정이 열악해지면서 잡역(雜役)이 잡역세(雜役稅)로 전환되어 갔다. 특히 민고(民庫)가 널리 설치되면서 결렴(結斂)으로 재원 조달이 부족하자 호렴을 실시하여 부족한 재원을 보충하였다. 1798년(정조 22) 이종섭(李宗燮)이 능주목사로서 응지상소(應旨上疏)를 올리자 정조는 다음과 같이 비답하였다. “호남 지방의 민고의 일은 결수로 부족하여 호렴까지 하고 말게 되니, 이 폐단을 생각하면 통곡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정조의 말을 통해서 당시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정조실록』 22년 9월 14일].
변천
18세기 이후 지방관청에서는 공식적인 세금 외에 상납이나 관용(官用)을 위하여 적지 않은 재화를 토지나 가호에서 추가로 거두어 물의를 일으켰다. 특히 아전들이 포흠(逋欠)한 공전(公錢), 경사(京司)의 구청(求請), 영문(營門)의 복정(卜定), 저리(邸吏)의 역가(役價), 공곡(公穀)의 부족분 등을 결렴이나 호렴으로 조달하였다. 단, 결렴 혹은 호렴의 비중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다. 대체로 전라도·충청도·경상도에서는 결렴이 많았고, 경기도·황해도·강원도에서는 호렴이 많았다.
참고문헌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목민심서(牧民心書)』
김덕진, 『조선 후기 지방 재정과 잡역세』, 국학자료원, 1999.
장동표, 『조선 후기 지방재정 연구』, 국학자료원,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