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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와 준비된 백성(p175-228)
After You Believe The Kingdom Coming and the People Prepared
오늘은 이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와 준비된 백성 그러니까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그 개념은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해야 할 일이 일을 얘기하는 거입니다. 그거에 대해서 과연 통치자와 제사장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의 영성 즉 제자들의 삶하고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런 부분들을 4장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이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통합 인문 과정이 성경은 드라마를 꼭 시청하시고 이 과정에 참석하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왜냐하면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의 전체 이야기는 결국에는 그가 신약 성경학자로서 풀어나가는 그의 연구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약성경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기초를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After you believe 만을 읽으면 그가 얘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이 특별히 새관점에서 이야기해 왔던 그 성경을 읽어가는 방식에서 성경의 드라마다에서 얘기하는 그 거대 서사에 대해서 파이 미니스트리에서 통합 입문과정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거를 이해해야만 오늘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라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라는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The Kingdom coming and people prepared) 내용이 무슨 얘기인지를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산상수훈 – 마태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긴 설교
이렇게 이 책의 처음 부분에서 이제 산상수훈에 대해서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이 이야기를 합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서 5장부터 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장 긴 설교를 우리는 산상수훈 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태복음서 5장부터 7장이 그 예수님의 가장 긴 설교 그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이냐라고 한다면 모든 성경학자들이 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산상수훈의 핵심 : 팔복
팔복이라고 the be attitudes라고 표현을 합니다. 여덟 가지의 다양한 복받은 사람,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엔 티 트라이트 목사님은 이것을 적절하게 번역하는 것은 복 있는 사람은 이라기보다는 복받은 사람은 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얘기합니다
그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팔복의 핵심이 복 있는 사람 또는 복 받은 사람의 단어가 고대 그리스도는 마카리우스 고대 히브리어로는 아쉬레이(Ashrei)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긴 설교의 산상수훈의 핵심은 복받은 사람 또는 복 있는 사람인데 이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진정한 목표다 라고 얘기했다는 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서 5장부터 7장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진정한 목표 즉 복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해서 쭉 풀어 나가는 그 얘기의 그 진정한 골(?), 우리가 보통 텔로스라고 얘기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그래서 우리가 중요하게 이 책에서 이야기 나누고 있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텔로스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얘기합니다. 그게 복 있는 사람이다라는 거입니다. 하나님 임재 안에 거하는 복 있는 상태 그래서 이 방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어 복받은 상태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이책에 181 페이지에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복받은 상태는 창조주 하나님이 누군가의 삶 속에서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을 통하여 일하실 때 발생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받은 상태다 하는 마카리우스 그리고 이에 아쉬레이 말은요 신명기에서 이제 그 신명기에 기초를 두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즉 복받은 상태라는 것은 신명기 뒷부분에 나오는 야웨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맺은 언약 안에 약속이 성취될 때 생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팔복이 무엇이 있었는가 하나님 나라 신약성경으로 한번 같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이 가난한 사람은 복 있다. 하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 있다. 너희가 위로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 있다. 너희가 만족할 것이다. 하나님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만족할 것이다. 자비로운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자비를 받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하나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하나님 길을 걷다 박해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헐뜯고 박해하고 너희에 대해 온갖 악한 말을 거짓으로 늘어놓을 때 너희는 복이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너희 앞에 온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마태복음서5장 3-11절>
팔복의 의미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은 팔복의 의미가 다음과 같다고 얘기합니다. 일단 성도 그 하나님 나라 백성의 그들이 가진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다. 그리고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 라이트 목사님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때는 위로를 받을 때, 천국이 마침내 이 땅에 내려올 때, 창조 세계가 새롭게 될 때, 풍성함을 누릴 때, 자비를 얻을 때, 상급을 받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직접 목격할 때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이 팔복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두 번째 의미는 예수님께서 공생의 사역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목표가 온 창조세계에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라이트 목사님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여기에 계신 만큼 그 목표는 현시대에 도래했습니다. 산상수훈 또는 산상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분의 공적 사역이 장차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하나님나라 그 목표가 창조세계에 도래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세째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계시된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을 마음 깊은 곳부터 새기고 살아가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라이트 목사님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의 존재방식에 상응하는 마음의 습관과 삶의 습관을 현재 여기에서 실행할 수 있다. 그래서 이는 결국에는 이루어질 모습이지만 예수님이 여기에 계심으로 이미 여기에도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183쪽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이 부분이 좀 의아하실 수 있습니다. 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새기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그런데 영성을 공부하고 그리스도교 제자도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깊게 나눠 보신 분들은 이 마음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가 중요한가?
이제 다시 한번 짚어보면, 왜 마음 깊은 것부터가 중요합니까? 그 이유는 첫 번째 성도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완성하실 궁극적인 완성 즉 그 미래에서 진정한 인간이 살아갈 삶의 모습을 지금 현재 여기서 믿고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이다는 것을 믿는다는 거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소망한다는 거입니다 그 믿고 바라는 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미래를 현장으로 가져오시는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 가운데서 현재 지금 이 순간을 진실하게 사랑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성도가 그렇게 진실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 나라 증인으로 살아가며 겪게되는 어려운 일들 그런 어려운 일들도 주님 임재 안에 거하는 복받은 상태 즉 사람이 진정한 사람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성취해야 할 진정한 목표로 확신하게 된다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궁극적으로 완성하게 될 미래의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완성하신 그 하나님 나라가 우리가 믿고 바라면 현재를 진실하게 사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겪게 되는 하나님 나라 증인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모든 어려움들 그것들을 복받은 상태라고 얘기하지 못한다는 거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시는 복받은 상태, 복 있는 사람, 팔복에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는 거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성취하는 진정한 인간의 목표상을 성취하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왜 중요한가,
세 번째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을 즉 하나님 나라 증인으로서 살아가며 겪게 되는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복받은 상태라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과 다른 것들을 동급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를 했고 그 우상 숭배를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그들을 신 바벨로니아 제국의 포로로 그리고 오랜 시간 페르시아 제국 알렉산드로스 대제를 통해서 그때 로마 제국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포로 생활로 살아가게 하셨기 때문이다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라이트 목사님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취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려고 한다. 일단 너희가 이 점은 인식하면 이런 습관은 새 세상을 바라보며 지금 여기에서 행해야 할 마음의 습관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말하자면 상급이나 보상을 얻기 위해 반드시 행해야 할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새로운 신자들이 쫓아야 할 행동 규율로 내놓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새롭게 창조된 삶 새 언약의 삶 예수님이 주시는 삶의 표지판 내지는 표지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라고 얘기합니다.
종말론적 진정성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대표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미덕 목표를 이렇게 고대 이스라엘 유대교식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변역하여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적절하도록 바꾼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어찌됐든 이 마음 깊은 곳 이렇게 사는 것이 왜 중요한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거입니다. 그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왜 그렇게 못 살았는가, 그들은 하나님 나라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것들을 바라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은 ‘종말론적 진정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 팔복은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소망을 이해하고 그 바탕 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성도가 예수님께서 완성하실 진정한 미래의 모습을 믿고 바라며 오늘 진실하게 살아간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말세라고 얘기하는 것은 바로 그런 거입니다. 말세라는 것은 바로 완전하게 하시는 그 예수님의 그 날 새 하늘과 새 땅 그 예수님 재림의 날을 바라보면, 그런데 그것을 오늘 이곳에서 이미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통하여 누리며 살아간다는 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그런데 여기는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 완전이 오고 있다는 것을 믿으면 그러나 좀 완전하지 않지만 이미 우리가 맛보며 살아가게 하신 그 은혜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감사하며 우리 신실하게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종말론적 진정성이다고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적 진정성을 다시 한번 정리한다면, 야웨 하나님이 얼마나 모든 사람과 온 창조 세계에 신실하게 사랑하셨는지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언약적 신실하심
이 언약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파이 미니스트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그리스도교 영성을 이야기하고 나누고 공부하고 훈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것을 회복해야 한다는 중요한 핵심 단어입니다. 언약적인 신실하심이 그 단어가 바로 그것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God chooses faithfulness to his own promises even though he knows it going to cost Him. pastos matt라는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언약적으로 신실하셨다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맺어 주셨던 언약이 신실하셨습니다. 그들이 타락한 이후에도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또한 모세를 통해서 고대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시고 또한 다윗 왕국을 세우시고 그들이 분열하고 망하고 그래서 바벨로니아의 포로로 끌려가고 아시아 제국의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어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계속해서 이어져 나갔다는 거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언약이 성취된 곳이 어디다 바로 예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언약의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신실하심 때문에 우리가 우리를 그렇게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주님을 우리도 신실하게 언약적 사랑한다는 것이 종말론적인 진정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 나눴던 거지만 언약에 대해서 우리가 반드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언약
언약의 복들은 순종함에 따른 조건적이나 언약 그 자체는 조건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불순종했다고 해서 그 언약이 깨지거나 취소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 오래된 옛 언약 새로운 신언약 새 언약 그래서 그 안에는 연속성이 없다는 식으로 자꾸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언약은 단 한 번도 깨지거나 폐기되거나 연속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연속 됐다는 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첫 언약 그리고 갱신된 언약 이렇게 부르는 것이 어쩌면 오늘 우리의 시대에 더 적절한 이해를 성도님들에게 준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는 너희의 것이며 너희는 내 것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너희를 창조한 너희를 구속한 하나님이 되며 너희는 그것을 증거하는 증인된 백성으로 살아하는 것이다라고 그 언약을 계속해서 맺으셨다는 거입니다. 그래서 야웨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으로 창조한 사람에게 청지기 역할을 수여하신 때부터 그분은 사람과 언약을 맺으셨다 분이에요 그리고 그 언약은 단 한 번도 불 연속된 적이 없다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마치 불연속 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결국에는 그 의무를 그래서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신실하시고 우리는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신실해야 하는, 즉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우리는 하나님 백성을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야 하는 것들을 온전히 할 때는 축복이 있고 그렇지 못하면 결국에는 저주를 받는다, 이런 개념은 있었지만 언약의 관계적인 기초가 깨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이 얘기하는 중요한 핵심은 예수님이 증거하셨다 마음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만 증거한 것이 아니라 남유다 왕국을 향하여 말씀을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말씀을 예언했던 예레미야 예언자나 또는 에스겔 예언자나 이런 사람들 마음에 대한 문제를 굉장히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 증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고통받고 불합리한 일을 당하고 오히려 피해를 받고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것을 복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라는 거입니다. 복받은 백성의 인생 언약 백성의 삶을 누리면서 살아간다고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고대 근동 문화 종교와 문화와 관련 있을 때 굉장히 혁신적인 완전히 그들의 생각을 깨부수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 문화에서는 신은 자기 백성들을 무조건 지켜 줘야 되는 것입니다. 전쟁으로부터 지켜주고 이기게 하고 항상 그 자연 재해로부터 지켜주고 좋은 일들만 가득하게 해야 하는 거입니다. 그 좋은 일들을 가득하게 하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그 신은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라든지, 아니면 우리가 그 신에게 신실하지 못한 존재라는 식의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이런 생각했다는 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데 그래서 하나님 나라 증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우리에 모습이 복받은 삶이냐고 한탄합니다. 왕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군대도 가지지 못하고 우리는 야 이게 이게 복받은 백성의 사면 왕도 제대로 못 세우고 뭐 군대도 모지 못하고 우리를 보여준 인간적인 존재로 영웅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고, 겨우 사사가 나타났다가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인간 왕들을 세웠더니 그 인간 왕들이 예배드리는 장소 뭐 이런 사람들이 없네 하나님만 우리 지키신다고 이게 뭐야 겨우 사삼 순간에 나타나다가 사라지고 인간 왕들을 세웠더니 그 인간 왕들이 조금 예배를 드리는 장소를, 예루살렘 성전뿐만이 아니라 지방에 만들었는데 그건 또 문제다고 하고, 도대체 이런 것이 복받은 백성의 삶이냐고 하면서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하나님 백성다운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다라는 거입니다.
이제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은 뭐라고 얘기하냐면 그들이 노예로부터 즉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로부터 하나님 안에 중요한 핵심은 자유로운 백성이 하나님 안에서 됐다라는 거입니다. 하나님 안에 자유로운 백성이 된 것을, 마음 그 중심 깊은 곳으로부터 참되게 감사하며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언약이라는게 참 재미있는 것이 뭐냐면 언약의 신실해야 할 것은 사실 고대 근동의 다른 종교는 물론 일반 백성들도 있지만 왕 또는 제사장등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 즉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 다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그 하나님 백성다운 삶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만큼 이렇게 하나님 백성 한 명 한 명의 회개와 돌아서면 중요하게 여기기는 분은 사실 고대 근동 어느 종교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굉장히 혁신적인 그런 생각이다 얘기할 수 있는데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그만큼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그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모여서 한 공동체를 이룬 하나님의 단일 백성이 하나님께 언약의 신실한 삶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보여 준다라는 거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 언약의 신실하심 증거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향해서 하나님이 언약이 하나님이 정말 그 언약에 신실하셨습니다 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거에 대해서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첫 번째 모든 사람과 온 창조 세계가 하나님 임재 안에 복받은 상태로 인도하는 참된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이스라엘이 실패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스라엘, 즉 하나님 백성이다는 그 하나님 백성이 언약의 신실해 하는 그 모습을 예수님이 담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시실하셨다는 증거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Gods covenantal fathfulness라고 얘기하는게 예수님 안에서 그래서 이루어졌다고 얘기한다는 거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오고 있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자기 인생을 통해서 공생애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전체 인생을 통해서 증거하셨다는 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거하면서 겪는 모든 어려움도 예수님은 진정한 이스라엘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 임재 안에 복 있는 상태 복받은 상태라고 인정하셨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과 온 창조 세계를 위하여 죽으실 수 있었다라는 거입니다. 그 죽는 것을 복이라고, 복받은 상태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면 예수님은 돌아가실 수 없었다는 거입니다. 십자가에서 구속의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거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순간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증거의 상태 즉 하나님 인재 안에 복받은 상태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고통으로 받으신게 아니라 증인으로서 그 일을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취지로 말씀하셨어요. 라이트 목사님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제 나는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려고 한다. 이건 방 금전에 말씀드렸던 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갱신된 언약
그래서 이거는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갱신된 언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첫 언약이 완전히 더 나은 더 멋지고 아름고 세상의 빛이 되는 아름다운 것으로 나타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그 언약을 자기 백성하고 갱신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다는 거입니다.
이제 보면 갱신된 언약의 통치자며 제사장인 메시아가 예수님이시다는 거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것이 갱신되었기 때문에 마음 중심으로부터 즉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못했던 그 하나님 나라 백성의 증인으로서 당하게 되는 어려움들도 복받은 상태라고 예수님이 인정하기 때문에 자기들도 마음 중심으로부터 그것을 인정하며 감사하게 된다는 거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자신들이 하나님 부르심을 받았고 새 언약을 맺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백성 모두가 창조 세계를 위해 일하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워졌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백성이 되었으니
그래서 하나님의 자유로운 백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노예 상태로부터 자유로운 백성이 되었다라는 것은 그냥 하나님 없이 자유로운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백성이 되게 했다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자유인으로 살되 하나님 종으로 살라라 얘기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자유롭게 된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복인데 그 자유롭게 됐다는 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 나라 증인으로서 그것을 증거하며 살아갈 때 겪게 되는 모든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일도 하나님으로부터 복받은 상태다 인정하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백성이 된 것이 바로 자유로운 백성이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2장 16절에서 그렇게 얘기했던 것처럼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부터 온 거입니다
조이스 마이어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people are born to be free it’s a gift from God 사람은 자유로운 종로서 선택할 수 있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그것을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가 어떻게 다른 말로 한다면 응답할 수 있는가라는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 안에서 자유로운 백성이라는 거입니다.
주님 안에서의 노동은 결코 헛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헛되지 않다라는 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얘기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우리 안에 계시는데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기 때문에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장 온전한 모습으로 완성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곳에서 주님을 안에서 우리가 일하는 것 증인으로서 살아하는 거, 그 일로 인하여 겪게 되는 모든 복된 것과 그리고 좋은 것들과 힘든 것도 다 복으로 우리는 여긴다는 거입니다. 주님은 임재 안에서 어디서든 그렇기 때문에 전심으로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언약 관계적 관계 가운데 있는 성도가 주님께 드려야 할 합당하며 신실한 사랑 다른 말로 하면 예배다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라는 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실하셨던 것만큼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 그래서 겪게 되는 모든 좋은 거 안 좋은 거 하나님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그래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반응하고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응답할 수도 있지만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사람이 응답할 수도 있었다는 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실제로 타락이라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그 방향으로 응답했을 때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를 온 세상 흩어져서 자기의 증인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살아가게끔 만드셨고 그 일을 계속해서 진행해 나가기 때문에 주님은 그 모든 일을 헛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자기의 모든 일들을 우리를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고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헛되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게 되는 모든 일들 우리가 최종적인 궁극적인 완성이 어떻게 될 것이다는 것을 이미 맛보고 알고 있는 존재들인데 이곳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 증인으로서 사랑하는데 겪게 되는 모든 불공정한 것과 불합리한 것들을 어떻게 그것은 복된 것이 아니다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노동은 결코 헛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이라고 표현했다는 거입니다. 노동이 무의미한 거 아니냐, 우리가 보통 노동이란 말을 사용할 때는 우리가 아무리 수고해도 결과물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할 때 우리는 보통 노동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일을 부정적으로 표현할 때 노동이라고 하고 우리의 일을 긍정적으로 표현할 때는 근로라 표현하는데 지금 노동이라고 했다는 거입니다. 그런데 그 노동이 헛되지 않다라고 얘기하고 있다는 거입니다
예수님이 미래에 완성된 그 나라를 위해 오늘 성도를 부르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 성도를 향하여 예수님이 너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런 종말론적인 진정성 다른 말로 하면 언약적 신실하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바탕 위해서 성도는 진정으로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진정한 인간으로서 진정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바르게 일하기 위해
주님 안에서 바르게 일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 완전하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데리오스(perfect), 마태복음서 5장 48절에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해야 한다 “You therefore must be perfec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어떻게 우리가 완전할 수 있냐라는 거야요 주님 안에서, 그런데 우리가 참된 증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래서 주님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완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한게 뭐냐, 라이트 목사님은 그리고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중요한 핵심은 우리가 신실하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신실하게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하게 사랑하는 것이 바로 완전함의 핵심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은 그게 바로 온전함입니다.
완전하라 = 온전하라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도 말씀하셨던 것이 바로 온전하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 답게 살아가라라는 것이었습니다
라이트 목사님은 189 쪽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모든 경우에 온전함이라는 것은 긴 목록으로 작성된 어려운 도덕 명령을 의무적으로 지키는 일이 아니라, 철철 넘치는 관대한 사랑으로 빚어진 성품에 이르는 것이다. 그 성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
고대 유대인이 예수님 말씀을 거부한 이유
그것이 바로 고대 유대인이 예수님 말씀을 거부한 이유입니다.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으로 살아가라는 것을 주 이세기 고대 유대인들이 왜 거부했는지 그렇게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으로 일하면서 그런 존재로 살아가라고 말한 것을 거부한 이유는 그것으로 그리고 거부한 것을 더 넘어서서 그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증오했던 이유는 주후 1세기의 고대 유대인들은 모든 원수를 심판하고 자기 백성을 회복하시는 주님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포로 생활을 끝내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아오시면 우리를 억압했던 모든 이방 제국 옛날 신 바벨로니아 제국으로부터 로마 제국에 이르는 모든 이들을 다 하나님께서 싹쓸어 버리시고 우리만 높이실 것이다. 우리만 즐거워하실 것이다. 우리의 복수를 갚아 주옵소서. 우리가 당했던 모든 원한을 다 갚아 주옵소서, 그 하나님 나라를 꿈꿨다는 거입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꿈꿨다는 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 넓은 마음을 가지고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으로 일하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고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그 요청을 받아 수 없었던 것이고 더 나가서 미워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왜 온전함이 중요하고 주님은 왜 이것을 가지셨는가?
그래서 왜 온전함이 중요하고 주님은 어떻게 이것을 가셨는가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장례가 즉 미래가 완전히 도래하려면 새로운 대한 세력으로서 그 반대편에 포진 되어 있는 세력 즉 무질서와 파괴 미음과 의심 폭력과 자만심 탐욕과 야망을 일삼는 세력을 포위하는데 그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서 파멸시켜야 한다라고 확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맡겨진 왕과 제사장의 소명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투를 치름으로써 그리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제사장 새 성전의 중심부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순종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예수님은 믿으셨던 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로서는 조금밖에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소명 의식을 품고 자신이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자 그리스도 즉 구세주이자 이스라엘의 제사장이라고 믿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궁극적인 승리와 순종의 제사를 가능케 해줄 그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하신 예수님의 신실하신 사랑으로 인해서 실제로 예수님은 온전한 진정한 하나님 형상의 완전한 온전한 존재로서 인간으로 사셨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래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 하나님 영이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옳다 왜냐면 내가 떠나고 성령님이 임하면 너희가 그런 나와 같은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 때문에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 하나님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같이 온전하게 하나님께 반응하며 즉 신실하게 예배하며 사랑하는 참 사람의 참 인간의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거입니다. 그래서 그 일로 말미암아 그 진정한 그 인간의 공동체가 형성된 주님의 몸된 공동체가 형성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과 온 창조 세계를 대적했던악의 세력이 가장 최대 패배를 당했다는 것을 증거하게 됩니다. 바로 그 세력이 어떻게 패배를 당했냐 그 세력이 아무것도 아닌 마치 인간의 노예로 만들고 인간의 막 그렇게 만든 그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존재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폭로하셨다는 거입니다. 예수님의 그 신실하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일이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님 vs 신앙의 그리스도
이들이 원래 초대교회로부터 받아들였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믿어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사람이 무엇인가라는 중요한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20세기 21세기의 성도들이 특별히 서양 서구 세계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온전하게 고백하기 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역사적 예수님 연구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이 얘기합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 또는 역사적 예수님 연구는 뭐냐면 the act historian person jesus of Historical meth reconstruct him 교회가 이전 교회가 계속해서 수백년 동안 고백해 왔던 그분은 진정으로 이 땅에서 사셨던 그 역사로서 사셨던 예수님의 실제 모습은 아니다라는 거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인 그 교회가 고백하고 교회가 신앙 고백하는 예수님이 아닌 진짜 예수님을 찾자는게 이게 역사적 예수님이 연구였습니다. 그것에 따라서 그 신앙이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님을 나눈 거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그리스도는 the figure of Jesus as the central figure of Chris theology and faith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이 얘기였던 그 예수님의 형상적인 모습은 이제 차치하고 진짜 말씀하시고 진짜 밥 먹고 진짜 주무시고 그 사셨던 예수님의 그 진짜 이야기에 우리에게 살려 내자는 연구가 역사적 예수님 연구가 그래서 펼쳐졌다는 거입니다
그러면서 새관점이라는 것이 등장했고, 우리가 보통 자유주의라는 그런 것들이 나타나고 했는데 수백년간 이런 연구가 이렇게 분리된 일들이 일어났다는 거입니다. 그래서 수백년간 내려온 역사적 예수님 연구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분리하고자 하는 수많은 서구 신약 성경 학계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일어난 일은 오늘 21세기 2025년에 서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태도를 가지게 만들었다고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이 얘기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얘기하냐고 했었을 때 서양 세계에 몸담은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서신서 중심의 신자와 복음서 중심의 신자로 나뉘었다고 얘기합니다. 서신서 중심의 신자는 그리스도교를 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복음서 중심의 신자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주로 굶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 것과 같은 선행의 견제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럼으로 그들이 겪는 어려움
그러므로 인해서 그들이 겪는 어려움이 뭐냐고 얘기했을 때 192 쪽에서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서신서 중심의 신자는 즉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의 핵심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내가 하나님 나라 구원을 얻게 되었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제자들을 향하여 온전하라 즉 완전하라고 요구하신 그 가르침을 그것에 과연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하기를 힘들어 한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복음서 중심의 신자 다른 말로 한다면 역사적 예수님 연구 그 역사적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라고 얘기했던 사람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선행을 하라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려운 건 뭐냐면 그 날카로운 일들을 실제로 몸서 실천하면서 가야 할 길을 몸소 이렇게 보여주셨던 모범이 셨던 예수님이 어째서 그토록 일 죽으셔야 했는가, 왜냐면 그분이 죽으신 거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근데 왜 그분이 죽으러 가는 길을 마다하지 않고 계속 그 길에 갔냐는 거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힘들어 한다라고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이 얘기합니다.
예수님 사역의 핵심
예수님 사역의 핵심은 제자를 키우는 것과 더불어서 하나님 나라의 그 구속을 감당하는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말씀드린다면 예수님 사역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가 계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 그 더불어 증인들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계시는 우리가 보통 신앙이 그리스도라고 얘기하는 그 사람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통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세우는데 목적이 있다라고 확신했다는 그것과 연관되어 있다면 제자를 세우는 것 복음서에서 증거하는 즉 복음서 중심에 역사적 예수님 연구를 그렇게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 나라의 증인들이 야웨 하나님과 온전한 언약적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합니다.
엔 티 라이트 목사님에게 있어서 그리고 파이 미니스트리의 핵심의 중요한 사실은 사실 언약이 언약을 강조하는 것이 많이 흐트러진 거에 대해서 언약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거 그것으로 인하여 교회가 얼마나 역동적으로 살았는지에 대해서 역동적으로 창조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반응하며 함께 그 일에 정말 멋지게 참여했던 것 그 일들을 21세기 교회가 회복하여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언약이 중요하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 하나님 나라의 증인들이 야웨 하나님과 온전한 언약 관계를 맺어 살아가며 모든 사람과 온 창조세계 주님의 복을 전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공생의 기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일에 집중하셨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님과 신앙의 그리스도는 다른 존재다 얘기할 수 없다는 거입니다. 왜냐면 둘 다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핵심이었기 때문에 그분이 진정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실하신 것처럼 인간에게 모든 사람과 온 창주에게 신실하셨습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일의 자신의 사역의 중심이다 놓으셨다는 거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또한 증거하는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서 살아가는 자기의 제자들 자기의 신부들 그 사람들이 그 증인으로서 자기처럼 살아가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또한 제자들을 세우는 그 일들을 열심히 하셨다 예수님 사역의 중요한 두 핵심 축이었다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이 얘기한다는 거입니다.
증인으로서 바울의 가르침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창시자가 바울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세우신 그
증인으로서 가장 완벽한 중요한 가르침들을 남겼다고 얘기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증인으로서 도대체 거룩한 바울이 가르친게 뭡니까 그가 가르친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 유일하신 하나님의 비유대인 출신이든 유대인 출신이든 하나님의 단일 백성 성도가 라오스 하나님 백성이 탄생했다는 것이 증인으로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일들이 중요하고 그것을 깨뜨린 이들을 단연코 우리는멀리해야 한다라는 것이 성 바울 거룩한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백성으로 인해서, 그럼 왜 단일 백성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 백성이 통치자들이 동시에 제사장들로 일해야 그래서 만왕의 왕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분을 닮아 왕들로 그리고 제사장들로 일해야 하나님의 온 창조 세계가 회복되기 때문에 그리고 온전한 아름다운 일들을 이 땅에 쳐지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 진실로 온전히 꽃을 피우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이루신 분이라고 사도 바울은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야웨 하나님의 이 거대 서사를 메타 네가티브를 성취하신 가장 클라이맥스 절정이었다고 말합니다. 성경 드라마에서 얘기했던 중요한 핵심을 다시 한번 언급하면 이거입니다. 성경은 모든 창조된 실제 그 창조물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우주적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가르칩니다.
그것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모든 것을 통털어 얘기하는 거입니다 다 망라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 역사의 비전은 온 힘을 다해 시간의 시작 너머로 확대하면 마지막 날로 향한다고 그리다너스(S Greidanus)는 말했습니다. 역사의 성경적 비전은 첫 창조 때부터 새 창조까지 지속되며 모든 창조된 실재들을 아우릅니다라고 했습니다.
엔 티 라이트 목사님도 같은 얘기를 해요 194쪽 이런 얘기합니다
이 거대 서사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 형상을 반영하는 어디에 반영합니까? 창조 세계에 반영하는 자가 되도록 부름 받았고 이스라엘은 인류의 구원자가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과업을 완수하여 인류를 구출함으로서 구속받은 인류를 통해 온 창조 세계를 부패와 죽음에서 해방시키고 또 새 창조의 프로젝트를 시작하도록 부름받았다 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핵심은 그거입니다. 창조 세계를 폴 마셜 교수님이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펼치시는 구원 즉 구속의 범위 회복하시는 그 갱신의 범위는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셨던 그 범위와 똑 같다는 것입니다. 엔 티 라이트 목사님도 194 쪽에서 동일한 이야기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은 하나님의 용서와 새로운 삶을 받는 수령자로뿐만 아니라 신앙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 백성 천국에 간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대리인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 즉 창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대리자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속은 바로 우리를 진짜 인간으로서 일하게끔 만든 진짜 인간으로서 일하고 쉬는 존재로 만드는 그것과 관계된다는 것을 우리 잊어버려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잊어버린 그 순간 그리스도교 영성은 결국 한 개인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내안에 이 정도의 기초 단계에서 머물 수밖에 없다는 거입니다. 더 넘어서지 못한다는 거입니다.
온 창조 세계에 샬롬을 증언하는 증인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성은 그래서 하나님 예수님처럼 그 하나님과 그 정말 진정으로 성숙해지는 건 뭐냐면 온 창조세계의 샬롬 평화와 번영을 증언하는 증인들로 세워지는데 있어서 그리스도 영성은 매우매우 중요한 이야기 화두를 가지고 있다라고 우린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그렇게 얘기할 수 있어야 됩니다. 휴식과 샬롬 그게 사람만이 아니라 온 창조 세계를 다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 창조 세계가 평화를 누리는 궁극적 샬롬(평화+번영)을 말한 고대 이스라엘 예언을 따라 그 일이 시작됐으며 완성을 향해 간다는 하나님 나라 증인으로 영적 이스라엘, 주님의 몸된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주님의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일어나게 되는 주님의 재판 주님의 처벌 이 법정 의 심판은 복수의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라는 거입니다. 복수의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세 땅에서 예수님이 양과 염소로 나눈 그 심판 그 재판은 그 법정의 재판은 온전한 회복을 위한 공의의 바탕을 두고 있다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후 1세기 고대 유대인들은 용서를 증가하는 증인을 세우는데 집중하셨다 예수님을 반대하고 그분을 죽였다는 거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일에 대한 복수를 정당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바랐기에 그들이 바라는 것은 결국 아무런 하나님 능력이 없다라고 그들은 무능력한 사람들이다고, 예수님은 폭로하고 억눌려 있는 모든 사람을 구속하신 겁니다. 그게 예레미야서 51장 9절부터 10절에 우리가 좀 살펴볼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51장 9절10절
예레미야서 51장은 결국 남유다 왕국을 망하게 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유다 왕국을 망하게 하는 신바벨로니아 제국을 하나님이 동일하게 심판하실 것이다라는 법정으로 재판하고 그대로 정당하게 그 집행 그 처벌을 집행하실 것이다는 것을 얘기하는 중요한 챕터입니다 51장 중요한 장입니다.
거기서 예레미야가 그런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이 바벨로니아를 치료하려고 했으나 낫지 않으니 이제는 바빌로니아를 내버려 두고 각자 고향 땅으로 돌아갑시다. 바빌로니아의 재앙이 하늘에까지 닿았고 창공에 까지 미쳤습니다. 즉 하나님의 그 임재의 장소까지 미쳤다 하늘의 그 영역까지 실제까지 미쳤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의 의로우심을 의로움을 밝혀 주셨으니 어서 이제는 예루살렘 즉 우리가 마침내 신 바벨로니아 제국이 망하고 심판 당하고 우리가 포로로부터, 즉 끌려왔던 그곳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는 그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의 의로움을 밝혀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증거하게 하시기 위해 그것을 온 세상에 증언하라고 하실 것이기 때문에 신바벨로니아 제국을 심판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복수의 바탕은 즉 남유다왕국이 망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복수로 하나님이 그의 심판하신다는게 아니라 그들도 회복의 대상이 나서 하나님이 정말 이 남유다 사람들을 왜 포로로 끌려가게 했는가 왜 거기서 잘 살게 하였는가, 그들도 회복되야 하고 그들도 구속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백성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치료하려고 하셨기에 그들이 그곳으로 가게 했으나 그래서 그와 같은 일들을 하게 했으나 낫지 않았다는 거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거야 듣지 않았다는 거야 아시아 제국처럼 요나 예언자가 가서 말씀을 증거 있는데 온 백성이 회개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입니다. 그 하나님이 공의로운 심판으로 신 바벨로니아 제국을 재판으로 처벌하신다라는 얘기를 예레미야 예언자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거입니다. 지금 뭐냐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판이라는 것 재판이라는 것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복수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라는 것을 단순히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언자들의 그 모든 예언을 성취하신 그 시작점의 예언자들도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죽음은 다시 한번 강조한다면 복스가 아닌 정당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이 191쪽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마침내 그분의 백성에게 돌아간 것을 몸소 보여주는 인물로 밝혀졌습니다. 이는 요한복음서의 중심 주제 중 하나이지만 다른 세 복음서에도 나타난다고 요한복음서 다른 세 공간복음서보다 더 두드러지게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 약속하신 바대로 오셔서 거하게 된 장소인 인격화된 성전이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당한 하나님 의를 드러내신 진짜 하나님 성전입니다. 인격화된 성전이다고 얘기했다는 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당한 의를 드러내신 인격화된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모든 예수님 제자들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게 된다라고 얘기했습니다. 그게 초대 교회가 예수님 안에서 고대 이스라엘 민족 즉 하나님 백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두 이야기 줄기인 통치자와 제사장이 성취되었고 때문에 그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인류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소명이 확정된다고 선포했던 그 메시지인 것입니다. 복음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5.9절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5절부터 9절에 사도 베드로가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 자신은 살아 있는 돌들처럼 영적인 집으로 지어져, 진정한 반상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에서 살아 있는 돌들처럼, 왜 살아 있는 돌들이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거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원래 하나님께서 세우고자 하시는 진정한 하나님 임재의 장소 성전이라는 영적인 집으로 지어져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주 기뻐하실 영적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된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 바탕위에서 거룩한 인격화된 성전으로 받은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백성이 된다라고 거룩한 베드로는 이야기했습니다.
역사적 예수님 = 신앙의 그리스도를 다시 말함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예수님의 연구와 신앙의 그리스도는 사실 분리 되는 것이 아닙니다. 통합된 관계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는 통합된 관계입니다.
라이트 목사님이 이렇게 198쪽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온전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온전한 이야기야 합니다
54:47
이것이 신약성경 학계가 극복하고 온전하게 나아가야 할 중요한 화두라고 신학자로서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일부를 생략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님만 너무 강조한다든지 아니면 신앙이 그리스도만 너무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략한 이야기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이야기 즉 역사적 예수님 연구와 신앙의 그리스도 이것을 통합하는 온전한 이야기 속에서만 우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새 창조의 걸맞는 미덕을 온전한 의미 를 파악할 수 있다라고 그리고 그 뜻을 따라 우리가 그 일에 우리가 온전한 성품을 빚어져 가는 일에 우리가 충성을 다할 수 있게 된다라고 에 티 라이트 목사님이 얘기합니다.
거대 서사의 핵심
그러면 도대체 거대 서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드라마다에서 얘기했듯이 첫 번째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왕 같은 제사장 즉 청지기로서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사람의 타락 이후에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속하시기 위하여 말씀과 영으로 자신이 누구이신지 계시하시며 일하기 시작하신, 일하고 계셨던 삼위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에브라함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 고대 유대인 초대교회로 이어지는 구속된 하나님 백성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일관성이다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백성과 맺으신 언약의 신실하신 야웨 하나님. 다섯 번째는 세상을 창조하신 인격이신 하나님 말씀이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신 구세주 만왕의 왕 대제사장 그리고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속에서 유일하신 하나님, 단일 백성으로 하나된 또는 한 하나님의 단일 백성으로 하나된 복음의 성취라고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는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인으로 일하는 주님 성전된, 사도 베드로가 말했던 그 반속위에 지어진 집들 속에 왕같은 제사장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어떤 백성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그것이 창조 세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라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 일을 위하여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었으니 너희도 이제는 너의 십자가를 치고 나를 따라라, 즉 증인된 삶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살아가라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엔 티 라이트 목사님은 얘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