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기장 총회교육원 사순절 묵상집
3월 30일 수요일
사순절 25일째
다비다의 병
사도행전 9장 40절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서 앉았다. |
다비다의 죽음을 애도하며 과부들이 베드로 옆에서 그녀가 지어온 삶의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여주자 베드로는 그녀를 다시 살립니다. 속옷과 겉옷이 부활로 이어집니다. 어떻게 이 일이 부활로 나타날까요? 이 부활은 단지 죽은 사람이 일어나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어떤 의미의 부활일까요?
먼저 다비다의 ‘병’(37절)이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병은 성서 안에서 죄를 표상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 2:1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다비다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 다른 말로 죄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착한 일과 구제 사업’이라는 겉옷은 화려한데 과연 그의 속사람 역시 순수한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일까요? 더욱이 다비다(아람어)나 도르가(헬라어 둘 다 그 뜻이 ‘사슴’(혹은 영양)이라면 ‘뿔’이 특징일진대 혹 자기가 한 일을 뿔처럼 자랑을 하고 싶은 속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착한 일과 구제 사업이라는 겉옷을 입었지만 같은 마음의 속옷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착한 일과 구제 사업을 자랑하는 겉 다르고 속 다른 병을, 아니 그의 죄를 본문은 죽어있는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37절을 “병이 들어서 죽었다”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은 ‘죽다’라는 동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의 ‘죽다’는 부정사 아포싸네인)로 이것을 이끄는 동사는 ‘기노마이’(되다)입니다. 단순히 육체의 질병과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로 죽어있는 사람이나 다를 바 없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엡2:1)라는 말씀과 같은 상태인 것입니다.
전에는 위선과 가식이라는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 위선과 가식의 뿔을 꺾고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된 것이 부활한 모습 아닐까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속마음이 다르지 않게 살아가는 일은 신앙인의 과제입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나의 모습을 성찰하고 돌이키는 사순절의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찬송 :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통 102장)
기도 :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속사람의 마음이 일치한 삶으로 부활하게 하옵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 도르가의 삶을 통해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겉과 속이 다른 바리새인의 외식을 꾸짖으셨습니다. 오늘 나의 삶에서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은 없는지 깊이 돌아봅니다. 제 자신의 연약함을 회개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속을 채워가게 하시고, 겉으로는 말씀의 삶을 살아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베드로는 죽어있는 다비다를 향해 무릎꿇어 다비자여 일어나시오 하고 기도하며 말하자 그여자늘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다비다의 병과 죽음은 죄로부터 온것임을 토론하는 제자들 예수님은 건강한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고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른러 온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죄을 지으면 병들기도하고 사망에 이르기도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부활의 예수님을 믿을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고쳐주시며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심바 되시는 예수님 내가 지은 모든 죄들을 낫낫이 아시는 예수님앞에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살지 아니하고 정직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거룩한 신부의 옷을 입는 삶이 되기를 날마다 나는 죽고 예수님만 증거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하며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