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내가 직접 불편하게 하는 것 / 이훈
내 눈으로 보고 내 머리로 생각하고 내 손발로 해보려는 것. 어쩌면 세상은, 지금 그걸 ‘불편'이라고 부르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불편'이란 ‘삶' 자체다. 그렇다면 ‘편리'란 ‘죽음'일지도 모른다.
이나가키 에미코, <<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32734143&start=slayer)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197.html
<한겨레 21>에서 이 작가를 처음 알았다. 한마디로 멋진 사람이다. 이 기후 위기 시대의 대안적인 삶-그는 “개인적 차원의 탈원전 계획”이라고 부른다-을 즐겁게 실천하고 있다. 대담과 함께 소개된 책 내용을 보자 생각과 행동이 일치해서 어떻게 사는지 알아 보고 싶게 만들었다. 이미 그의 책 세 권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는데 '밀리의 서재'에서 전자책으로 편하게 다 볼 수 있다.
저 대담에서 나온 멋진 대답을 한 대목 옮기고 위와 같은 생각을 다르게 말한 내 글을 덧붙인다.
―글 쓰는 일이 직업인데 책상도 없는 걸 보니 집에선 일을 안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일과 생활을 분리하는 이유가 있나요?
“집에서 계속 일하면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혼자 있게 되잖아요. 외롭고 재미도 없어서 카페에 가요. 같은 카페에 계속 있으니 거기서 만나는 사람이 많고 친구도 많이 생겼어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헌책방이 제 책장이고 카페가 사무실이고 목욕탕이 욕실이에요. 제 방은 작지만 동네 전체가 집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아주 큰 집에 사는 거죠.”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196.html
우리 안의 자연 / 이훈
우리는 감각 기관을 통해서 현실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육감은 이 구체적인 세계의 정보와 그 느낌을 전달해 주는 통로다. 그러므로 감각을 이용하여 외부와 소통하지 않으면 삶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이나 행복은 감각의 활용과 깊은 관계에 있다. 아름다운 풍경과 예술이 선물해 주는 감동을 생각하면 얼른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애인들의 포옹을 떠올려도 좋다. 존 레논이 노래했듯이 “사랑은 접촉이다(Love is touch).”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지 않으면 멀어지는 법이다. 이런 이치를 잘 알려 주는 말로 “Out of sight, out of mind.”가 있는데, 감각이 마음(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한눈에 보여 준다.
그런데 문명이 발전할수록 이 감각의 직접적인 소통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기계는 몸의 움직임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우리 몸과 감각 기관을 확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톱을 쓰면 굵은 나무를 잘 자를 수 있다. 전에는 직접 등에 지고 날라야 할 무거운 짐도 이제는 손가락 하나로 단추만 누르는 수고를 거치면 기계가 알아서 한다. 인공 지능이 등장하여 사람이 차를 직접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눈앞에 두고 있다.
놀이의 변화에도 이런 현상이 그대로 나타난다. 놀이야말로 몸과 직결되는 운동이다. 어떻게 보면 외부 세계와의 감각적인 소통을 즐겁게 연습하려고 놀이가 생겼다고 해도 좋을 만큼 온몸을 골고루 쓴다. 고무줄놀이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리는 물론이고 몸까지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 여름에 물가에서 날마다 놀다 보면 몸이 물에 뜰뿐더러 헤엄까지 치게 되는 신기한 경험도 하게 된다. 이 놀이의 되풀이가 없었다면 몸의 기관들이 역할을 제대로 하기가 불가능하고 따라서 사람 구실도 못 했을 것이다. 흔하디흔했던 제기차기라든지 줄넘기를 하면서 우리는 저절로 건강해지고 친구들과도 우정을 쌓았다.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영어 속담은 놀이의 기능을 한마디로 압축해 설명해 준다.
그런데 이제 이런 놀이를 주위에서 보기가 점점 더 힘들어져 버렸다. 공부하기 바빠서 같이 놀 동무가 없기도 하지만 혼자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놀이의 특징은 몸의 일부분만 쓰고, 현실 인간과의 생생한 교류나 어울림이 없어도 된다는 데 있다. 가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게임이 그 전형적인 예다. 몸은 편하게 가만히 있으면서 눈만 움직여도 되는 놀이도 있다. 좀 과장하면, 남이 노는 것을 보기만 한다. 시각 매체로 구경하는 스포츠가 그렇다. 그래도 텔레비전은 식구와 얘기를 나누면서 함께라도 보았다. 스마트폰은 이런 분위기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스마트폰은 일인용 장난감이자 놀이터며 애인이다. 심지어 친구나 애인과 만나고서도 이 만능 기계하고만 논다. 과거에도 이렇게 눈으로 즐기는 구경거리가 없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 운동회처럼 어디까지나 이례적이었고 그 현장감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놀이의 일상화는, 몸을 활기차게 움직여서 땀을 흘리고 현실 세계와 관계를 맺는 데 익숙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다. 우리 조상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스포츠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매체가 있다는 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요컨대, 문제는 삶이 편해지는 것과 비례해서 무언가 많이 잃어버린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자동차를 타기 때문에 우리 발은 땅과 직접적으로 맞닿지 않게 된다. 웬만한 길은 다 포장돼 있어, 걸으면서 흙이 지니고 있는 생명을 품고 키우는 힘을 맛보지 못한다. 어린 시절에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사람의 불안과 불만족은 이런 감각의 간접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에서도 오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 몸은 외부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자연 세계로부터 퇴각하고 소외되어 가고 있다. 당연히 감각도 싱싱하게 자랄 수 없다. 이러므로 축구 선수가 되고자 하는 아이가 아닌데도 이 운동을 학원에서 배우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감각의 간접화가, 뒤로 돌리기는 아예 불가능하다는 무력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대세가 되고, 그 해결 방법도 덩달아서 자연에 대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현실에서 감각의 직접적인 소통은 아주 소중하다. 그러므로, 좀 거창하게 말하면, 흙을 밟고 풀 냄새를 맡으며 우리 감각을 자연에 열어 걷는 일은 우리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산에 올랐을 때의 뿌듯함을 상상해 보자. 자동차로 짧은 시간에 멀리 가고, 에어컨이 있는 방에서 하는 일이 잘되면 효율성이 높아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겠지만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도 자꾸 물어 보아야 한다. 걷지 않고, 자연의 공기와 절연해서 잃어버리는 것을 생각하면 그 효율성이라든지 경제적인 효과는 사소한 것일지도 모른다. 돈도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닐까?
자연과 멀어짐으로써 우리 안의 자연마저도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되어 버렸다. 우리가 과도하게 건강을 걱정하여 약과 음식을 챙기는 것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게 된 결과에 반응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의 궁극적인 도달점인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죽음 자체는 그렇게 무섭거나 더러운 것일 수가 없다. 생명의 순환 과정에서 거쳐야 할 한 단계일 뿐이다. 옛날에 어른들이, 죽어서 입을 옷을 미리 준비하고 자기가 묻힐 곳을 정하고 틈나면 찾아가 눈에 익히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다. 삶에 뜻이 있다면 바로 이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부여하는 생물학적인 필연성, 다시 말하면 한 번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유한성과 일회성이야말로 삶을 진지하고 엄숙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종교도 이 필연성과 깊은 관계에 있다.
우리가 자연에 속하며, 따라서 자연과 직접적으로 교감해야 지극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우리의 존재 조건을 깊이 생각해야 할 때다.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 예를 들어 최신 의술에 기대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는 목숨을 연장하는 것은 겉보기와는 반대로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인지 모른다. 이런 걸 생각하다 보면, 바닷가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마구 해치며 들어선 건물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https://cafe.daum.net/ihun/jIQm/65
첫댓글 이나가키 에미코의 <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 다 읽었어요. 아주 재밌어요.
소비 문화에 물들어 편리만 추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입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고를 계기로 전기를 최소한 쓰겠다면서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전자렌지 등을 버리고 "개인적 차원의 탈원전 계획”을 즐겁게 실천합니다. 그 과정을 재밌게 얘기해 주는데 웬만한 모험기 못지않게 독자를 끌어당깁니다.
나머지 두 권도 바로 읽어야겠습니다. 태풍이 지나가자 무더위가 다시 오는데 저 책의 정신을 이어받아 불편해야 사는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아야겠습니다.
'밀리의 서재'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