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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지파(4) - 단 지파 / 창 49:16-18
이제 9월이 되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서늘합니다. 여름 무더위에 고생들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은 열두지파 중 단 지파에 대해 알아봅니다.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단지파라고 일부 기독교인 중에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단 중 영생교 창시자인 조희성은 우리 민족이 단 지파라고 말합니다. 또 일부 기독교인들 중에도 민족의 이동경로를 들어가면서 단 지파라고 말합니다. 창조과학을 말하는 학자들 중에도 우리 민족이 단 지파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아직 확실하게 규명된 정설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직 성경에 나오는 말씀으로만 단 지파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열두지파 강해 네 번째 시간입니다. 르우벤 지파, 시므온 지파, 유다 지파를 차례로 상고했고, 이들 지파의 선조 르우벤, 시므온, 유다는 레아의 아들들입니다. 장자인 르우벤은 장자의 자질을 가졌으나, 자기 정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장자권과 축복권을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둘째인 시므온은 자기 마음 관리를 하지 못하여, 폭력의 도구가 되어 축복은커녕,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모세의 축복을 받지 못한 유일한 지파였고, 가나안 정복 후 분배 받은 땅도 사막이었습니다. 셋째인 레위도 시므온과 같았지만, 후에 하나님께 헌신한 공로를 인정 받아, 제사장 지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열두 지파에 포함되지 못했고, 땅 분배도 받지 못했고, 한 곳에 모여 살지도 못하였습니다. 넷째인 유다는 형제 중에 찬송이 되었고, 규를 얻게 되었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나오게 되고, 메시야인 예수님이 나오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단은, 야곱의 다섯째 아들입니다. 다섯째 아들이지만, 중간에 레위가 빠졌으니까, 열두지파 강해로는 네 번째 시간입니다. 눈치 챘겠지만, 열두지파를 강해하는 순서의 기준을, 출생순으로 잡았습니다. 야곱의 축복기도도, 모세의 축복기도도, 보면 출생순은 아닙니다. 열두지파 강해 순서를, 임의로 잡을 수도 있지만, 굳이 출생순으로 잡은 것은, 무슨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각 지파의 기원을 알려주는, 창세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편해서 그렇습니다. 르우벤부터 유다까지 네 아들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 29장에 나옵니다. 창 29:31-35절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레아는 같은 야곱의 아내였지만, 라헬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랑받지 못하였습니다. 편애의 수혜자였던 야곱이, 편애의 피해자인 레아의 고통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걸 지켜보신 하나님은, 레아의 태를 열어주셨습니다. 대신 편애의 수혜자인 라헬의 태는, 잠시 닫아두셨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과, 아이를 낳는 것이 별개로 나타났습니다. 레아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를 연달아 낳았습니다. 축구로 말하면, 레아가 연달아 골을 넣어, 4:0으로 앞서가게 되었습니다. 라헬 입장에서는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남편의 마음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한테는 임신의 기미조차 없습니다. 지금으로 봐서는, 자기가 아들을 못 낳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남편이 언제까지 자기에게 마음을 주리라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라헬은 속이 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라헬은 애간장이 녹아내립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라헬은 시어머니 리브가를 닮아서, 머리가 잘 돌아갔습니다. 잘 돌아가는 머리에, 과감성까지 갖춰서,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1. 단 지파의 기원
창 30:1절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라헬은 심각한 얼굴로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언니에 대한 시기심이, 남편에 대한 투정으로 나타났습니다. 뭐 그럴 수 있습니다. 사실 아내한테 남편은 만만한 존재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좀 과하긴 했습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라헬이 얼굴에 핏발이 서릴 정도로 흥분하여 소리쳤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게 남편한테 할 소리입니까? 라헬은 이미 이성을 잃었고, 감정이 극도로 격앙되어 있습니다. 감정적인 말은, 상대의 감정을 자극하게 됩니다. 감정을 자극 받게 되면, 자연스럽게 감정적으로 대응하게 됩니다. 옳고 그름은 이성으로 판단하는데, 감정이 극도로 자극되면 이성이 마비돼 버립니다. 그럼 상대가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맞는 말로 들리지 않습니다. 잘난척하는 말로 들립니다. 나를 비난하는 말로, 고깝게 들립니다. 그때 한 마디 더했다가는,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라헬의 생각 없는 말에, 야곱도 그만 발끈하고 말았습니다. 30:2절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라헬의 말에, 야곱이 화낼 만도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도, 감정 조절을 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라헬 본인이 가장 힘들겠지만, 야곱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야곱도 자기의 첫사랑이자, 지금은 아내인 라헬이 낳은 아들을, 하루라도 빨리 안고 싶습니다. 그리고 레아는 아들을 넷이나 낳았으니, 라헬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헬을 위하는 마음이 더 컸고, 라헬의 방을 찾는 횟수도 더 많았습니다. 야곱도 자기 나름대로, 라헬을 각별히 배려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도 모르고,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고 감정을 박박 긁으니, 야곱도 톤이 올라갔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내가 하나님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고 목소리를 높인 것입니다. 2절을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2절 ‘야곱이 라헬에게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내가 하나님이라도 된단 말이오? 당신이 임신할 수 없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라헬은 지금까지, 야곱이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라헬은 자신의 속상한 마음을 남편에게 표현한다고 했지만, 표현의 강도가 선을 넘었던 모양입니다. 야곱도 그 정도의 투정을 받아들일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불꽃(스파크)이 파박 튀었지만, 다행히 불이 붙지는 않았습니다. 라헬이 얼른 목소리를 낮춘 덕분입니다. 30:3절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런 면에서, 라헬은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나름의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이 방법이 낯설어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선가 한 번 본 듯합니다. 맞습니다. 예전에 이와 판박이 사례가 있었습니다. 창 16:2절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사라가 한 번 썼던 방법입니다. 라헬이 사라의 일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알고 있다면 더 문제고, 모르고 있다면, 더욱 신기하긴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라헬의 태를 잠시 닫아두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 리 없는 라헬 입장이, 한편으로 이해가 되면서도, 꼭 그 방법이어야 했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결혼 후, 오랫동안 자식이 없기는, 이삭과 리브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른 방법을 썼습니다. 어떤 다른 방법이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창 25:21절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리브가는 기다렸고, 이삭은 기도했습니다. 문제는 리브가의 기다림이 결코 짧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몇 년이나 기다렸을 거 같습니까? 창 25:26절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이삭이 사십 세에 결혼했고, 쌍둥이를 낳을 때가 육십 세였습니다. 그럼 결혼 후 20년입니다. 결혼하고 20년을 기다리며 기도한 것입니다.
좀 양보를 해서, 당시 그런 풍습이 문제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보인 반응은 실망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30:4-5절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물론 야곱이 원해서 빌하와 동침한 것은 아닙니다. 얼굴에 핏줄이 설 정도로 흥분한 라헬의 청을, 야곱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족장인 야곱이 아버지 이삭처럼, 기도로 나아가지 않고, 아브라함처럼 아내의 요구를 따른 점은 아쉽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었는데,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본받기만 하면 됐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라헬은 야곱의 사랑을 받고, 그렇게 임신하고 싶어도 임신이 안 되는데, 빌하는 단 번에 임신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태어난 아들이 단입니다. 그런 거 보면 하나님의 섭리는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라헬은 빌하를 통해 아들을 얻고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30:6절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라헬이 하나님께 자기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를 했었던 모양입니다. 아니 자기에게 무슨 억울할 일이 있습니까? 억울할 걸로 치면, 레아가 더 억울할 것입니다.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할 게 아니라, 그냥 자기에게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의 태를 열어주옵소서. 하나님, 나에게도 아들을 주옵소서.” 간구 앞에 이상한 거 붙이면 안 됩니다. 진심을 담아 절실하게 간구하면 됩니다. 빌하를 통해서 낳은 아들을 품에 안은 라헬은 단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이름의 뜻이 ‘판단하다, 판결하다’입니다. 하나님이 억울한 처지에 있는 자에게, 공의로운 판단을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당장은 아닐지 몰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와 불의를 구별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제쳐두고, 자신이 정의의 사도가 되려고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2. 단에 대한 야곱의 축복
창 49:16-18절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야곱이 단에 대해 축복한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야곱은 그의 이름대로 축복하였습니다. 단 지파가 이스라엘의 심판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심판자란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함께 갖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땐, 공의로 무엇을 판단하여 올바르게 회복시킨다는 뜻이 되고,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땐 복수를 한다는 뜻이 됩니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자를 뒤로 떨어지게 한다는 표현을 볼 때, 부정적인 의미로 봐야 합니다. 단 지파에게는 호전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땅을 빨리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동하던 중에, 미가의 집에 있던 레위인을 빼앗아, 자기 지파의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평안하게 살고 있는 라이스 사람들을 쳐서, 그 땅에 거주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삿 18:30-31절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이스라엘 전체가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될 때, 단 지파가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유다 지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선두에 섰습니다. 하지만 단 지파는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는데 선두에 섰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됐을 때, 여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에 우상의 본부를 두 군데 선정하는데, 벧엘과 함께 단이 선정됩니다. 단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한 면도 있지만, 단이 우상숭배 친화적인 면도 배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 지파 중에 유명한 사람이 있긴 합니다. 바로 사사 삼손입니다. 삼손은 여느 다른 사사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긴 했지만, 그를 통해 이스라엘의 원수 블레셋을 심판했습니다. 삼손 역시 자기 약점 관리를 잘하지 못해서 문제가 되긴 했지만, 후에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회개한 후,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단에 대한 야곱의 축복과 삼손의 죽음이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18절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두 눈이 뽑힌 채 연자 맷돌을 돌리며 이렇게 기도했을 삼손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3. 단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
모세가 죽기 전에 단지파에 대해 축복한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신 33:22절 ‘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 간단합니다. 역시 그들을 사자의 새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전에 야곱은 뱀에 비유했는데, 모세는 사자의 새끼에 비유했습니다. 본래 뱀은 지혜의 동물로 여겨지고, 사자는 용맹과 힘의 상징입니다. 단 지파는 분명히 가진 것은 있습니다. 뱀 같은 지혜도 있고, 사자 같은 용맹과 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잘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지혜와 용맹과 힘이 사용될 수도 있지만, 죄를 위해 지혜와 용맹과 힘이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본적으로 은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나한테 은사가 있나? 내 은사가 뭐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먼저는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고, 다음은 개발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은사도, 발견하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발견했어도 개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기대만큼 쓰임 받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우리는 받은 은사를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주의 복음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자기 탐욕을 위해, 자기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자기를 위해 사용한다고,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자기 당대는 물론이고, 자기 후대까지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 7:5-8절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는 지파가 있습니다. 열두 지파가 나오는데, 단지파만 보이지 않습니다. 이를 근거로, 고대 교부들은 단 지파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오게 될 것을 예언한 거라고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꼭 적그리스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단 지파가 축복에서 제외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참 안타까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단 지파의 지리적 위치
수 19:40-48절 ‘일곱째로 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들의 기업의 지역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 사알랍빈과 아얄론과 이들라와, 엘론과 딤나와 에그론과, 엘드게와 깁브돈과 바알랏과, 여훗과 브네브락과 가드 림몬과, 메얄곤과 락곤과 욥바 맞은편 경계까지라. 그런데 단 자손의 경계는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셈과 싸워 그것을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하였음이라.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셈을 단이라 하였더라. 단 자손의 지파가 그에 딸린 가족대로 받은 기업은, 이 성읍들과 그들의 마을들이었더라.’
단 지파가 살았던 지리적 위치는 어디입니까? 단지파는 맨 마지막에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리고도 해안 평야 지대의 좋은 땅을 얻었습니다. 블레셋의 곡창지대요, 지중해의 암스테르담이라 불리는, 욥바의 옥토 지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기쁨도 잠깐이었습니다. 단 지파는 그 땅을 노리는 아모리 족속의 침공을 받아, 정착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삿 1:34절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래서 결국은 저 북쪽으로 올라가, 라이스를 쳐서 그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지파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더구나 다행인 것은, 의지의 대상이 곁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친형제 지파인 납달리 지파가 곁에 있었으니, 아마 큰 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단 지파가 호전성은 가졌지만, 그들이 차지한 땅은 평화로웠습니다. 아무 염려도 부족함도 없는 땅이었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힘이 있는데, 환경이 너무 평온합니다. 이상합니다. 그러면 꼭 사고가 납니다. 단 지파가 이스라엘 전체에 우상 숭배의 앞잡이가 됩니다. 지금도 단 지파가 차지했던 그 지역은, 아름다운 산들과 넘치는 수자원의 천국입니다. 중동 최대의 수자원을 가진 곳으로, 사시사철 물이 흘러넘치는 곳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가이사랴 빌립보가 그 지역입니다. 그 좋은 땅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지는 못할망정, 우상 숭배에 앞장섰으니, 그 결과는 비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 지파에 속한 현대 도시 중에 텔아비브가 있습니다. ‘봄의 언덕’이란 뜻의 텔아비브는, 욥바에서 시작된 현대 도시입니다. 이곳은 빌딩 숲으로 가득 메운 문화형 도시입니다. 그래서인지 유대인 동성연애자들의 집산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세속적인 도시가 텔아비브인 것입니다. 단 지파가 차지한 땅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살았기에, 우상 숭배를 하기 쉬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 다닐 때를 떠올리면, 맨 뒤에 앉은 애들이 뻘짓거리를 많이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초등학교(초등)에서 고등학교 때 학급 정원이 60명이 넘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 한 분이 그 많은 아이들을 관리할 수 없었습니다. 학교든 교회든 앞자리가 금자리라고 하는 것에, 저는 동의합니다. 간혹 등잔밑이 어둡다는 것을 이용하여, 교탁 바로 앞에서 컨닝하는 아이들이 있긴 해도, 공부하기에는 앞자리가 좋은 건 분명합니다. 예수 잘 믿는 것은 간단합니다. 주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 하면 됩니다. 공동체와 멀어지는 순간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를 가까이 하면 됩니다. 말씀과 기도가 내 삶에서 멀어져 있다면, 신앙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5. 단 지파의 상징 보석
출 28:15-21절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 테에 물릴지니,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출 28:30절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하라. 아론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
르우벤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이 석류석이고, 시므온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이 남보석이며, 유다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이 홍보석이라고 했습니다. 단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은, 넷째 줄 첫 번째에 있는 녹보석입니다. 녹보석을 다른 말로 녹주석이라고도 하는데, 정복자를 상징하며, 파괴자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녹보석은 전쟁을 해서 승리하게 되면, 승리한 병사들이 달고 다니던 보석이었다고 합니다. 정복자들이야 훈장처럼 기분 좋겠지만, 정복을 당한 사람들이 그 보석을 바라보면, 마음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녹보석은 별로 좋은 의미를 가진 보석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당히 대제사장의 가슴에 붙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 반드시 열두 보석이 달린 흉패를 가슴에 붙여야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명 중 단지파가 빠져있습니다. 단지파는 이런 운명을 가지고 있지만, 놀라운 사실은 이런 단지파도, 제사장의 가슴에 있는 보석 중에 하나로 빛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위나 지나온 과거로 보면, 축복받을 수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고, 보석처럼 가슴에 품고 다니신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대제사장 예수님이, 우리를 보석으로 품고 계신다는 것을 믿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보석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을 보석처럼 귀히 여겨야 합니다. 보석의 가치는 귀히 여길 때 빛을 발합니다. 스스로를 가치 있게 여길 때,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치 있는 것은,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보석의 가치는 희소성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희소성으로 따지면,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살면서 자신이 맘에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긴 자신을 맘에 들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이 잘못 했을 때는, 누군가 용서해주고 감춰줘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을 저지른 이가 살아납니다. ‘너는 행한대로 다 받아라’ 요즘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누구든지 다 죽습니다. 지상에는 떳떳한 인간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호해주고 변명해 주고 감싸주지 않으면, 우리는 진노의 자식이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기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법 앞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는 지성이나 학벌, 가문 같은 것으로 자기를 감싸고 있지만, 우리는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과거를 숨겨주시고, 우리 죄를 눈과 같이 씻겨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못본척 하셔서 희망을 주시고, 축복의 자녀로 세워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심장의 한 복판에는, 여러분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은 놀라운 영광을 받으실 것을 믿는 성도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단 지파를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단이 받은 땅은, 물이 많고 풍부하며 비옥한 땅입니다. 산이 울창하여 세계에서 제일 좋은 산림욕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은 그곳에 우상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단 지파가 계시록에서는 빠졌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 지파의 행위나 지나온 과거로 보면, 축복받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단지파도, 제사장의 가슴에 보석 중에 하나로 빛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대제사장 예수님이, 보혈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를 보석으로 품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보석이 된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자신을 보석처럼 귀히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