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중 ‘반야심경 입문’ 읽어
과학과 통하는 혜안으로 감탄
아내의 아픔 덜고자 절 찾다가
구인사서 관음정근 계기 만나
유교 집안에서 출생하여 40대 초반까지는 종교에 대해 무관심한 평범한 생활을 해왔다. 1960년대 일본 유학 중 지도교수로부터 ‘반야심경 입문(마쓰바라다이도松原泰道 저)’을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일본의 발전된 불교학 연구에도 시간에 쫓기는 여건 속에서 도저히 책 읽을 기회를 만들기 어려워 거의 읽지를 못하였다.
‘반야심경 입문’은 늘 마음 한 곳에 숙제처럼 남아있었다. 마침 명절 연휴가 됐고, 시간을 내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20세기 초에 발표한 상대성원리 가운데 하나인 ‘에너지와 물질(질량)의 등가성의 법칙’을 그대로 나타낸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구절에 이르러 부처님의 혜안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때부터 종교에 관심이 없었던 인생에 불교가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책에서는 겨우 20세기 초에서야 우주는 에너지와 파동의 흐름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이미 2500여년 전 부처님께서 그 진리를 설파하셨음이 소개되어 있었다. 과학적인 관점에서도 불교를 다시 생각하고 주지해야만 했다. 상대성원리를 조금 더 설명하자면 이렇다. 1g의 물질을 에너지로 바꾸면 약 2000t의 석탄이 보통 연소할 때 발생하는 에너지(열)에 필적하는데, 이는 물질(색)은 에너지(공)에 다름 아님이 입증된다.
하지만 이 같은 불교의 이치에 공감하면서도 신행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관련 서적을 곁에 두고 읽는 것이 불교 공부의 전부였다. 오랜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상에서 불교 서적을 읽는 것도 감지덕지였다. 바쁜 직장 생활이 계속되었기에 사찰을 찾는다거나 수행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의도하지 않게 불연이 삶에 쑥 들어왔다. 1977년경 아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마에 시달렸다. 협심증과 유사한 질환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겪어야했고, 여러 병원을 오가며 입원과 치료를 병행했지만 별다른 효험은 없었다. 어떻게든 아내의 질환을 낫게 하고 싶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무속적인 처방을 권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자연과학을 전공했던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거절했다. 좀 더 시설이 잘 갖춰진 병원을 찾고 또 찾았다. 그러던 중, 아내의 학교 동문 가운데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의 권유는 거절할 수 없었다. 절박한 심정이었다. 반신반의 상태로 부산 온천장 광명사에서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모든 게 생경했다. 사찰예절이 뭔지도 모르고 들어선 법당이었다. 여러 가지 예의도 전혀 모르고 생전 처음 불교식 예경과 수행을 시도하려고 했다. 어쩌겠는가. 하나하나 지도를 받았다. 낯선 만큼 모든 게 어색했다. 하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나름대로 수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때마침, 법사로 오신 덕수 스님과 면담을 하고 조언을 얻어 다른 활로를 찾아 나섰다. 구인사에 가기로 결심했다.
급하고 절박했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길은 멀고도 험했다. 1970년대 후반의 교통과 도로의 여건에서 쇠약한 환자의 수송은 택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에서 아내와 함께 아침 일찍 출발해서 저녁때가 되어서야 구인사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입방 절차를 마치고 5박6일의 기도를 시작하였다. 2일 정도가 경과하였다고 기억이 되는 시기였다. 신기한 현상을 겪게 되었다. 아내는 기력이 쇠약해서 평지에서조차 보행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환자인 아내가 하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적멸보궁에 다녀왔어요.” 적멸보궁은 구인사의 주된 수행공간에서 성인 걸음으로도 30분 정도 오르막길을 오르고 올라야 도착하는 전각이었다. 그런 곳에 다녀왔다는 아내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적멸보궁에 오르는 아내와 동행을 해보았다. 직접 눈으로 보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아내가 병약한 몸으로도 나보다 더 수월하게 다녀오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였다. 부처님의 가피를 몸소 체험하게 됨으로써 심적 부담이 말끔히 사라졌다. 관음정근에 몰입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기력 회복하고 생활하는 아내
주위서 사정 듣고 귀의하기도
체력적으로 힘든 일과이지만
하루 300분씩 관음정근 노력
평지에서도 보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아내가 보통 성인의 걸음으로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는 전각에 다녀왔다니….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그 순간 아내가 완쾌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심에 젖게 되었다. 여러 병원에서도 치료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이런 믿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되다니 그동안 쌓아온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의심할 수 없는 체험을 통하여 필연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부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도를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에 때로는 광명사에서, 평상시에는 집에서 기도를 하였다. 기력이 쇠약했던 아내는 점차 회복되어 갔다. 구인사에서 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3~4개월이 지나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 부부뿐만 아니었다. 주변 이웃들은 우리 부부가 구인사를 향할 때 사실상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면서 그간의 사정을 물었다.
숨길 이유는 없었다. 그동안의 경과를 들려주었더니 관음정근 주력수행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몇 사람은 이미 광명사와 구인사의 소문을 들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광명사의 신도가 되어 열성적으로 기도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았다.
수행의 인연이 지속되었다. 그러면서 1970년대 후반 천태종 부산지부 고문에 임명되었다. 이후 공직 생활에 관해서도 남대충 제2대 종정스님의 많은 은혜을 받고 무난히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12·12사건 등 나라 안팎이 뒤숭숭한 정국 불안으로 인해 한때 신앙생활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러다 정국이 안정됐고, 불기 2530(1986)년 다시 부산지부 고문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개인 사정으로 더 이상 광명사에 나가지 못하였다. 1년에 1번 정도 구인사에 다녀오는 정도였다. 시간이 흘러 퇴직한 후 불기 2542년(1998년)에는 다시 삼광사 신도회 고문에 임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광스럽게도 불기 2558년(2014년)에는 수계(受戒)를 받았다. 그 은혜에 조금이나마 부응하기 위해 수행을 나름대로 거듭해왔다.
그러던 중 서적에서 황벽(黃檗) 선사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읽고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 신령스럽고 늘 깨어있는 성품은 찾아 구할 수도 없고, 지혜로 완성할 수도, 언어로 해설할 수도, 경계로 이해할 수도, 공을 들여 도달할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불보살과 꿈틀거리는 벌레까지도 다 함께 갖추고 있는 열반의 성품이다.”
‘참나’는 책이나, 지식이나, 경전 등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수련에 의해서만 가능한 마음이 사라진 자리일 터다. 즉 3차원의 형상세계에서 벗어난 언어도단의 초월의식 자리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순수의식임을 깨닫고 체력이 닿는 대로 꾸준히 노력하고자 다짐해본다.
그렇다하더라도 이제는 나이만큼 신체도 이전과 같진 않다. 가부좌를 하고 좌복에 앉아 관음 정근을 하기에는 체력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하여 요즘은 정진의 법석에 동참하기보다는 집에서 매일 꾸준히 관음정근 수행을 이어가려고 한다. 가부좌는 일정 시간 이상 자세를 취하기 힘들게 되었지만 의자에 앉아서도 수행이 가능한 덕분이다.
의자에 앉아서 하더라도 수행 일과를 세워 스스로 실천을 거듭하고자 한다. 매일 오전 150분, 오후 150분으로 나누어 하루 300분씩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다. 또 매회 수행은 50분 정근 후 잠시 휴식을 하는 나름의 일정표를 지키며 수마나 사견에 빠지려는 상황을 철저하게 단속하려고 노력한다.
이상으로 그간의 사정과 수행의 동기 그리고 과정을 적어보았으나 수기라고 할 만한 내용도 없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말씀드리는 것은 혹시라도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분이 있다면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임을 밝혀 둔다. 반드시 수행한 만큼의 보람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전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