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역사 앞에 서다
2023년은 봉평교회 창립 80주년 맞이하는 해다. 때는 1943년 일제의 끝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해 3월 3일에 평창에서 양주조합 직원이던 이원진 씨가 봉평으로 이사했다. 그는 양주조합 직원들 10명을 중심으로 예배를 시작했다. 그 후 5월 8일 이원진 씨는 양조장 밑의 옛날 경비대실이었던 초가 8간을 임시장소로 정하고 평창교회 봉평 기도처소를 봉평교회라는 이름으로 예배를 시작함으로써 봉평교회가 태어나 이 지역의 구원의 방주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봉평교회 50년사」에 수록된 교회 창립 이야기다. 그렇게 교회 창립 80주년을 맞이하는 2023년에 봉평교회 새로운 역사를 말하는 옛 문헌이 발견되었다.
이는 「미감리회 제22회 조선연회의록」(1929년)이다. 당시 원주지방 신홍식 감리사의 보고 중 봉평교회 설립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평창구역 봉평이라는 장터에 그 동리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목사에게 편지하여서 교회 설립하여 주기를 요구함으로 목사가 새 기도회를 조직하여 지금 30여 인의 신자를 얻었습니다”(연회록 52쪽).
연회록은 전년도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회의록이다. 1929년 발행된 회의록이니까 봉평교회는 1928년에 세워진 것이다. 신홍식 감리사는 계속하여 강릉구역에 관해서 보고한다.
“강릉지방 삼척구역에 교가라 하는 장터에도 교회 설립하기를 희망함으로 담임자는 활동 중입니다. 두 지방 보통 인심으로 말하면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고 부르짖습니다. 따라서 각 교역자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활동하지만은 교회 심방에도 시간이 바쁜 까닭에 심히 어렵습니다. 마태 9장에서 말하심과 같이 추수할 것은 많으되 일꾼이 적다는 느낌이 많음으로 주께 기도합니다.”(연회록 52쪽).
이 보고에 의하면 봉평지역에는 이미 1928년에 장터 어느 집에서 교회가 세워졌고 30여 명이 예배하고 있었다. 잘 모이고 있었고 구역을 담당하는 목회자가 여기까지 돌봐야하기 때문에 매우 바빴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평창구역 안에는 평창교회(1910년), 안미교회(1911년), 대화교회(1925년)가 있었다. 여기에 1928년에 봉평교회가 세워졌으니 구역을 담당하는 구역장 목회자는 목회 영역이 넓어져서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봉평에 교회 설립을 요구하고 예배하던 30여 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막 예수님을 믿게 된 초신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이미 어디선가 예수를 믿고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봉평교회 주일학교를 다녔다는 강희철 씨(85세)는 1943년 교회 설립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고 있는 산 증인이다. 그에 의하면 당시 봉평에는 이북에서 내려와 봉평에 정착한 사람들이 많았다. 북한 지역이 너무나 추워서 남쪽으로 내려와 살기 좋은 곳을 찾던 중 봉평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미 봉평에 왔을 때는 예수님을 믿었었고 교회를 찾아 예배했던 사람들이었다.
1943년 상황이 그렇다면 1928년 봉평에 교회가 세워질 때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했는지는 모르지만 1903년과 1907년에 조선반도를 태풍처럼 휩쓸었던 성령대부흥의 결과였다는 것으로 보인다. 1903년 8월 남감리교의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 선교사의 원산 부흥운동과 1907년 평양부흥운동을 말한다. 이때 조선 반도에는 초대교회와 같이 성령의 강한 역사가 나타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으며 회개와 변화가 속출했다. 처첩을 거느리던 양반들, 술과 담배, 노름에 찌들던 사람들이 회개하여 변화되었다. 악한 귀신들이 떠나가며 온전한 가정을 만들었다. 초대교회에 임했던 성령님은 조선반도에 그대로 나타나 일제의 억압 속에서 절망의 나락에 빠뜨렸던 이 땅에 새로운 소망의 불씨를 타오르게 했다. 성령부흥운동은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켰다. 이 부흥 운동으로 인하여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전국 각처에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고, 그들이 머물던 그 자리에는 교회가 세워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28년 봉평에 세워진 교회 역시 20여 년 전에 이 부흥운동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의 노력으로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이 봉평에 정착하게 된 시기는 최소한 1928년 훨씬 이전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평창구역 내에는 평창교회는 평창군 북부 지역을 담당했고 안미교회는 남부 지역을 담당했다. 봉평은 평창군 남부에 위치하였으므로 북부에 있는 평창까지 가서 예배하기는 어려웠다. 당연히 평창지역 중앙에 위치하는 안미교회를 다녔을 것이다. 그러다가 1924년에 대화면 대화리에 대화교회가 설립되었다. 대화면의 중심지에 있는 대화교회는 자연히 안미교회보다 더 발전하게 되었다. 대화교회 설립은 봉평에서 예배하러 다니던 봉평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자극이 되었을 것이고 구역 담당 목회자에게 편지를 보내서 봉평에도 교회 설립을 요청하였다. 마침내 1928년에 봉평에 감리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고 그해 30여 명이 예배하게 된 것이다. 교회 설립 당시 30여 명의 교인이 있었다는 것은 봉평 지역에 기독교 역사가 그 전부터 있었으나 기록에 1928년으로만 남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봉평교회는 1943년에 설립되었다는 기존의 역사의 기록을 변경하여 우리의 앞선 세대가 이 지역에서 복음의 불빛을 발하기 위하여 수고했던 그 역사를 당연히 이어가야 한다. 이제 봉평교회는 80년 역사가 아니라 95년이 되는 새로운 역사에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이는 다 옛 기록에 의존한 것이라”(역대상 4:22).
1929년에 발행된 미감리회 제22회 조선연회록 원주지방 신홍식 감리사의 봉평교회 설립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