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재 몸속의 장승백 영혼은 잠시 고민스러웠다. 끝까지 버텨야 하나 순순히 제 의지로 나가 주어야 하나 갈등이었다. 제 스스로 나가면 박달재는 아무런 피해나 상처를 받지 않아도 된다. 만약 끝까지 버티다가 감찰대장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 나간다면 박달재는 영혼 이탈로 육체는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이 될 게다. 영혼이 없는 그의 육체는 결국은 사망처리 되어 질 것이다. 장승백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선생님 걱정 말고 저랑 함께 돌아가요. 선생님한테는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기로 공주님께서도 약속을 했어요. 여기 이렇게 특별 사면장도 가져 왔어요." 초선낭자가 차분하게 장승백의 영혼을 설득 했다. 그리고 감찰대장 옆에 서있던 고참 저승사자가 내어준 그의 특별 사면장을 보여줬다. "선생님과 저도 공주님의 은혜로 둘 다 사면을 받았어요. 누구한테도 죄를 묻지 않기로 약속했어요."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황녀궁에서 식구들이 모두 유아존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하주공주님도 왈츠 레슨을 기다리고... 우리 단체반 포메이션 팀들도 선생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요. 천상축제 때 공연도 나가야 되잖아요." 초선낭자의 조리 있는 설득에 장승백은 마음이 흔들렸다. 무엇보다 초선낭자랑 둘 다 용서받기로 죄가 사면되었다는 소리에 그의 마음은 안심이 되었다. 또한 그의 댄스반 제자들의 천상축제 때 시범 공연 나갈 것도 걱정이 되었다.
그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박달재의 몸속에서 빠져 나가기로. 만약 사면장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버텼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강제로 끌려가면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지옥으로 끌려가서 감금 될 테니까. "선생님 나오세요. 제가 모든 걸 책임질 테니까 걱정 마시고." 그녀는 다시 한 번 더 그를 안심 시켰다. 그리고 곁에 있는 감찰대장을 바라보며 눈짓을 했다. 감찰대장이 알아차리고 곧바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졸개 저승사자들더러 지시를 내렸다. "이놈들아 냉큼 물러 나거라. 얼른 나가지 않고 뭣들 하는 거야!"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 떨어지기 무섭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을 기세로 단숨에 졸개 저승사자들을 몰아붙였다. 졸개 저승사자들의 동작도 매우 재빨랐다. 그들의 대장 성질을 아는지라 말 떨어지기 무섭게 총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간 무슨 봉변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졸개 저승사자들이 우르르 학원 문을 빠져 나가서 저승 호송버스로 올라탔다. 조금이라도 늦장을 부렸다간 불같이 성질 급한 감찰대장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질까 봐서였다. 그리고 졸개 저승사자들을 뒤 쫓아서 감찰대장도 나갔다. 이제 초선낭자와 박달재 아니 장승백과 백장미 원장만 남았다.
그제야 박달재의 몸속에 있던 장승백의 영혼이 초선낭자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외형적으로는 박달재가 소파에서 일어나서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초선이 왔어?" 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초선낭자의 눈을 애써 피하려고 했다. "선생님 전 괜찮아요. 이제 황녀궁으로 돌아가세요. 하주공주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우리 댄스반 가족들도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초선낭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장승백을 바라보았다. 장승백 영혼이 활성화 되는 순간에 박달재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제 박달재의 육체는 장승백의 영혼이 지배하는 것이었다. "알겠어. 잠시만 시간을 좀 줘." 장승백은 아니 표면적으로 보이는 건 박달재가 소파에 앉아 있는 백장미 원장 쪽을 바라보며 초선낭자한테 말했다. 초선낭자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학원 사무실 문 바깥으로 자리를 피해 주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백장미 원장은 멀거니 박달재를 쳐다보았다. 그가 갑자기 그녀 옆 소파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혼자서 중얼거리는 모습을. 곧 이어서 일어나서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서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졸음이 심하게 오는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장승백의 영혼이 지배하는 박달재가 백장미 원장이 앉아 있는 소파에 다시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가볍게 안았다. 그런 그의 품 안으로 그녀가 자연스레 안겼다. 백장미 원장의 눈앞에는 살아생전과 똑 같은 장승백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아서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주었다. "우리 장미 아니 비너스 잘 있었지?" 그가 다정스레 그녀의 귓전에 속삭였다. "응 오빠. 요즘 자주 봐서 장미는 정말 기뻐." 그녀가 그의 품속으로 안기면서 속삭였다. 오빠의 품은 언제나 포근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비너스 이제 오빠 없어도 잘 살 수 있겠지? 댄스도 열심히 하고." 그가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싫어 오빠. 그런 말 하지 마. 내 곁에 있어줘 오빠. 장미 두고 다른 데 가지마. 장미랑 댄스도 하고 대회도 나가야 되잖아..." 그녀가 앙탈을 부리며 그의 가슴을 작은 손으로 토닥거렸다. "이제 오빠 없어도 다른 사람이랑 댄스하면 되잖아. 언제까지나 오빠가 장미 곁에 있을 수 없는 거 알잖아." 그가 달래듯 말했다. "싫어! 오빠 없으면 싫단 말야!" 그녀는 떼쓰는 어린애 마냥 상체를 흔들었다. "이제 글마랑 댄스 해 봐 오빠라 생각하고... 잘 맞을 거야." 장승백의 그 말에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지난번 가면무도회 때부터 뭔가 이상한 일이 연속적으로 생겼다. 다름 아닌 박달재의 댄스 변화였다. 가끔은 초보티를 내면서 버벅 거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예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일 때가 많았다. 어느 날은 완전히 프로 선수를 능가하는 기술로 그녀를 리드해 나가는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나처럼 잘 할거야. 내가 모든 걸 가르쳐 놨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가 다정스레 말했다. 그때 누군가 학원 홀에서 음악을 틀었다. 그들이 왈츠 출 때 좋아하는 곡 중의 하나였다. ~~~~~~~ [겨울 나그네] 심수봉 .....(중략)..... 사랑 이루지 못한채 하얀 겨울 속으로 으음~ 그 님 떠나 보내놓고 다시는 다시는 올 수 없는 그 겨울
....(중략).... 사랑 이루지 못한채 하얀 겨울 속으로 으음~ 그 님 떠나 보내놓고 다시는 다시는 갈 수 없는 그 시절 ~~~~~~ 심수봉의 [겨울 나그네]가 학원 홀 안에 깔리고 있었다. "오빠 가지마 제발. 내 곁에 있어줘." 꿈결에도 그녀는 이제 그와 헤어지면 두 번 다시 못 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건 장승백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제 오빠 없어도 잘 살 거야. 잘 있어, 안녕." 그리고는 장승백이 학원 사무실 문 바깥으로 나갔다.
문 앞에는 초선낭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학원 홀 안은 심수봉의 [겨울 나그네]가 더욱 애절하게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 장승백이 백장미 앞에서 나감과 동시에 두 사람은 잠에서 깬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백장미는 박달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상태였다. 인간세계는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었다. 장승백의 영혼과 초선낭자가 학원 바깥으로 나왔을 때 하늘에는 함박눈이 펑펑 휘날렸다. 그들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저승 호송버스에 올라탔다. 장승백은 맨 뒤쪽에 격리된 죄인 칸에 타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 기다리던 감찰대장의 안내로 자신의 특별 좌석으로 장승백과 초선낭자를 안내했다. 저승행 호송버스가 인간세계를 떠나서 저승으로 향해 출발했다. 장승백은 이제 영원히 다시는 백장미 곁으로 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났다. 다시는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겨울 나그네가 되어서... 그곳 장승백이 머무를 천상세계의 황녀궁은 겨울이 없었다. 언제나 꽃 피는 따뜻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