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시편은 3권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2권의 마지막 시편인 72편에서 정의로운 왕을 통한 통치의 풍요로움을 노래함으로 끝나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3권에서는 그러한 왕을 기다리며 겪게 되는 어려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73편에서 83편까지 아삽의 시가 이어지는 대부분 내용을 보면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73편이 그러한 일련의 시편 가운데 첫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되고 정의로운 왕을 기다리며 사는 삶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부당하게 우리를 대하시는 것 같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이 느껴지는 그러한 삶의 순간들을 주제로시편이 구성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부조리와 악과 고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그러한 삶 속에서 겪게 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고 생각해야 하는지 삶의 지혜에 관한 시이기 때문에 오늘 시편은 지혜시로 분류가 됩니다.
오늘 시편의 표제를 보시면 아삽의 시라고 합니다. 아삽은 성전에서 노래를 맡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이 아삽이라는 사람이 겪은 인생에 관한 시입니다.
1절을 을 보시면 아삽이 겪은 삶의 문제를 제시하기 전에 한 가지 전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문제는 무엇입니까? 바로악인의 잘 됨, 형통함 입니다. 시는 처음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하면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시 전체를 놓고 보면 이것은 쉬운 결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선하시다는 것은 익히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렇지 않은 것이 보이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시편을 짓게 된 동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선하시는 것은 확실 하지만 2절을 보시면 시인 자신은 거의 넘어질 뻔했고 미끄러질 뻔했다고 합니다. 지혜서에서 길은 주로 삶의 여정 혹은 신앙의 여정을의미합니다. 그 삶의 여정, 신앙의 여정에서 큰 걸림돌에 넘어질 뻔했고, 미끄러질 뻔했다고 하는 것은 큰 시험에 들거나 절망을 겪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착하고 선한 사람이 잘되고, 복을 받고 형통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시인이 겪은 인생의 길에서 관찰하게 되는 것은정반대입니다. 3절을 보시면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했다고 합니다. 악인이 잘되는 것을 보고 시인이 그것을 부러워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부러워하신 자신 때문에 넘어질 뻔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거의 넘어질 뻔했을까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악인들이잘 되어도 너무 잘되는 것입니다. 4부터 11절까지 보십시오. 원문에는 4절 앞에서는 ‘왜냐하면’라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4절을 보시면 죽을때도 편안하게 죽습니다. 죽을 때까지 비실비실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흔히 당하는 고난도, 재앙도 그들은 당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자식들도공부도 잘하고 속도 안 썩이고, 사업도 잘되고, 가정도 화목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겪게 되는 삶의 문제가 없습니다. 다 순탄합니다. 하다못해 사고도 한번안 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자신감이 넘쳐서 교만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지도 않습니다.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잘 나갑니다. 5절을 보시면 살도 찌고 소득은 기대보다 항상 많습니다.
10절과 11절은 그들의 영향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들의 영향이 워낙 커서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심판은무시합니다. 시인은 그들이 악인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12절을 보시면, 항상 평안합니다. 거짓 샬롬이지만 마치 참된 샬롬과 같이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재물도 더욱 늘어납니다. 이것이 시인이 첫번째로 넘어질 뻔한 이유입니다. 요약하면 악인들이 너무 잘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13절 이하를 보시면 시인이 넘어질 뻔한 두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마음을 깨끗히 하고 자신의 손을 깨끗하게 씻어 무죄하게 살아가는것에 대한 회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회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로우시고, 참으로 살아 계신다면, 정결한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악인들보다 더 탁월하게는 아니더라도 뭔가 더 좋은 것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됩니까? 14절을 보시면 종일 재난을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꾸지람을 듣고,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이거 너무 한 것아닙니까? 여러분 어떻습니까? 앞에서 악인과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는게 정상이겠지요. 그런데 2절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시인은 넘어질뻔 했지만, 미끄러질 뻔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15절과 16절을 보십시오. 그런 상황에서도 시인은 다행히 그들과 같이 교만하여 악인들과 같이 말하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부당한 상황 속에서 인내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대신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16절을 보시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생각하다는 것은 이해하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이해 해야 할지 고민 때문에 고통까지 느낄 정도였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것이지요. 답답하기도 하고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반되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이납득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17절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그들의 최후를 깨닫게 됩니다. 그들의 최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결국 그 악인들을 처리하신다는 것입니다. 18절에서 보면 ‘참으로’라고 하면서 강조합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악인들을 심판하십니다. 넘어질 뻔한 시인과 달리는 하나님은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고 파멸로 이끄십니다. 그렇게 강력해 보이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던 악인들이 순식간에 갑자기 전멸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을 보면 마치 꿈에서 깨면 그 꿈이 아무것도 아닌 허상에 불과하듯이 악인들의 형통함도 하나님께서 깨셔서 한번 활동하시면 악인들의 형통함은 마치 없었던 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21절부터는 다시 시인은 자신의 반성과 회개로 돌아갑니다. 잠시 나마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했던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마치 이성이 없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절을 보시면 내가 항상 주님과 함께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시인이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시인의 오른손을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임마누엘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이 회복의근거가 됩니다. 하나님께 의심과 불만을 품은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떠나지 않고, 오히려 예배를 통해서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경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주의 교훈으로 인도하시고, 영광으로 영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겪게 되는 수많은 어려움과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교훈하시고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25절에서 시인은 그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늘 위에 주님 밖에 없고, 땅에서는 주님 밖에 사모할 자가 없습니다. 하늘과 땅, 온 우주 속에서 의지하고 사랑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6절에서 볼 수 있듯이 다시 시인의 육체와 마음이 약해 질 바로 그 때에도 하나님은 시인의 반석과 영원한 분깃, 보상이 되십니다. 이 모든 것을 27절과 28절이 한 마디로 정리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나는 자는 망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는 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인 인생의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경험한 것을 전파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시인과 같이 참으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이런 어려운 일을 나에게만주시는가. 왜 저 사람은 예수도 안 믿는데 잘되는 것인가. 우리는 때로 넘어지게 만들 수 있는 수 많은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시편 73편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의 원망과 의심을 찬송과 기쁨으로 바꾸시고, 언제나 함께 하실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고,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끝까지 붙드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