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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은, SNS를 통해 일제 강점기 최악의 친일파를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1회는 무려 44.8%의 압도적인 득표를 보인 매국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 2위는 일제하 고문경찰로 악명 높은 노덕술이 차지했습니다. 그밖에도 상당히 많은 친일파 인사들이 이름을 올렸는데요. 이들은 왜 역사 속에 민족의 반역자, 친일파로 남게 되었을까요.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친일파 특집, 3부작 오늘 첫번째 시간입니다. 근대사를 다루면서 끊임없이 친일파 얘기를 해왔는데 그런데 막상 그들의 실체가 뭔지 제대로 다룬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오늘부터 세번에 걸쳐서 친일파를 집중 조명해 보겠습니다.
박재민/배우: 친일파를 집중 조명한다 라는 요 명제에 딱 걸 맞는 시원한 설문조사를 한 것 같애요. 1위는 우리가 예상한 대로 나왔지만은 제가 이름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이름이 있고 좀 의외로 다양한 친일파들이 거론되었습니다.
최원정: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일제 강점기 최악의 친일파는 누구인지 선정 이유까지 적어 달라는 댓글 이벤트를 진행해 봤는데, 총532명이 투표에 참여해 주셨습니다. 1위는 보셨다시피 압도적인 득표로 이완용이 차지했습니다. 선정 이유를 몇 개 보면은, 을사5적, 정미7적, 경술국치에 모두 포함되는 희대의 나쁜 놈, 팔아서는 안될 것을 팔았고, 누려서는 안될 것을 누린 자, 또 소위 지식인으로서 개인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해방후 민족 반역자들을 척결하지 못해서 지식인 중 이완용의 후예가 계속 나온다 그리고 비방용이라 차마 알려드릴 수 없는 댓글도 많았습니다.
심용환/역사작가: 감정이 바로 고양되었다는 것이죠,
류근/시인: 이완용은 거의 바리케이트에 가까워요, 감정이 탁 막혀버려서 그 다음부터는 아무 생각도 안납니다, 그냥 을사5적~
최원정: 그리고 녹화하기 전에 이 자리에 있는 패널들에게도 누가 최악의 친일파였느냐고 물어보았는데, 이윤석씨는 그냥 이완용~
이윤석/방송인: 넘을 수 없는 큰 산 아니에요?
박재민: 이완용은 다른 친일파들이 고마워할 정도예요, 가려지니까~
최원정: 류근 시인은 누구를 선정한 게 아니라 누구를 칭할 것 없이 비겁하게 일제에 빌붙어 악마처럼 동족을 괴롭혔던 앞잡이들 전부라고 하였습니다.
류근: 그냥 권력에 빌붙어서 동포를 괴롭혔던 그런 자들이 두고 두고 미워지는 거에요. 이를테면 우리 할아버지를 괴롭혔던 일본인 무슨 순사 이런 사람들~ 노덕술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죠.
최원정: 저희의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친일파를 선정했는데, 교수님이 아는 최악의 친일파는~?
한철호/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 나라가 망하기 전에 권력을 잡았던 사람인데, 오히려 부정부패, 정치 잘못해 가지고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고, 그 순간에 또 친일파로 전향해 가지고 나만 잘 살겠다고 은사금과 작위를 챙긴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000 이죠.
심용환: 고종이 총애했다는 바로 그 사람!
(고종의 총애, 부정부패, 친일행위로 작위 및 은사금을 수령한 사람(?) 잠시후 공개됩니다).
류근: 녹화 전에 우리는 작가한테 아주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거든요. 아시다시피 최근에 친일파 논쟁이 다시 한번 휘몰아치지 않았습니까. 그의 답변에 현재 우리 사회 인물로, 정치인들이죠. 그런 분들이 아주 많았다고~
최원정: 지금 현역 정치인의 이름이 친일파 리스트에 상당히 올라있다구요~
류근: 분명히 명시했거든요. 을사늑약, 경술국치, 일제 강점기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활동하고 있는 현역 정치인들을 뽑으신 분들이 아주 많았다는 겁니다. 재미있는 현상이죠. 살아있는 친일파를 뽑았다는 거니까
이윤석: 정치인만 있었는지 좀 조심스럽게 여쭈어 봅니다.
최원정: 연예인은 없었죠?!
이윤석: 오늘 주제가 친일파다 보니까 방송에 나갈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과거에 친일파관련 발언 때문에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어쨌거나 많은 분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렸기 때문에 다시 한번 사과를 드리고, 제 본심은 그런 건 아니었다 라는 걸 말씀 드리고 지나가야 할 것 같애서~
심용환: 정말 마음의 짐인가봐요. 저 만난지 한 달도 안됐을 때인데 저한테 자꾸 이 주제에 대해서 얘기하자 이제 내가 너한테 할 얘기가 있다면서요,
이윤석: 제가 많이 미숙했어요. 역사에 대해서 열심히 배워보겠습니다.
최원정: 우리 좋은 자료가 있어서, 들을 수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이에요. 친일인명사전이 3권에 걸쳐서 나왔는데~ 저도 사실 이거 집에 셋트가 하나 있어요. 이걸 처음 받았을 때 제가 제일 먼저 한 게 뭔지 아세요? 혹시 우리 할아버지가 혹시 친척이~ 그것부터 찾아보게 되더라구요. 너무 정말 떨리는 마음으로 이거 다 읽어 봤어요. 다행히 없었어요. 여기에 수록되고, 여기에 등재된 사람의 수가 모두 몇 명일 것 같애요?
이윤석: 책이 두껍네요. 한 900~1000 페이지 정도 되네요. (900~1000쪽 3권 총 3000여쪽).
류근: 거기 이름과 함께 행적이 나오는 거지요?
최원정: 네, 행적이 다 있어요. (친일인명사전-일제 강점기 일제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친일행위와 광복 전후의 행적을 수록한 사전).
심용환: 실제로 읽어보시면 정확하게 팩트로 행적만 딱~ 딱~ 딱~ 나와 있어요.
류근: 사전이니까~
심용환: 이 책이 나온 다음에 엄청난 소송이 제기 되었데요. 그렇지만 친일인명사전 관련 소송에 진 건 한 건도 없었데요. 모두 승소했어요.
최원정: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은 총 4398명입니다.
박재민: 4398명?
한철호: 적극적으로 친일한 자, 자발적으로 친일한 자, 또 관리들도 고위 친일관리 이렇게 한정을 했는데도 숫자가 그렇게 나왔습니다.
박재민: 그런데 4400명이 되는 거예요?
이윤석: 많아야 천명 정도로 생각했는데, 정말 많네요.
심용환: 우리나라 인구가 2천만이 넘으니까~사실 아무나 해서 넣은 건 아니지요.
이윤석: 엄선된 친일파들만 수록했데요~
류근: 일제기간이 35년이니까~
이윤석: 그리고 요즘 보면은 일본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좋아하는 분들이 꽤 있는데 소위 덕후라고 표현해야 하나요. 그런 분들을 친일파다 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덕후를 친일파 라고 부르면 안되는 것 아녜요?
최원정: 일본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을 우리는 지일파라고 하잖아요. 덕후나 지일파는 친일파는 아니지요.
류근: 우리가 말하는 건 친일 매국노를 말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한철호: 친일파는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 사이에 일본이 우리를 침략했을 때 거기에 같이 협력해 가지고 나라를 빼앗기게 하고 동포들에게 위해를 가한 인물들입니다.
이윤석: 국권을 상실케 했거나 혹은 동포들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들이죠?
한철호: 그렇죠. 일제 강점기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방해하거나 탄압한 사람들이에요. 시기가 한정되어야 합니다. 기간은 1880년대가 아니라 1905년 을사늑약부터 1945년 광복 전까지 기록이 한정되어 있어요.
심용환: 정확히 뭐라고 불러야 됩니까?
한철호: 정확하게는 친일 반민족행위자,
일동: 아~! 아~!
최원정: 친일파의 대명사인 이완용도 처음부터 친일파가 아니었다는 얘기던데요.
이윤석: 네? 날 때부터 친일파가 아니었어요?
심용환: 189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이완용은 정말 애국자였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나라를 살리겠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제국과 황제를 지키겠다 라는 정말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학부대신 이완용씨는 평일에 애국애민 하는 마음만 가지고 (중략) 백성을 구완하며 나라권리를 외국에 뺏기지 않도록 하려고 애를 쓰다가 미워하는 사람을 많이 장만하였다.-------독립신문 1897.9.4------
그 다음 기사가 또 있습니다.
-------------외국 공사가 이완용씨를 좋아하지 않아서 매우 불편한 일이 많이 있었으나 죽는 것을 무서워 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나라를 위하여 옳은 일을 기어이 할 모양이다----------독립신문 1897.11.11-----------
이윤석: 내가 아는 이완용과 정반대네요.---------나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다가 외국 공사의 미움을 받았다.-------------정반대예요. 이럴 수가??
박재민: 이게 지금 동명이인이거나 그런 건 아니죠?
심용환: 아니죠, 아니에요.
박재민: 요직에 있었던 이완용이, 이완용A, 이완용B~
류근: 근데 우리가 아는 이완용이라면 기자를 매수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심용환: 아, 처음부터~
한철호: 관련되는 기사들이 여기 나왔는데~ 이완용은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신문을 만드는 독립협회에 창립위원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회장도 하구요.
박재민: 지금 방송을 보고 계시는 분들이 너무 충격을 받을 것 같애요.
한철호: 왜 이렇게 최고의 애국자가 최악의 매국노로 변했느냐 그 과정과 원인, 의미들을 살펴야 될 것 같애요.
최원정: 먼저 그러면 이완용이 어떤 과정을 밟아서 성장했는지 차근 차근 볼게요. 영어를 그렇게 잘 했다면서요?
류근: 명색이 친일파의 거두인데 일본어를 못했데요. 이완용 하면 영어를 잘 하고 일본어를 전혀 못했데요 낯설죠?
이윤석: 계속 의외예요.
한철호: 그리고 우리가 서양국가 중에서는 미국(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체결)과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맺었으니까, 교관이라든가, 학교에서 가르칠 교사들을 초빙해 왔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게 육영공원입니다(육영공원-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후 1886년에 설립한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
최원정: 학교죠?
한철호: 그렇죠. 영어와 근대식 문물을 가르치는데~, 그 육영공원에 과거합격자로서 입학한 사람이 이완용입니다. 그가 학교에 입학한 이후에 남긴 글이 있어요. (一堂紀事-(1927년 발간)-이완용의 조카이자 비서였던 김명수가 펴낸 이완용 추모지), 보면 “외국과의 교통이 확장됨에 따라 서양과의 교제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일당기사中).
그러니까 세계대세를 읽은 거죠. 그래서 “예전의 학문을 고수하기 곤란해서 서양학문으로 전환하려고 한다. 당시에는 미국과의 교제가 요긴했기 때문에 육영공원에 입학했다.”(일당기사中).
류근: 정말 자발적으로 선택을 했다는 거 아네요? 정말 보통 선각자가 아니네요.
최원정: 기득권자인데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인다는 게 쉽지 않아요. 열린 사고를 갖고 있었네요.
박재민: 이완용은 잘 성장을 해가지고 발 빠른 대응력과 세계판단의 능력을 가지고 지도자로 잘 양성이 되었으면 좋았을텐데 바로 그 기로에서 다른 선택을 해 버리게 되네요.
류근: 그 이유가 궁금해요.
한철호: 이완용이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국제정세에 밝았던 것 같애요. 그래서 앞으로의 대세는 서양국가 중에서도 신흥미국이다. 미국이 영토도 넓으니까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을 것이다. 또 우리하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한테 해꼬지를 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우리의 부국강병이나 근대화를 추진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니까 미국에 대해서 알아야 되겠다. 대세를 따른 것이죠.
최원정: 친미파 관료고 미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서~
한철호: 그러니까 1887년에 중국이 하도 간섭을 하니까 우리가 중국의 속국이 아니다 자주 독립국이다. 그것을 대내외에 과시 할려고 처음으로 서양국가 중에 미국에 공사를 파견합니다. 전권공사를~ 가만히 보니까 영어도 좀 할 줄 알고 육영공원에 다녀서 국제정세도 달고 그래서 이완용이 주미대한제국 공사관 참찬관으로 발탁돼서 워싱턴에 부임하게 됩니다. 약2년 5개월 동안 이런 저런 문물을 경험하면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또 부국강병은 어떻게 하여야 되는가 하는 개혁에 대한 의지를 키웠던 것이죠.
심용환: 독립운동가의 인생을 보는 것 같네요~
류근: 아직 까지도 애국자 행보예요. 강대국 미국의 도움을 받아서 약소국인 대한제국의 어떤 살아남을 방도를 찾고 있는 애국행보 인정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심용환: 일제의 어떤 위협을 피해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했던 사건(1896년)을 주도했던 멤버 중에 한 사람이 이완용입니다. 이번에 러시아가 또 이권을 뜯을려고 하니까 독립협회를 주도적으로 움직여서 러시아의 간섭에 맞서 고종의 의사를 세워주는 행동을 이완용이 주도했습니다. 노련한 정치가~
이윤석: 아관파천을 주도했다고 하면 그야말로 일본하고 정반대의 입장에 있었다는 얘기예요. 그러면 어떻게 이랬던 사람이 180도 친일로 돌아설 수가 있었는지 이해가 안가요.
한철호: 이완용이 미국 다녀와서 부터는 친미가 기본입니다. 미국을 기본으로 삼고 청나라가 강했을 때는 친미반청, 그런데 인제 갑오개혁 때 경복궁 점령하고 일본이 권력을 잡으니까 친미반일 이렇게 가다가 아관파천에서 러시아가 관여를 하니까 친미반러가 되는 거죠. 친미는 기본적으로 가는 거죠. 그런 지조가 있었던 사람이죠.
심용환: 탁월한 외교관이네요.
한철호: 당시 대한제국의 자주를 방해했던 나라 중국, 일본, 러시아였는데 세 나라들이 가장 중요하게 우리의 독립과 자주를 침해했던 나라들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나라들을 배척하기 위해서는 외교상, 전략상 다른 나라를 끌어드릴 수 밖에 없다. 자극적으로 하면 가장 좋지만 우리 힘이 못미칠 때는 전략적으로 지금도 우리가 동맹관계를 맺듯이 기본에는 친미가 있는 거죠.
이윤석: 그런데 이완용이 어떻게 친일로 돌아섰나요?
한철호: 그런데 친미가 무너지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류근: 친미가 무너지게 된 계기가 있었을 것 아녜요
최원정: 어떤 사건에서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 같은데요.
한철호: 시기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종이 1897년에 대한제국이 되고 황제가 되잖아요. 처음에는 독립협회와 굉장히 좋은 관계를 맺었어요. 고종이 할 수 없는 일을 독립협회가 해주고 1898년 3월달에 이완용과 독립협회 주도로 러시아가 군사교관을 철수를 합니다. 그러면서 외세에 대한 세력균형이 어느 정도 나름대로 이루어졌어요. 그때부터 고종과 독립협회는 국내문제로 눈을 돌려서 서로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독립협회에서는 황권과 민권을 서로 합하면 힘이 강해질 수 있다는 입장이었는데, 고종은 권력은 하나인데 민권을 주게 되면 황권이 약해 지는 게 아니냐 서로 대립하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이완용을 비롯한 친미파 세력이 점차 밀리기 시작하면서 고종이 왕권강화, 황권강화에 찬성하는 측근 세력들을 주변에 두기 시작합니다.
최원정: 거기에서 밀리니까 이완용이 일본 쪽에 붙은 거네요.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극동의 패권을 둘러싼 이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비테 러시아 전권대사, T.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고무라 일본 전권대사), 결국 미국의 중재로 열린 포츠머스 회담에서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 지도보호조치를 인정한다. 러시아를 견제해온 영국도 두 차례(1902, 1905)에 걸친 영일동맹으로 일본에 힘을 실어준다. 일본의 극동 아시아 패권은 서양열강의 인정을 받으며 더욱 공고해 진다.
최원정: 이완용은 촉이 있었던 거 같애요. 미국이 아니라 내가 일본 쪽으로 가야 되겠다 라는 아주 본능적인 감각이 있었던 거 같애요.
이윤석: 눈치가 빠르니까 러시아는 전쟁에 졌겠다 미국이 가만히 있으니까 이제는 일본이 대세인가 보다 라는 판단을 한 게 아닌가.
한철호: 이완용이 현실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확한 판단을 하고 있는 거죠. 국제정세의 흐름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서 굉장히 밝은 것 같애요.
류근: 그런데 이게 지금까지 행보에 비하면 갑자기 드라마틱한 변화를 일으킨건데, 황제라는 나라와 민주를 위해서 고민한 게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권력획득에 유리하다면 무엇이든지 상관없다 고 생각했다는 게 아닙니까.
심용환: 결정적 순간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선택을 합니다. 이완용의 삶은 어느 지점에서 이제는 확실히 건너갔다 라고 느끼는 게 몇 개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이완용이 주도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입니다.
최원정: 이완용의 첫번째 선택은 바로 을시늑약 체결에 앞장선 것입니다.
류근: 을시늑약 체결 당시에 사실 모든 대신들이 체결에 주저하고 있을 때 결정적인 판을 바꾼 게 이완용이잖아요. 그때 이런 말을 했죠. 이것은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국력이 약한 우리가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진데, 더 이상 감정이 충돌하기 전에 원만히 타협하여 일본의 제의를 수용하고 우리 요구도 제기하여 체결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이게 갑자기 무슨 요설입니까?
한철호: 이완용은 그래서는 안되는데 대세가 확실해 지니까 어차피 나라는 빼앗길게 분명하고 우리가 무력으로, 정치력으로, 국민저항으로도 안되니까 이런 걸로 합리화를 시키는 거예요.
최원정: 왜 나라 빼앗기는 걸 기정사실화 하느냐구요?
한철호: 싸울 생각은 안하고 이럴 바에는 우선, 첫째 개인적인 야욕으로 어차피 누가 하더라도 나라는 빼앗길거니까 이참에 자기도 권력을 잡아보자 라는 것이 있는 거죠. 겉으로는 일본이 10을 달라는데 8을 주고 2라도 지켜내야지 괜히 우리가 앞장서서 믿보이지 말자, 이걸로 친일의 논리, 매국의 논리로 교묘하게 둔갑하는 거죠. 옹색한 변명이죠.
박재민: 그래서 제가 준비했습니다. 이완용의 친일을 얘기하면 끝이 없잖아요. 이완용의 친일행적을 적어 봤습니다.
류근: 이완용 친일행적, 글씨를 적게 쓴 게 이 정도입니다. 이 두루마리가 지금 194cm 입니다.
이윤석: 힘들면 제가 들고 있을게요.
박재민: 제가 몇 가지로 요약을 하면 헤이그 특사사건 후 고종 퇴위강요,
-1907년 순종즉위 후에 정미7조약 체결로 대한제국 내정권을 일제에 완전히 넘겼고, 무엇보다 우리 역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이완용을 3관용으로 만들어 준 사건이죠.
-1910년 통감 데라우치와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장본인이 바로 이완용입니다.
최원정: 그런데 이완용이 뭐라고 이윤석씨 까지 벌을 서야 합니까? (이윤석씨가 194cm 되는 이완용 친일행적 두루마리를 두 손으로 들고 서있다), 팔이 너무 아파요.
박재민: 이게 정말 이 정도예요. (이완용 행적 두루마리가 박재민씨 키보다 길다).
류근: 여기 한번 보세요. 한일강제합병 전에 이토 히로부미한테 바쳐진 시가 있는데 헌정시죠. 네번째 구절이 이렇습니다. “일본과 조선이 한 집을 이루니 천하가 봄이로다.” 이게 이완용을 위해 지은 거예요. 그러니까 진작부터 이완용은 말 그대로 합병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거죠.
심용환: 시를 다 가지고 왔습니다. 마지막 3절이 있습니다. 위 3절을 포함해서 4행시입니다.
甘雨初來 霑萬人 단비가 처음 내려 만 사람을 적셔주니
咸寧殿上 露華新 함녕전 위에 이슬 빛이 새롭구나
扶桑槿域 何論態 일본과 조선이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
兩地一家 天下春 두 땅이 한 집 되니 천하가 봄이로다.
최원정: 이완용이 쓴 거라고 하셨죠?
류근: 네, 이완용이 쓴 겁니다.
심용환: 첫번째 사람이 운을 딱 올린 거죠 (이토 히로부미에게)
박재민: 줄줄이 너희 읊어 봐 요런 거네요.
이윤석: 이게 이완용이 이토한테 바쳐진 시가 아니예요?
심용환: 맞아요.
이윤석: 그런데, 본인한테~ 본인이~
최원정: 본인이 처음 운을 떼고 알아서 밑에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한철호: 우아함을 떠는 거죠. 저희들 끼리~
심용환: 네가 원하는 걸 한번 표현해 봐 그렇게 된 거죠.
이윤석: 소위 말하는 놀고 있네~
류근: 놀고 있는 거예요.
이토 히로부미----甘露初來 霑萬人----단비가 처음 내려 만 사람을 적셔 주니
모리 타이라이----咸寧殿上 露華新----함녕전 위에 이슬 빛이 새롭구나
소네 아라스케----扶桑槿域 何論態-----일본과 조선이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
이완용------------兩地一家 天下春-----두 땅이 한 집 되니 천하가 봄이로다
박재민: 너무 열 받는게 그래도 조선 이름 자체가 이완용인데 어떻게 일본인 입장에서 시를 쓰고 있습니까.
류근: 한일강제합병 이전(1909년) 이라는게 중요하잖아요. 저 때에 이미~ 兩地一家 天下春 이라니~ 이게 두 땅이 한 집 되니 천하가 봄이로다. 이건 합병을 단정하고 쓴 거 잖아요.
한철호: 이완용은 현실 순응적이라고 했잖아요. 하나는 빠르고 정확한 건 좋은데 거기서 자기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이제 우선하기 시작한 거죠. 이때 그렇게 되면 한국은 더 이상 망해서 다른 쯕으로 극복하고 자주 독립이 될 가능성이 없는 거죠. 이 때 이미 망한 나라, 여기서 “나” 라도 챙기자.
이윤석: 그 말이 너무 슬프네요. 나라를 잃었으니 ‘나’ 라도 챙기자 그 말이 너무 슬프고 지금 이 시를 같이 쓴 사람들의 면면을 보니까 당시에 이완용이 친일 인사 중에서 얼마나 비중이 있었는지 여실히 증명이 되네요.
한철호: 그렇죠.
심용환: 1935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했던 조선공로자명감 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거기에 이완용의 평가가 뭐라고 나오느냐 동양의 인걸이다. (조선공로자명감(1935년)-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한 인물들을 수록한 책), 불세출의 위인이다.
류근: 불세출의 친일파 라는 맞는 말이네~
한철호: 이완용이 죽은 다음에 나온 일본 책에 의한 평가인데,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면서 온갖 것들을 수탈하고 억압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자기들이 한국을 근대화 시켜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또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게 한국을 병탐했던 이토를 비롯한 일본 지도자들의 염원이고 그것이 잘 시행되고 있다. 이완용도 그 대열에 같이 끼워 넣는 거지요.
최원정: 이토가 갖고 있었던 신념을 따른 거네요.
한철호: 이토 같은 경우도 한국이 약해서 망해가니까 주변의 국가들이 한국을 서로 침략하려고 그런다. 러시아도 찝쩍대지 중국도 찝쩍 대지 자기들 일본이 찝짝대는 것은 얘기하지 않으면서 이랬을 때 더군다나 러시아 같은 경우는 서양 세력인데 자기들이 황인종 으로써 서양세력인 백인종에 맞서서 한국을 지켜내고 동양평화를 지켜냈다. 따라서 한국은 우리 일본한테 감사해야 하고 이런 논리거든요. 이완용도 거기에 추종을 하는 것이고 그 핵심을 꿰뚫어 보는 분이 안중근 의사 같은 분이죠. 너희들이 한국민족을 이렇게 억압하고 나서 한국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어 놓고 무슨 동양 평화를 외치느냐 너희들의 본질은 침략이다. 한일양국의 진정한 평화 노력과 화합을 해치는 바로 이토 당신이 그래서 응징을 당해야 된다고 꿰뚫고 있는데 이완용은 그와 반대로 가는 거죠. 똑 같은 상황에서 그와 정반대의 길을 갔던 진짜 희생을 하고 독립운동을 하고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고난의 길을 갔던 분들과 대비해 보면 이 사람은 진짜 용서받지 못할 선택을 했죠. 아무리 미사여구로 자기를 변명할지라도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치사하고 더구나 지식인으로서 국가에 책임을 졌었던 고위관료로서 해야되지 말아야 될 일들을 뻔뻔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더 분노를 느낍니다.
류근: 이 당시 동양평화론 이란 교과서가 두권이 나옵니다. 이토의 동양평화론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이토의 동양평화론은 일본의 주도로 한국과 중국이 협력, 러시아 남하저지 일본이 패권의 중심이 된 동양평화의 주장), 근데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한-중-일 3국이 평화적으로 독립을 위해서 새로운 동양평화를 이룩하자 이런 건데 결이 다른 거예요. 그런데 이완용은 이토의 교과서를 치켜들었습니다.
한철호: 그 당시 1905년에서 10년 사이에 우리가 일본보다 힘이 약한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던 시절이지만, 소위 말하는 애국 계몽운동이 벌어지면서 사회진화론 같은 것도 받아 들입니다. (사회진화론-자연도태, 적자생존의 법칙을 사회발전 이론에 적용, 제국주의 팽창의 이론적 바탕이 됨), 그래서 우리가 실력양성, 계몽을 통해서 우리도 근대화의 초석을 놓자. 이런 운동이 있었어요. 이완용도 그런 한 축을 반영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그 논리를 폈던 사람들이 일본의 지배논리, 침략논리에 오히려 빠져들어가서 일본의 침략을,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논리를, 인정하고 합리화시켜주는 인사들도 많았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친일파들이 많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윤석: 그런데 이완용도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잖아요. 국내외의 정세를 충분히 파악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또 하물며 을사늑약을 겪어 봤기 때문에 일본의 속내가 시커멓구나 하는걸 알아챘을 거예요.
한철호: 당연한 거죠.
이윤석: 그런데 아까 시를 보니까 강제병합 이전에 이미 하나가 되기로 꿈꾸고 있었고~ 또 이토의 동양평화론을 끝까지 추종을 했단 말예요. 이거는 본인의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해서 또 합리화하기 위한 궤변이라고 의심이 들 수 밖에 없어요.
박재민: 그런데 이완용에 가려져서 을사늑약에 찬성했던 다른 사람들도 저희가 살펴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윤석: 그러니까 처음부터 동의를 한 사람들이 있어요.-박제순,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이렇게 다섯명은 을사오적이다 얘기하고 처음에는 반대를 했지만 나중에 찬성을 한 이하영을 추가하여 을사육적이다 라고 하지요.
박재민: (이윤석을 향하여) 아, 진짜 존경합니다.
심용환: 을사조약에 사인했던 사람, 그 당시 외부대신 박제순입니다. 아주 악명 높은, 동학군 토벌로 악명 떨친 인물입니다.
류근: 동학농민혁명 때 부터 그 파랑새, 녹두 꽃이란 노래가 여러가지 버전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박으로 너를 치리”에 박이 박제순이라는 설이 있어요. 오죽 했으면 이런 노래까지 나왔겠어요.
이윤석: 박으로 동학군을 친다 라는~
심용환: 경술국치, 1910.8.22에 조선 왕조가 사라지게 되는 그 자리에서도 바로 이 사람이 있었습니다. 박제순, 을사오적인 동시에 경술국적,
한철호: 가장 극렬하게 반대했던 한규설 (을사늑약 당시 참정대신)과 함께 도장을 찍지 않으면 조약이 체결되지 않는 것 아니냐 그래서 한규설과 함께 그 전에 도장을 갖고 있으면 빼앗겨서 강제로 찍게 될지 모르니까 연못에 던져버리자 라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 실행을 못했죠. 박제순도 그때 한규설 처럼 야! 끝까지 못찍겠다 라고 했어야지 되는데, 그래서 나중에 한규설이 한테도 혼 많이 났다 라고, 너는 같이 약속을 하고서 끝까지 반대하지 못했느냐,
최원정: 또 누가 있죠?
이윤석: 권중현 (을사늑약 당시 농상공부 대신), (을사5적-이완용, 박제순, 권중현, 이지용, 이근택),
한철호: 이지용 (을사늑약 당시 내부대신), 같은 경우는, 흥선대원군의 형이 흥인군인데, 흥인군의 손자입니다. 왕족으로서 나름대로 최고의 지위와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인데 이런 걸 보면 너무 혹하고 넘어가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찰싹 달라붙어서, 이지용 같은 경우는 나중에 일본 공사관으부터 거금 만원을 받아서 왕궁 내부의 비밀들을 일본 공사관에 넘겨주는 역할을 했어요.
이윤석: 왕족이요? 만원 받고?
최원정: 첩자 노릇을 했네요.
박재민: 진짜 돈과 지위와 힘을 다 가지고 있었는데 명예를 갖고 있지 못했네요.
심용환: 저는 개인적으로 이근택 (을사늑약 당시 군부대신), 이 사람의 에피소드가 좀 인상적인데, 이 사람은 원래 양반이 아니었어요. 양반이 아니고, 미천한 신분 출신인데, 그의 인생을 바꾼 키워드가 있습니다. 키워드가 생선, 먹는 것 물고기,
최원정: 생선 장수로 갑부가 됐구나.
이윤석: 회를 잘 떴나? 일본인에게 진상?
심용환: 임오군란 (1882년) 때 명성왕후가 피난을 갔잖아요. 도망을 오니까 명성왕후가 생선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들은 거야. 그래서 그 상황에서 매일 매일 빠짐없이 신선한 생선을 구해다가 빠짐 없이 갔다 바친 거야.
류근: 내륙에서 생선 구하기가 쉽지 않지요~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심용환: 구해 주니까 고마웠죠, 명성왕후가 화려하게 컴백할 때에 같이 가 남행선전관 (1883년)으로 임명했데요.
한철호: 와이로 라는 말이 떠 올라요. 와이로는 일본 말로 뇌물이라는 뜻이지만 또 우리 말로 와이로가 있어요. 그게 고려시대 때 대문호였던 이규보가 즐겨 썼었던 말입니다. 그러니까 蛙가 개구리 와자예요. 利자가 이롭게 할 때 이자이고, 鷺자는 백로 로자예요. 꾀꼬리 하고 까마귀가 노래 시합을 하는데, 까마귀가 노래연습도 안하고 맨날 백로한테 백로가 좋아하는 개구리를 갔다 바치는 거예요.
일동: (웃음) 와~!
한철호: 그래서 막상 시합 날이 다가 왔는데, 꾀꼬리가 아무리 랄~랄~ 랄~ 노래를 잘 해도 심판관인 백로는 까마귀 손을 들어 준 거예요. 그래서 이규보가 자기 대문 앞에다가 내 평생 개구리가 없어서 출세를 못했다 (이근택의 개구리는 생선),
박재민: 이근택 이란 인물이 명성왕후의 마음을 샀는데 그럼 이근택은 명성왕후가 피살된 이후에는 어떻게 자리를 보전했는지?
한철호: 명성왕후가 살해당 할 당시 피묻은 비단 옷(허리띠)이 있었어요. 이근택이 그걸 일본인에게 거금 6만냥을 주고 삽니다. 사서 그걸 고종한테 바칩니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야~ 이거 이근택이 역시 네가 충신이구나!
이윤석: 그야말로 처세술의 달인이다. 고종이 퇴위하고 나서는 또 다른 쪽으로 붙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한철호: 그렇습니다. 또 붙은 정도가 아니라 이 사람이 이토에게 의붓 양아들 노릇을 해요.
최원정: 전형적인 간신 모리배다.
류근: 진짜 비린내를 잘 맞네요. 생선 비린내, 피 비린내,
한철호: 처음으로 명성 왕후한테 붙어서 출세하고 고종한테 붙었다가 출세한 거지요.
이윤석: 출세를 위한 근근한 선택들, 이근택.
류근: 근면한 선택의 가장 나쁜 예~
심용환: 오죽하면 무슨 얘기까지 있느냐 하면, 그 집(이근택) 노비들이 주인을 경멸해 가지고 가출했다는 소문까지 있어요. 해도 너무 한다.
류근: 이 꼴인지 저 꼴인지 노비도 부끄러워~
이윤석: 노비들이 살아 있네~
최원정: 이번에 이완용의 두번째 선택, 3.1운동 경고문 발표,
심용환: 1919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3.1운동이 일어나잖아요. 3.1운동 하면 느낌이 어떻습니까?
이윤석: 가슴이 뜨겁지요.
심용환: 만세, 태극기, 대부분의 우리 사람들은 민중들과 함께 독립을 외치는데, 이완용은 3.1운동 후 비난 경고문을 발표합니다. 경고문을 한번 쓴게 아니고 세 차례에 걸쳐서 썼는데 대강 내용을 요약해 드리면~ 한번 썼으면 압력에 밀려서 썼겠거니 보는데 아주 적극적으로 논조가 간단히 정리해서 볼게요. 1차 경고(매일신보 1919.4.5) 때는 3.1운동은 불순한 세력이 주동한 것이다. 너희의 처지는 변하지 않으니 포기하는게 현명하다. 2차 (매일신보 1919.4.9) 때는 너희들이 다칠까봐 경고하는 것이다. 내가 매국노이긴 하지만 다 너희들을 위해서이다.
박재민: 처음에 쎄게 나가다가 두번째는 약간 회유를 하네요.
심용환: 3차(매일신보 1919.5.30)는 조금 깁니다. 우리는 힘이 없으니 일본의 덕을 보는게 맞다. 3.1운동으로 뭔가 바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라 그것이 조선을 위한 길이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포기해! 안돼! 실패할 거야! 아무리 해도 안돼! 너희들 망해! 그러니까 꿈도 꾸지마 딱 이런 걸로 다 글을 쓰는 거죠.
최원정: 그런데 교묘하게 이 경고문이 무슨 불순세력 나오고 학생들 공부 열심히 하고 맡은 일 열심히 하고~~ 현대사회에 나오는 무슨 경고문 이랑 비슷해요, 교수님,
한철호: 누가 떠 오르죠?
심용환: 학생들은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본업에 충실할 것을,
박재민: 한 때 독립협회 회장이었던 그 모습은 인제 온데 간데 없어지고 딴 사람이네요.
류근: 대놓고 얘기 하잖아요. 내가 매국노지만~
이윤석: 내가 희생한 거야 너희들 위해서~
한철호: 그래도 자기가 매국노 라는 건 알고 있네~ 결국은 이완용도 정치를 해 본 사람이니까 나도 옛날에 해봤는데 안되더라 그러니 나서서 모나게 정맞지 말고 오히려 국민을 위한 척하며, 자기의 잘못된 경험을 일반화시켜서 자기 면죄를 받고 오히려 합리화 시킬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지식인들이 더 나쁘고 더 비판을 받아요. 모르고 한 행동은 몰랐으니까 용서 받을 수 있는데 알면서도 저지른 잘못은 더 나쁜데 이완용이 아주 표본이고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원정: 뭔가 궤변으로 자꾸 말을 바꾸잖아요. 변신을 하고 변신을 하고 이런 사람들이 한두명이아니라는게 문제죠. 또 어떤 사람이 있어요.
한철호: 이완용과 쌍벽을 이뤘다고 하는 송병준이가 있습니다.
심용환: 쌍벽 맞죠?
한철호: 일본이 그걸 잘 이용하잖아요. 이완용은 나름대로 양반출신이고 송병준은 서자 출신인데 둘이서 일본을 향한 충성경쟁, 그야말로 매국경쟁이죠. 어차피 나라는 망하는데 이 과정에서 자기가 주도권을 장악하겠다 그런데 일본이 그걸 잘 알고 송병준 하고 이완용을 서로 경쟁을 시키고 견제도 하게 만들고 일본을 향한 충성심을 자아내게 만들고 여기에 둘 다 넘어가죠.
최원정: 송병준은 일진회의 수장이잖아요.
한철호: 그랬죠. 일진회도 처음에는 계몽운동단체로 시작됐어요. 1904년, 5년을 전후로 해서 실력을 양성하게 된다. 그래서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시대적으로 개혁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없다. 거기서 출발을 하죠. 그런데 일진회가 송병준이 장악하면서 을사늑약을 전후로 해서 인제는 친일을 위한 일진회가 돼버리는 거죠.
이윤석: 처음에는 민중을 위한 정치개혁을 표방하는 요즘으로 치면 정당 같은 조직이었죠.
한철호: 러일전쟁이 벌어지면서 송병준이 일본어 통역관으로 활약을 하게 되고 또 그 뒤에 일본에 가 있으면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일본 고위관료들 하고 관련을 맺으면서 한국은 더 이상 을사늑약 이후에는 가망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한국 황제를 폐하고 한국을 일본에 합방시키는 것이 한국을 위해서는 좋다 라는 이런 궤변으로 나오죠. 가장 과격하게 고종을 폐위시켜야 된다고,
심용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은 체결될 건데 체결되기 10여일 전에 일본으로 외교권의 이양을 주장하는 보호청원선언서를 먼저 발표합니다. 잽싸게 빨리 좀 해 주세요. 뭔가 내가 큰 공을 세웠다고 티내고 싶은 거죠. 1907년 6월달에 그 유명한 헤이그 밀사 사건 그때도 의병이 막 일어나잖아요. 의병이 일어나니까 자위단을 조직해서 의병탄압에 앞장서기도 합니다.
박재민: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로 송병준은 고종에게 자결을 하라 그리고 이제 남은 방법은 일본 천황 폐하에게 가서 사과를 하던지 대한문 앞에 나가서 하세가와 조선주차군 사령관에게 사과하는 방법 밖에 없다 라고 얘기를 했던 사람입니다.
심용환: 나중에 가면 저는 개인적으로 이완용 보다 한 수 위라고 느끼는게 이완용은 여기 이렇게 편지를 세번 썼잖아요. 송병준은 3.1운동 터지니까 일본에 가서 일본 고위 정치인들 만나서 나를 정무총감으로 써라 까지라고 해서 제가 친일인명사전을 읽다가 정말 친일도 창의적으로 하는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최원정: 교수님께서 사진을 하나 준비하셨다고 해서 이걸 보고 친일파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요.
한철호: 이완용한테 모든 걸 다 뒤집어 씌워서 진짜 망국의 책임이 누구한테 있느냐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거론 조차 되지 않고 거저 면죄부를 받는 형식이 되고 있는데요. 이게 한일합방 기념사진인데요. (일본에서 만든 합성사진), 대외적으로는 한국을 침략한 게 아니라 동등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기념사진이라고 해 놨어요. 맨 위에는 메이지 일왕이 있죠. 맨 왼쪽에는 이미 안중근 의사에 의해서 암살당했던 이토가 있구요. 그 옆이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 옆이 가쓰라, 오른 쪽으로는 순종 고종 그 옆이 누굴까요?
이윤석: 이완용?
최원정: 이완용은 여기 아래에 있어요. 이완용 보다 상석에 있는데~
한철호: 여기가 박제순, 권중현, 이근택의 동생 이근상, 그리고 을사6적이라 했던 이하영,
최원정: 고종 옆이 누굽니까? 교수님이 제일 싫어한다는 최악의 친일파?
한철호: 맞습니다. 민영준 입니다.
류근: 민씨 일가가 한 사람은 나와야 해요.
박재민: 그 정도로 위에 있었구나.
한철호: 그런데 민영준은 친일파 할 때 거론은 되도 이완용에 밀리는 거죠. 이게 민영준이 하도 악명이 높으니까 자기 이름 끝자 준을 휘로 바꾸죠.
류근: 반전~반전~
이윤석: 민영준=민영휘,
류근: 그 유명한 민영휘가 민영준 이었다는 거예요?
최원정: 민영준은 어떤 인물입니까?
한철호: 민영준은 평양감사 (1887~1889년) 하면서 고종에게 뇌물을 갔다 바쳐서 출세해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땐 권력을 잡고 자기 권력을 위해 청국에 붙은 거죠. 그래서 고종도 그렇지만 민영준은 동학민을 진압하기 위해서 청국군을 끌어들이는데 앞장 섰던 사람이에요.
심용환: 당시 조정 분위기를 보면 다른 신하들은 좋게 해결해야 된다고 하는데 민영준이 혼자 막 찍어 눌러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처참하게 주장한 바로 장본인이에요.
한철호: 그 당시 우리나라에 와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이 위안스카이(원세개)인데 원세개도 이 민영준이 아주 나쁘다 라는 걸 알아요. 위안스카이의 보고서에도 나옵니다. 이건 진짜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자로 조선 사람들이 다 싫어한다. 민씨들은 처음에는 청나라를 끌어들였지만 원세개가 하두 고종을 간섭하니까 고종하고 명성왕후는 반청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 민씨 척족 중에서도 권력유지를 위해 유일하게 민병준은 원세개 한테 달라붙었다. 이렇게 친청 민족 반역자 였는데 나중에는 어디에 서 있었을까. 나라가 망한 상태에서는 또 일본에 달라붙어서 친일파로 돌아서서 작위 와 은사금을 받았고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 최고의 갑부였습니다.
최원정: 갑부였어요?
한철호: 최고 갑부였어요. 1925년에 이완용의 재산이 약 300만원 정도 였다고 했는데 민영준 재산은 얼마 정도 됐을 것 같습니까?
박재민: 천만원?
이윤석: 이완용 보다 많을까~
심용환: 비교가 안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한철호: 6000만원~ 이완용의 재산 20배 입니다. (현재가치 약1조 2천억원).
최원정: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렇게 부를 축적할 수 없잖아요, 사실. 어떻게 해서 백성들 수탈해서 그렇게 했겠죠.
한철호: 나라 망하기 전부터 계속 일삼은 부정부패,
최원정: 어떻게 돈을 모았어요?
한철호: 마다리가 자루의 사투리인데~
(민 마다리의 탄생-민영준의 평양감사 시절) 연기
백성/박재민役: 이거 잘 좀 봐주시라구요. 전 재산 다 끌어왔습니다.
평양감사/이윤석役: 어디 한번 봅시다 (자루 위에 껑충 올라타다) 아니 이거 질소과자도 아니고, 공기 밖에 없는데, 이런 건 못받아요. 이 소리가 아니야~ 성의가 부족해요.
백성: (돈 자루에다 더 넣는다) 잘 좀 봐 주시라구요, 제발.
평안감사: (자루를 들어올리면서) 이 소리야, 성의를 봐서 받아주겠소 이 정도면, 내가 마다할 리 없지~
최원정: 발로 밟아서 헐거우면 돈을 더 넣어라 이런 식으로 수탈을 한 거군요.
한철호: 민영준이 평양감사를 할 때 아주 교묘하게 부자들을 뒷조사를 다 해가지고 내가 감투를 주겠다 매관을 하는 거죠. 가마니에다 돈을 딱 채워가지고 오면 (과장은 됐지만) 하인들이 이렇게 발로 밟아 본 답니다. 직접 밟아서 들어가면 너 이거 꽉 안채워왔네~
최원정: 자루에다가 돈을 거둬서~
이윤석: 그렇게 해서 6천을~
한철호: 그런 것도 쌓이고, 또 일제 시대 때도 쌓이고~ 부동산 뭐에 투자해 가지고~
심용환: 민영준이를 고종과 명성왕후가 그렇게 이뻐했다고 합니다.
류근: 위안스카이 같은 나쁜 놈이 나쁘다고 했다면 정말 나쁜 놈이에요. 그리고 이완용을 미워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나라를 팔아서 만든 돈으로 땅을 사잖아요. 땅 투기를 한다고, 민영준(휘) 역시 그때 만든 돈으로 땅을 산다구요. 부동산 투기의 원조들이에요! 사실은 한 글자 차이로 또 한 명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 이름, 같은 집안의 애국자가 있습니다. 민영환 이라는 사람,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해서 자결한 사람, 이런 분도 계시지 않습니까. 정말 정반대의 삶을 산 거죠.
한철호: 오늘날도 그렇지만 지도자들이 잘못을 할 수도 있어요. 그 잘못에 대한 반성도 철저하게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에 대한 반성은 전혀 하지 않고 책임은 오히려 딴 사람한테 전가해요. 친일파를 변명할려는 게 아니라,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나라가 망하겠끔 그런 구조와 상태를 만들어 놓은 사람도 있었거든요. 그전에 나라가 망하겠끔 이렇게 됐던 내적인 반성은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백년이 지났으니까 일본 비판하는 것은 기본이고 더 철저히 내적인 비판도 철저히 해야 된다.
심용환: 친일파가 되는 과정들은 다들 제 각각인 거 같애요. 민족에 대한 너무나 답답함에서 오는 포기, 아예 도저히 안된다 라는 사람들이 있었고, 한편에서는 일본과 좀 잘해보면 뭔가 우리의 기회를 마련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던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여한 이유를 다 쌓아놓더라도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어찌 됐건 나 출세와 개인의 영달을 다른 어떤 것 보다도 탐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개인의 욕망에 충실했다는 건 분명해서 그것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최원정: (일본이 만든 사진 대표 친일파들이 한데 모인 사진 속에서) 우리가 아까 계속 얘기한 이완용이 여기 있고 민영휘가 있고 그리고 고종과 순종이 사진에 나란히 있다는 게 이상해요. 왜 우리의 왕들을 이 자리에 올려놨는지~?
한철호: 일본이 대외적으로 한국과 일본이 평화로운 조약을 맺고 합의에 의해서 한 나라가 되었다. 봐라 순종과 고종도 기꺼이 다들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일본 황제한테 갔다가 받치지 않았냐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죠. 그리고 친일파들이 특히 이완용이 내세운 논리였지만 너희들이 원할려고 했던 것은 황실이고 황제권 이니까 거기에 대해서 만큼은 일본이 보장해 주겠다. 너희들이 그거 할려고 했는데 러시아, 다른 외세가 와서 불안해서 너희들은 그걸 못지킨다. 일본이 지켜 주겠다. 그리고 너희들은 원하는 걸 얻지 않았느냐 궁극적으로 이왕직(李王職)은 보존시켜 주않아요. 그래서 망국의 책임에는 고종과 순종도 자유로울 수 없다. 최익현은 고종에게 아주 직격탄을 날립니다. 명나라는 외적이 쳐들어 와서 나라가 망할 때 명나라 황제는 결연하게 목숨을 끊으면서 저항했는데 당신은 왜 그러지 않았느냐. 당신 (고종)이 진짜 그렇게 했더라면 일본이 감히 쉽게 우리의 외교권을 뺏지 못했을 것이다.
최원정: 당시 대신들과 왕, 누구도 망국의 책임에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래도 고종은 특히 노력은 했었잖아요. 외세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나라를 지켜낼려고 헤이그 특사도 보냈고~
심용환: 한번쯤 냉정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라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저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1890년대 보면 고종이 광무개혁도하고 비슷한 시기에 독립협회가 만들어지고 처음엔 둘이 잘 지내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막 부딪치거든요. 부딪치는 원인이 뭐냐면 고종은 어찌 됐건 이건 내 소유의 나라고, 나, 나, 황제를 중심으로 전제권력을 강화하면서 내 나라를 살리든지 말든지 하겠다는 거고, 독립협회 입장에서는 이 나라가 근대화가 될려면 의회도 가져야 되고, 자유 민권 민생보장 이런 것들을 보장해 주는 시스템들이 나와야 되는데 쉽게 말하면 황제께서 너무 협의하게 접근하신다 라고 하면서 갈등이 심해지거든요. 나중에 가면 고종이 결국은 자기 황제권이 축소가 된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 분노를 하게 되면서 독립협회를 해산해 버리는 모습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을 우리가 망국의 군주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너무 그 동안 간주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류근: 유명한 바둑 격언 중에 我生然後必他 라는 말이 있어요. 내가 먼저 산 후에 적을 잡으러 간다. 이때 망국 무렵에 고종과 권신들의 행태를 보면 아생연후망국이에요. 나라야 망하건 말건 내가 먼저 살겠다 결국은 다 죽은 거 아닙니까. 왕과 권력자들이 민중들의 얘기에 좀 더 귀를 기울여 가지고 그들과 통합을 했으면 국론이 어떻게 움직였을까. 혹시 다른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든다는 거죠.
심용환: 갑신정변(1884년) 때는 급진적으로 나라를 바꿔볼려고 했던 사람들이 고종을 믿고 있다가 다 죽임을 당했고, 갑오개혁(1894년) 때는 온건하게 나라개혁을 할려고 했던 사람들이 다 버림 받았고, 동학혁명 (1894년) 때는 농민들이 세상 바꿔 볼려다가 왕한테 버림받은 사건이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나쁜 놈은 일본이지만 그때 국가 지도자로써 고종이 과연 잘 했느냐 이제는 정말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류근: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권력자들이 사고치면 백성이 수습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도 그런 노력 조차도 무마시키는 그런 권력자들 한번 털고 가야돼요.
한철호: 국민들이 같이 주인이 되는 과정으로 모든 세계사의 흐름이 가는데 고종이 거기에 발맞추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런 노력들이 있었는데 오히려 우리는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외세의 침략에 대해서 독재를 해야된다. 모든 권력을 효율적으로 해야겠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이미 대세는 그런 대세가 아닌데 그걸 고집했다는 데서 역사의 흐름에서 거꾸로 갔다는 것에 우리가 좀 아쉬움이 있는 거죠.
최원정: 우리가 친일파의 탄생을 얘기를 시작하면서 고종의 책임론 까지 이야기가 흘러왔는데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친일파를 옹호하는 지식인들이 있고 이게 친일파의 논쟁이 정치적 이슈로 계속 거듭 되잖아요. 이게 속상한데 우리가 이 시대에 친일파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한철호: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친일파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잘못된 사람들은 당연히 그 대가를 치루어야 된다 라고 하는 사회정의를 회복하고 바로 잡는 일인데 그것이 지금 제대로 되지 않아서 핑계거리가 서로들 되는 거예요. 자기가 책임을 회피하고 이것이 해방 이후에 지금까지 구조적으로 정착되는 아픔을 우리가 지금 겪고 있기 때문에 사회정의의 문제로 확대시켜서 바라봐야 될 것에요.
최원정: 친일의 맥을 잇고 있는 한국사회의 주류들, 당사자들이 역사 앞에서 염치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조상 땅 찾기 환지소송 이런 것은 정말 민망하고 낯 뜨거운 일들이 아닙니까.
이윤석: 제일 놀라웠던 게 이완용이 특히 그랬고 송병준도 그랬고 처음부터 친일파가 아니었다 라는게 굉장히 놀라웠어요. 그래서 권력욕이나 출세욕이 역사나 백성에 대한 두려움을 앞설 때 애국이 언제든지 매국으로 변질될 수도 있구나 그것을 조심해야 되겠다 놓쳐서는 안되겠다 하는 생각을 했고 특히 사회지도층에 있는 사람이라면 변화는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 변화가 과연 변절을 향하는지 아니면 변혁을 지향하는지 항상 고민하고 숙고하고 반성을 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최원정: 이 시점에 우리가 친일파를 거론하는 것은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의 진리와 사회정의를 찾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도 친일파 특집 두번째 시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일제에 협력자 이야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부작 청산되지 못한 역사, 친일파, “제1편 친일파의 탄생”에서 정리).
① 친일인명사전을 인터넷에 검색하니, “친일인명사전-일제 강점기 일제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친일행위와 광복 전후의 행적을 수록한 사전.” 이라고 나와 있다. 한 900~1000 쪽 정도 양질의 두꺼운 책 3권 총 3000여쪽이다. 기간은 1905년 을사늑약부터 1945년 광복 전까지 40년간 기록으로 한정되어 있다. 거기 이름과 함께 행적이 다 나와 있다. 40년간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방해했거나 탄압한 사람들을 친일파 라고 부르는데, 정확하게는 친일 반민족행위자라고 부른다. 총4398명이다.
② 갑신정변(1884년) 때는 급진적으로 나라를 바꿔볼려고 했던 사람들이 고종을 믿고 있다가 다 죽임을 당했고, 갑오개혁(1894년) 때는 온건하게 나라개혁을 할려고 했던 사람들이 다 버림 받았다, 동학혁명 (1894년) 때는 농민들이 세상 바꿔 볼려다가 왕한테 버림받아 많은 농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전체적으로 나쁜 놈은 일본이지만 고종은 국가 지도자로써 과연 잘 했느냐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결국, 고종은 당시 민주라는 세계사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③ 대표적인 친일인사는 이완용(1858~1926)-을사오적,정미칠적,경술국치,후작,중추원부의장,1925년이완용재산300만원, 노덕술(1899~1968)-경시, 민영준(휘)(1852~1935)-자작, 1925년 민영휘재산6000만원 이완용의 20배 (현재가치 약1조2천억원),고종과 명성왕후가 총애, 박제순(1858~1916)-을사오적,경술국적,악명높은 동학군토벌대,자작,중추원고문,경학원대제학, 이지용(1870~1928)-을사오적,백작,중추원고문, 이근택(1865~1919)-을사오적,자작,중추원고문,권중현(1854~1934)-을사오적,자작,중추원고문,이하영(1858~1929)-자작,중추원고문,송병준(1858~1925)-정미칠적,백작,중추원고문,일진회총재.
④ 해방후 한국의 과제는 일차적으로 자주적인 통일정부의 수립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에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친일파의 청산이 중요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미군정의 친일파 보호정책으로 부활하여 사회 각 분야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민특위는 정부 수립을 앞두고 해방에 기여한 애국선열의 넋을 위로하고 무너진 민족정기와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설치되었다. 반민특위는 설치 목적에 따라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친일세력과 이승만 대통령의 비협조와 방해로 반민특위의 활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친일세력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나아가 이들이 한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였다. 이 때문에 사회 정의가 무너져 사람들의 가치관이 혼란에 빠졌으며, 사회에 이기주의와 부정부패 등이 횡행하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⑤ 친일파의 대명사인 이완용은 처음엔 애국자였고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협회 창립위원장과 회장도 했다, 최고의 애국자 친미파 이완용이 왜 최악의 매국노로 변했느냐. 이완용이 친미에서 친일로 돌아서는 두 가지 계기가 있다. 하나는 고종은 1897년에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다. 고종은 처음에 독립협회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 고종이 할 수 없는 일을 독립협회가 해주고 1898년 3월달에 이완용과 독립협회 주도로 러시아가 군사교관을 철수한다. 외세에 대한 세력균형이 어느 정도 나름대로 이루어지니까 고종과 독립협회는 국내문제로 서로 대립, 독립협회에서는 황권과 민권을 서로 합하면 강해질 수 있다는 입장이었는데, 고종은 민권을 주게 되면 황권이 약해 진다고 판단, 이에 친미파 세력이 점차 밀리기 시작하면서 고종의 왕권이 강화되어 갔다. 이게 이완용이 친일로 기우는 계기가 된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이완용이 친일파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 이완용은 현실과 국제정세의 판단이 정확했다. 이완용은 이때부터 대한제국과 민주를 위해서 고민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권력과 부획득에 집중한다. 송병준(러일전쟁 일본어통역관,의병탄압), 박제순(악명높은 동학군토벌), 민영휘(뇌물 부정부패의 원흉)도 친일파로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가 독립을 못할 것으로 미래를 내다보았던 것이다.
⑥ 당시 두 개의 동양평화론이 있었다. 이토의 동양평화론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다. 이토의 동양평화론은 일본의 주도로 한국과 중국이 협력, 러시아 남하를 저지 일본이 패권의 중심이 된 동양평화의 주장인데, 반면에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한-중-일 3국이 평화적으로 독립을 위해서 새로운 동양평화를 이룩하자는 것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결이 다른 거였는데 이완용은 이토의 편에 섰다.
⑦ 당시 우리의 안중근은 일본이 한국민족을 억압하고 적으로 만들어 놓고 무슨 동양 평화를 외치느냐 너희들의 본질은 침략이다. 안중근은 그 핵심을 꿰뚫고 일본 제국주의의 원흉 이토를 만주 하얼빈역에서 저격암살한다, 안중근과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이완용과 비교하면 이완용은 지식인이고 국가 고위 관료로서 진짜 뻔뻔스럽고 용서받지 못할 선택을 하였다. 이완용이나 송병준도 처음부터 친일파가 아니었다. 권력욕이나 출세욕이 역사나 백성에 대한 두려움을 앞설 때 애국은 언제든지 매국으로 변질될 수가 있다. 우리는 항상 고민하고 숙고하고 반성을 해야한다. 나부터 조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