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친 글] 원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 정희연
할아버지는 3형제다 정일O(종백부), 이O(종백부), 삼O(할아버지)이다. 한 마을에서 같이 살았다. 그러다 보니 애경사로 자손들이 모이면 그 인원이 40명이 넘었다. 아버지 형제는 모두 외지로 나갔지만 장남인 아버지는 가족을 살펴야 해서 고향에 남았다. 그래서 4촌 형제들은 멀리 있어 자주 보지 못했고 6촌과 한식구처럼 가까이 지냈다. 명절이 되면 큰집(이O(종백부), 그렇게 불렀다)에서 지냈고 항상 풍성했다. 자손들이 모여 여자는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고 남자는 가축를 잡고 손질하느라 바빴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대종회(종친들이 대규모로 모인 모임)에 참석해 임원으로 활동하셨다. 총부, 이사, 감사, 부회장직을 수차례 맡으시며 문중일을 첫 번째로 꼽으셨다. 농사일를 하며 행사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족보를 만들 때는 광주에 사는 형 집에 머무르며 4~5개월 동안 문중 사무실로 출근 했다. 부지런하게 두 가지 일을 쉬지 않고 했지만 남편, 아버지, 가장의 빈자리는 생기기 마련이었다. 직업은 농부였지만 큰방에는 텔레비전과 책장만 있고, 작은방은 장롱하나 빼고는 온통 책이어서 시골에서 농사하는 사람의 집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열심히 문중일을 하신 아버지의 때문인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다가설수록 문중사에 멀리했다. 양파나 마늘을 심기 전 비닐을 씌우려면 일손 하나가 큰 힘이 된다. 마음은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물장구치거나, 마을 앞마당에서 오징어 게임을 하는데, 아버지의 빈자리 때문에 미뤄진 일들로 주말이면 항상 바빴다. 놀고 싶고 공부도 해야 하는데 말이다. 가끔 아버지를 따라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니다였다. 첫 번째는 나이였다. 70~80%가 60을 넘이 넘었다. 가장 어렸고 비슷한 또래는 없었다. 나이 차이가 많다 보니 질문에 답은 네, 네, 네가 전부였다. 두 번째는 혈연으로 구성되다 보니, 모두 가까운 사이여서 그런지 회의는 갈수록 산으로 갔다. 의견이 많고 시간이 길어져 밥시간이 되어서야 급하게 마무리 됐다. 결론도 맺지 못하고 끝이 났다. 그렇지만 아무도 결론을 내려 하지는 않았다. 모두 할 말을 했으니 이제는 위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세 번째가 한문이다. 안내문, 회의록, 제문, 비문, 족보, 모두가 한자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몇 줄 읽다 포기해 버렸다. 네 번째가 학식이다. 문중을 대표하는 사람이라 대부분 왕년에 한자리하면서 학식도 격식도 모두 높아, 그 자리에 같이할 수 없는 것을 느꼈다. 아직은 아니구나 하는 것이 결론이었다. 아버지는 한자를 많이 아셨고 열정도 있어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나는 무기가 없었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어 왔다. 나만의 것이 필요했다.
코흘리개 꼬마가 성장해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는 벌써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는 자신이 돌아가기 전 개인 앞으로 있는 재산을 문중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했다. 아는 사람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어, 살아 계실 때 해야 한다고 하시며 몇 년 동안 자손들과 의논을 같이하며 마무리했다. 그러면서 아랫사람에게 위임했다. 그중 소 문중(OOO 19세손부터 30세손) 총무를 나에게 하라고 하시며 넘겨주었다. 마을 뒤 좌측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나지막한 산이 있다. 그 산을 중심으로 조상의 묘가 사방으로 모여 있었다. 그중 더 낮은 남쪽 산자락에 19세손 어른과 그 자손이 자리를 잡았다. 올봄에 제사를 지냈다. 처음으로 안내문을 보내고 음식을 준비해 첫 신고식을 치렀다.
곧 추석이 다가온다. 음식은 가족들의 몫이지만 벌초는 더 큰 의미가 있다. 세 분의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집안에 세 사람씩 아홉 명을 대표로 하는 단톡방을 만들었다. 회장·맏형과 의논해 일정을 정하고 안내문을 발송했다. 역시나 소통이 빨랐다. 에스엔에스 덕이었다. 일찍 눈을 떴다. 다섯 시 10분 시간은 넉넉했지만 어제 저녁 쓰레기도 모두 버리고 특별한 일이 없어 서둘러 집을 나섰다. 카페에 들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바로 무안으로 향했다. 편의점에서 빵과 음료수를 챙겼다. 예초기 연료와 전어회 그리고 막걸리는 회장이 맡기로 했다. 형님 아들이 금일봉을 찬조해 주어서 일이 쉽게 이루어졌다. 농막으로 향했다. 예초기를 챙겨야 했다. 1년 전 벌초하고 지금껏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었다. 기름도 없어 시운전도 못했다. 거무스름하게 익은 무화과 몇 개를 따서 부모님에게 드리고 산소로 갔다. 일곱 시 20분, 10분 빨리 도착했다. 허리춤까지 자란 풀은 아침이슬을 흠뻑 품고 있었다. 올해의 마지막 숙제가 오늘이면 끝난다.
옆으로 긴 사다리꼴 모양의 선산은 몇 해 전 흩어져 있는 봉분을 19세손부터 25세손까지 가운데 모셨고, 왼쪽으로 일O 할아버지 자손, 오른쪽으로 삼O 할아버지 자손이, 이O 할아버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아버지의 수고로 만들어진 선산이다. 10여 년 전부터 후세대가 맡아 벌초 해 오고 있다. 모두 도시물을 먹어 이제 노동이 서툴러도, 한나절 땀 흘리고 막걸리 한잔을 나누는 시간은 형제처럼 지내던 어린 시절의 추억 속으로 이끌어 주었다. 이런 시간이 좋았고 좀 더 쌓아가고 싶었는데, 제일 맏형이 평장으로 만들어 일을 줄이자고 한다. 예초기를 들 힘도 없고 수고하는 동생들에게 미안하다며 의견을 냈다. 틀린 말은 아니나 많이 아쉽다. 다수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지만 이럴 땐 민주주의가 좀 야속하다. 힘은 내가 원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숙제가 생겼다. 어쩌면 더 잘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의견을 잘 모아서 결론을 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내가 해야 할 역할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안녕하세요! ㅇㅇ석재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