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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스터디 다음 시간 자료입니다. 스터디 시간에는 조금씩 생략하면서 읽을 예정입니다.
2부 맑스주의의 변증법
7장 객관적 관념론에 대한 맑스주의의 비판
어떤 철학체계든 그것의 약점이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약점이나 결함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맑스는 헤겔과 관련해서 이 점을 분명히 이해했고, 그럼으로써 헤겔은 물론 그와 정반대의 입장에 선 유물론자 포이어바흐보다도 논리학의 문제를 더욱 발전시켰다.(인간204)
맑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은 헤겔의 역사적 공헌은 물론 역사적으로 제약된 그의 학문적 발전의 한계도 동시에 보여 줬다. 다시 말해 헤겔의 변증법이 건널 수 없는 분명한 경계와 변증법의 창조자가 아무리 애써도 극복할 수 없는 환상의 힘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대체로 헤겔의 위대함은 그의 한계와 마찬가지로 관념론의 토대 위에서, 즉 과학적 사고에 부여된 관념론적 전제의 한계 내에서 변증법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이끌어 냈다는 사실이다. 헤겔은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관념론이 사고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며 심지어는 변증법으로 계몽된 사고조차 ‘자기외화’ 혹은 ‘자^기의식’의 무한한 과정을 맴도는 빠져나갈 길 없는 자기 내 원환 운동으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을 보기 드물 정도로 극명하게 보여 줬다. 그러나 헤겔은 매우 정직하고 일관된 관념론자였으며 모순적이고 불완전한 그 밖의 모든 관념론의 비밀을 폭로했던 인물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헤겔은 존재, 즉 사고 외부에 독립해서 존재하는 자연과 역사의 세계가 논리학을 증명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봤으며, 나아가서 존재가 논리학의 동일한 도식이나 범주를 되풀이해서 확증하는 ‘사례들’의 고갈되지 않는 저장소라고 봤던 것이다. 청년 맑스가 표현했듯이, ‘논리의 사상(事象)’은 헤겔이 들어가지 못하게 ‘사상의 논리’에 울타리를 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센 군주와 군주의 머리 위에 기생하는 이는 관념론적 변증론자들에게 ‘즉자대자적으로 실재하는 개체’라는 범주를 예증하는 ‘사례’들로서 훌륭하게 봉사할 수 있게 된다.(인간204-205)
위와 마찬가지로 끓는 주전자나 프랑스대혁명도 단지 질과 양이라는 범주의 관계를 예증하는 ‘사례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그 어떤 경험적 실재도 그 자체가 아무리 우연적이라 할지라도 절대이성의 외적 구현체로 변모돼 버린다. 즉, 절대이성이 자기를 분화해 가는 필연적인 변증법적 단계들 가운데 하나의 단계로 변모되고 만다.(인간205)
헤겔 변증법의 근원적 결함들은 관념론과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관념론으로 말미암아 그의 변증법은 독창적이긴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논리적으로 난해한 변명으로 쉽게 변혁되고 말았다. 따라서 그렇게 된 전반적 사정들을 더 자세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인간205)
헤겔은 실제로 인간과 인간의 현실적 사고를 비인격적이며 형체^가 없는 절대적 사고와 대립시켰다. 여기서 절대적 사고란 모든 시대에 존재하는 어떤 힘이며, 이 힘에 따라 ‘세계와 인간의 신성한 창조’ 활동이 일어난다. 또한 헤겔은 논리학을 ‘절대적 형식’으로 이해했다. 이 절대적 형식과 관련해서 볼 때 실재하는 세계와 실재하는 인간의 사고는 파생된 이차적인 것이고 창조된 것이다.(인간205)
여기서 사고에 관한 헤겔의 관념론적 입장이 드러난다.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은 특히 사고를 새로운 신, 다시 말해 인간 외부에 존재하면서 인간을 지배하는 초자연적인 어떤 힘으로 변형시켰다. 하지만 이런 헤겔 특유의 환상은 그가 종교로부터 단순히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이념이나, 포이어바흐가 지적했듯이 종교적 의식의 단순한 실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깊고 중대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인간206)
사실상, 헤겔의 사고개념은 사회적 노동분업의 제한된 한 전문화한 형태(다시 말해 직접적인 실천적 활동과 감상적인 대상적 활동을 뜻하는 육체노동과는 분리된 정신노동)의 토양 위에서 형성된 사물들의 현실적 상태를 무비판적으로 묘사한 것이다.(인간206)
자연 발생적으로 발달된 사회적 노동분업 아래서는, 인간 개개인과 그들의 집단적 힘 및 집단적으로 개발된 능력(보편적인 사회적 활동수단) 사이의 현실적 관계에 독특한 전도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런 전도현상은 철학에서는 소외로 알려져 있다. 행위의 보편적(집단적으로 실현된) 양식들은 종교적으로 교화된 사람들과 관념론적 철학자들의 단순한 공상 속에서가 아니라 바로 사회적 현실 속에서 특수한 사회제도로 조직되고 교역과 직업의 형태로 확립되며, 나아가서 자신의 고유한 의식(儀式)⋅언어⋅전통과 극히 비인격적이며 무형적인 특성을 보이는^ 그 밖의 ‘내재적’ 구조를 지닌 일종의 특권적 계급제도의 형태로 확립된다.(인간206-207)
결국 개별 인간들은 이런저런 보편적 능력(활동적 힘)의 주체나 담지자가 되지 못하고, 반대로 이 활동적 힘 자체가 갈수록 개인으로부터 소외되면서 각 개인에게 해야 할 일의 수단과 형태를 외부에서 지시하는 주체로 나타난다. 이리하여 개인 그 자체는 일종의 노예로 전락하고, 보편적인 인간의 힘과 능력을 빼앗겨 버린 ‘말하는 도구’, 다시 말해서 화폐와 자본, 더 나아가서는 국가⋅법⋅종교 등으로 구체화된 활동수단으로 변모해 버린다.(인간207)
사고 또한 마찬가지의 운명을 면할 길이 없다. 사고는 전문 영역으로 돼 버리면서, 정신적이며 이론적인 작업을 하는 직업적 학자들의 생활을 위한 방편으로 남게 된다. 학문이란 특정한 조건들 아래서 전문적 직업으로 변형된 사고다. 소외가 보편화된 상황 아래서 사고는 단지 학문의 영역에 국한된 범위(학자들의 집단) 내에서만 사회 전체를 위해 필요한 발전 수준에 도달하기 때문에, 사고가 그런 형태를 취하면 사실상 대다수의 인간들과 대립하게 된다. 나아가서 사고는 단순히 인간과 대립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관점에서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 하고 또한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등등을 지시하게 된다. 전문적 이론가인 과학자는 자신의 이름으로 몸소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 개념, 그리고 절대보편적이고 집단적이며 비인격적인 힘의 이름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법칙을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학자는 다른 사람들 앞에 이런 힘을 위임받은 대리자나 절대적 대행자로서 나타난다.(인간207)
바로 이런 토양 위에서, 정신노동과 이론적 작업에 종사하는 전문가들 특유의 온갖 환상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환상들^을 가장 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소외된 사고의 자기의식이라 할 수 있는 객관적 관념론 철학이다.(인간207-208)
헤겔이 그의 논리학에서 인간 생명활동의 근본적 특징을 현학적으로나마 꽤 정확하게 표현했다는 사실이 쉽사리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생멸활동의 근본적 특징은 ‘외부로부터’ 자신을 바라볼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을 어떤 ‘타자’나 특별한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고하는 동물로서의) 능력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자신의 활동도식을 자신의 고유한 대상으로 변형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점이 바로 청년 맑스가 헤겔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인식했던 인간의 독특한 특징이다. 즉, “동물은 자신의 생명활동과 직접적으로 통합돼 있다. 동물은 자신을 자신의 생명활동과 구별하지 못한다. 동물은 생명활동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활동 자체를 자신의 의지와 의식의 대상으로 만든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활동을 의식한다. 인간이 직접적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피규정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인간208)
헤겔은 인간 생명활동의 이런 특징을 오로지 논리의 눈을 통해서만 바라봤을 뿐이다. 그 결과 헤겔은 사고의 도식이나 논리적 도식, 즉 규칙−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규칙에 따라 이런저런 특수한 활동(그것이 언어를 재로로 한 것이든 그 밖의 다른 것이든)을 의식적으로 행한다−으로 변형된 정도에 국한시켜 인간의 생명활동을 서술했다. 그러므로 헤겔은 개인의 의식 바깥에 개인의 의지를 벗어나 있는 사물과 사물의 상태(행위)를 단지 인간의 신체를 포함하는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소재 속에서 실현되며 실현될 수 있는 사고(주관적 활동)의 변형태나 계기로 기술했을 따름이다. 위에서 맑스가 언급한 인간 생명활동의 고유한 특징이 헤겔한테는 인^간에 의해 실현된 사고의 도식이라는 논리적 외형을 띠게 된다.(인간208-209)
헤겔이 제시한 인간 생명활동의 실질적 모습은 거꾸로 뒤집힌 형태다. 실제로 인간은 자신의 현실적 생명활동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고한다. 그러나 헤겔은 반대로 인간이 특정한 도식에 따라서 사고하기 때문에 인간의 현실적 생명활동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활동에 대한 모든 규정들은 물론, 생명활동을 통해 인간 두뇌 외부에 위치하게 되는 사물의 상태 역시 ‘사고에 의해 정립되는’ 한에서만 결정되고 또 사고의 결과물로 나타난다.(인간209)
이와 같은 전도된 사고방식은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다. 왜냐하면 사고를 전문적으로 탐구하는 논리학자들은 사고하는 존재인 주체의 활동결과, 즉 사고활동의 산물(개념은 그 특정 형태다)로 나타난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논리학자들은 인간과 인간의 활동 바깥에 이미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사물 자체(혹은 사물의 위치)에 별다른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논리학자는 결코 실재를 물리학자나 생물학자 혹은 경제학자나 천문학자처럼 이해하지 않는다).(인간209)
이렇게 논리학에 대한 관점이 부적당함에도 불구하고 헤겔이 ‘순수’ 논리학자로 남아 있는 것은 잘못이다. 이처럼 헤겔이 갖는 논리학자 특유의 직접적 맹목성은, 그가 실천(현실적이며 감성적인 인간의 대상적 활동)을 사고(실천에 앞서 독립적으로 완성된 정신적⋅이론적 작업과 그 작업의 결과)를 검증하는 권위 있는 유일한 척도로 간주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인간209)
이때 실천은 추상적으로 이해되고 있을 뿐 아니라 사고 때문에 사실상 지니게 된 이런저런 양태나 특징으로 설명되고 있다. 왜냐하면 헤겔이 말하는 실천은 어떤 의도⋅계획⋅이념⋅개념, 혹은 사전에 선택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이며 사고와 무관하게 그 자체의^ 규정성을 통해서는 절대 분석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실천적 활동의 모든 결과들−인간노동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 역사적 사건과 그 결과−은 어떤 이념을 구체화하거나 객관화하는 한에서만 고찰대상이 된다. 역사적 과정 전체를 조감하는 역사관의 관점에서는, 이런 견해가 가장 순수한(절대적인) 관념론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사고과학인 논리학의 관점에서는, 이런 견해는 정당화될 뿐 아니라 합리적인 유일한 입장이기도 하다.(인간208-209)
논리학자가 그의 탐구의 주제와 전혀 관계없는 모든 것을 가차 없이 추상해 버린다든지 어떤 사실이 논리학의 주제인 사고를 해명하는 형식 혹은 사고의 결론으로 이해될 수 있는 한에서만 그 사실에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서 우리가 논리학자를 실제로 비난할 수 있을까? 사상(事象)의 논리(예를 들면, 인간활동의 어떤 구체적 영역에 대한 논리)보다 논리의 사상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다는 이유로 전문적 논리학자들 비난하는 것은, 마치 화학자들 화학의 문제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인다고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헤겔에 대해 앞에서 언급한 맑스의 말은 지금의 맥락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인간210)
편협한 전문가들의 결점은 자신의 사고를 자기 학문의 주제 테두리에만 엄격하게 제한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자신의 제한된 견해와 연관돼 있는 자기 학문의 관할 영역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인간210)
이것은 전형적인 직업적 논리학자 헤겔에게도 적용된다. 논리학자로서의 헤겔이 일반적으로 진술이나 사실로 나타나 있는 어떤 사상의 논리에만 관심을 가질 때, 그가 그 진술이나 사실을 오로지 그 속에서 드러나는 사고의 추상적 도식에 따라 고찰하는 것은 정당^하다. 헤겔 논리학의 신비주의라든가 맑스가 “거짓 실증주의”라고 불렀던 헤겔 논리학의 교묘한 특징은 전문적 논리학자 특유의 관점이 유일한 과학적 관점−말하자면 인간이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면서도 ‘궁극적’이고 심오하며 소중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으로 받아들여지고 부각되는 곳에서 시작한다.(인간210-211)
논리학자로서 헤겔이 인류 문화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사고의 위력을 드러내는 행위로 간주하는 것은 정당하다. 특수한 논리적 추상개념이 도출되는 현상 자체의 본질이 바로 그런 논리적 추상개념으로 표현된다는 헤겔의 견해는 논리학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견해다. 그러나 이런 견해에 다른 어떤 것이 첨가되면, 그 견해는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왜냐하면 진리가 거짓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어떤 화학자가 마돈나상을 그리는 데 사용된 색채 배합을 화학적으로 탐구한 정확한 결과를 바로 라파엘로의 붓에 의해 창작된 독특한 색채의 ‘종합’에 대한 유일한 과학적 설명이라고 간주하는 순간, 그 과학적 탐구의 결과는 거짓이 된다.(인간211)
사고과정의 형식과 도식을 구체적으로 실현된 형태로 아주 정확하게 표현하는 추상개념은 헤겔에게는 인류 문화의 전체적 다양성을 창출히는 과정의 도식으로 직접 변모돼 버린다. 결국 헤겔의 사고 개념에 놓여 있는 모든 신비는 하나의 요점으로 집중된다. 인류 문화의 다양한 모든 형식을 인간이 발휘하는 사고능력이 드러난 결과로 간주함으로써, 헤겔은 인간이 지닌 사고능력과 사고능력의 도식⋅규칙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헤겔은 사고를 인간으로 하여금 역사를 창조하게 하는 신적 힘으로 올려놓음으로써, 사고의 근거와 관련된 합리적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봉쇄해 버렸다. 노동을 통해 문화−문화에 대한 자기의식이 과^학적 사고다−를 창조했던 수많은 인간들의 감성적인 대상적 활동은 헤겔의 관심 영역 밖에 있었다. 헤겔은 이런 활동을 사고의 ‘전사(前史)’쯤으로 여겼다. 따라서 외적 세계는 개념을 산출하기 위한 원초적 자료일 뿐이고 기존의 개념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그 개념에 따라 진행해야만 하는 어떤 것일 뿐이었다.(인간211-212)
그리하여 사고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힘으로 변형되는 반면, 외적 세계는 사고가 적용되는 영역으로 변형된다. 만약 사회적 인간의 감성적인 대상적 활동(실천)이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고에 의해 창조된 이념⋅계획, 혹은 개념의 외적 대상화나 결과물로 나타난다면, 이론가의 두뇌 속에 있는 사고의 기원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발생했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인간212)
헤겔은 사고가 어떤 것으로부터 유래했는지를 묻는 것은 쓸데없는 물음이라고 보면서, ‘사고가 이미 존재했다’고 대답한다. 사고는 이미 존재했으며, 인간 내부에서 작용함으로써 점차 자신의 활동 및 활동의 도식과 법칙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논리학이란 그 어디에서도 유래하지 않는 이런 창조적 원리, 무한한 창조적 힘, 절대적 형식 등에 대한 자기의식인 것이다. 인간이 이런 창조적 힘을 드러내고 대상화시키며 외화시키고 난 후에야 이런 힘 자체는 보편적인 창조적 힘으로서 논리적으로 인식된다.(인간212)
이것이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에 감춰진 전체적 비밀이다. 결국 논리적으로 볼 때, 객관적 관념론은 사고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아무런 답도 할 수 없다. 모든 창조적 활동에 대한 영원하고 절대적인 도식 체계로 정의된 논리학의 형식 속에서, 헤겔은 인간의 현실적 사고와 그 논리적 형식⋅양식을 신격화했다.(인간212)
이것은 사고와 논리학에 대한 헤겔의 견해가 갖는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다. 그 강점은 인류의 정신적⋅물질적 문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발견한 인간사고의 참된 논리적 형식과 법칙을 시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것으로 우상화시켰다는 점이다. 그에 비해 그 약점은 인간사고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제기조차 하지 않고 논리적 형식과 법칙을 절대적인 것으로 단언함으로써 인간사고의 논리적 형식과 법칙을 우상화시켰다는 점이다.(인간213)
사실 사고를 보편적 능력으로 파악하는(정확하고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인간 외부에 인간과 독립해서 형성된 특정한 조건들로부터 발생하는 능력이라기보다 인간의 자기의식을 각성시키는 능력으로 파악하는) 관념론의 입장은 논리학 자체로는 절대로 풀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불러일으킨다.(인간213)
헤겔은 사고의 논리적 형식에 대한 이해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한 진보를 이룩했다. 그러나 정신활동(사고)−여기서는 정신이 정신의 고찰대상이 된다−을 구체화한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형식들의 상호 연관에 대한 물음에 직면했을 때, 그는 중도에서 멈추거나 심지어는 후퇴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헤겔은 언어를 ‘정신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유일한 형식, 즉 사고의 창조적 힘이 외적으로 발현되는 유일한 형식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헤겔은 언어를 사고와 대치하고 있는 가장 적절한 주요 형식으로 간주했다.(인간213)
헤겔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성서의 입장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인간사고(사고하는 인간정신)와 관련해서 옹호했다. 그리고 성서의 입장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 사고하는 정신이 자기의식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연속적으로 구성하는 혹은 재구성하는 근본^원리로 삼았다.(인간213-214)
인간의 사고하는 정신은 바로 ‘명명하는’ 기능으로서의 언어 내에서 그리고 언어를 통해 최초로 드러난다. 따라서 사고하는 정신은 ‘이름의 영역’에서 맨 먼저 구체화된다. 또한 언어는 ‘사고활동의 최초의 객관적 실재’로 기능하며, 본질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정신이 스스로 존재하는 최초의 직접적 형식으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유한한 정신’(개인들의 사고)이 언어 내에서 그리고 언어를 통해서 다른 유한한 정신의 주제(대상)가 될 수 있게 된다. 특정하게 분절된 소리라고 할 수 있는 언어는 정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청각을 울릴 때 다시 사고하는 타인의 정신 상태로 바뀐다. 주변 공기의 진동(들을 수 있는 말)은 결국 두 정신의 상태 사이의 순수 매체이고 정신과 정신의 관계 방식이며, 헤겔의 언어로 표현하면 정신이 자신과 맺는 관계 방식이다.(인간214)
여기서 언어는 사고를 외적으로 대상화하는 최초의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 도구는 사고하는 정신이 스스로 대상이 되기 위해서(사고하는 다른 정신의 상(像)이 되기 위해서) 자기자신으로부터 창출한 것이다. 돌도끼, 깎는 도구, 문지르는 도구, 나무 쟁기 등과 같은 실재하는 도구는 부차적 도구이며, 사고를 감성적⋅객관적으로 변형하는 대상화 과정으로부터 파생된 도구이다.(인간214)
이리하여 헤겔은 언어 속에서 사고하는 정신의 현실적 존재형식을 봤다. 사고하는 정신은 노동을 통한 자연의 실재적 변형과는 무관하게 이미 그 전에 언어라는 형식 속에서 스스로의 창조적 힘(능력)을 드러낸다. 노동은 사고하는 정신이 자기자신과 대화하는 과정, 즉 말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만을 실현시킨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해석해 버리면 대화는 사고하는 정신의 독백, 즉 자신의 발현 양^식에 그칠 따름이다.(인간214-215)
따라서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경험하는 모든 역정은 (‘여기’와 ‘지금’이라는 언어로 표현된) 사고와 아직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그 밖의 사고 내용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의 분석과 더불어 시작된다. 또한 논리학도 비록 그 시작에서는 함축적 전제이기는 하지만 동일한 도식을 전제하고 있으며 또 포함하고 있다. 논리학에서 나타나는 사고는 우선적으로 언어를 통해서만 줄곧 자신을 실현시킨다. 따라서 사고하는 정신의 ‘현상학적’이며 ‘논리적인’ 모든 역경의 종국점이 출발점으로 귀환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고하는 정신은 자신의 극히 정확하고 완전한 모습을 언어로 출판돼 나온 논리학 관련 서적인 논리학에서 획득한다.(인간215)
그러므로 헤겔은 논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유형식들이 발현되고 최초로 제시되는 곳은 인간의 언어다. 오늘날 인간을 동물과 구별시키는 것이 사유 능력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언어는 예컨대, 인간 자신이 창출한 관념과 같이 인간에게 내적인 것에는 무엇이든지 침투해 들어간다. 그리하여 인간은 숨겨져 있는 것, 혹은 다른 것들과 혼합돼 있는 것, 혹은 명백히 해명한 것(범주)을 언어로 변형시킨다.”(인간215)
바로 이 점이 헤겔 관념론에서 가장 깊이 뿌리박혀 있는 생각이다. 이와 같이 생각함으로써, 내적 언어의 형식으로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활동이라 할 수 있는 사고는 모든 역사적 사건, 사회적⋅경제적⋅정치적 구조 등을 포함하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문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 돼 버린다. 그 결과 인간노동의 산물인 전체 세계는 물론 모든 역사는 ‘두뇌로부터’, 즉 ‘사고의 힘으로부터’ 발생하는 과정으로 해석된다. 사고가 지니는 창조적 에너지가 외화^(대상화)되고 다시 외화된 노동산물에 의해 역으로 사고가 지배하게 된다(탈대상화)는 헤겔의 웅대한 역사관은 언와 더불어 시작하고 언어 속에서 그 순환과정을 완결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논리학의 전 과정을 개괄적으로 요약한 것이다.(인간215-216)
헤겔 사상의 실마리를 푸는 단서를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먼저 사고하고, 그다음에야 행동한다는 사상은 헤겔 도식의 토대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도식은 언어→행동→행동의 산물→언어(이 경우는 행동으로 옮겨진 것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의 과정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서 동일한 도식을 따르지만 새로운 토대 위에서 이뤄지는 새로운 순환과정이 나타난다. 이 새로운 토대 때문에 운동은 순환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나선형의 형태, 요컨대 한 번찍 돌 때마다 출발점과 종결점이 동일한 형태를 취한다.(인간216)
여기서 서술된 헤겔 도식의 합리적 핵심과 동시에 신비한 특성은, 정치경제학이 상품-화폐의 유통과정을 분석할 때 해명되는 상품의 형태 변화를 유추해 보면(비록 유추 이상이기는 하지만) 쉽게 이해된다. 마치 노동수단이자 노동산물인 기계에 집중돼 있는 축적된 노동이 ‘자기증식하는 가치’−이것의 ‘집행자’는 개별 자본가다−의 형태로 기능하듯이, 사회적으로 축적된 정신노동(과학적 지식)은 일종의 비인격적이며 형체가 없는 익명의 힘, 즉 과학의 형태로 기능한다. 개별적 전문 이론가는 자기 발전하는 지식의 힘을 대변하는 기능을 한다. 그의 사회적 기능은 요컨대 수 세기,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정신노동의 보편적인 정신적 부를 개별적으로 구체화하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의 개별적 의식이나 의지와 독립적으로 완성되는 지식의 증대 과정에서 살아 있는 도구다. 그는 여기서 자기 스스로 사고하지 않는다. 교육 과정에서 그의 머릿속에 뿌리내려져 있는 지식이^ ‘사고한다’. 그가 개념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이 그를 지배하고 그의 탐구방향과 활동의 형식을 규정한다.(인간216-217)
교환가치에 근거한 물질적 생산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의 전도현상, 즉 보편과 특수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현실적 신비화가 존재한다. 이런 신비화는 추상적 보편자가 감성적 구체(이 경우 살아 있는 인간)의 측면이나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감성적 구체인 개별 인간이 보편자(이 경우는 지식⋅개념⋅과학)를 추상적이고 일면적으로 체현하는 전도현상을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교환가치에 근거하고 있는 관계들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으로부터 유추한 것이 아니라, (물질적 생산 영역이라기보다 오히려) 정신적 생산 영역에서 일어나는 마찬가지의 사회적 과정이다. “추상적이며 일반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의 속성으로 간주되는 대신에 감성적으로 구체적인 것이 추상적이며 일반적인 것의 표현형식으로 간주되는 이런 ‘전도’는 가치표현의 특징이다. 동시에 이런 전도는 가치표현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 만약 내가 로마법과 독일법을 모두 법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자명하다. 반대로 만약 내가 추상적 법이 구체적 법인 로마법과 독일법에서 그 자체로 실현된다고 말한다면,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사이의 관계는 신비화된다.”(인간217)
헤겔의 관념론은 적어도 종교적 환상이나 종교적 성향을 띤 상상의 산물은 아니다. 헤겔의 관념론은 정신노동의 제한된 영역에 종사하는 전문적 이론가가 사고활동을 벌이는 토대, 즉 사물들의 현상적 상태를 무비판적으로 묘사한 것일 뿐이다. 헤겔 철학의 형식들은 실제로 자신의 이론작업에서 필연적으로 창출된 불가피한(실제로 유용하기까지 한) 환상이다. 그 환상은 헤겔의 이론작업이 갖는 객관적인 사회적 지위로부터 생겨나서 그 지위를 반영한 것이다. 이^런 환상은 헤겔의 지적 성장 과정에서 그가 개념적으로(언어적 표현의 형식으로) 습득한 지식이다. 언어적 표현형식은 헤겔 고유의 이론 활동을 가능케 한 시작(출발점)이면서 동시에 궁극적 목표 혹은 그 참된 ‘완성태’를 이룬다.(인간217-218)
그러나 우리가 사용했던 유추는 우리들로 하여금 또 다른 상황, 즉 위에서 서술된 ‘전도’의 메커니즘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주지하다시피 상품-화폐 유통 패턴은 C-M-C라는 정식이다. 그리고 화폐(M)는 ‘상품의 형태변화’로서 상품을 매개하는 고리다. 그러나 C-M-C-M-C-M …이라는 자기폐쇄적 순환 운동의 특정한 지점에서, 화폐는 수많은 상품유통의 수단, 즉 단순한 매개자이기를 중지하고 갑자기 수수께끼 같은 ‘자기증식’의 능력을 드러낸다. 이런 현상은 도식적으로 M-C-M이라는 정식으로 표현된다. 전체 과정의 실질적 출발점을 이루는 상품은 앞서 화폐가 수행했던 역할, 즉 일시적인 화폐의 형태변화를 매개하는 수단의 역할을 수행하고, 이때 화폐는 자신의 형태변화를 통해 구체화됨으로써 ‘자기증식’ 활동을 완수하게 된다. 신비화된 속성을 획득할 때 또한 화폐는 자본이 된다. 화폐는 자본의 형태로 “가치의 자기증식을 이룰 수 있는 신비로운 능력”을 획득하게 되고 “갑자기 독자적 자기운동을 하는 실체로 나타난다. 여기서 상품과 화폐는 단지 자기운동을 하는 실체의 형식일 뿐이다.” M-C-M이라는 정식에서 가치는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주체’, 즉 전체 순환 운동에서 끊임없이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실체-주체’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끊임없이 화폐와 상품이라는 형태를 번갈아 취하면서 동시에 양적으로 변화하고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가치는 그런 과정의 능동적 요인이다. 그래서 원^래 가치는 자발적으로 증식하고” 이런 가치의 증식은 자체 내에서 발생한다.(인간218-219)
논리학에서 헤겔은 동일한 상황을 단지 가치가 아니라 지식(이해⋅진리)과 관련해서 서술하고 있다. 사실 헤겔은 논리학에서 지식의 축적 과정을 다뤘다. 왜냐하면 개념은 축적된 지식이며, 과학에서는 언어의 형태로 나타나는 사고의 ‘불변자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이라는 관념은 자기증식하는 주체, 즉 주체-실체인 가치의 이념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인간219)
따라서 우리는 어느 관념론자의 추상적 환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확하게 표시돼 있으나 이해돼 있지 않은 사실을 설명의 출발점으로 삼는 정치경제학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산출과 축적의 현실적 과정을 무비판적으로 서술하는 이론을 다루고 있다. 사실 화폐가 자본의 운동형식(자기자신으로 귀환하는 전체 순환과정의 출발점과 목표)으로 나타날 때, 화폐는 자기증식과 자기발전의 신비스러운 능력을 드러낸다. 이런 사실이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신비화된다.(인간219)
가치의 자기증식의 비밀, 즉 잉여가치의 창출과 축적의 비밀을 폭로할 때 맑스는 자본론에서 위에서 언급한 헤겔 논리학의 용어들과 헤겔의 사고개념을 사용하고 있다(우연히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숙고 후에 의식적으로 사용한다). 자신의 의식⋅의지와 독립해서 자신도 모르게 발생하는 잉여가치의 창출과 축적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인간을 사로잡는 환상이 생겨나게 되는데, 논리학자 헤겔에 의해 창출된 관념론적 환상도 그런 환상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이들 환상의 기원의 논리적 유형과 사회역사적 유형은 주관적 측면에서나 객관적 측면에서나 동일하다.(인간219)
자본가들에게 일정한 화폐의 총합(화폐의 형식으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일정한 가치)은 자본가로서 행하는 이후 모든 활동의 출발점이며, 따라서 자본가에게 특유한 활동의 형식적 목표다. 신비한 특성을 가진 이런 화폐의 총합이 근원적으로 어디로부터, 어떻게 나왔는지는 자본가에게 특별한 관심거리가 될 수 없다.(인간220)
유사한 일이 인격화된 지식⋅학문⋅개념 등을 취급하는 전문적 이론가에게서도 일어난다. 그들에게 인류에 의해 축적되고 언어나 기호 형식으로 기록된 지식은 그의 이론작업의 출발점인 동시에 목표로 나타난다.(인간220)
전문적 이론가가 볼 때 개념은 당연히 ‘자기발전하는 실체’⋅‘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주체’, 그리고 ‘모든 변화와 변형의 주체-실체’로 나타난다.(인간220)
따라서 전문적 이론가의 삶을 규정하는 실질적 활동형식 때문에 헤겔 논리학에서 체계적으로 제시된 바 있는 사고와 개념에 관한 모든 필연적 환상이 발생한다. 헤겔 논리학은 개념을 확장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의 한계 내에서 객관적 사고형식의 체계를 서술하고 있다. 이때 재생산 과정이란 ‘처음부터’ 그 발전된 형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존재하는 개념의 완성 과정, 즉 이미 축적된 이론적 지식의 변형 내지 ‘증대’ 과정으로 발생한다. 개념은 항상 새로운 정복을 위한 도약점의 형태로 이미 전제돼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정복은 인식의 영역을 확장하는 문제인데, 여기서 최초의 개념이 가장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인간220)
팽창하고 성장하는 지식을 생생한 순환과정 속에 차례로 끌어들이는 독립적 표현형식이 제시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규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즉 과학(축적된 지식)은 언어(과학의 언어)이고^ 과학은 지식에 근거해서 창출된 객관화되고 물질화된 지식의 힘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지식은 다음과 같은 과정의 주체가 된다. 그 과정은 지식이 언어적 형식을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형식으로 끊임없이 변화시켜 나가는 가운데 지식의 양을 변경시키고, 최초의 지식뿐 아니라 잉여(첨가된) 지식도 자신으로부터 떨쳐 버림으로써 ‘자기발전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지식이 새로운 지식을 자신과 결합시키는 운동이 지식의 자기운동이고 따라서 지식의 팽창도 자기팽창⋅자기강화⋅자기발전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결국 스스로 지식이라는 사실을 통해 지식을 창출하는 신비로운 능력을 획득한다.(인간220-221)
따라서 잉여가치의 창출과 축적에서 유추해 볼 때 논리적 형식(지식 산출의 실질적 형식)은 여기서 지식의 ‘자기발전’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그리하여 지식은 신비화한다. 신비화는 전문적 이론가의 활동 특징을 표현하는 양식, 즉 지식 일반의 발전 양식인 듯이 수용되는 양식에 존재한다.(인간221)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것은 정치경제학에서 나타나는 것과 똑같은 신비화다. 왜냐하면 맑스도 정치경제학을 분석할 때, 그의 탐구가 가치분석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상품분석으로부터 시작한 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논리적 관점에서 볼 때, 맑스의 강조는 원리적으로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가치의 생성과 원천의 비밀, 그다음으로 화폐의 형식으로 발현되는 가치의 비밀은 상품의 분석을 통해 폭로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치 생성의 비밀을 원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인간221)
동일한 현상이 헤겔 도식 내의 사고개념에서 일어난다. 헤겔은 사고과정에서 실제로 구체화된 그런 특징들을 사고의 발전된 형태, 즉 사회적 노동분업의 독자적 영역인 과학과, 언어→행동→언어라^는 사유 과정의 외형을 정확하게 반영한 정식의 형태로 서술했다. 여기서 언어로 기록된 지식, 보편적 형식의 지식, ‘과학언어’ 형식의 지식, 정식, 도식, 상징, 모든 종류의 모형, 청사진 등의 형식을 지닌 지식은 ‘언어’를 통해 이해된다.(인간221-222)
실제로 헤겔 논리학의 비판적 정복은 긍정적인 모든 특성을 조심스럽게 보존하면서도 신비한 ‘순수 사유’나 ‘신적 개념’에 대한 숭배를 제거한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이뤄졌다. 헤겔 이래로 어떤 철학체계도 헤겔의 논리학을 ‘비판의 도구’로 사용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체계도 관념론의 환상을 유지시키는 객관적 조건에 대해 혁명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념론의 환상을 유지시키는 객관적 조건은 바로 인간의 실질적이고 활동적인 능력이 대다수의 개인으로부터 소외돼 있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인간의 활동적 능력을 뜻하는 모든 보편적(사회적) 힘이 대다수의 개인으로부터 독립해 있으면서, 외적 필연성으로 그들을 지배하는 힘, 소수의 사회집단⋅계층⋅계급에 의해 독점돼 있는 힘으로 나타나는 상황을 말한다.(인간222)
헤겔의 사고개념을 실질적이고 비판적으로 정복하는 유일한 길은 소외된 세계인 상품-자본의 세계에 대해 혁명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신비주의적 난센스’, ‘신학의 유물’ 등과 같이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하는 모멸적 어구로 단순히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헤겔 사고개념의 객관적⋅관념론적 환상을 실제로 설명할 수 있다.(인간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