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무지개 / 창 9:8-17, 롬 2:12-16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죄를 인정하시거나 묵과하신 적이 없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도 여지없이 심판하셨다. 노아 시대에 많은 사라들이 육체가 되었을 때, 곧 죄악된 생활로 떨어졌을 때에도 틀림없이 죄악을 심판하셨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무지개를 통한 약속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무지개를 만드시며 사람들이 무지개를 볼 때마다 진노를 거두시고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도록 하셨다. 우리가 알다시피 무지개는 장대(소나기)와 같은 비가 그친 후에 사람들에게 찬란하고 아름답게 나타난다. 비가 그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무지개야말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평안과 소망을 주는 것이다. 이 시간 먼저 이 무지개의 의미를 두가지로 생각해 보겠다.
1. 이 무지개는 주님의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지개를 바라보았던 노아 시대의 사라들이 소망과 기쁨을 알게 되었듯이 오늘날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볼 때마다 소망과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 아닌가? 무지개가 나타나므로 비가 그쳤음을, 또한 재앙이 멈추었음을 그 시대의 사람들이 느꼈던 것처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히 멈추게 된 것이고 재앙이 그쳤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노아 시대에 하늘에 떠 있는 먹구름과 어둠을 몰아내며 일곱색깔로 찬란히 빛나던 그 무지개는 인류의 죄악과 어둠을 청산하며 빛 가운데 나타나는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노아 때부터 나타난 무지개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일찍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기도 하셨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지금까지 없었던 무지개가 하늘에 생기게 된 것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모르는 어떠한 사람들처럼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작품임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다. 사실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그 순간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될 것이고, 우리의 자세를 고치게 될 것이며, 삶을 새롭게 할 것이다. 우리는 분명 무지개를 바라보며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약속의 무지개를 통하여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살아계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육체가 되어(죄를 지어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물로써 심판하시어 그들을 멸하셨다. 얼마나 진노하셨던지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들과 땅의 모든 짐승까지 진멸하게 된 것이다. 생존했던 노아와 그 식구들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사람들에게 더 이상 그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지개의 언약을 통하여 다시금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어둠을 뚫고 나타난 하늘의 무지개는 이 땅에서 호흡이 있었던 짐승들과 그리고 새, 또한 사람들을 멸하신 것을 가슴 아파하며 다시는 멸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아니라 우리 인생들의 아버지가 되시기에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는 줄 믿는다. 사실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성서의 모든 곳에 나타나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영원히 저주를 받았지만, 그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죄인 가인이 죄의 벌로 인해 두려워하여 떨 때 가인을 위해 가인을 해치는 자는 7배나 벌을 더하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이다. 시 30:5절상은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라고 하셔서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시고 계심을 설명해 주고 있다. 또한 애 3:32-33절에서는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하셨던 것이다. 때로 우리가 하나님께 매를 맞아 근심하게 되고 고통할 때가 있지만,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풍부한 자비로 긍휼히 여기시고 계실 것이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에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넉넉히 이해하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천사가 지상에 파송되어 왔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천사가 들길을 날아가다가 모든 꽃보다도 돋보이는 장미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장미꽃이라고 생각하며 그 꽃을 가져가기로 했다. 천사는 이제 한 가정에서 티없이 웃고 있는 아기의 웃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귀엽고 해맑은 모습에 반하여 그 아기의 웃음도 가져가기로 했다. 막 떠나려는 순간 그 옆에 인자한 얼굴로 웃고 있는 엄마의 미소가 보였다. 그 웃음은 너무도 평화스럽고 아늑하여 역시 하나님께 가져가기로 했다. 천사가 천상을 향하여 올라가던 중 장미꽃은 어느덧 시들었고 아기의 웃음은 울음으로 변했으나 엄마의 미소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듯 여전히 빛나고 있는 것이었다.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를 영원히 변함없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설명해 주고 있는 내용으로 이해하여 주기를 바란다. 이 땅의 모든 것은 변하여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선교사가 시골 마을을 방문하여 한 농부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침 농부는 닭장 앞에 있다가 암탉 한마리를 가리키면서 그 암탉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선교사님, 간밤에 닭장에 족제비가 들었었지요. 아마 저 암탉은 족제비로부터 제 새끼를 보호하기 위하여 무척이나 애를 썼는가 봅니다. 머리와 가슴 등에 상처가 많군요’ 하며 암탉을 건드려 보았다. 그 암탉은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암탉이 쓰러지자 그 속에서 노란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하면서 품 속에서 빠져나왔다. 암탉은 제 새끼를 지키기 위해 족제비의 수없는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냈던 것이다. 선교사는 말했다. ‘보십시오. 저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죽게 하셨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보잘 것 없는 미물에 불과한 암탉도 새끼에 대한 사랑이 이러하거늘, ‘너희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일까 보냐’ 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결코 인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무엘하를 읽다보면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다윗은 예루살렘성을 버리고 피신해야만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적군이 쳐들어 온 것도 아니다. 바로 아들을 피해 피난길에 오르는 다윗의 심정은 비통하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압살롬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다윗이 피하지 아니하고는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다. 압살롬은 다윗의 후궁 10명을 만백성이 보는 가운데서 아내로 취하였고, 다윗을 완전히 쳐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도우셔서 압살롬을 이기게 하셨다. 다윗은 싸움이 시작되기 전 자신의 군대장관 요압에게 간곡히 부탁을 한다.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내 아들 압살롬의 생명은 해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누구보다도 전쟁의 경험이 많았던 다윗이기에 전쟁의 경험이 전혀 없는 압살롬을 요압이 이기리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전쟁이 승리는 다윗이 되었다. 그러나 요압은 다윗의 간절한 당부를 외면한 채 압살롬을 죽이고 만다. 다윗이 이 소식을 듣고 성 문루에 올라가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오늘 이 다윗의 탄식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탄식인가? 자신의 왕의 자리를 빼앗고 왕이 되고자 하던 아들 압살롬이었다. 자신의 생명을 빼앗고자 집요하게 쫓아다니던 압살롬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후궁 10명씩이나 범하여 다윗을 욕되게 만들었던 패륜 중에서도 극에 달한 패륜을 범했던 압살롬이지 않은가? 그러나 다윗은 바로 그 아들을 위해 울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대신할 수 있었으면 하고 진정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여러분, 이 얼마나 가슴벅찬 한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인가? 그러나 성서에 기록된 이 이야기가 어찌 다윗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내용이겠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바로 이 다윗의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우리 인생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진정 이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압살롬이 그 아버지 다윗을 어찌 대하고 있었든지 다윗은 압살롬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의 이 애절한 탄식에, 승리에 도취되었던 요압과 군사들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고 잠잠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 시간 다시한번 확신하도록 하자. 노아 시대에 무지개를 보았던 그 시대의 사람들이 무지개 안에서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소망을 가졌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오랜 장마 끝에 무지개가 보이면 이제 비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다. 이런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소망을 갖도록 해야겠다. 지금 내 모습이 죄악으로 얼룩져 있다 해도, 실패와 낙심의 자리에 있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다. 무지개의 약속은 언제나 우리에게 소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히 4:16절의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는 말씀처럼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이마다 담대히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이마다 세상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이다. 수 1:9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시며 대장부처럼 담대할 것을 말씀하셨다.
무지개를 통하여 이제 우리가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서려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더욱 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다. 이 강단에 있는 십자가는 노아 시대의 무지개보다도 더욱 큰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나?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이제 다윗과 같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자. ‘골리앗, 너는 칼과 창을 가지고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는 외침이다. 무지개의 약속 안에서 언제나 소망과 강하고 담대함이,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확신이,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성도 여러분의 생활과 가슴 속에 넘쳐나기를 바란다. (1997-022)